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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관념론
이처럼,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세계의 의미가 감각적 대상을 통해서 그 불멸의 제자인 인간에게 전달된다. 이 훈련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자연의 모든 부분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목적이 우주의 긍극적 원인 the final casuse인가, 혹은 자연은 과연 외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고차적인 의문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신이 인간의 정신을 교화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우리가 태양과 달, 남자와 여자, 그리고 집과 교역이라고 부르는 몇 가지 조화스러운 감각의 수용자가 되게 한것만으로도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외관appearance에 대한 설명으로 충분하다. 나의 오관이 전하는 바의 진정성, 곧 감각이 나의 정신에 새긴 인상이 외부의 대상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검증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할진대, 저 하늘에 떠 있는 오리온 성좌가 실재하는지, 아니면 어떤 신이 그것의 영상을 우리의 영혼의 창공에 그려놓았는지,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부분들과 전체의 목적 사이의 관계가 늘 동일하다면, 육지와 바다가 상호 작용을 하건, 모든 세계가 헤아릴 수 없이 그리고 끝없이 회전하며 상호 뒤섞이건--심연 밑에 또 다른 심연이 입벌리고 있거나,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은하와 은하가 서로 평행하는---혹은 시공간의 관계를 벗어나서 동일한 외관이 인간의 변함없는 신앙 속에 새겨져 있건, 그것이 무슨 차이란 말인가. 자연이 외적으로 실체적 존재성을 향유하건, 아니면 다만 정신의 묵시 속에서만 존재하건, 어는 쪽이든 자연은 나에게 똑같이 유용하고 똑같이 경외스럽다. 자연의 형편이 실제로 어떻든, 내 감각의 정확성을 내가 시험할 수 없는 이상, 그것은 나에게 관념으로 존재할 뿐이다.
경박한 자들은 관념론을, 마치 그것의 결과가 무슨 희극이라도 되는 듯이, 혹은 그로 인하여 자연의 안정성이 깨지기라도 하는 듯이,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치부하기 급급해한다. 정녕코 그것은 그렇지 않다. 신은 결코 우리를 희롱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신은 자연의 진행에 어떤 불합리성을 허용함으로써 자연의 목적을 훼손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 자연 법칙의 항구성을 의심하면 그것은 곧 인간의 능력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그 영속성은 신성스럽게 존중되어왔고 그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완벽하다. 인간의 바퀴와 태엽은 자연의 영원성이란 가정에 맞추어진 것이다. 우리는 파도에 흔들리는 배처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상에 서 있는 집처럼 만들어졌다. 그 당연한 결과로서, 우리는, 원동력이 반사력보다 우월한 것을 믿는 한, 자연이 영혼보다 단명한다든지 혹은 변하기 쉽다는 식의 어떠한 암시에 대해서도 분연히 반대하여야 할 것이다. 중개인도, 차륜공도, 목수도, 요금 정수원도, 그런 암시에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자연적 법칙의 영구 불변성을 전적으로 승인하더라도, 자연의 절대적 존재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자연의 특정한 현상, 가령 열, 물, 질소와 같은 물질의 안정성은 확고하게 믿으면서도, 자연을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으로 간주한다든가, 정신에 대해서는 필연적인 존재성을 부여하면서 자연을 우연이나 어떤 결과의 소산으로 보는 것은 모두 문화가 인간의 정신에 끼친 획일적인 결과이다.
자연의 절대적 존재성에 대한 일종의 본능적 믿음은 감각과 아직 쇄신되지 않은 오성에 기인한다. 이런 감각과 오성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은 불가분으로 결합되어 있다. 만물은 궁극적 실체이기 때문에, 자신의 영역 너머로 결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이성의 존재는 이 믿음을 훼손한다. 사상의 최초의 노력은 우리 인간이 마치 자연의 일부인 듯이 우리를 자연에 비끄러매는 감각의 전제성을 약화시킴으로써, 자연이 우리와 유리된 것으로, 말하자면, 우리로부터 부유하는 것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한층 고차적인 작용이 개입하기 전까지 감각적인 눈은 뚜렷한 윤곽과 채색된 표면을 놀랄 만큼 정확하게 관찰한다. 이성의 눈이 열리면서 즉시 윤곽과 표면에는 우미함과 표정이 덧붙여진다. 이 우미와 표정은 상상력과 애정에서 생기며, 사물의 예리한 윤곽을 다소 느그러뜨린다. 이성이 자극을 받아 한층 진지한 시각으로 발전하면, 윤곽과 표면은 투명해지면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그 대신 여러 원인과 정령이 그들을 통하여 보이게 된다. 보다 고차적인 능력의 이와 같은 환희에 찬 개안과 신 앞에서 자연이 경건하게 물러서는 것이야말로 삶의 지고의 순간을 이루는 것이다.
이제 우리 문화가 끼친 결과들을 지적하기로 하자.
1)관념철학의 최초의 교시는 자연 그 자체로부터 받는 암시이다.
