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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무섭지는 않아서 그래서 나는 폭발했다
전창수 지음
들어가며
-“그리움”이 “허상”에 기대고 있다
1권
가슴의 감옥
회귀
극장에서 무심
트라우스의 성장 - 윤회설(輪回說)
개 같은, 같잖은 게
Brood War
벽돌쌓기 – 기다림
햇살이 무섭게 쏟아지는 날에 – 꿈
햇살이 무섭게 쏟아지는 날에 – 졸림
가슴을 울리는 뒤통수
금붕어
극장에서
모조품
깁밥을 먹으며…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거울의 방
낯선(?) 수술
이력서
지렁이 철학
바람막이
현.상.수.배.
허무에 대하여
2권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남녀
나이 많은 미혼
출근길
세기말의 중심
그리움에 걸리다
아낌없이 받는 남자
눈의 십자가
사랑하지 않았다
꽃 파는 총각
발가락이 예쁜 천사
3권
너를 체포한다
수증기 사랑찌개
열대어네 집
세 마리의 글자로 세우는, 안녕
도둑 한 마리 세상에 나가려고 하신다
저 멀리 아득한 테레비 소리
Ending
“그리움”이 “허상”에 기대고 있다
그리움이란 단어를 노트 속에 동그란 종이로 접어, 그림이라는 걸 그려본다 새벽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우리에게선 떨어나가지 않은 천국의 시체들이 黎明(여명) 속에 하나둘 살아나고 난, 이 어둠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리움이 허상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움츠린 어깨, 더욱 더 움츠리고 “너”라는 좁디좁은 동굴 속으로 빨려드는 그곳은 텅빈 가슴, 아무도 없다 젖무덤의 향내 나는 입술 사이 한숨이 새어나오고, 그․립․다
다이아 색채나는 반짓가락 만지작거리면 허영에 들뜬 마음이 움직인다, 바람이 지나친 바람에 쓰러진 나무들, 廟塔(묘탑)에 부은 시선들, 너마다 등을 돌려, 야윈 풀들은 꿋꿋하다 그리움은, 없․다
좁은 어둠 사이로 허상이 그리움을 잡아끌고, 살아있는 시체가 묻히고, 몰아치는 폭우가 무덤을 짓밟고 난, 그리움이란 단어 속에 들어가 “허상”에 기․대․고․있․다
너무나 무섭지는 않아서 그래서 나는 폭발했다·1권
가슴의 감옥
- 성인 같은 아이가 웃고 있다 -
1.
어린 소년의 가슴 속에
자신을 감시하는 조그만 창문이
방문에 양쪽으로 매달려 있다
그리고 그 창문 너머엔
자신을 감시하는 괴물이
24시간 대기하고 있다
가끔, 그 괴물은 창문으로 소년을 쳐다보다
위협적인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마음에 안 들면, 문을 부수고 들어가
소년의 가슴을 파먹기도 한다
그리고, 괴물은 소년의 가슴에
이 한 마디를 새겨놓은 채 사라지곤 한다.
“smile”
2.
괴물이 창조한 창문 너머
성인이 된 아이가 헤- 웃고 있다.
회귀 (回 歸)
나는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다
나보다 더 슬프고 외로운 사람들은 내 기억 속에서 모두 죽었다 이 모든 것들이 두 평도 되지 않는 내 방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나는 한번도
그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그 방의 문을 열면 세월에 찌든 퀴퀴한 냄새가 난다 방향제를 뿌려도 그 방의 오래된 낡은 관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처음 문을 열던 날 이곳은 텅빈, 바람소리로 가득한 황무지였다 개간된 그곳은 이제, 쓰레기로 가득찬 폐허다
철저하게 방음된 방,
어느 곳에서도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고
모래사막으로 불리는, 온몸이 부딪힌 곳엔
음주와 흡연, 그리고 섹스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않은
도시(都市)와 도시(都市) 사이
미친 듯 부르짖는 그 방의 광기(狂氣)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외로운 마지막 한 사람을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기로 한다
태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태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극장에서 – 무심(無心)
- 팝콘을 몰래 감추던 그들의 엉킨 몸매는 아름답다 -
1. 상영 시작
서서히 점등이 시작된다, 어둠 속으로 깊이깊이 잠든 후에 엉키던 나의 뜨끔한 맛. 나는 그들 뒤로 몰래 다가가 슬며시 콜라를 붓는다, 히히덕거리는 그들의 몸매가 허걱거리는 나의 숨소리에 묻힌 순간, 극장 안은 갑자기 울려퍼지는 총성소리와 함께 긴장감에 파묻혔다. 나도 너도 우리도 뒤엉켜버린,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 나뒹굴며 치고박는 사람들이 난무하는 극장 안.
