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선비인 정원용(鄭元容)(1783~1873)은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일찍 결혼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을 일찍 여의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망설이다가 과거를 보기 위해 열심히 글을 읽었다. 그러니 물려받은 재산도 넉넉치 못한지라, 남아날 재산이라곤 없었다. 더욱이 남은 재산이 없으니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짓는 것은 염두를 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가재도구를 모두 처분하였고, 마침내는 끼니를 이을 수 없을 정도로 몹시 가난(窮塞)해져 버렸다. 그이 나이 20세의 일이다. 하루는 사랑방에서 글을 읽다가 어찌나 배가 고팠던지, 아내에게 먹을 것이 없는지를 물으려고 안방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런데 마침 아내가 무엇인가를 먹다가 무릎 밑으로 황급히 감추는 것이었다. 정원용은 서운한 마음이 들어 아내에게 나무라기 까지 하였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부부간에 밥 한 톨이라도 나누어 먹어야지, 어찌 혼자서 무엇인가를 먹다가 감추는 것인가? 세상에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잔뜩 속이 뒤틀린 정원용은 뒤돌아서서 나오다가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아내를 나무랐다.
“도대체 무엇을 먹다가 무릎 밑에 감추었소? 당신이 어찌 그럴 수가 있소?”
나무라는 남편을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요즘 들어서 저에게 무엇을 주셨나요? 돈을 주셨나요, 쌀을 주셨나요?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면서 무엇을 먹는다고 그리도 야단입니까? 사방을 둘러봐도 먹을 것은 없고 어찌나 배고 고프던지, 녹두 가루로 만든 비누가 그릇에 조금 붙어 있기에 그것도 곡식이라고 빨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당신이 들어온 것입니다. 너무나 부끄러워서 말도 못하고, 당신이 민망해할까 봐 무릎 밑에 감추었습니다. 자, 이게 그것이니 빨아 봐요, 무엇이 묻어 있기나 한지?”
정원용은 사랑방에 틀어박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별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돈이 있어야 장사라도 하고, 땅이 있어야 농사를 짓기라도 하건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탄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도둑질이었다. 그러나 막상 도둑질을 하려는 마음을 먹었으나 어떻게 해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동네를 돌아 본 뒤에 결심하기로 마음먹었다. 동네는 양반들이 살고 있어서 대부분 담장이 높은 집들이 많았다. 그래서 담장이나 울타리가 없는 집을 골라 무작정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한 참을 기웃거리며 다니다 보니 과연 울타리나 담장이 없는 집이 하나 보였다. 몰래 그 집에 들어가 보니 뒷마루에 무엇인가가 담겨 있는 자루가 하나 보였다. 손으로 만져보니 나락(벼)이 한 말 쯤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면 됐다.”정원용은 그 나락 자루를 어깨에 메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서 자루를 막 내려놓다가 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울타리도 담도 없는 그 집도 얼마나 먹을 것이 없으면 이 나락을 식량으로 구해 놓았을까? 내가 훔쳐왔으니........, 그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사나? 내가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이런 짓은 하면 안 된다.’생각을 바꾸어 본래의 순수한 마음자리로 돌아온 정원용은 나락 자루를 다시 본래의 집에 갖다 놓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도둑질을 하려고 해도 내 마음이 용납을 하지 않으니, 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나도 그렇지만, 나에게 시집을 온 저 불쌍한 아내는 이제 어떻게 하나? 아내가 무슨 죄가 있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깊이 근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였다. 갑자기 허공에서 “정원용아, 이제 복을 받아라!”하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복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닌지라, 어떤 좋은 일이 생길 것인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튿날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을 시작한 것이다. “정원용 내외를 저대로 놔두면 틀림없이 굶어 죽을 것이다. 우리들이 힘을 모아 도와주자”그리고는 양식도 갖다주고 옷도 갖다주어서 굶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에 열심히 공부한 결과 과거에 합격하여 약관 20세의 나이로 벼슬길에 올랐다. 정원용은 늘 바른 생각으로 검소하게 살았고 청렴결백하게 관직 생활을 하였는데, 차츰 벼슬이 높아져 나이 56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그 뒤 20여 년 동안 최고의 관직에 있다가 91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아들과 손자들도 정승과 판사를 지내는 등 집안의 경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일은 나 자신과 우리 가족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을 지경에 처하더라도 상대방의 이익과 안위를 먼저 걱정했다는 점이다. 