자연은 영혼과 합작하여 우리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떤 기계적 변화나 우리의 이치의 사소한 변화로도 우리는 이원론을 인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달리는 배 위에서나, 지구 위에서, 혹은 미묘한 하늘의 색조를 통해서 해안을 보면 우리는 기묘한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의 시점을 조금만 변화시키더라도 전세계가 그림 같은 모습을 띠게 된다. 마차를 별로 타지 않은 사람이 마차에 올라 시가지를 한바퀴 돌기만 하면 거리는 인형극으로 바뀐다. 남자도, 여자도---이야기 하고, 달리고, 흥정하고, 싸우는 ---열심히 일하는 수선공도, 게으름뱅이도, 거지도, 아이들도, 개들도, 모두 곧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으로 보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관찰자와의 일체의 관계에서 완전히 유리되어, 실체가 없는 이관만의 존재물로 비치게 된다. 아주 친숙한 전원의 풍경도 빨리 달리는 기차 안에서 바라보면 얼마나 색다른 생각을 주는가! 뿐만아니라, 아주 낯익은 물건도 (아주 조금만 관점을 달리하면) 우리를 매우 즐겁게 한다. 카메라 암상자camera obscura를 통해서 보면, 푸줏간의 고기차나 자기 가족의 모습도 재미있게 보인다. 마찬가지로 잘 아는 얼굴의 초상화도 우리를 즐겁게 한다. 몸을 굽혀 다리 사이로 풍경을 거꾸로 바라보면, 그것이 바록 지난 20년 동안에 늘 보아오던 것이라도 얼마나 재미있는가!
이런 경우들이 암시하는 것은, 기계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관찰자와 광경 사이---인간과 자연사이의 차이이다. 거기에서 경이감이 섞인 쾌감이 일어난다. 어쩌면, 세계가 하나의 광경인 데 반하여, 인간 자신의 내면에 어떤 불변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약간의 숭엄한 감정을 맛본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2)보다 고차적인 방식으로 시인 역시 이와 흡사한 즐거움을 전달한다. 시인은 언어를 약간 색다르게 구사함으로써 마치 공기 위에 묘사하는 것처럼, 태양, 산, 캠프, 도시, 영웅, 처녀 등을 묘사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 다르다기보다는 지상에서 약간 떠올라 있는, 다시 말하여, 우리 눈에 부유하는 모습이다.시인은 대지와 바다를 고정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여, 자신의 근본적 사상의 축 주위로 회전시키고 그것을 새로이 배열한다. 시인은 그 자신 영웅적인 열정에 사로잡혀 있어서, 자신을 사로잡는 열정의 상징으로 물질을 활용한다. 감각적인 사람이 사고를 사물에 일치시키려고 한다면, 시인은 사물을 그의 사고에 합치시키고자 한다. 전자가 자연을 뿌리박힌 고정된 것으로 본다면, 후자는 그것을 유동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자연 위에 자기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완강한 이세계도 시인에게는 유연하고 다루기 쉬운 것이 된다. 시인은 흙과 바위에 인간성의 옷을 입혀, 그것을 이성의 언어가 되게 한다. 상상력이란 이성이 물질계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셰익스피어는 그 어떤 시인보다도 표현의 목적을 위하여 자연을 복속시키는 데 뛰어났다. 그의 제왕다운 시심은 만물을 마치 장난감처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기고, 그의 마음에 첫번째로 떠오르는 변덕스러운 사상에 형체를 부여하는 데 그것을 인용한다. 그는 절묘한 영적인 결합으로 자연 속의 가장 궁벽진 곳도 방문하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들을 하나로 결합시킨다. 우리는 물질의 대소는 상대적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여 모든 사물은 시인의 정열에 봉사하기 위하여 줄어들기도 하고 팽창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가령 그의 소네트에는 새의 노랫소리와 꽃의 향기와 색깔은 사랑하는 연인의 그림자가 된다. 연인과 그를 갈라놓은 시간은 그의 가심이고, 연인이 불러일으키는 의혹은 그녀의 장식이다.
의혹은 미의 장식이고 천상의 가장 감미로운 대기 속을 나는 까마귀로다.
그의 열정은 우리의 산물이 아니다. 그의 열정은 그가 말을 할 때, 특히 도시나 국가에 대해 말을 할 때, 더욱 고조된다. 아니, 그것은 결코 우연히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소 띤 화렴함 속에서 고통받는 일도 없고 그것은 권모술수, 짧은 시간 번창하는 이단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한 국가가 되어 전적으로 홀로 선다. 영구불변한 시심의 힘 속에서는, 피라미드도 최근에 생긴 덧없는 것으로 비친다. 청춘과 사랑의 청신함은 여명을 닮아 그를 눈부시게 한다. 그 입술을 가져라가 그렇게 달콤하게 거짓 맹세한. 그리고 가져가라, 그 눈을---여명을, 아침을 오도하는 그 빛을! 지나가며 한마디 해두지만, 이 과장법의 분방한 미학은 그 어떤 문학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리라. 시인의 열정을 관류하며 모든 물질적 사물들이 겪는 이 변모---장대한 것을 왜소하게 만들고, 작은 것을 확대하는 이 시적 권능---의 실례는 그의 희곡에서도 수없이 발견된다. 내 앞에 '폭풍 the tempest'이 놓여 있으니, 몇 구절만 인용해보겠다. 프로스페로, 거대한 반석으로 된 갑(岬)을 내 뒤흔들었고, 그 뿌리를 붙잡아 소나무와 삼나무를 뽑아버리도 했다. 프로스페로는 경악한 알론조와 그의 일행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음악을 청한다. 장엄한 음악, 산란스런 환상을 위무하는 특효약, 이제 무익하게, 그대의 두개골 안에서 들끓고 있는 뇌수가 그것으로 고쳐지기를. 다시, 마술의 약효가 빨리 사라진다. 마치 아침 햇살이 어둠을 녹이며 저녁을 슬그머니 물리치듯이, 회복되어가는 그들의 감각이 맑은 이성을 덮고 있던 몽롱한 안개를 쫓아내기 시작한다. 이제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밀물이 지금은 혼탁하고 진흙투성이인 이성의 해안을 곧 가득 채우리라. 사건들 사이의 진정한 친연성(다시 말하면, 관념적인 친연, 왜냐하면, 이것만이 참되기 때문에)을 지각함으로써 시인은 세계의 가장 장엄한 형상과 현상을 자유로이 구사하며 심령의 우위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3) 시인은 이처럼 자신의 사상으로 자연을 생기 있게 만드는데, 그가 철학자와 다른 것은 그가 미를 주목적으로 삼는데 비하여, 철학자는 진리를 주목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일 뿐이다. 