2. 상영 중
멍든 눈을 문지르며 비상구를 내려온다, 그녀는 내 손을 자꾸 끌고 있었다, 뿌리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호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골목이 나오는 상황이다, 그녀의 입술이 갑작스럽게 내 입술을 덮쳐왔다, 나의 눈이 그녀의 얼굴 언저리를 뱅뱅 돌고 있었다, 그녀의 따스한 입김이 혀끝으로 전해져 왔다, 나는 눈을 감는다, 그 순간.
3. 상영 끝
아주 뜨거운 햇살이, 살갗 구석구석을 콕콕 찔러댄다 흘러내린 팝콘을 몰래 감추던 그들의 엉킨 몸매는 내가 부어버린 콜라와 뒤범벅되어 엉망이 되어버리고 엉켜버린 몸매를 탓하는 대신 영화가 재미없었다며 투덜거리던 그들의 아침이 행복해 보인다
트라우스의 성장 – 윤회설(輪回說)
아이가 맞고 있어요 이유도 없이 아아
이유를 물었어요 시(詩)는
쓰는 게 아니래요, 시(詩)는
노래하는 것이라고 네가 노래를 할 줄
아냐며 이유도 없이 아이가
맞고 있어요, 턱시도에 번쩍이는 구두를
쫘악 빼 입고 아이는 어른들을 맞이해요. 엉엉엉, 낯선 사람들
앞에서 아이는 낯설어서 울며불며 매달려 보지만 또
맞았어요. 어? 아이가
결혼을 하네요. 우리나라에서 미성년자는 법적으로
결혼이 금지되어 있는데, 아이가
결혼을 한대요, 결혼을 한다고 아이를
때리던 어르신들이 덩더쿵
춤을 추네요.
그래요 전 아주 행복한 아이에요 절 길러주시던 어머님 아버님 저에게 성(性)을 알게 해준 나의 배우자님, 모두모두 감사드려요 그래요 전 아주 행복한 아이에요 시(詩)를 노래하던
어느 날,
아이는 실컷 두들겨 맞고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어요 아아 이유도 없이 노래하지 않았어요 아아 이유도 없이 결혼을 하고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희미한 기억은 하나씩 지워
져 가는 것이라며 아이는 과거를 지워
나가고 있어요. 과거가 그를 덮치기 전에 그가 먼저 과거를 덮
고 있어요. 아이가 우네요 난 너무 행복한 아이라고 아
이가 우네요. 과거에 있는 그가 현재로 날
아오네요. 미래로 날
아가네요. 아
름다운 날
들이네
요. 흑
흑.
노래도 없이.
이유도 없이.
아이가 날아가네요 아이가
아기를 낳았어요 아이가
아기를 아이가
아기를.
세상은 돌
고 돈대요, 세상은 돌
고 돈대요 시(詩)란 참
아름다운 것이래두요.
개 같은, 같잖은 게
개 같은, 같잖은
쓰레기통 버려진 소파 뒤에 숨어
있던 개가 놀라, 펄쩍
개 같은, 같잖은
인생 같은 게
그렇다고 쓰레기통 말고 쓰레기통은
어디에도 없는 데
개 같은, 같잖은 게
날 놀라게 하고 있어 발길질 한 번
바람 날아와, 바람과 함께
펀치 한번 날리고
개 같은, 같잖은 게
놀란 눈끼리 서로 마주쳐
놀란 눈끼리 경계를 하고
놀란 숨 죽여 서로를 노려보면
개 같은, 같잖은 게
그래도 살겠다고
소파 뒤로 숨어버리는
개 같은, 같잖은 게
<STRACRAFT>
Brood War
- Clocking
너에게 난 클로킹(Clocking)된 전사
특별한 유닛(Unit)에 의해서만 발각되는 고스트(GHOST)
어둠 속을 헤메이는 다크 템플러(Dark Templer)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아픈 곳을 찌르는 럭커 드롭(Lucker Drop)으로
너의 영혼을 엉망으로 만든다,
벽돌쌓기 - 기다림
그대와 내가 벽돌을 쌓는다
벽돌은 점점 더 견고해지고 있다.
