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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119문화상 소설 최우수상/ 볼 빨간 소화기/ 박종희
계단을 올라가 105호 문 앞에 서니 몸이 얼음처럼 굳어졌다. 후유, 여자는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벨을 눌렀다.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떨리는데 아무 소리가 안 나니 여자는 더 불안했다. 여자가 용기를 내 다시 한번 벨을 누르려는 순간 현관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사람보다 현관문 앞에 놓인 볼 빨간 소화기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여자는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가정집에서 이렇게 큰 소화기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슬쩍 지나치려는데 집게처럼 생긴 손잡이가 여자의 손을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힘도 제법 셌다.
“어머, 뭐야? ”
소스라치게 놀라며 내려다보니 여자의 손을 잡은 것은 소화기에‘움켜쥔다’고 쓰인 글씨였다. 여자는 헛웃음이 나왔다. 남편이 소방관이었는데 여태껏 소화기에 글씨가 쓰여있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니.
휠체어를 탄 남자가 여자를 안으로 안내했다. 혼자 살기에는 집이 꽤 넓어 보였다. 어느 곳에도 턱이 보이지 않는 집안은 남자 혼자 산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정리정돈이 잘돼있었다. 냉장고 옆 하얀색 대리석 식탁에 놓인 목이 긴 유리컵이 남자의 섬세한 성격을 짐작하게 했다. 양문형 냉장고에는 요리 레시피 사진이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일하는 여성의 집에서 듣던 것하고는 많이 달라 여자는 어안이 벙벙했다.
남자는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식탁 위에 있는 유리컵에 따랐다. 컵을 다루는 남자의 손동작이 능숙했다.
“오시느라 힘드셨죠? 보시다시피 저는 이렇게 홀아비 냄새 폴폴 피우며 삽니다. 하하하”
남자는 휠체어 바퀴를 돌리며 집 안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 남자의 신체조건 때문인지 집안이 온통 둥글었다. 여자는 욕실 앞에 서서 깜짝 놀랐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턱을 없앴는데 버튼을 누르니 신기하게도 옆에서 유리문이 밀려 나왔다. 꼭 호텔 로비로 들어가는 회전문 같아 볼수록 신기했다. 욕실 바닥도 휠체어가 드나들 수 있도록 맨들맨들했다. 자칫 하다가는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남자가 사용하기에는 편리해 보였다.
“수제비 좋아하세요?”
“저는 요리하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이렇게 집안에만 있으니 요리 프로그램을 즐겨보는데 한 번씩 따라 해 먹어보니 제 솜씨가 그리 나쁜 편이 아니더군요.”
남자는 여자를 식탁 의자에 앉혀놓고 냉장고에서 밀가루를 꺼내 반죽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자기가 식사 준비 하는 동안 여자한테 쉬지 말고 이야기를 해달라고했다. 늘 혼자 있는 남자는 입에 석회가 낄 것 같아 말벗을 찾았는데 정말 쉽지 않았다고 했다. 칼을 다루는 남자의 손놀림이 능란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몇 번 움직이는가 싶었는데 벌써 감자 한 개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여자는 회전의자를 돌리듯이 휠체어를 자유롭게 밀고 다니는 남자가 꼭 마술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가 움직일 때마다 주방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남자가 끓여준 수제비는 정말 맛있었다. 멸치와 다시마로 우린 육수에 감자를 썰어 넣어 국물이 시원했다.
남자의 집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여자는 계속 기분이 멍했다. 꼭 무엇엔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일하는 여성의 집에서는 하반신이 마비된 남자환자의 가사를 도와주는 일이라 좀 힘들 거라고 했었다. 실장한테 전화 받고 밤새 고민했었는데 지금은 뭐에 홀린 것처럼 도무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남자는 말동무 해주고 바깥바람 좀 쐬어주며 같이 드라이브해주면 된다고 했지만 그러면서 월급을 받아도 되는지 여자는 꺼림칙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남자한테 다른 꿍꿍이속이 있는 것은 아닐까?
여자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근심을 떠안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보기에는 점잖고 말해보니 나쁜 남자 같지는 않았지만. 여자는 정말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싶었다. 아직 돈이 많이 들어가는 애들 때문에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드라이브하자는 말이 자꾸 여자 마음에 걸렸다. 애들 방에는 책을 펴 놓은 채 작은애가 엎드려 자고 있었다. 고3인 큰딸은 오늘도 늦는 것 같았다.