시인 못지않게 철학자도 사물의 외관상의 질서나 관계를 뒤로 미루고 사사의 제국을 앞세운다. 플라톤에 따르면, "철학의 문제는 조건적으로 존재하는 만물을 위하여 무조건적이도 절대적인 기초를 발견하는 데 있다." 철학은 하나의 법칙이 만상을 결정하며, 그 법칙을 알면, 현상을 예견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전개된다. 그 법칙은 인간의 정신속에서는 하나의 관념이다.그 아름다움은 무한하다. 진정한 철학자와 진정한 시인은 하나인 것이고, 진리이며 미인 것과, 미이면서 진리인 것이, 양자가 추구하는 목적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린 정의가 갖는 매력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의 매력과 완전히 흡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양자의 경우 모두, 영적 생활이 자연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외적으로 견고하게 보이는 물질의 덩어리가 사상에 침투되어 용해되어버리고, 이 연약한 인간이, 형상을 부여하는 심령으로써, 거대한 자연의 집단 속으로 뚫고 들어가서, 그들의 조화 가운데에서 스스로를 인지한다는 것, 곧 자연계의 법칙을 포착해낸다는 점이다. 물리학에는, 이것이 성취되면, 기억은 개개의 사항들을 힘겹게 열거하는 고역을 면하고, 수세기에 걸치는 관찰 사항을 하나의 공식으로 표명한다. 이와 같이 물히학에서조차도, 물질적인 것은 영적인 것 앞에서 그 격이 떨어진다. 천문학자와 기하학자도 논박의 여지없는 분석에 의지하고, 관찰의 결과를 소홀히 한다. 오일러가 원호의 법칙에 관하여 언급한 숭고한 말---"이 법칙은 모든 경험적 사실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실이다."---은 이미 자연을 정신 세계에 전이시키고, 물질은 마치 내팽개친 시체처럼 버려두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4) 지적인 학문은 물질의 존재에 관하여 항상 의문을 던져 왔다. 튀르고는 "물질의 존재에 대하여 한번도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형이상학적 탐구에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지적 학문은 영구불변이고 필연적이지만 아직 창조되지 아니한 자연, 곧 관념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관념의 존재로 인하여 우리는 외부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 관념의 존재로 인하여 우리는 외부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 관념의 존재로 인하여 우리는 외부 현상을 한바탕의 꿈이나 하나의 그림자로 느끼는 것이다. 이 제신의 올림포스에서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자연을 영혼의 부속물로 생각한다. 우리는 올림포스의 산정에 오르면서 관념들이 지고의 존재supreme being의 사상임을 알게 된다. "이들은 영원으로부터, 태초부터, 곧 대지가 존재하기 전부터 이미 만들어졌다. 신이 천상을 만들 준비를 할 때부터, 그들은 거기에 이미 있었다. 신이 구름을 하늘에 만들었을 때, 심연에 수원지를 구축할 때, 그들은 신과 더불어 성장한 존재로서 거기 신 곁에 있었다. 신은 이들의 조언의 상대로 삼았던 것이다." 관념의 감화력은 비례적이다. 학문의 대상으로서 관념은 단지 극소수의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경건과 열정을 통해서 사람은 누구나 그들의 세계로 오를 수 있다. 그리고 이 신성한 자연물 곧 관념에 접하면, 사람은 누구나 어는 정도 신성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신성한 자연은 하나의 새로운 영혼처럼 우리의 육체를 새롭게 한다. 우리의 육체는 민첩해지고 날렵해진다. 우리는 허공을 밟는다. 우리의 삶은 더 이상 짜증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앞으로도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임을 안다. 이런 신성한 존재와의 평정한 만남에서, 인간은 나이를 두려워하거나, 불행을 두려워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변화의 영역 밖으로 옮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의와 진리의 세계를 숨김없는 그대로 보고 있는 동안 우리는 절대적인 것과 조건적인 것 혹은 상대적인 것의 차이를 배우게 된다. 우리는 절대의 세계를 이해한다. 말하자면, 비로소 우리는 존재하게 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물질의 관계에 불과하다는 것, 곧 진리의 지각이나 유덕한 의지와 아무런 친연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불멸의 존재가 된다. 5) 끝으로, 종교와 윤리---관념의 실천, 혹은 관념의 삶으로의 도입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지만---도, 저급한 문화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품격을 낮추고 그것이 정신에 의존하고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윤리와 종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전자는 인간에게서 시작하는 인간의 의무의 체계이고, 후자는 신에게서 시작하는 인간의 의무 체계이다. 종교는 신의 인격을 포함하지만 윤리는 그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는 한 가지 시도, 곧 자연을 격하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종교의 처음이자 마지막 교훈은 "가시적 삼루은 일시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은 영원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모독이다. 종교는 철학이 버클리나 비아사에 대하여 한 일을 무교육과자에게 한다. 아무리 무지한 종파의 교회에서도라도 한결같이 들을 수 있는 언어는 이것이다. "세계의 허망한 현상을 경멸하라 그것은 한갓 허영이요, 꿈이요, 허상이요, 비현실이다. 종교의 실재를 구하라." 열성적인 신자는 자연을 경멸한다. 