흔들어도 흔들려지지 않을 만큼,
벽돌이 쌓였을 때 그것은 이미
빠져나갈 수 없을 높이만큼의
벽이 되어 있었다.
문 좀 만들어줘요!
저 너머로, 희미한 대답이 들려왔다.
아직 안돼!
점점 더 쌓아져 가는 벽돌만큼 숨이 막혀왔다.
발로 두드려봤지만, 저 너머에서는 오직
텅텅 빈 메아리만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밀폐된 벽돌 안,
막막한 하루를 지탱하는 목소리 하나,
구원의 손길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햇살이 무섭게 쏟아지는 날에 - 꿈
1
바람에 밀려난 바람이 춤을 추는 새벽, 허탈하게 웃어제끼는 호탕한 남자에게선 세월에 절절 쩔은 냄새가 난다. 그의 주위엔 듬성듬성하게 잡초가 자라고 또 하늘에 떠가는 구름도 듬성듬성하다. 누군가 함께 있기 싫어서일까 그의 수염도 머리카락도 듬성듬성하다.
2
제멋대로의 광기(狂氣)만이 불어 제끼는 오후, 그의 주위는 온통 오후의 빛깔이다. 비라곤 내리지 않을 것만 같은 벌판, 강렬한 햇살이 벌판을 뒤덮고 꿈을 꾸는 그에게는 단 한 방울의 이슬도 맺히지 않는다. 당연한 오후지만, 사라지지 않는 오후. 그는 새가 되는 꿈을 꾼다. 벌판을 나는 꿈. 오후를 탈출하는 꿈. 다시는, 깨지 않는 꿈.
3
듬성듬성하게 기억나는 그의 지난 일들은 이제 완전히 사라져가고 있다 짓밟힐 그 무엇조차 없어 황량한, 어둠까지도 잃어 빛의 절망만이 가득한 허허들판. 함께 있기 싫어서일까 저 들판 저 빛조차 그의 꿈을 먹어치운다
햇살이 무섭게 쏟아지는 날에 - 졸림
1
쏟아지는
쏟아지는 별빛
처럼 쏟아지는 잠이 나의
배고픔 누르고 주문을
왼다 고픈 배 사라지는
낮 또 밤 또
아침 쏟아지는 잠이
저 뜨거운 햇살처럼 쏟아지는
잠이 마구 퍼붓는 소나기처럼
갑작스런 첫 키스 그리고
이슬처럼 수십번 먹어치운 립스틱 나를
사랑하는 또 너를 또
우리를 사랑하는 배고픔처럼 쏟아지는
잠이 나의 배고픔 누르고 사랑으로
무궁무진한 사랑으로 변하여 혹은
별빛으로 태양으로 소나기로 때론
이슬처럼 쏟아지는 잠이.
2
그리고……햇살이 무섭게 쏟아지는 오후.
그녀가 또 다른 여자와 길을 걷는다 나는 그녀를 본다 나는 그녀와 그 여자의 사이로 들어가 하늘 향해 양팔 벌린 나무가 된다 나는 그녀와 그 여자를 하늘 높이 칭송하고 축복한다 나는 그녀가 된다 나는 그녀가
되어 버린다 하늘 향해 양팔 벌린 동상이 되어 나는 그녀 안으로 들어간다 그녀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여자와 길을 걷는다 그녀의 여자가 웃는다 그녀의 여자는 내가 있어 기쁘다 그녀의 여자는 내가 된다 내가 되어 그녀와 길을 걷는다 나는 그녀와 길을 걷는다 나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된다 나는 그녀의 애인이 된다 나는 그녀와
결혼을 한다 나는 그녀와 하나가 된다 나는 그녀가 되어 그녀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그녀의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아이가 된다 그녀는 나를 위해 웃는다 그녀는 내가 있어 기쁘다 그녀는 내가 된다 그녀는 내가 되어 하늘 향해 두팔 벌린 나무가 된다 두팔 벌린 나무가 되어
그녀와 그 여자를 하늘 높이 칭송하고 축복하는 나와 그녀와 그 여자의 그늘이 되어 준다 햇살이
무섭게 쏟아지는 오후.