이 생각 저 생각에 뒤척이느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은데 벌써 밖이 환했다. 세종시까지 가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여자는 애들 아침밥을 준비하면서 밑반찬을 몇 가지 만들었다.
남자가 빌라 비밀번호를 알려주었지만, 여자는 선뜻 번호를 누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벨을 누르면 남자가 힘들 것을 알면서 여자는 벨을 눌렀다.
“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오지 그러셨어요?”
남자는 피아노를 치느라 문을 늦게 연 것 같았다. 소파에는 급히 나오느라 올려놓은 악보가 뒤집힌 채 놓여 있었다.
“아, 피아노 잘 치시나 봐요?”
남자는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번역 일을 하는 남자는 이십 대 후반에 몸을 다쳤다고 했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다니느라 어린 시절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낸 남자는 대학도 호주에서 졸업했다. 아버지 덕분에 남자는 유년을 화려하게 보냈다. 5개 국어를 능숙하게 할 만큼 남자는 어학 능력도 뛰어났다. 부모님 이야기를 할 때 남자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남자는 호주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발령 난 아버지와 가족여행을 떠났다가 화재 사고를 당했다. 호텔에 불이 났는데 부모님은 가스에 질식해 돌아가시고 남자 혼자만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래서였구나.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 온 날 눈에 들어온 큰 소화기의 비밀을 알 것 같았다. 남자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여자는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소방관으로 근무하다 하늘나라로 간 남편이 생각나서였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여자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가지고 간 반찬을 넣으려고 보니 어쩜, 냉장고 안은 여자의 손길이 느껴질 만큼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여자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에이프런을 둘렀다. 청소하려고 청소기를 찾는데 남자가 여자의 팔을 잡았다.
“저기, 청소는 안 하셔도 됩니다. 주말에 한 번씩 청소하시는 분을 부르니 걱정하지 마세요.”
인터넷으로 장보고 필요한 것은 킥 서비스를 이용하는 남자가 가사도우미를 고용한 것은 바깥세상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혼자 밥 해 먹고 집안일 하는 것은 터득했는데 운전할 줄 모르니 누구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자가 생각해 낸 것이 운전할 줄 아는 가사도우미였다.
“여사님은 그저 제 말벗이 되어주고 가끔 여행이라도 다녀올 수 있었으면 합니다.”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남자는 매너가 있었다. 정중하게 부탁하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믿음이 갔다.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여자는 꼭,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너무 짧았다. 연년생 애들 키우느라 지쳐 행복을 맛볼 새도 없었다. 명석하고 사람 좋아하는 남편은 늘 직장에 묶여 살았다. 소방관이던 남편은 교대 근무를 했다. 퇴근했다가도 불이 나면 한밤중이라도 뛰쳐나가야 하는 남편 때문에 여자는 늘 뉴스를 챙겨 봤다. 불을 꺼야 하는 남편의 직업 때문인지 여자는 유독 빨간색에 민감했다. 직업병처럼 어딜 가나 소화기가 먼저 눈에 띄고 남편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남편은 결혼한 지 7년 만에 여자 곁을 떠났다. 남편이 떠나고 어린 두 딸을 키우면서 여자는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고깃집에 가서 불판을 닦고 주말에는 웨딩홀에서 아르바이트했다.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관광버스 청소하는 일도 했다. 버스 청소하는 일은 한 달에 100만 원의 수입이라 욕심이 나는데 관광 철이면 버스가 늦게 들어와 열대나 되는 버스를 청소하고 나면 새벽 두 시가 넘을 때도 있었다. 그렇게 아등바등해도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애 학원비 대기도 버거웠다.
고민 끝에 여자는 여성단체에 등록하고 가사도우미 교육을 받았지만, 처음에는 일자리가 없었다. 겨우 하루 4시간 정도 하는 일자리가 들어와도 끝나고 나면 바로 연결이 되지 않아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을 무렵 연락받은 일이 남자의 집이었다.
“지수 어머니! 다음 주에는 우리 바깥바람 좀 쏘이죠?”