어떤 신지론자들은 마니교도나 플로티노스처럼 물질에 대하여 일종의 적대감과 분노감을 갖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이집트의 미식(美食)을 되돌아보는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육체를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외적 미에 대하여 "그것은 신이 이 세상에 불러낸 영혼을 감싸는 연약하고 피곤한 옷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요컨대, 그들은 이 말을 그대로 물질에 대해서도 적용하고자 한다. 운동, 시, 자연과학, 지적 학문, 종교 등은 모두 외적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문화 전체가 관념론의 주입을 조장한다는 일반적 주장의 세목을 너무 세세히 살피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일종의 배은망덕한 행위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자연에 대해 하등의 적대감이 없다. 오히려 자연에 대해 어린이와 같은 사랑의 감정을 갖고 있다. 나도 옥수수와 멜론처럼 날씨가 따뜻할 때 성장하면서 살아간다. 자연을 공정하게 말해야 한다. 나는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에게 돌을 던지고 나의 아늑한 둥지를 더럽히고 싶지 않다. 나는 다만 인간 세계에 있어서 자연의 참된 위치---모든 올바른 교육이 지향하는 인간의 위상을 지적하고자 할 따름이다. 거기에 이르는 것이 인간 생활의 목적, 즉 인간과 자연과의 결합에 있음을 확실히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화는 자연에 대한 속류적인 견해를 전도하여, 정신으로 하여금 그것이 흔히 실재라고 불러온 것을 외관이라 부르고, 환상이라고 불러온 것을 실재라고 부르게 한다. 사실 어린이들은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믿는다. 외부 세계가 현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나중에 생기는 사상이다. 그러나 문화와 더불어 성장하면서 이 신념은 외면 세계가 실체라고 여겼던 처음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게 마음속에 자리잡게 된다. 관념론이 통속적인 믿음보다 우월한 점은 그것이 이 세계를 인간 정신에 가장 바람직한 시각에서 제시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사변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 곧 철학과 덕이 취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계는 현상적일 뿐이고, 따라서 덕은 세계를 정신에 복종시킨다. 관념론은 세계를 신 속에서 본다. 그것은 인간과 사물, 행동과 사건, 나라와 조요를 하나의 전체적 순환 속에서 바라본다. 그것은 이들을 노쇠하여 사라져가는 과거 속에 뿔뿔이 흩어진 원자로서 혹은 고립된 행위로서 고통스럽게 쌓여져 있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신이 영혼의 정관을 위하여 그 순간적 영원속에 그려놓은 한 폭의 거대한 그림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은 이 우주의 명판(銘板)을 지나치게 세세한 현미경으로 관찰하길 스스로 피한다. 심령은 그 목적을 존중하여 수단에 몰입하지 않는 것이다. 심령은 교회사의 스캔들이나 성경 해석상의 오묘한 비평보다는 기독교의 믿음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심령은 사람과 기적에 관하여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역사적 증거가 없더라도 동요되지 않고, 이 현상을 눈에 비치는 대로, 순수하고 외경스런 형식의 종료로서 신으로부터 받아들인다. 심령은 그 자신의 행운 혹은 불운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나타나더라도, 또 다른 사람들이 서로 화합하거나 반목하여도 격정에 빠지지 않는다. 심령은 어떤 사람도 적으로 여기지 않는다. 심령은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자기 교훈의 일부로서 받아들인다. 심령은 행동가라기보다는 관조자이다. 심령이 행동가가 되는 것은 다만 보다 더 잘 지켜보기 위해서일 뿐이다. VII. 영혼 자연과 인간에 관한 참된 이론에는 다소 진보적인 요소가 포함하여 있는 것이 필수적이다. 모두 소진되어버리는 혹은 소진될 수 있는 효용이나, 서술로만 끝나버리는 사실들은 자연이라는 이 멋진 거소---그 안에서 인간이 은신하고, 그의 모든 능력이 적절히 그리고 무한히 운용되는 이곳에 해당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연의 모든 쓰임새는 하나로 요약될 수 있으니, 그것은 인간에게 무한한 활동의 영역을 제공해주는 데 있다. 자연은 그 모든 영역에서, 곧 만물의 주변과 변방에 이르기까지 그 근원이 된 원인에 충실하다. 자연은 언제나 영혼에 대하여 말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것을 암시한다. 자연은 하나의 영속적 결과이다. 그것은 우리의 배후에 있는 태양을 가리키는 커다란 그림자이다. 자연의 외양은 경건하다. 마치 예수의 형상처럼, 자연은 머리를 수그리고 두 손을 앞가슴에 접고 서 있다. 가장 행복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신앙의 예지를 배우는 자이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는 이 표현할 수 없는 본질에 대해서 가장 깊이 숙고한 사람이 가장 적게 말한다. 우리는 조야한, 말하자면, 아득한 물질적 현상 속에서 신을 예견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신을 정의하고 신을 묘사하고자 하는 순간, 우리의 언어와 사고가 달아나버려, 우리는 바보나 미개인처럼 무력해지고 만다. 신의 본질은 명제로 표현되길 거부한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지적으로 경배하게 되면, 자여은 그것이 수행하는 가장 고귀한 책무, 즉 신의 대리자로 나선다. 자연은 보편적 영혼이 그것을 통하여 개인에게 말을 걸어오고, 개인을 보편적 영혼에게로 데려가고자 애쓰는 기관이다. 영혼에 관하여 고찰할 때, 우리는 우리가 이미 피력한 견해가 인간의 모든 영역을 모두 감싸지는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와 연관된 몇 가지 사상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자연은 세 가지 문제를 인간의 마음에 제기한다. 물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그리고 어디로 귀착하는가, 이 세 의문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첫번째 의문만큼은 관념론에 호소하여야 대답할 수 있다. 관념론은 선언한다. 