가슴을 울리는 뒤통수
퍼억퍽 아침의 질척거리는 교통체증, 아니 가슴을 짓누르는 이상한 체중 나의 단잠을 깨우는 이상한 목탁소리, 도시를 상실케 하는 라디오의 소음은 커져만 가고 사람들, 자신이 갇혀 있던 동굴 속으로 출근을 시작한다 배배배 꼬인 창자 움켜쥐고 아니 참아내고 스트레스 한뭉치 꿀꺽 집어삼킨 개미떼들처럼 우르르. 지상은 천지가 요동치는 경적 소리다 아직 이 세상에서 뭐 하나 제대로 해본 것도 없는데, 더러는 궤도를 이탈해 달라고 요구하는 왕벌. 새벽 네시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요란하기는 한데, 아침 일곱 시 날은 완전히 밝고 출근길은 여전히 북새통이다 뒤통수를 맞은 듯 가슴이 아파오는 오후 무렵, 벌침에 쏘인 사람들은 눈물 나는 어떤 사연에 내일을 기다리고 세상은, 천지를 뒤덮은 먹구름이다
금붕어
금붕어 열 한 마리가 연못에서 놀고 있었다
한 마리가 늙어 죽었다
금붕어 열 마리가 물 속을 헤엄쳤다
한 마리가 메말라 죽었다
금붕어 아홉 마리가 사람에게 잡혀갔다
한 마리가 도망쳤다
금붕어 여덟 마리가 어항 속으로 들어갔다
한 마리가 바뀐 환경에 적응을 못해 죽었다
금붕어 일곱 마리가 밥을 먹었다
한 마리가 배가 터져 죽었다
금붕어 여섯 마리가 물 위로 뛰어넘기를 했다
한 마리가 실수하여 어항 밖으로 떨어졌다
금붕어 다섯 마리가 어항에서 놀고 있다
한 마리가 의학용으로 잡혀가 버렸다
금붕어 네 마리가 달리기를 했다
한 마리가 바위에 부딪혔다
금붕어 세 마리가 싸움을 했다
한 마리가 상처를 깊이 입었다
금붕어 두 마리가 다시 연못으로 던져졌다
한 마리는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너무도 외로운 금붕어 한 마리가 연못을 헤엄친다
11人의 금붕어는 모두 무사히 자기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극장에서
1. 잠
코 고는 소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슬금슬금 그 녀석의 앞으로 간다
그녀석의 뒤통수가 “빡”하는 순간,
“번쩍”하는 굉음소리와 함께 나는 잠에서 깬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꿈.
2. 핸드폰
어디선가 울리는 “띠리리리”
나 몰라라 전화기를 받는 그녀석의
뒤통수가 “빡”하는 순간,
“번쩍”하는 굉음소리와 함께 나는 잠에서 깬다
사람들의 시선, 울리는 전화벨.
3. 수다
어디선가 들리는 소곤소곤
그 녀석들의 머리가 “번쩍”하는 순간
“빡”하는 굉음소리와 함께 나는 잠에서 깬다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조심스런 속삭임
“잠꼬대 좀 그만하세요”
4. 햇빛 속으로
뜨거운 햇빛이
어두운 극장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
안간힘을 쓰면서 햇살을 내려보내고 있다
그 햇살 아래 검은 외투를 어깨에 걸친 한 남정네가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는 미소 가득 머금은 얼굴로
사연이 가득했던 극장을 내팽개친 후,
또 다른 극장을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한다
모조품
무엇인가
완성된 듯 하다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위선의 십자가가 즐비하다
할렐루야, 할레루야
탑 위에는 못박힌 예수
무엇인가
완성된 듯 하다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는
위선의 알부자들이 가득하다
돈 많아야, 돈 많아야
그림 위에는 그림자 박힌 그림
저녁을 떠나면서
나는 아침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무엇인가
그럴듯한 완성품이 없을까
모든 것이
위조된 위선 혹은
위조된 위악 혹은
그 어느 것도
결정을 내리지 못할 모조품.