처음에 여사님이라고 부르는 남자한테 작은 딸애 이름을 가르쳐주었더니 남자는 여자를 지수 엄마라고 불렀다. 남자는 바람 쐬러 가자고 했지만, 남자와 단둘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여자는 선뜻 내키지 않았다. 망설이는 여자 마음을 눈치챘는지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남자 집으로 출근하고 나서 첫 나들이였다. 아침부터 들떠있던 남자는 흥얼거리며 노래를 불렀다. 카키색 체크무늬 남방에 와인색 카디건을 걸친 남자를 옆 좌석에 태웠다. 미처 여자가 도와줄 사이 없이 능숙하게 휠체어를 접은 남자는 뒷좌석으로 조심스럽게 휠체어를 던졌다. 하반신을 못 쓰는 남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여자는 무거운 생각을 했었다. 여자는 누워있는 남자한테 기저귀를 갈아주고 밥을 먹여주는 그림을 그렸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한테까지 차례가 왔을 거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간간이 바람이 불 때마다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져 노란 꽃길을 내었다. 첫 외출에 흥분한 남자의 얼굴 위로 고슬고슬한 가을볕이 쏟아졌다. 이런 시간이 얼마 만인가. 여자는 그동안 애들하고 먹고사느라 드라이브 같은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살았다. 사실 차를 굴릴 형편도 안 되는데 남의 집 일을 하러 다니다 보니 대중교통으론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큰맘 먹고 중고차 한대 마련한 것이 이렇게 큰 선물을 준 것이다. 차창으로 바깥 풍경이 복사될 때마다 남자는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그동안 집에만 있다시피 했으니 오죽할까. 조치원을 빠져나와 청주 가로수 길에 들어서니 남자가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아, 벌써 이렇게 가을이 깊어졌군요. 이 길은 오래전 부모님과 할아버지 댁에 가느라 지났던 길인데. 그때 모습이 아직 남아 있네요.”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남자가 이번에는 자기가 찍은 멋진 사진을 들여다보며 감탄했다. 여자는 남자와 둘이 드라이브하니 기분이 묘했다. 뭐랄까, 설렌다고나 할까. 아무튼, 집에서 남자를 대하는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남자와 시선이 맞닿으면 여자는 괜히 가슴이 뛰었다.
남편은 같은 동네에 살던 선배였다. 큰딸을 임신하는 바람에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고 연년생으로 둘째를 낳았다. 연애할 때는 잠시만 떨어져도 못살 것 같았는데 결혼생활은 그렇지 않았다. 결혼 전에는 여자밖에 모르던 남자가 직장에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은 일 중독자였다는 것을 부부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하긴, 화재는 남편의 의지대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니, 자다가도 뛰쳐나가야 했고 진압 과정에서 다치는 일도 허다했다. 그렇게 목숨 내놓고 일하는 것에 비하면 대가는 형편없었다. 화재 진압 중에 인명사고라도 나면 소방관들이 도마에 오르고 불을 끄다 동료 직원이 사망할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남편은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대학교에 다닐 때도 불의를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매사에 정의로웠던 남편은 직장에서 노조 일을 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는 소방관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다가 가끔 회사 측과 노조가 부딪혀 난관을 겪을 때가 있긴 했지만, 사람들이 잘 따라 남편은 동료들 간에도 인정받았다. 그랬던 남편이 노조 문제로 곤경에 처하더니 갑자기 죽음을 택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으면..., 인정하기 싫었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지수 어머니 덕분에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남자를 내려주고 여자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어쩐 일인지 학교에 있어야 할 큰딸이 벌써 집에 와 있었다. 지혜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골난 것처럼 잔뜩 부어있었다. 밥숟가락을 내려놓는 지혜가 대학교 원서를 써야 하는데 119 응급구조학과에 가고 싶다고 했다. 여자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남편이 떠날 때 큰딸은 일곱 살이었다. 유치원에 다니던 딸애는 아빠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소방관 정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유치원에 갖고 가서 친구들한테 아빠가 불 끄는 사람이라고 자랑을 했던 아이다. 이미 마음을 굳힌 큰딸을 설득할 생각에 여자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나흘 일이 없던 남자가 오늘은 오전 내내 번역하느라 움직이지 않았다. 큰딸 때문에 속도 시끄러운 김에 여자는 베란다를 치우기로 했다. 남자가 웬만한 집안일은 손도 못 대게 하니 왠지 돈을 거저 받는 것 같아 가시방석 같았는데 베란다에는 묵은 먼지가 가득했다. 청소를 마치고 거실로 들어오니 커피 향이 그윽했다. 남자가 커피를 갈아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커피를 건네주는 남자의 하얀 손이 꼭 여자 손처럼 부드러웠다. 그 손으로 피아노를 칠 때면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남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에 빠져들었다. 피아노 소리에 빠져야 하는데 여자는 남자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건반을 따라다니느라 종종 피아노 소리를 놓칠 때도 있었다.
“지수 어머니! 우리 바다 보러 가요. 사고 나기 전에 골드코스트 갔다 온 이후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어서요.”