물질은 현상이지 실체가 아니라고, 관념론은 우리의 존재의 증거와 세계 내의 존재자들의 존재의 증거가 전혀 일치하지 않음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한쪽은 완전하지만, 다른 한쪽은 어떤 확신도 불가능하다. 마음은 사물의 본성의 일부이고, 세계는 신성한 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그로부터 깨어나면 대낮의 광명과 확실성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는 꿈인 것이다. 관념론은 목공일이나 화학의 원리와는 다른 원리에 의하여 자연을 설명하고자 하는 가설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물질의 존재를 부인만 한다면, 영혼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나로부터 신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내 자신의 지각의 화려한 미로에 가두고 끝없이 방황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면 우리의 심정이 관념론에 반기를 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녀를 막론하고 인간의 유로가 막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활 속에 자연은 그처럼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그 전체 속에 그리고 하나하나의 개체 속에 인간성의 일면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념론은 자연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서 우리가 자연에 대하여 인정하는 혈연 관계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지식의 체계에서 관념론은, 심령과 세계 사이의 영구불변한 구별이 있음을 우리에게 주지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는 서론적 가설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불가시적인 사상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물질은 어디에서 유래하였고, 어디로 귀일하는가라는 문제에 결국 봉착한는데, 이때 많은 진리가 우리의 의식의 뒤안으로부터 나타난다. 우리는 지고의 존재가 인간의 여혼 속에 존재함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그 영혼이 지혜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미도 아니고, 힘도 아니면서, 그 모두가 일체를 이루고 있고, 만물이 그 때문에 그리고 그에 의해서 존재하는 어떤 보편적 본질을 창조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또 자연의 배후에서 , 자연을 통해서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도 안다. 그 영혼은 복합적인 것이 아니라 단일한 것으로서 외부에서, 곧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에게 작용해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즉 우리를 통해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그 영혼, 곧 그 지고의 존재는 자연을 우리 주위에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무의 생명이 새로운 가지를 잉태시키고 낡은 숨구멍에서 새 잎을 틔우듯이, 우리를 통해서 자연을 나타낸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식물이 대지에 안겨 있듯이 인간은 신의 품속에 안겨 있다. 인간은 결코 마르지 않는 샘으로 양육되고, 필요에 따라 결코 다함이 없는 힘을 그로부터 빨아들인다.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누가 제한할 수 있단 말인가? 일단 상층의 영기를 호흡하고 정의와 진리의 절대적 본성을 보도록 허용되고 나면, 인간은 조물주의 정신 전체에 접근할 수 있고, 그리하여 인간 자신이 이 유한계의 조물주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 견해는 인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나에게 경고하고, 또한, 영원의 왕궁을 여는 황금의 열쇠 를 가리키는 것처럼 미덕을 가리키며, 그 표상 이에 가장 고차적인 진리의 증명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를 생기 있게 만들어 나의 영혼을 정화시킴으로써 나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인간의 육체가 비롯되는 바로 그 영혼으로부터 발원한다. 세계는 신의 화신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육체에 비하면 한층 인연이 멀고 저급한 것이며, 신의 투영이되 그것은 무의식계 속의 그것이다. 세계는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육체와 차이가 있다. 세계는, 육체처럼, 인간의 의지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평정한 질서를 우리는 침범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는 신성한 정신의 현재적 설명자이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신으로부터 떨어져 있는지를 측정하는 고정된 점이다.우리가 쇠토해가면서, 우리와 우리의 거소인 세계 사이의 대조는 한층 분명해진다. 우리는 신에게 낯선 존재이듯이 자연 속에서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새의 노랫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여우와 사슴이 우리에게서 달아나고, 곰과 호랑이는 우리를 짓이기려 든다. 우리는 옥수수, 사과, 감자와 포도 같은 몇몇 식물의 효용밖에 모른다. 그렇지만 어느 모로 보든 장려한 자연의 풍경은 바로 신의 풍모가 아니겠는가? 그러면서도 이는 인간과 자연 사이에 어떤 부조화가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바로 가까운 들에서 노동자가 일을 하고 있으면, 고귀한 자연의 풍경을 흔연하게 찬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들의 모습이 안 보이게 될 때까지는 그의 기쁨에 무엇인가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VIII.전망 세계의 법칙과 사물의 윤곽에 관한 탐구에서 최고의 이성이 항상 가장 참된 것이다. 