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인 조선 초, 태조 이성계 곁에서 조선의 건국과 한양 천도를 도왔던 무학대사가 창건했다. 금선사는 조선 후기 정조 임금과 관련한 사찰설화가 전해져온다.
대구 파계사에서 수행정진 중이던 용파스님은 사찰에 부과되는 각종 부역으로 전국의 사찰이 피폐하게 되자 왕과 담판을 지으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승려의 도성출입이 금지된 시기여서 남대문 밖에서 물장수를 하며 기회를 엿보던 용파스님에게 어느날 임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사찰에 부과되는 부역을 면해달라는 청을 하자 정조 임금은 자신의 후사를 이을 왕자의 탄생을 조건으로 걸게 된다. 용파스님은 금선사 목정굴에서 수행중인 농산스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신은 수락산 내원암에서, 농산스님은 금선사 목정굴에서 기도에 들기로 했다. 그렇게 300일째가 되던 날 정조 임금의 후궁인 수빈 박씨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아들로 태어날 것을 점지한다.
같은 날 목정굴에서 기도하던 농산스님이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다.
이윽고 약속대로 그 해 음력 6월 18일에 정조의 수빈 박씨가 아들을 낳으니, 농산스님이 열반에 들어 수빈 박씨 몸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라 여기고 해마다 음력 6월 18일 순조 임금의 탄신제를 올리고 있다.
출처:지식백과/ 사진: 밴드장
특이한 구조의 돌
중아에 석가모니부처님과 협시보살로
좌측 지장보살 우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
여기에는 목정굴이라는 관음기도 성지와 聾山(농산)스님 그리고 정조대왕사이에 얽힌 순조의 誕生秘話가 서려 있다. 정조는 슬하에 세자가 없어 고심하던 중 한수북녘에 계행을 엄히 지키며 수십년간 산문 출입을 금하고 있던 농산이란 고승이 주석 하고있음을 알게 되어 마침내 그에게 世子誕降을 위한 祈鷲를 명하게 되었다.농산은 바로 이곳 목정굴에서 100일간 관음기도를 올린 것이다.
이때 왕실에 발신을 알 수 없는 봉서 하나가 올라왔는데 "庚戌6月18日 世子誕降"이라 적고 있었다.과연 순조는 바로 이날 태어났다.
이날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가 왕실에 닿아 産室을 휘감고 있었다.사람을 놓아 그 진원을 추적하게 하니 그곳은 다름아닌 바로 이곳 목정굴 이었다. 굴안에는 坐脫入亡한 체로 앉아 있는 농산스님의 脫穀身 뿐이었으나 서기는 여전히 그의 정수리로 부터 産室로 흘러 들고 있었다.
농산스님의 입적과 순조로의 환생을 목도한 정조는 內需司에 수하여 목정굴 위에 절을
크게 중창하게 하였으니 곧 금선사이다. 그후 일제의 강점으로 금선사는 廢寺가 되었으나 光復후 道空스님이 중건하였고, 현 주지法眼스님이 목정굴을 복원(1996년 3월)하여 수월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전통 사찰로 등록한 것이 오늘의 금선사와 목정굴이다. 지금도 금선사에는 순조의 誕辰祭를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