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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뭔가 불만이 잔뜩 있는 얼굴로 노인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가
표정을 바꾸고 그냥 빙긋이 웃고 말았다.
노인이 말년(?)에 거둔 이 제자는 자신이 500년 동안이나 노력해서 자연
의 기운을 느끼고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에 비해 5개월이라는 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 그 모든 것을 해냈고 지금 현재는 노인이 꿈에서도
이루고 싶어하는 경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노인이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발광할지 모르기 때문에 소년은 그 사실
을 숨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자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사부에게 말했을 때 사부
는 깜짝 놀라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고 축하해 주었지만 점점 자연의 힘
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자신을 보는 사부의 눈에 뭔가 못마땅한 기색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부가 왜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곰
곰히 생각해본 결과 사부는 500년에 걸쳐 이룩한 결실을 자신은 5개월 동
안에 이룩한 것이 배가 아팠던 모양이다.
사부라는 사람이 제자가 너무 뛰어나서 삐졌다는 사실에 소년은 황당할
뿐이었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여기고 그 다음부터
소년은 사부에게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것처럼 속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노인은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어가던 제자가 어느 순간부터 진전이
없다고 했을 때 약간 의아스러운 마음을 가졌지만 별로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제자가 진전이 없다고 하자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옛날의
따뜻한 사부로 돌아가서 열심히 지도했다. 열심히 지도하면서도 속마음
은 제자가 계속 이 상태로 200~300년 정도만 있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했다.
자신은 1000년이 넘게 수련해서 이제 겨우 간신히 자연의 기를 자유자재
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제자라는 놈은 이상할 정도로 빠른 성과를
보여서 5개월 만에 500년 수련과정을 뛰어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간다면 2년이 못돼서 현재 자신의 경지를 뛰어넘을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상당히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제자가 별다른 진전이 없이 그 자리에서 머물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제자에게 별다른 진전이 보이질
않았다. 이젠 제자의 눈부시게 빠른 진전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별로 없었지만 딱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 막돼먹은 버릇을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아이가 때려도 보고 달래도 보고 별짓을 다 해봤지만 그 싸가
지 없는 성격과 버릇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특별히 신경을 더 썼었더라면 그 성격도 어떻게 고칠 수 있었겠지만 노인
은 하나밖에 없는 사랑스런 제자의 싸가지 없는 행동도 귀엽게만 보였다.
소년은 갑자기 사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며 웃자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두 번 본 것도 아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사악해
보이는 사부의 간사한 웃음..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사부! 뭘 그렇게 쳐다봐요? 안 내려 갈 거예요? "
"음.. 그래. 마침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가다가 토끼 한 마리 잡아다가 구워
먹자꾸나.."
토끼를 잡아다 구워먹자는 말에 소년의 눈빛이 빛났다. 소년이나 노인은
특별히 음식을 먹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지만 먹는 걸 무척 좋아하기 때문
에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이 먹는 편이었다.
"사부 그럴까? 그럼 백호한테 부탁해서 잡아오라고 할까나.. 백호! "
소년이 소리친 방향에서 황소보다 더 커보이는 커다란 호랑이 한마리가
바람처럼 달려왔다. 소년에게 다가온 백호는 그 앞에 가만히 주저앉아서
재롱을 떨고 있었다.
가만히 백호를 쓰다듬어 주던 소년은 토끼한마리만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소년이 말을 꺼내자마자 왔던 것보다 더 빠르게 숲을 향해 뛰어 들어가는
백호를 보며 노인은 혀를 찼다.
"허헛.. 네놈은 어떻게 된 놈이 호랑이를 무슨 강아지 다루듯 하는 구나.
나한테는 사납게 대들기만 하는 놈이 어떻게 너한테만 오면 순한 강아지
가 되는지.. 원.. "
노인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백호는 어느새 토끼를 입에 물고 소년 앞에 도
착해 있었다.
"사부! 토끼 잡아왔으니까 집에가서 구워먹자. 백호야 오늘은 시간이 너
무 늦은 것 같으니까 같이 못 놀아주겠다. 내일 놀아줄 테니까 집에가
있어. 알았지? "
백호는 소년의 말을 알아 듣기라도 한 건지 고개를 끄떡거리더니만 이내
왔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노인과 소년은 절벽 수준의 비탈길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내려갔다.
"운아.. 네가 이 사부와 만난지도 벌써 3년이 다 되어가는 구나.. 그 동안
너는 이 사부가 500년동안에 걸쳐 이룩한 경지를 이루었으니 칭찬받아야
마땅한 일이지만 자만해서는 안 되느니라. 앞으로 더욱 더 열심히 부지런
히 수련해야 할 게야. "
"응.. 근데 갑자기 왜요? "
또 다시 노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쯤 됐으면 이제 노인도 반응이 없어
질 만도 한데 항상 소년이 반말 비슷한 말을 할 때마다 속이 뒤집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음..별 다른 일은 없지만 전에 운이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바깥 세상을
구경하고 싶다고. "
그 말을 들은 강운의 눈이 아까 토끼 구워먹자고 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렬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럼 사부 허락하는 거야? 바깥세상 구경 가도 되는 거야? 응? "
"허허.. 이놈이 그동안 어지간히 심심했던 모양이로구나. 이 사부가 허튼
소리를 할것 같이 생겼느냐. 내일이라도 당장 하산하도록 하여라. "
"히히.. 사부 고마워. 나중에 돌아올 때는 내가 선물 사가지고 올께.. "
제자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자 노인도 기분이 좋아졌다. 진작부터 바깥
세상에 나가 경험을 쌓기를 원하는 제자를 말리고 말렸었지만 매일같이
수련할 때마다 옆에와서 조잘거리는 통에 이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