장거리는 다녀본 적이 없는 여자가 내비게이션 덕으로 강릉에 도착했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차에서 내리니 어깨가 다 뻐근했다. 베이지색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를 휠체어에 앉히고 경포 바닷가를 거닐었다. 두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바닷바람이 뒤를 따르며 밀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쳤다. 가끔 휠체어 바퀴가 모래에 빠져 앞으로 나가지 않았지만, 파도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부서질 때면 남자는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도 좋을까. 하반신이 마비되고 나서 집에만 있던 남자는 새로운 풍경을 대할 때마다 황홀해했다. 그런 남자와 같이 웃고 즐기는 동안 여자는 불장난하듯 점점 남자한테 빠져들고 있었다.
“많이 드세요. 지수 어머니가 건강하셔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어요.”
남자는 자꾸 여자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 날랐다. 광어회와 매운탕을 배불리 먹고 카페에 들렀다. 여자는 낯익은 카페를 보며 남편을 떠올렸다. 이 카페는 20년 전 남편과 신혼여행 왔을 때 들렀던 곳이다. 카페 이름은 바뀌었지만, 실내 분위기는 여전했다. 카푸치노를 마시던 남자가 갑자기 흥얼거렸다. 낮은 소리로 남자가 흥얼거리는 노래는 ‘나미’의 ‘슬픈인연’이었다.
강릉에 다녀와서 여자는 며칠 아팠다. 무리하게 운전해서인지 몸살이 심했다. 남자 집에도 가지 못했다. 여자가 약에 취해 누워있을 때마다 카톡 카톡 하며 문자가 들어왔다. 좀 어떠냐는 남자의 걱정이 담긴 메시지였다.
여자가 닷새 만에 출근했다. 누워 있다가 문을 여는지 부스스한 몰골의 남자가 갑자기 바빠졌다. 남자는 싱크대 가득 쌓인 설거지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상했다. 겨우 닷새밖에 안 되었는데 여자가 비운 사이 남자의 집도 비워둔 집처럼 썰렁했다. 피아노 건반 뚜껑 위에도 먼지가 뽀얗고 식탁에도 그릇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수건이 여기저기 흐트러져있는 욕실도 마찬가지였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자를 반기는 남자의 얼굴에도 거뭇거뭇한 수염이 덥수룩했다.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
궁금해하면서 묻는 여자를 보고 남자는 싱겁게 웃었다.
여자는 보양식이라며 남자가 만들어준 전복죽을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남자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말 한마디 없던 남자의 긴 손가락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소파에 앉아있던 여자가 남자 앞에 서서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남자는 피아노 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억누르고 있던 분노를 쏟아내는 사람처럼 한참 피아노에 빠져있던 남자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어느새 여자의 손이 남자의 이마에 가 있었다.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남자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의 손이 참 따뜻했다.
그날 이후 여자는 괜히 남자 대하기가 어색했다. 어쩌다 남자의 손과 부딪히면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열에 올랐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여자만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도대체 이런 감정은 뭘까. 쉰 살이 다 돼가는 중년 여자가 외간 남자를 보고 이렇게 설렐 수 있는 건가.
여자는 남편을 보내고 사는 게 팍팍해 남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삶이 고달파 마음에 음표 하나 떠올릴 여유도 없었다. 여자는 한밤중에도 혼자 웅크리고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늘 무표정한 삶을 살았다. 주변에서 심심찮게 재혼 자리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여자는 먼 이야기로 들었다.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급한데 남자는 무슨 남자냐며 재혼을 권하는 친정엄마한테 골을 부리기도 했다.
일요일이라 딸애들과 저녁을 먹고 여자는 모처럼 얼굴에 팩을 했다. 오이를 갈아 밀가루에 섞어 거즈 위에 발랐다. 여자가 팩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지수가 놀라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다. 여자는 그동안 애들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자기 몸뚱어리는 돌아보지 못했다. 로션 한 병 사면 일 년을 썼다. 지독하다는 소릴 들으면서도 여자는 샘플을 쌓아두고 살았다.
옷장을 열었다. 훅, 하고 밀려들어오는 퀴퀴한 냄새만큼이나 변변한 옷 한 벌 없었다. 유행 지난 칙칙한 검은색 정장 옆에 친정 동생이 준 빨간색 바바리가 끼어 있었다. 동생한테 받아놓고 입을 새가 없어 한 번도 입지 않던 옷이었다. 빨간색 바바리코트를 걸치니 여자의 얼굴이 한결 생기 있어 보였다.
