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이유가 필요했다. 갓길 없는 이차선 도로에서 트럭이 팔십 킬로미터로 달렸고 따로 인도가 없었고 주변이 어두웠고 한겨울이라 길이 얼어 미끄러웠고 늦은 시간이라 트럭 기사는 피곤했고 노마가 너무 작고 가벼웠다는 그런 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어째서 그때 트럭이 달려왔고 우리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졌고 노마는 자전거를 탔는지,
왜 노마인지,
어째서 죽어야 했는지,
신만이 대답해줄 수 있는 그런 이유가.
- 함께하던 어느 날 구와 나 사이에 끈기 있고 질펀한 감정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우리의 모난 부분을 메워 주는 퍼즐처럼, 뼈와 뼈 사이의 연골처럼, 그것은 아주 서서히 자라며 구와 나의 모자란 부분에 제 몸을 맞춰가다 어느 날 딱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딱 맞아떨어지며 그런 소리를 낸 것이다.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다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가장 가까운 감정.
- 같은 나이의 친구에게, 네가 아직 세상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건 아니고, 그건 힘들고, 그건 말이 안 되고,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고, 대부분의 문장이 그렇게 시작되거나 끝났다. 그들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깊은 무력감에 빠졌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실패는 예정되어 있는 것 같고,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이미 진 것 같았다.
** 나는 혹 학생들에게, 혹은 무언가 하려는 사람에게 이 따위의 말로 처음부터 진 것 같은 느낌은 주었던 적은 없었을까. 괜히 미안해진다.
- 산을 수십 개 넘고 강을 수백 개 건너도 도무지 돌아갈 수 없는 곳에 담을 두고 온 것 같았다.
- 뜨거운 하루였다. 세상이 보온밥솥에 담긴 밥 한 그릇 같던 날씨. 사람들은 찐득하게 엉긴 밥알처럼 서로를 못 견뎌 했다.
- 그 소리를 빗속의 쓰레기봉투에서도 흘러나왔다. 봉투 앞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꼭 다문 입술 같은 봉투의 매듭을 풀려고 애썼다. 그 안에 구의 생활이 들어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봉투를 열어 구의 생활을 꺼내고 싶었다. 구의 생활을 알고 싶었다. 알 수 없다면 갖고 싶었다. 가질 수 없다면 내 손으로 버리고 싶었다. 매듭은 풀리지 않고, 어깨와 목 사이에 기대놓은 우산은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졌다.
- 이모는 할아버지와 같은 병으로 죽었다. 호명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병명을 알게 되자마자 병은 금세 깊어졌다.
- 사람이란 뭘까.
구를 먹으며 생각했다. 나는 흉악범인가. 나는 사이코인가. 나는 변태성욕자인가. 마귀인가. 야만인인가. 식인종인가. 그 어떤 범주에도 나를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인가.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 그들은 미개한가. 야만적인가. 지금의 인간은 미개하지 않은가. 돈으로 목숨을 사고팔며 계급을 짓는 지금은. 돈은 힘인가. 약육강식의 강에 해당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세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