너무나 정련되어 있어서 그 가능성이 희미하게만 나타나는 것은 실상 여러 영원한 진리 중에서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종종 아련하고 몽롱하다. 경험적 과학은 사람의 시력을 흐리게 하기 쉽다. 그리하여 모든 가능과 과정에 대한 지식 그 자체로 인하여, 자연의 탐구자는 전체에 대한 인간적인 주시를 잃게 되는 수가 있다. 아는 자는 그래서 비시적이다. 그러나 모든 주의를 경건하게 모아 진리의 발견에 헌신하는 가장 박식한 박물학자일지라도, 그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 배울 바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은 또한 이미 알려진 지식을 가감하거나 비교해서 배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누구에게서도 배울 수 없는 영혼의 돌진에 의해서, 그리고 부단한 자기 발견과 전적으로 겸허한 마음가짐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또한 탐구자에게 정확성이나 무오류성보다 훨씬 더 우수한 자질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는 때로는 논쟁의 여지없는 단정보다 추측이 보다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며, 한 몽상이 백여 명이 합심하여 하는 실험보다도 더 깊이 자연의 비밀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생리학자나 박물학자가 언급하길 생략한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동물계의 모든 개체를 알려고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사물을 부단히 절연시키고 분류하여 지극히 다양한 것들을 하나의 형식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인간성 속의 폭력적인 통일화 성향이 어디에서 유래하고 어디로 귀일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보다 합당한 일일 것이다. 풍요한 풍경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이루는 여러 단계의 순서와 중첩 상태를 정확히 암송하는 것보다는 왜 다양한 것들을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결국 고요한 통일적 감각으로 귀일되는가를 아는 편이 한층 더 내 목적에 합당하다. 나는 사물과 사상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줄 수 있는 힌트가 주어지지 않는 한, 더 구체적으로 말하여, 가령 패류학이나 식물학, 그리고 예술의 형이상학에 한 줄기 빛이 조명되어 꽃들이나 조개류나 동물이나 건축등의 형태가 인간의 마음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규명하고, 그 관념 위에 과학이 세워지지 않는 한, 세부으 상세함은 그다지 존중할 수가 없다. 박물학의 표본실에 들어가서 짐승, 물고기, 곤충류의 가장 추하고 기괴한 형태를 보게 되더라도 우리는 어떤 불가사의한 인식 혹은 공감을 갖게 된다. 미국내에서 외국의 모형을 좇아 건축된 건물들만을 보아온 미국인은 요크 사원이나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안에 들어서면서 이 건물들 역시 모방물이라는 것, 곧 어떤 보이지 않는 원형의 희미한 모사라는 느낌을 받고서는 놀란다. 박물학자가 인간과 세계 사이의 경이스러운 조화를 보지 못한다면, 과학은 인간적이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 세계의 주인인 것은, 그가 그 안의 가장 오묘한 거주자이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세계의 두뇌요 심장으로서, 모든 크고 작은 사물에서, 산간의 모든 지층에서, 그리고 관찰이나 분석의 결과로 드러나는 모든 새로운 색채의 법칙이나 천문학의 사실 혹은 대기의 영향 속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일며을 발견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신비의 지각으로 17세기의 아름다운 찬미가 작가였던 조지 허버트는 시적 영감에 고양되었다. 다음의 시는 인간에 관한 그의 단시의 일부이다. 인간은, 사지가 하나에서 열까지, 온 세계가 그 밖의 다른 세계와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균제미의 극치이다. 각 부분은 가장 멀리 떨어진 것도 형제라고 부른다. 머리는 발과 은밀한 친교를 맺고 있고, 그 둘은 또한 달과 조수와 친교를 맺기 때문이다. 인간이 포착하여 그의 인식의 대상으로 삼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눈은 가장 높이 떠 있는 별도 끌어내린다. 그 작은 몸 속에 온 세계가 깃들어 있다. 풀이 우리 육체를 흔연히 치료하는 것은 거기에서 지기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하여 바람은 불고, 대니는 휴식을 취하고, 하늘은 움직이고, 샘은 흐른다. 눈에 띄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은 없다. 모두가 우리의 기쁨이요, 우리의 재화이다. 세계 전체가 우리의 찬장이거나 우리의 오락실이다. 별은 우리르 침대로 인도한다. 밤은 커튼을 미쳐 닫고, 해는 그것을 열어제친다. 음악과 빛이 우리의 머리를 떠나지 않고, 만물이 아래로 내려와 존재할 때, 그것은 우리의 육신에 친근하고, 올라가 원인이 될 때에는 우리의 정신에 친근하다. 너무나 많은 하인이 인간을 시중들기에 그는 알아치리지 못한다. 그의 모든 도정에서, 병으로 창백하고 여위었을 때, 자신을 친절하게 대한 모든 것들을 밟고서 지나간다. 오, 강렬한 사랑이여! 인간이 한 세계이고, 또 한 세계가 있어서 그를 시중들고 있구나. 이런 종류의 진리를 깨달으면 사람은 과학의 세계에 이끌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수단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자칫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과학의 이와 같은 한계를 인식하면서 우리는 "시가 역사보다 더 산 진리에 가깝다"는 플라톤의 명언을 수긍하게 된다. 정시을 통한 추윽과 예감은 모두 어느 정도는 존중할 만한 것이다. 우리는 잘 정리되어 있으나 가치 있는 생각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체계보다는 불완전하지만 진리의 편린이 엿보이는 학설이나 문장을 선호하게 된다. 