“ 엄마! 밤에 뭐 하는 거야? 엄마 어디가?”
시어머니 같은 지혜의 잔소리에 놀라 여자는 후다닥 옷을 벗었다.
처음, 남자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부터 지혜는 심하게 반대했었다. 남자 혼자 사는 것도 불편한데 왜 하필 하반신을 못 쓰는 환자 집에 일 나가느냐며 짜증을 냈다. 그때부터 지혜는 수시로 문자 보내고 전화해서 여자를 감시했다. 혹시라도 남자와 여자가 가까워질까 봐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귀가 시간을 체크했다. 그래서인지 남자 집에 출근하고 나서부터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지혜의 눈치를 살폈다.
매일 출근하느라 소홀히 했더니 집안이 어지러웠다. 각질같이 쌓인 먼지가 부유물처럼 떠다녔다. 여자는 창문을 다 열어젖히고 아침부터 집안을 뒤집었다. 애들 방까지 환기하고 나서 여유롭게 화장대 앞에 앉았다. 화장을 해본 지가 언제인가 싶었다. 여자는 서랍을 뒤져 오래된 파운데이션을 꺼내 얼굴에 펴 발랐다. 쌍꺼풀 사이에 아이섀도도 정성껏 발랐다. 옷장에서 어제 입어봤던 빨간색 바바리코트를 꺼내 입었다. 단추를 잠그고 벨트를 나비 모양으로 묶어 늘어뜨렸다.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틀었다. 마침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며칠 전 남자가 부르던 ‘슬픈인연’이었다. 슬픈인연은 남편도 좋아하던 노래였다.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주책없이 코끝이 시큰거렸다.
밤을 새웠는지 머리맡에 번역원고를 수북이 쌓아둔 채 남자는 자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집안을 치워나갔다. 부옇게 먼지 쌓인 소화기를 닦았더니 수줍은 볼이 훨씬 불그스레해졌다. 거실도 걸레질하고 유리창도 훤하게 닦았다. 설거지하고 행주도 삶았다. 김치 냉장고에서 잘 익은 김장김치를 한 포기 꺼냈다. 여자는 오랜만에 돼지고기를 넣고 김치찌개를 끓여볼 요량이었다. 칼질하는 소리에 깼는지 휠체어 소리가 났다. 찬물 한 잔을 단숨에 들이켠 남자가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여자 앞으로 다가왔다. 한번 먹어볼래요? 여자는 남자한테 찌개 국물 한 숟가락을 떠 주었다. 남자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따뜻하게 웃었다.
점심을 먹고 두 사람은 호수공원으로 나왔다. 날씨가 쌀쌀해졌는데도 공원에는 제법 많은 사람이 있었다. 분수대 쪽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는 노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은발의 하얀 파마머리가 멋스러운 할머니가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그윽하게 바라보는 호수에 비친 윤슬이 아름다웠다. 좋아 보였다. 부부가 저렇게 아름답게 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옆을 보니 남자의 눈도 노부부를 향하고 있었다. 노부부를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이 참, 쓸쓸해 보였다.
“지수 어머니는 꿈이 뭐였어요?”
어색한 침묵을 깨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남자의 질문에 생각해보니 여자는 딱히 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아니, 꿈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여자는 그저 사랑하는 남편하고 알콩달콩 사는 것이 꿈이었던 것 같다. 큰 꿈도 아니었는데 바보처럼 그 소박한 꿈마저 여자는 이루지 못했다. 남자는 멋진 할아버지로 늙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순간 남자의 늙은 모습이 여자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남자는 늙어도 절대 구질구질하지 않을 것 같았다. 중년의 남자가 180cm인 키만 해도 얼마나 멋진가. 움직이지 않아 가늘어진 다리를 제외하면 군살 없는 몸매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 지금도 충분히 멋있는데 나이 들면 더 중후한 신사가 될 것 같은데요?”
여자의 말에 씨익 웃던 남자가 휠체어 바퀴를 돌렸다. 오후를 넘기며 누더기가 된 햇살이 총총거리며 휠체어 뒤를 따랐다.
남자와 같이 백화점에 들렀다. 애초에 남자의 머플러를 사려고 들어갔는데 남자는 여성 의류 판매장으로 여자를 이끌었다.
“이거 어때요?”