무엇인가
완성된 듯 하다
김밥을 먹으며…
길다랗게 토막난 야채들과 순간적으로 타오른 불꽃에 볶아진 김들이 어머니의 손에 의해 차곡차곡 쌓여졌을 길고 긴 김말이의 순간
김밥을 먹으며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어머니의 솜씨 좋은 손놀림으로 잘리워져 은박의 1회용 도시락통에 담겨져 내 앞에 있을 것이다
옆구리가 터지거나 속이 뭉개져 하얀 속살이 훤하게 드러난 김밥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들 깔끔하게 정돈된 흠이 없는 김밥이다 김밥 한 개를 먹을 때마다 오렌지 프리미엄 주스는 한모금씩, 꾸역꾸역 메인 목을 타고 흐른다
생각에 잠겨있는 나는 김밥을 먹으며
오렌지 프리미엄 주스를 커피잔에 따라 마시고 있다
아주 뜨겁게 달구어진 커피를 마시다가 바닥에 떨어져
이가 조금 갈려진 커피잔, 그것을 보며
뜨거운 남비를 다루던, 그 남비에서
라면이 끓는다
아무리 곱게 길러도 면발은 제멋대로 수증기를 따라 흐른다
보들보들한 살결이 곱지만은 않은 식욕을 끌어당기는 냄새가 익는다
양손에 두꺼운 수건을 겹겹이 둘러싸고 뜨거운 남비를 들어올린다
길길이 날뛰던 음식들의 혼연한 향기보다
더욱 더 그리운 냉정한 체감으로
비로소 완성된 식단.
차가운 김밥.
커피잔에 담긴 오렌지 프리미엄 쥬스.
뜨거운 라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내는 늘 그 자리다 그 자리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전화를 받는다, 멈추지 않는 시계, 또박또박 사내의 뇌 속에 자리 잡는다. 젠장, 이 시계는 고장도 안 나. 푸념도 잠시, 곧 어둠은 사내를 뒤덮고 깊은 잠에 빠져들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하얀 소복 차림의 여자. 오늘은 왜 또 나타났어? 늘, 그런 일을 겪는다는 듯, 사내는 애써 태연하다. 성(性)의 시간은 대체로 거룩하다. 여기는 뜨거운 감자 여기는 뜨거운 감자, 차가운 감자 대답하라 오바, 오바된 삶이 그를 떼어 놓는다 당신 안의 모든 것이 파란색이다. 대답하라, 파란 귀신. 대답하라 파란 귀신. 사내를 조여 오는 하얀 소복 차림의 여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내는 애써 태연한 척이다.
거울의 방
절제된 사각의 방은
어지럽다, 반듯하게 시작(始作)해야 할 방은 삐걱거리며 조각가를 맞이할 준비에 분주하다 책상은 의자를 향해 강펀치를 날려 의자의 한쪽다리를 부러뜨렸다 의자는, 웃으며 입을 닦고 다리 절뚝이며 조각가를 맞이했다 <의자가 좀 오래되었나 보군요> 조각가의 질문에 거울이 대답한다 당신보다는 새 것입니다 조각가는 거울의 대답을 듣지 못한다 <고쳐야겠군요>
절제된 사각의 방은
분주하다, 이번 주말에 높으신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방이 말한다 <의자를 고쳐야겠군 책상도 새것으로 바꿔야겠어> 복수를 꿈꾸던 책상은 의자에게 화해의 손짓을 보낸다 <이미 늦었어> 의자가 대답한다 <반듯하게 始作해야 할 방은 반듯하게 있어야 해 너 대신 새 주인을 맞는 내 기분은 정말 설레인다> 거울이 의자에게 소리친다 <때론 헌 것이 새 것보다 낳을 때도 있습니다> 의자는 듣지 못한다.
절제된 사각의 방은
울상이다, <가구가 별로 없군요 가구가 없으니 뭔가 허전해 보이는군요 의자의 前 주인이 누구였습니까 폭력이란 아래로 향해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까 책상의 前 주인이 당신이었습니까 이 방은 다시 오지 않는 게 좋겠군요> 거울이 그에게 묻는다 <이 안에 있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가 대답한다 <나는 당신의 주인입니다>
절제된 사각의 방은
텅 비어 있다, 거울이 묻는다
당신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낯선(?)수술
그때. 나를 벗기던 칼들의 횡포
중심 둘러 탈출 갈구하던 껍데기
요염(妖艶)한 비명을 지르며 횡사하고 있었다
무감각의 구멍 뚫어 영혼 갉아먹는 주사기
흰색 가운 걸친 정복자 명령 따라 이미 무너진
살갗 뚫고 중심에서 주변으로
정오의 햇살 아래 은밀하게 진행된다 비로소 벗겨지는
껍데기 스스로 탈출할 수 없음을 탄식하며
주인의 농도 높은 쾌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닿는 순간 폭발할 듯한 모든 근심들
오르가즘 타고 지구 끝까지 날아간다 칼들의 횡포
우주의 원형인 지구 위로 폭발한다
그 때.
