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그대 앞의 소멸
어느 누구가 되든, 그대 앞에 무언가 있다면 나는 그대에게 묻겠소. 이 사람이 맞나요? 이 물건이 맞나요? 당신은 무언가를 대답하겠지. 그렇다면, 당신은 이렇게 대답하겠지, 라고 나는 추측하겠소.
어느 날 내 앞에 그가 나타나 저 말을 하던 어느 순간, 나는 그에게 이 단어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런가? 그럴까? 그렇다면? 그래서? 그러면? 그런 건가? 그리고 그에게 이 단어들의 속뜻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그 말이 정말이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정말 모르고 묻는 것인데, 당신은 왜 그렇게 우물쭈물 하고 있나요? 그가 계속 우물거렸다.
그는 별걸 다 기억한다면서, 계속 우물거렸고 나는 내가 뭘 기억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며, 그에게 별 투정을 다 부리고 있었다.
그대 앞에 무언가가 있다면, 나는 그대에게 묻겠소. 이 사람이 정말 맞나요? 이 물건이 정말 맞나요? 당신은 무언가를 추측하겠지. 그렇다면, 당신은 이렇게 추측하겠지, 라고 나는 대답하겠소.
아주 치열한 슬픔이
나를 둘러싸고 누른 건 슬픔이 아닐까
슬픔이 아니다
나를 들처메고 벼른 건 기쁨이 아닐까
기쁨이 아니다
나를 바라보고 깨운 건 절망이 아닐까
절망이 아니다
나를 일으키고 이룬 건 출구가 아닐까
출구가 아니다
나를 바람에다 재운 건 세월이 아닐까
세월이 아니다
나를 별빛까지 태운 건 버튼이 아닐까
버튼이 아니다
나를 깨우기만 하는 건 채움이 아닐까
채움이 아니다
나를 재우기만 하던 건 이별이 아닐까
이별이 아니다
0시 속(續) 0시
현재 시각 0시 조금 지나
귀뚜라미, 울지 않는다
창밖, 이미 떠 있는 달은
이별을 삼키고 날아가는
슬픈 새다
나는 알지 못하는 시간
허공에 뜬
해돋이가 선명하다, 어둠 속에서
귀뚜라미 울지 않고, 현재 시각
0시 조금 지나
과거로 돌아간 이별도
슬픔으로 남지 않는다.
저 혼자 우는 달,
저 혼자 뜨는 해,
세상이 비춰진 곳에서는
이별을 슬픔이라 말한다.
세상의 뒷골목에서
날지 못하는 새
목마른 울음에 지쳐간다,
나는 알지 못하는 시간
0시를
조금 지난.
그런가가 있다
오른쪽 눈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왼쪽 눈에는 그런가가 있었다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통장잔고에 남은 무언가는 사람들의 왼쪽에 서서 그대들에게로 달려가고 살짝 내려앉는 그런가는 너의 뒤에 누워서 당신의 뒤로 달려간다 당신이, 당신이 어쩌면 무언가를 한다면 그런가가 무언가에게, 묻겠지 묻겠지
묻다 보면 살짝 기우는 어떤 것들은 무언가를 하게 되고 하다 보면 너의 다음 다짐을 살짝 알게 되다 보면 너의 다음 것들은 무엇이냐고 묻게 되고 나는 다음을 기약하며 그런가에게, 또 묻고 있겠지 그렇게 너의 다음을 당신의 뒤로 나의 다음을 당신의 다음으로 기억하다가 그런가에게, 묻겠지 묻겠지
아주 깊은 어둠 속으로 들면서 나는 너의 무언가를 살게 되고 그런가 뒤에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느 날 나는 또 무언가를 살게 되고 그 다음 살게 된 어느 날에 나는 아마도 겉으로 외치다가 평소를 생각하겠지 나는 다음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걸 다음이 아닌 지금이라는 걸, 알겠지 알겠지
알고 있겠지
나의 두 눈이 어느 날 아주 아주 잘 보이게 된 어느 날을.
벽 1
마른 나뭇가지
햇살에 타들어간다
너를 바싹,
태우고도 남을 세월
벽이 있다
벽 2
성냥개비 쌓아간다
널 기다리는 동안
완성된 탑
무심코 흘린 한숨
무너져 내리는.