현명한 작가는 학문과 글쓰기의 궁극적 목적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는 사상의 영역을 사람에게 알리고, 그럼으로써 무감각했던 영혼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희망을 통하여 가장 잘 달성될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시인이 나에게 읊조려준 인간과 자연에 관한 몇 가지 전언으로 이 에세이의 결론을 삼을까 한다. 그 전언은 지금까지는 늘 이 세상에 존속해왔고, 필시 모든 시인들에게도 반복하여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이면서 동시에 예언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인간의 밑바탕은 물질에 있지 않고 영혼에 있다. 영혼의 요체는 바로 영원성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에게는 아무리 길게 연속되는 사건도 또 아무리 오래된 연대기도 오래된 것이 아니고 최근의 것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잇는 개개인이 그로부터 비롯되는 보편적 인간의 역사에서는, 수세기도 하나의 점일 뿐이고, 전역사는 퇴락의 한 시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내면적으로는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공감을 불신하고 부정한다. 우리는 자연과의 연관성을 혹은 시인하고 혹은 부정한다. 우리는 느부갓네살 왕처럼 왕위에서 쫓겨나 이성을 잃고 소처럼 풀을 먹는다. 그러나 누군들 영혼의 갱생력에 제한을 가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영락한 신이다. 사람이 천진무구할 때, 그 생명은 오래갈 것이고, 꿈에서 깨어날 때처럼 조용히 불명의 세계에 들어가리라. 그러나 이러한 혼란이 수백 년 지속되면, 세계는 광란에 빠질 것이다. 죽음과 유년(幼年)만이 이를 억제할 수 있다. 유년은 영원한 메시아로서, 타락한 인간의 품안에 들어가 그들에게 천국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한다." "인간은 자신이 난쟁이이다. 그는 일찍이 영혼에 푹 젖었었고 영혼에 용해되었었다. 그는 넘치는 생기로 자연을 충만케 하였었다. 태양과 달도 그에게서 나왔었다. 남자에게서는 태양이, 여자에게서는 달이 나왔다. 그의 정신의 규칙과 그의 행동의 주기가 외현화되어 낮과 밤이 되었고, 해와 계절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거대한 조개껍질을 스스로를 위하여 만들면서, 그의 생명수는 사라졌다. 그는 더 이상 큰 수로관도 작은 수로관도 채우지 못한다. 그는 그는 하나의 물방울로 수축되어 있다. 그는 세계의 조직이 아직도 그에게 적합하긴 하지만, 그것이 너무나 방대하다는 것을 안다. 과거에는 세계가 그에게 치수를 맞추었는데, 이제 세계는 멀리서 그리고 높은 곳에서 그에게 상응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의 결과물을 겁먹은 듯이 숭배한다. 이제 남자는 태양의 추종자가 되었고, 여자는 달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따금 잠에서 놀라듯 깨어나 그 자신과 그의 집을 보고 의아해하고, 자신과 세계의 유사함을 기이하게 여기며 생각에 잠긴다. 인간은 그의 법칙이 여전히 최고라고 하더라도, 그가 연전히 자연력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의 말이 여전히 자연에 내재하는 순정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의식의 힘이 아니요, 그의 의지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뛰어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것으 그의 본능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저 오르페우스와 같은 나의 친구 시인은 노래하였다. 오늘날 인간은 그의 힘의 반밖에 자연에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세계를 오성만으로 대한다. 그는 세계 속에 살며 세계를 얄팍한 지혀로 정복하려 든다. 세계 내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자는 다만 반인(半人)에 불과할 뿐이다. 그의 양팔은 굳세고 소화력은 왕성한데, 마음은 짐승처럼 거칠다. 그는 이기적인 야만인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관계 그리고 자연이나 불, 바람, 물의 경제적 이용과 항해자의 나침반 사용, 증기, 석탄, 화학적 농사법, 치과 의사나 외과 의사의 치료등이 모두 오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추방된 왕이 단번에 왕위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토를 조금씩 매입해가는 것과 같이, 그 힘을 점진적으로 회복해가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보다 맑은 광명의 반짝임---인간이 오성뿐만 아니라 이성으로, 곧 그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자연과 대면하는 실례가 이따금 나타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모든 국가의 태고적의 기적에 관한 전설,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 종교 혁명이나 정치적 혁명, 그리고 노예의 폐지의 경우와 같은 어떤 이념의 성취, 스웬덴보리, 호헨로헤, 혹은 쉐이커 교도들shakers의 경우에 볼 수 있는 열정의 기적, 근래의 동물 자기animal magnetism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애매하고 논쟁적인 사실들, 기도, 웅변, 자가치료 요법, 어린이들의 예지가 그것이다. 이러한 예들이 이성이 순간적으로 왕홀(王笏)을 붙잡는 것, 곧 시간과 공간 속에 매어 있는 힘의 작용이 아니라 찰나적으로 흘러들어오는 어떤 원인력의 작용의 경우들이다. 인간의 현실적 힘과 관념적 힘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적적하게 비유하여 말하였다. 인간의 지식이란 저녁의 지식verpertina cogiti이지만, 신의 예지는 아침의 지식 matutina cogito이다. 세계에 그 본래의 영구불변한 아름다움을 회복시키는 문제는 영혼의 구제로 해결된다. 자연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보는 폐허나 공허함은 실상 우리 자신의 눈 속에 있다. 시각의 축이 만물의 축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만물이 투명하게 보이지 않고 불투명하게 보인다. 