나를 짓누르는 중심의 횡포.
내 영혼 갉아먹던 주사기의 병정들
더 이상 갉아먹을 영혼 없는 듯 내게서 멀어져간다
그들이 쓸고 간 빈 자리 메울 곳 없어 그들 그리다
아침이면 찾아오는 고통의 신음소리 한번은 거쳐야 할
이제는 폐허된 수많은 영혼들
칼들이 훑고 간 돌이킬 수 없는 상처 더듬으며 사라져간
쓸모없던 껍질들 회유(懷柔)하는
그 때.
나를 자극하는 영혼의 칼부림,
스르르르.......
이 력 서
고개 숙인 사내가, 이력서 한통 들고, 아니
아직 들지 않고, 이력서를 쓴다, 고개 흔들며
까딱까딱, 눈꺼풀은 감기고, 그녀의 전화를 받고
이력서를 써야 한다며, 이력을 손에 들고 있다
사내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려다 멈칫
“꼭, 써야 하나?”
라는 생각이, 춤을 춘다, 이력서 위에서
사내의 손이 떨린다, 심장의 박동
메아리친다, 눈동자 흔들린다, 손이 떨린다.
안돼!
소리치는 사내의 등 뒤에
그녀가 서 있다, 두 눈을 이력서에 고정한 채, 섬찟,
문득 그녀를 생각한, 사내의 손이 멈춘다, 이겨내야 한다며
기억 속으론, 수백장의 이력서가 떨어져나갔다
낙엽이 떨어지듯, 마지막 한 장, 마지막 이별까지도
놓치지 않던 사내의 손가락이 숨가쁘게 움직인다,
이. 력. 서.
나·는·멈·출·수·없·는·사·람·입·니·다·
나, 는, 멈, 추, 려, 고, 합, 니, 다
지렁이 철학
지렁이가 꿈틀거린다
-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나타났죠?
- 부모님께서,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내세우면서부터요.
- 그 지렁이는 언제부터 껍데기를 벗기 시작했죠?
- 경제가 성공하면서부터요.
- 아직, 그 지렁이는 죽이지 못했습니까?
- 그 지렁이는 절대 죽지 않아요.
지렁이가 꿈틀거린다
- 증세가 어떻습니까?
- 그다지 심각하진 않군요.
- 그럼, 입원은 안 해도 되겠습니까?
- 입원해도 소용없습니다, 저 병은 결코 치료되지 않아요.
- 그다지 심각하진 않다고 했잖아요?
- 아, 그랬었군요. 그다진 심각하진 않아요.
- 그럼, 치료는 되는 건가요?
-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 도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 무슨 소리라뇨? 지금까지 무슨 말씀을 들으신 겁니까?
지렁이가 꿈틀거린다
-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 글쎄요, 지금으로선.
- 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 지렁이가 사람을 잡아먹을 순 없다는 거죠.
- 그런데, 잡아먹으려 하잖아요?
- 그게 문제죠.
-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 무슨 말이라뇨? 제 말이 말 같지 않다는 소린가요?
지렁이가 또 꿈틀거린다
- 지렁이의 상태가 어떻죠?
- 그 지렁인, 절 잡아먹으려 해요.
- 아직, 잡아먹지 않았죠?
- 전 끝까지 그 지렁이와 싸울 겁니다.
- 어떻게 싸울 거죠?
- 끝까지요, 잘 몰라요, 아무튼, 끝까지요.
- 무모하다는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 아니요, 전 살고 싶어요.
-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아니요, 하지만 전 살아야 돼요.
지렁이가 자꾸 꿈틀거린다
-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 그게 뭐죠?
- 살고 싶다는 생각을 없애는 거죠.
-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 글쎄요, 또 다른 정신병을 낳게 되겠죠.
- 어떤?
- 밥을 먹길 주저하면, 배고픔에 빠지게 되죠.
- 어떤 쪽이 더 낳을까요?
- 그건, 당신께서 결정할 문제 아닌가요?
지렁이가 꿈틀거린다
바람막이
- 애비, 망연자실 (茫然自失) 앉아서 하늘만 바라봄, 그 아들 망연자실 (茫然自失) 앉아서 하늘만 바라보는 애비를 보면서 웃고 있음, 한마디로 집안 망신 둘이서 다 시키고 있음. 허허허…
현. 상. 수. 배.