남자가 손으로 가리킨 것은 목까지 올라오는 니트 폴라티였다. 남자의 성화에 못 이겨 여자는 갈색 카디건과 폴라티를 샀다. 남자도 같은 색 카디건과 폴라티를 샀다. 남들이 보면 꼭 부부같이 커플 옷을 사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야릇했다.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감정이었다. 남자를 태워다 주고 돌아서는데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는데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남자를 남겨두고 여자는 엑셀을 밟았다.
여자는 지혜의 진로 상담과 지수 일로 사흘 동안 남자의 집에 가지 못했다. 전화로는 연락했지만, 혹시나 남자한테 연락이 올까 싶어 자꾸 휴대폰만 들여다봤다. 남자는 여자가 보내는 문자에 늘 짧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밥을 먹었느냐고 하면 ‘네.’ 잘 잤어요? 하고 물어도 ‘네.’ 다른 말을 하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말을 아끼는 바보 같은 남자 때문에 여자는 가끔 자존심이 상했다.
별일이었다. 사흘 동안 남자를 못 봤다고 여자는 조바심이 났다. 여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남자가 좋아하는 김밥을 쌌다. 남자가 사준 갈색 폴라티를 입고 현관문을 열었다. 텔레파시가 통했을까. 휠체어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남자도 같은 색 폴라티를 입고 있어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여자를 보고 어색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이 참 따뜻해 보였다. 야채 샐러드와 김밥을 먹은 남자가 1인용 소파로 옮겨 앉았다.
“오늘은 번역 작업 안 하세요?”
대답 대신 씨익 웃던 남자가 다시 휠체어에 앉더니 피아노 앞으로 갔다. 남자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피아노에서는 아름다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역시 남자의 18번인 슬픈인연이었다. 평소에 참 좋아하는 노래인데 남자가 피아노로 쳐주니 여자는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자는 살며시 일어나 남자의 등 뒤에 섰다. 그리고 양팔을 벌려 남자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생각했던 것처럼 남자의 어깨는 넓고 따뜻했다. 건반 위에서 춤을 추던 남자의 손가락이 조금씩 느려졌다. 서서히 건반을 오가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벗어났다. 피아노 소리가 멈추자 거실은 온통 남자와 여자의 숨소리로 가득했다.
여자는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갱년기 증상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답답했다.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어도 잡을까 말까 한데. 무슨 생각으로.
“미쳤지, 내가 미쳤어.”여자가 그럴수록 천장은 남자의 얼굴로 가득해졌다. 여자가 일어나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 안에는 낯익은 중년 여자가 앉아있었다. 피부 하나는 타고났다고 부러움을 받았는데 피부도 갱년기를 앓는지 핏기없이 까칠했다. 손을 보니 거친 손등에 시퍼런 실핏줄이 굼실굼실 기어 다녔다. 여자는 얼마 전 동생이 준 기능성 아이크림을 꺼내 눈가에 꼼꼼하게 발랐다. 평소에는 아까워 손톱만큼씩 바르던 수분 크림을 듬뿍 덜어 손등에도 문질렀다. 남자의 하얀 손을 볼 때마다 여자는 손이 부끄러워 오그라들었다. 그동안 궂은일을 한 흔적이 여자 손등에 이력서처럼 당당하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쫀쫀하게 밀착감이 느껴지는 영양 크림을 부드럽게 비비면서 여자는 다시 남자의 넓은 어깨에 기대있는 환상에 빠졌다. 이 나이에 주책없이. 혹시 내가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하고 여자는 생각했다.
“엄마, 나 오늘 원서 접수했어요. 선생님도 잘 생각했다고 하셨어요. 119 응급구조학과가 전망이 밝은 학과라서 인기가 많대요.”
“ 너, 119 응급 구조원이 뭐 하는 일인지는 알아?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일인 줄이나 알고 하는 소리냐고?”
“......,”
눈도 안맞추고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그악스럽게 말렸지만, 큰딸은 결국 119 응급구조과에 수시 원서를 넣었다. 지혜는 소방서에 들어가 위험한 사람들을 구하며 아빠처럼 멋진 삶을 살겠다고 했다. 변변치 않은 살림 사느라 학원도 제대로 못 보낸 것을 생각하면 기특하기 짝이 없지만, 남편같이 위험한 일을 하며 살아갈 딸애 생각에 여자는 두 손으로 가슴을 쳤다.