벽 3
긴긴 세월 대답없는 너에게 나는 조금씩 지쳐간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너의 인내도 인내지만 이제는 나도 너를 배우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답 없던 네가 대답하기 시작했다 내 인내력이 극도(極度)에 달해 네 대답을 더 이상 강요하지 않는 내게 넌 대답한다 너의 대답은 그것이었구나 바로 그것이었구나 오늘도 침묵하는 너는 어둠 속에서 저 맑은 세상을 바라다본다
도서관-개관(開關)
1
영혼 부풀린 책 속의 글뿌리, 깊게 흘러 넘쳐, 가장자리 섬세한 꿈결을 이룬다. 책상의 낡은 통로로 오래 묵은 생각이 배설(排泄)된다. 관 안 가득 자연 흐름 휴게실로 흐른다. 볕 뜨는 날마다 게워지는 아픔 뒤 기쁨 서성이는 행복이 소리 없는 축복을 행사한다. 관 안 가득 움츠린 사람들 종일 지쳐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고 자랑스럽게,
아들의 뒤를 밀어주는 아버지, 거품 부풀려 한 올 두 올 얽어가는 책냄새의 심심한 소리, 요란한 넘김 소리로 흘러내린다. 시간 따라 흐르는 이용자들의 걸죽한 입담, 때로 관을 메우고 절제된 휴게실 절제된 책장 절제된 하늘. 까르륵 소리와 함께 흘러 비워져가는 마음. 희망으로 들어찬 어둠이 내내 흐렸던 하루를 잠재운다.
2
소리 없이 아침이 들어찬다. 밤새 헤어진 빛깔 틀어 하루는 용용용 넘쳐 흐른다. 가득 찬 열람 가득, 한 주름의 숨결이 맑은 마음 주르륵 열람실로 흐른다. 한 줄기 밝은 빛줄기 맑게 비추어 아름다운 그 안,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은 조용하다. 밤새 움츠렸던 사람들 비로소 기지개를 켜면, 절망 뒤를 품은 슬픔 나누는 얼굴에 미소는 조금,
사라진 관 속의 글뿌리 흘러흘러 야위었던 시간이 채워져 간다. 흐르는 책들이 다시 일어서고 껄껄껄 걸죽한 웃음소리 소리없이 관 안 가득 번진다. 시간이 매만진 자리, 새로 쌓인 책들이 글뿌리에 실려나간다.
3
관 안의 비좁은 창가 겨우 비집고 힘차게 뻗은 하얀 빛줄기, 비로소 햇살을 인식할 때쯤 떠오른 아아 한 줄기 저 강한 마음.
햇살에 부풀은 책들이 힘찬 포효로 일어서고 있다
목욕탕-개화(開花)
1
거품 부풀린 탕 속의 물뿌리, 깊게 흘러 넘쳐, 가장자리 섬세한 물결을 이룬다. 배관(配管)의 낡은 통로로 오래 묵은 때들이 배설(排泄)된다. 탕 안 가득 자연 향내 하수구로 흐른다. 동트는 날마다 게워지는 향내 뒤 아픔 서성이는 물살이 소리 없는 폭력을 행사한다. 탕 안 가득 움츠린 사람들 종일 지쳐 때묻은 마음의 문을 열고 자랑스럽게,
아들의 때를 밀어주는 아버지, 거품 부풀려 한 올 두 올 얽어가는 때타월의 심심한 액체, 요란한 방울 소리로 흘러내린다. 세월 따라 흐르는 어르신들의 걸죽한 입담, 탕 안 가득 메우고 절제된 수증기 절제된 온도 절제된 사랑. 까르륵 소리와 함께 흘러 비워져가는 마음. 창문으로 들어찬 어둠이 내내 흐렸던 하루를 잠재운다.
2
소리 없이 아침이 들어찬다. 밤새 헤어진 꼭지 틀어 새해는 콸콸콸 넘쳐 흐른다. 텅텅 빈 탕 안 가득, 한 주름의 물결이 맑은 마음 주르륵 배수구로 흐른다. 한 줄기 밝은 물줄기 맑게 비추어 아름다운 탕 안,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은 조용하다. 밤새 움츠렸던 사람들 비로소 기지개를 켜면, 희망 가득 안은 인사 나누는 얼굴에 미소 가득하다, 거품
사라진 탕 속의 물뿌리 흘러흘러 야위었던 시간이 채워져 간다. 흐르는 물결이 다시 일어서고 껄껄껄 걸죽한 웃음소리 절제되어 탕 안 가득 번진다. 세월이 매만진 자리, 새로 쌓인 때들이 물뿌리에 실려나간다.
3
탕 안의 비좁은 창가 겨우 비집고 힘차게 뻗은 하얀 빛줄기, 비로소 햇살을 인식할 때쯤 떠오른 아아 한 줄기 저 강한 마음.
물살에 부풀은 새해가 힘찬 포효로 일어서고 있다
신도림 환승역
여기는
지하로 내려가는 승객들과
올라가는 승객들이 엇갈리는
신도림 환승역입니다
즐거운 인사를 나누기엔
모두가 바쁘기만 한 출근길
사람들이 내는 길을 따라가면
겨우겨우 승강장에 닿을 수 있죠
어스레한 빛이 소곤소곤 나오려 하는데
안개가 온통 세상을 감싸 버렸어요
지하로 내려간 승객들은 까맣게 모르는
지상은 두 갈래 자연이 티격태격 사랑을 하네요
한참이나 사랑을 하고요
그러다가 태어난 너무도 환한 햇살.
햇살을 받고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
오늘은 참 따뜻할 것만 같아요
지상으로 올라가는 승객들과
내려가는 승객들이 마주치는
서로서로 안녕이라고 인사하는
여기는 신도림 환승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