세계가 통일성을 상실하고 깨어진 쓰레기더미인 채 남아 있는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분열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은 영혼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때비로소 자연주의자가가 될 수 있다. 지각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영혼의 요구이다. 사랑과 지각은 어느 한쪽이 없으면 완전해질 수 없다. 낱말의 최상의 의미에서, 사상은 신앙이고, 신앙은 사상이다. 깊이가 깊이를 부르는 법이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사상과 신앙의 결합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신을 경배하는 순진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의무감은 그들의 모든 능력을 사용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지는 않다. 세상에는 또한 참을성 있는 자연주의자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상을 오성의 싸늘한 빛으로 바라보아 얼어붙게 만든다. 기도도 또한 진리의 탐구---미발견된 무한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영혼의 돌진이 아닌가?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항상 무엇인가르 배우게 된다. 모든 물상을 개인적 관계 속에서 분리해내서, 이를 세상의 빛에 비추어보고자 애쓰는 충실한 사상가가, 이와 동시에 가장 성스러운 애정의 불로써 학문의 불을 지필 때, 그때에 신이 새로이 창조의 한가운데로 나타날 것이다. 정신이 탐구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연구의 대상을 일부러 찾을 필요가 없다.지혜의 표지는 언제나 평범한 것에서 기적을 보는 것이다. 하루는 무엇인가, 일 년은 무엇인가, 여름은 무엇인가, 여자는 무엇인가, 어린이는 무엇인가, 잠은 무엇인가, 우리는 눈멀어서 이러한 것들로부터 아무런 감응도 받지 않는다. 우리는 적나라한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우화를 만들고, 그것을 말하자면 정신의 한층 고차적인 법칙에 순응시킨다. 그렇지만, 사실이 이데아의 빛에 드러날 때, 그 화려한 우화는 퇴색하여 사르라지고 만다. 우리는 참으로 높은 법칙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자에게, 사실이야말로 참된 시이고, 우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화이다. 이런 경이가 바로 우리 자신의 문턱으로 다가온다. 그대들도 또한 한 사람의 인간이다. 남자와 여자, 그들의 사회 생활, 가난, 노동, 수면, 공포, 운명 등, 어느 것이든 그대들도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도 피상적인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은 없다. 각각의 현상은 정신의 능력과 애정 속에 그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추상적인 의문으로 그대의 지성이 고심하고 있는동안 자연은 그것을 구체 속에 드러냄으로써 그대의 손에서 그 의문이 해결되도록 해준다. 우리의 나날의 이력과 정신 속의 관념의 발생과 진전을, 특히 인생의 커다란 위기의 국면에서 그것을 하나씩 비교해보는 것은 닫힌 실내에서 행하는 연구로서는 현명한 방식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보게 된다. 세계가 그 스스로 교화된 의지에 복종함으로써,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지성이 끝없이 제기하는 의문에, 그리고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애정이 제기하는 의문에 응답할 것이다. 우리의 시인은 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연은 고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다. 영혼은 자연을 변화시키고 주형하고 만든다. 자연의 부동성이나 야만성은 영혼이 부재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순수한 영혼에 대해서 자연은 유동적이고, 가벼우며, 순종적이다. 모든 영혼은 스스로 하나의 집을 짓는다. 그 집 너머로 세계가 있고, 그 세계 너머로 천국이 있다. 그렇다면, 세계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알도록 하라. 그대를 위하여 현상계는 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다만 그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아담이 가졌던 것 모두를, 시저가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그대도 가질 수 있고 행할 수 있다. 아담은 자신의 집을 천상과 대지라 불렀다. 시저는 자신의 집을 로마라고 불렀다. 그대들은 필시 그대들의 집을 구둣방이라고도, 일백 에이커의 경작지라도도, 혹은 학자의 다락방이라고도 부르리라. 아름다운 이름은 없지만, 그대의 영토도 선과 선에 있어서, 점과 점에 있어서, 아담과 시저의 영토만큼 위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 자신의 집을 구축하라. 그대의 생활을 그대의 정신 속의 순수한 관념에 확고하게 순응시킨다면, 그대의 세계는 즉시 그에 비례하여 넓게 펼쳐질 것이다. 영혼이 흘러들어와 충만하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혁명이 사물 속에 일어난다. 그러면, 불유쾌한 현상들, 돼지, 거미, 뱀, 페스트, 정신 병원, 감옥, 적들이 곧 사라지리라. 이들은 한시적인 것이니, 이제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자연의 추함과 오물을 태양이 말라비틀어지게 하고 바람이 그것을 날려보내리라. 여름이 남쪽에서 찾아오면, 눈 쌓인 둑이 녹고 대지의 표면이 여름 앞에서 푸르게 되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영혼은 그 나아가는 길에 장식을 스스로 만들고, 그것이 방문했던 곳의 미와 그의 귀를 매혹시켰던 노래를 함께 가져간다. 영혼은 그의 길 주위로 아름다운 얼굴과 따스한 마음과 현명한 담화와 영웅적인 행위들을 끌어모은다. 그리하여 악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자연 위에 세워진 인간의 왕국은 관찰과 더불어 생기는 그런 곳이 아니라, 신에 대한 인간의 꿈을 초월한 곳에 있는 영지이다. 인간은 점차 시력이 회복되어 마침내 완전한 광명을 되찾게 된 맹인이 느끼는 것에 못지않은 경이감으로 그 왕국에 입성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