그나마 딸애가 남편을 자랑스러운 아빠로 기억하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동생은 언니를 바라보며 꿈을 키운다더니 둘째 지수도 간호과를 간다고 했다. 피는 못속인다고 딸들이 어쩌면 그렇게 남편을 빼닮았을까. 여자는 남편이 화상을 입고 들어오면 다칠 줄 알면서도 왜 불 속에 뛰어드냐며 온갖 잔소리를 해대며 패악스럽게 굴었다. 그때마다 남편은 위험하다고 다들 회피하면 세상은 누가 지키냐고 했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여자는 딸애들을 응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하늘나라에 있는 남편이 원하는 일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람의 감정과 시간도 비례하는 것일까. 여자가 남자 집에 출근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3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에 여자도 많이 변했다. 립스틱 색깔도 짙어지고 옷차림도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여자가 다정해졌다고 딸들이 좋아했다. 여자가 질끈 동여매고 다니던 머리를 손질하러 미장원에 가면 뭐 좋은 일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영화를 번역해서 돈을 많이 받았다고 한턱내겠다는 남자를 태우고 드라이브를 나왔다. 약속한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은 커플처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폴라티를 입어 따뜻해 보이는 남자를 보니 여자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부끄러운 마음에 딴생각하다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차가운 금속성 마찰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남자는 순하게 웃었다. 여자는 남자와 같이 있으면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고장 난 시계처럼 수시로 가슴이 콩콩거려 혹시 남자가 숨소리를 들을까 봐 불안했다. 그런 여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를 대하는 남자의 태도는 갈수록 더 정중해졌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호수공원 주변에 차를 세웠다. 구석구석에 차가 많은 것을 보니 밤에도 호수공원을 찾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았다. 낮에는 몰랐는데 야광이 쏟아지는 호수공원의 야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남자와 둘이 벤치에 앉아 공원을 내려다보니 황홀했다.
여자는 무슨 복에 이런 남자를 만나서 이 시간에 여기에 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얼굴이 따뜻해졌다. 옆을 보니 남자도 공원의 야경을 보며 감상에 빠져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와인을 한잔해서 인지 남자는 평소보다 더 말이 많아졌다. 와, 와우 하면서 불빛이 변할 때마다 남자는 환호했다. 여자는 슬쩍 남자의 손을 끌어다가 자기의 손위에 포갰다. 흠칫 놀라는 것 같던 남자의 손이 여자의 손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슬며시 남자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지수 어머니! 저는,”
“저는 지수 어머니한테 남자로서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남자는 한 손으로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호수에 브로치처럼 떠 있는 ‘수상무대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남자가 슬며시 어깨를 빼더니 손수건으로 눈 주위를 닦았다.
그사이 보라색 불을 발하던 ‘수상무대 섬’이 파란색 불빛으로 바뀌었다. 옆을 보니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시무룩하게 앉아있었다. 여자는 열쇠를 꽂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남자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더디게 느껴졌다. 두껍게 내려앉은 침묵이 무서워 차라리 어둠이 세상을 먹어 치워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차가 남자의 빌라 앞에 도착했다. 여자는 남자를 내려놓고 다시 차에 올랐다. 막 시동을 걸려고 하는 순간 남자가 부르는 소리에 여자는 다시 온몸이 얼음처럼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남자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따뜻하게 데웠다.
“한 잔 드시고 가세요. 잠이 잘 올 겁니다.”
반쯤 마신 우유를 식탁에 내려놓은 남자가 다시 피아노 앞으로 갔다. 건반 위에 악보를 뒤적이던 남자의 손이 다시 건반을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흰건반과 검은 건반이 눌릴 때마다 남자의 어깨도 같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남자의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피아노 치는 남자를 혼자 남겨두고 여자는 무겁게 발을 뗐다.
“ 엄마! 요즘 점점 예뻐지는 것 같아. 우리 엄마 남자친구 생겼나 봐.”
아침을 먹으며 지수가 하는 말에 놀란 여자가 ‘캑캑’ 사레가 들렸다. 지수의 말에 지혜가 무슨 소리 하느냐며 살짝 눈을 흘겼다. 지난번 남자와 강릉 다녀오던 날, 지혜가‘엄마, 혹시 그 남자 좋아하는 것 아니냐고’물었다. 지혜 때문에 남자 집에 가는 것도 눈치가 보였는데 아직 어린 줄만 알았던 지혜의 속이 꽉 차 있었다. 지혜는 이제껏 자기들 키우느라 고생한 여자가 멋진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고 했다. 그 남자처럼 불구가 아닌 사람을 만나 여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행복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하는 지혜의 말에 여자는 목이 메었다. 어느새 훌쩍 자라 엄마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는 큰딸이 여자는 대견하기만 했다.