한 순간 잘못 생각해서 남의 물건을 훔쳤으나, 상대의 입장을 헤아려 훔쳐온 물건을 다시 갖다 놓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하늘이 복을 내리지 않겠는가? 먹을 것이 없어 죽을 지경에 이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그 순수한 마음은 하늘이 감동하여 복을 내리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보통 어리석은 자들이 나쁜 행위를 할 적에는 내가 하는 행위가 아무도 모를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비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반성할 줄 모르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역경에 처할지라도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니, 내가 살아 있을 때 나쁜 짓을 하더라고 내가 잘 살고 우리 가족이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삿된 생각을 해서는 아주 험란한 고통속에서 헤매이게 된다. 다음 생을 위해서는 현재 살아 있을 때 복을 짓고 선을 쌓는 일을 부지런히 해 놓지 않는다면 비참한 생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라는 청소년들을 위해서, 혹은 자녀들을 위해서 부모는 항상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자녀들이 부모가 하는 행위를 보고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 자녀에게 가장 모범이 되어야 할 사람은 바로 부모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돈이 많다고 하여 자녀가 사달라는 대로 마음껏 사주고, 용돈을 푸짐하게 준다고 하여 자녀가 반듯하게 자리지 않는다. 핵심은 부모의 말 없는 가운데 모범적이 행동이다. 비록 부모가 가난하여 몹시 어렵게 살더라도 부모의 가치관이 뚜렷하고 사상이 올바르면 자녀들은 반듯하게 성장할 수 있다. 흔히 부모가 말 싸움도 하지 않고 서로를 위하며 사랑스럽게 잘 지내면, 그런 환경에서 자란 자녀는 효자가 될 것으로 착각한다. 효자는 慈愛(자애: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도타운 사랑)로운 가정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어떤 가정에서 효자가 나오는가? 노자는 肉親(육친: 부모 형제 같이 혈족관계에 있는 사람)이 화목하지 않을 때 孝(효)가 나온다고 하였다. 왜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는데 효자가 나올까? 의심스러울 것이다. 그것은 가정에 불화와 위기가 지속적으로 닥쳤음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그 환경에 무너지지 않고 잘 극복하며 헤쳐 나가는 과정을 지켜 볼 때에 자녀들의 효행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충신이 나라가 안정될 때에 나오지 않고, 전시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나온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리라.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이순신 장군, 맥아더 장군 등 수많은 인재가 모두 나라가 매우 혼란한 시기에 출현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올바른 마음 자세가 복을 깃들게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자녀들에게 올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모범된 행동이다. 더 나아가 자녀 뿐 아니라 젊은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모범을 보여야 젊은이 들이 올바름을 보고 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 젊은이들이 정의롭고 반듯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녀는 부모가 하는 행동을 보고 그대로 배운다. 가령 위법한 행동을 보고, 사회 상규에 어긋나는 행동을 보고 배운 젊은 세대들은 잘못한 행동을 하고도 부끄러운줄 모르게 된다. 이런 행위들이 오랫동안 누적되어 사회 전반에 미치게 되면, 국민의 정서를 병들게 하고 신뢰를 무너뜨려 결국 나라를 위태롭게하는 폐습적인 풍습을 낳게 한다. 나 자신이 해서는 안 되는 일(사회 상규에 어긋나는 일 등)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부추기거나 압력을 행사하여 삿된 일을 하게 해서는 안된다. 올바른 길을 놔두고 삿된 길로 가게 하는 것은 스스로 罪業을 지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罪業을 짓게 하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특히 집단이기주의를 위해 나라 전체에 폐습적인 나쁜 문화를 조장하여 전통으로 이어가는 것은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국민정서를 병들게하고 국법질서를 어지럽히는 나라에 해를 끼치는 중대한 행위로 매우 큰 죄업을 짓는 행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罪業은 반드시 되돌려 받도록 되어있는 것이 바로 우주의 진리인 동시에 인과법칙이다. 우리 나라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진리의 문장은 바로 이와 맥을 같이 하는 문장이다. 다만 어리석은 자들은 그 죄업이 당장 나에게 닥치지 않으니 죄를 함부로 짓고 그 결과를 두려워 한다. 반면에 현명한 자들은 죄업의 원인을 두려하기 때문에 원인을 짓지 않으려고 한다. 또한 주역에 積善之家(적선지가) 必有餘慶(필유여경), 積不善之家(적불선지가) 必有餘殃(필유여앙)”즉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고, 불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고 하였다. 즉 선과 악의 결과는 그 자손까지 미친다는 의미이니, 그 결과가 금방 나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부로 輕擧妄動(경거망동:경솔하여 생각 없이 망령되게 행동함)해서는 더 큰 재앙이 따르게 될 것이다.