#1. 현상수배
이름 : 무명인
나이 : 무명세월
신장 : 알수없음
성별 : 여자
상금 : 무진장마니
죄명 : 이상한얼굴로많은남자들의가슴을설레게한죄.
- 이와 같은 사람을 발견한 자는 창수생각 관청센타에
즉각 연락해 주시기 바람 연락처 : ***-****-****
#2. 현상수배
이름 : 전창수
나이 : ****년생현재나이**세만나이**세
신장 : 대략178그동안조금더자랐을지모름
성별 : 못생긴남자
상금 : 전혀없음
죄명 : 못생긴얼굴로많은여자들가슴을못박은죄(???)
- 이와 같은 사람을 발견한 자는 창수생각 관청센터에
즉각 연락해 주시기 바람 연락처 : 마구찍구 또찍어
#3. 현상수배
이름 : 인간이란탈을쓴동물
나이 : 시간과공간을초월한 세계
신장 : 세계에서가장큰키보다더크고
세계에서가장작은키보다더작음
성별 : 여자도되었다가남자도되었다가때론창조주인척하기도함.
상금 : 이세상전부
죄명 : 세상을제멋대로주무른죄
- 이와 같은 사람을 발견한 자는 창수생각 관청센터에
마구 연락해 주시기 바람. 연락처 : 불멸의 시간과 공간.
#4. 현상수배
이름 :죽음이란 알 수 없는 세계
나이: 전혀 알 수 없음
신장 :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음
성별 : 역시나 모르겠음
- 이와 같은 사람을 발견한 자는 창수생각 관청센터에
절대 연락해 주시지 말기 바람. 연락처 :절대 없음.
Ⅲ 위와 같이 공고합니다 <창수생각 백>
Ⅲ 아래와 같이 각주(各主)합니다 <창수생각 백>
각주 脚注) 창수생각 관청센터 : 창수의 머리에 들어있는 저장창고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리로 들어오기 위해선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엄청나게 기나긴 노력을 요구함. 덧붙여, 이곳의
최종 연락처는 <절대 닿을 수 없는> 곳. 이곳에 근무하는
직원은 100% 미친 자. 창수생각 관청센터에 근무하실 분은
연락바람. 미친 자 대환영. 연락처 : 불멸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후, 이상(李箱)의 정신병적 치매 현상 여관번호를
찾은 뒤, 전화번호부에서 이상(李箱)의 정신병적 치매 현상
여관번호와 일치된 주소를 찾은 뒤, 그 번호가 알려주는 대
로 마구 찍구 또 찍은 후 절대 없음을 찾을 것.
이상, 창수생각 관청센터에서 각주(各主)함
참고 : 각주 (脚注) - 본문 아래쪽에 단 주해 각주 (各主) - 사전엔 없는 단어로서 창수생각 관청센터에서만 통용되는 용어. 각 각(各)자와, 주인 주(主)자(子)를 합쳐 말 그대로 풀이하자면 각각의 주인. | ||
☞ 창수생각 관청센터에서 통용되는 ☜ ☞ 각주(各主)의 의미 – 6가지 ☜ 1) 제각각 따로 노는 사람들 2) 미친 사람들이 경고합니다 3) 나를 찾지 말아주세요 4) 영원히 하나일 수 없는 우리 5) 이상 마칩니다 6) 영원히 끝나지 않는 세상 |
허무에 대하여
바람 속으로 들어가라
가서, 너의 눈물을 보고
세월이 앗아가버린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하라
후회는 침묵에서 오는 것
수많은 상처들에 둘러쌓인
절정의 고비에서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헤어짐의 나날, 속물처럼
빼앗겨버린 명예와
실추된 너의 앞날에 대해서
아픔으로 이야기하라
이별만이 슬픔은 아니듯
웃음과 울음 사이에
가장 큰 아픔이 있음을
너의 눈으로 말하라
눈빛의 강한 열기가 너를 붙들 것이다
이제, 눈으로 들어가라
가서
너의 열정에 대해서 말하라.
돌아오지 않는 것들은 내일에 있다
바람처럼 빼앗겨버린 날들에 대해
슬픔으로 이야기하지 마라, 눈빛으로
점점 더 슬퍼하지 않는 눈빛으로 끌려가는 곳
이별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니, 어둠에 서라.
어둠에 서서 빛을 보라, 빛을 보고 다시
어둠을 보라, 그 속에서
너를 보라, 네가 보일 때까지
네가 보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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