남자는 오늘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여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젯밤에 잔치국수가 먹고 싶었는데 얼굴이 부을까 봐 참고 잤다며 딴전 피는 남자가 귀여워 여자는 하마터면 남자의 손을 덥석 잡을 뻔했다. 평소에는 여자가 말이 많고 남자가 말이 없었는데 오늘은 남자가 더 말이 많아졌다. 국수를 어떻게 삶아야 불지 않느냐, 육수 끓일 때 멸치 똥을 발라야 하느냐는 둥 표정을 살피느라 애쓰는 남자의 마음 씀에 여자는 가슴이 울컥했다.
사고를 당한 후 남자는 오랜 시간 자기 몸을 괴롭혔다. 자괴감으로 사람들한테 괴팍하게 굴어 남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떠났다. 한때는 목숨처럼 그를 사랑했던 여자도 남자 곁을 떠났다. 남자는 유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자해를 하기도 했다. 그랬던 남자가 변역가로 이름을 떨치기까지는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전혀 결혼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남자 구실을 할 수 없는 몸으로 여자를 맞는 것이 정신적인 장애 한 가지를 보태는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지수 어머니 말씀대로 멸치 똥을 발랐더니 국물이 훨씬 깔끔하네요.”
남자는 후루룩거리며 국물까지 말끔하게 잔치국수 한 그릇을 비웠다. 남자가 보는 앞에서 밥 먹는 것도 떨렸지만 여자도 국수 한 그릇을 먹어 치웠다.
“자, 설거지는 내 전공이니 지수 어머니는 여기 앉아 과일이나 깎아주세요.”
빈 그릇을 걷어간 남자가 수세미에 베이킹파우더를 묻혀 그릇을 닦았다. 고무장갑도 안 끼고 맨손으로 집안일을 하는데도 어쩌면 저렇게 손이 고울까.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말끔하게 씻어 놓은 그릇을 여자가 바구니에 엎었다.
예쁜 딸을 두 명이나 낳았으니 사과도 한 줄로 예쁘게 깎아보라는 남자의 주문에 여자는 손이 떨렸다. 여자는 평소에는 잘하던 일도 남자 앞에만 서면 실수를 해 식은땀을 흘렸다. 여자는 잘 나가다가 얼핏 끊어질 뻔한 사과 껍질을 용케 살려내어 사과 표면에 비스듬하게 다시 칼을 넣었다.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눈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했다. 여자는 남자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겨우 한 줄의 사과 껍질을 만들었다.
포크로 사과를 찍어 남자의 입에 넣어주며 여자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매일 밤 당신이 쳐주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싶어요.”
“ 아무것도 바라는 것은 없어요. 그냥, 이렇게 당신 옆에만 있게 해주세요.”
캑캑, 사과가 목에 걸렸는지 갑자기 기침을 토해내던 남자의 얼굴이 또르르 말린 사과껍질처럼 발개졌다. 남자는 남은 사과 조각을 다시 입으로 밀어 넣었다.
베란다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여과 없이 남자의 얼굴에 스며들어 현관 앞에서 남자를 지켜주고 있는 볼 빨간 소화기처럼 수줍어 보였다. 남자가 피아노 앞으로 휠체어 바퀴를 밀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건반 위에서 길고 흰 남자의 손가락이 출렁일 때마다 잔잔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피아노를 치며 남자가 부른 노래는 얼마 전 여자들의 가슴을 마구 흔들어놓았던 ‘마부스’의 곡 ‘바보’였다.
남자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여자는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두 손을 모으고 남자의 등 뒤에 섰다. 여자는 이미 남자의 소화기가 되기로 마음먹었지만, 수줍어 볼이 빨개진 소화기처럼 얼음이 된 여자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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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시 읽어도 감동입니다.
대상으로 선정된 작품 제목은 모르지만
올라온 다른 작품보다 더 뛰어나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수줍어 볼이 빨개진 소화기처럼 얼음이 된 여자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미 부분이 대반전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박순철 선생님, 부족한 글에 늘 좋은 말씀해주시고 함께 기뻐주셔서 감사합니다. 급하게 수정해놓고 걱정했는데 상을 받으니 좋네요. 오늘 도서관 학생문학상 시상식이 있어 늦었습니다.
숨 막히도록 빠르게 읽었습니다. 읽는 내내 적당한 긴장감도 흥미로움도 있었고요. 잔잔한 인간미를 느끼는 작품이 감동입니다. 어떻게 이토록 훌륭한 소설까지 섭렵하시는지요. 박종희선생님 존경합니다.^^
안희자 선생님,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인간미를 느끼셨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