이런 문장을 깊이 받아들여 정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특히 안타까운 일은 기성세대가 젊은이 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모범을 보여야, 그들이 정의롭고 반듯하게 성장하여 국가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러나 썩어 빠진 폐습을 지키느라 젊은이 들의 정신을 병들게 만들고 정의롭지 못한 방향으로 인도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한다.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잘못된 폐습적인 관행은 시대 상황에 뒤떨어진 정신나간 어리석은 무리들의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반드시 깊이 반성하고 청산되어야 한다. 이런 어리석은 행동은 인과법칙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과응보경에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다.
“가령 백천겁이 지난다 하더라도 자신이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아니하여 인연이 만날 때에 그 과보를 저절로 받게 된다[假使百千劫 所作業不亡 因緣會遇時 果報還自受].”라고 천명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 생활를 하면서 깊이 새겨둘 진리의 가르침이다. 시대가 바뀌고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이러한 진리는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매사에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言行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 진심으로 蔭德을 쌓기를 바란다면, 제일 먼저 할 일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참회하여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회는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평생토록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붓다는 45년 동안 남⋅녀⋅노⋅소⋅신분을 초월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였다. 그 주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①나쁜 짓을 하지 말라(諸惡莫作) ②善을 받들어 행하라(衆善奉行)
③마음을 깨끗이 하라(自淨其意)
우리가 선을 행하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善因善果, 善因樂果).
If we do good, good thinks will happen to us.
우리가 나쁜 짓을 하면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다(惡因惡果, 惡因苦果).
If we do bad, bad things will happen to us.
붓다의 설법을 음미하면서 평소에 늘 복 짓는 행위를 해야 마음이 편안해 지리라.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오면서 한 행동을 되돌아 보고 이를 참고하여 반성하고, 새롭게 나아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다. 복을 짓는 행위는 어떤 특별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어르신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일, 구걸하는 이에게 도움을 주는 일, 손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언덕을 올라가는 어르신에게 도움을 주는 일,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正義롭게 행동하며 모범을 보이는 일 등 잘 보이지는 않는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그저 당연한 것처럼 무심코 善을 행하는 것이 습관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善을 쌓는 시발점이다. 이러한 내용을 참고하여 인생을 살아가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고 善을 증장시키는 계기가 되어 가족이 좀더 안정되고, 더 나아가 나라가 행복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참고) 법공양 통권 345호, 불교신행연구원에서 참고
註)정원용(鄭元容:1783~1873년)은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본관 동래(東萊). 자 선지(善之). 호 경산(經山). 시호 문충(文忠). 1802년(순조 2)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검열·대사간 등을 지내고 1821년 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로서 평안도의 민폐 실정을 조사·보고하였다. 1831년 동지사(冬至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온바 있으며, 1837년(헌종 3) 예조판서에 승진한 뒤 이조판서를 거쳐 1841년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영의정으로서 강화에 사는 덕완군(德完君) 원범(元範)의 영립(迎立)을 주장, 철종(哲宗)으로 즉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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