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어제 걸었던 게 무리가 되었는지 온몸이 뻐근하다.
그래서 원래 걷기로 한 13코스에서 가장 짧은 거리 중 하나인 9코스로 급선회. 11.8km
대평포구로 향한다.
널찍한 정원을 지닌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박수기정이 한 눈에 보이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살아 숨쉬고 있다.
커피 한 잔으로 몸을 녹이고 걷기에 돌입한다.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우비를 둘러 쓰고 박수기정을 오르기 시작한다.
첫걸음부터 오르막
하아, 하아 더운 입김이 새어 나온다.
알고 봤더니 난이도 최상
짧은 길을 택하면서 난이도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
박수기정을 다 오르면 360도 시원한 바다가 파노라마 뷰로 펼쳐지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왠 걸, 반전이다. 몰질 입구가 나타난다. 몰질은 말의 길, 원나라에 말을 보내기 위해 가는 길이란다.
바다는 보이질 않고 제법 너른 밭들과 잔디밭들이 보인다.
올랐으니 내려가리라 생각했지만 거의 평지나 마찬가지인 길을 걷는다.
군산오름이 건너편에 보이고 초록빛 소철나무가 한가득 심어져 있는 겹담길을 지난다.
각양 각색 현무암 돌들을 아귀가 딱 맞게 조절해 가며 겹담을 쌓은 이들의 지혜가 보인다. 멋스럽기까지 하다.
조경수로 심어진 귤나무가 노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약천암을 지난다.
아기자기 예쁘게 꾸며진 암자이지만 올레꾼을 배척하고 있다.
화장실 한 번 들르고 싶은데 들어오지 말란다. 치, 인심하고는 상부상조하면 얼마나 좋아.
군산오름을 향한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이래서 난이도 최상이라 했나보다.
비가 오는 숲길
무척이나 상쾌하다. 피톤치트 듬뿍 마신다. 머리가 맑게 개인다.
비오는 숲속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룰루랄라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천양금 빨간 열매가 앙증맞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주변이 온통 군락이다.
다양한 식물들. 처절한 생존경쟁이 치러지고 있으리라.
패트병을 재활용해 만든 쉼터의 벤치도 보인다. 올레 정신에 딱 맞는 쉼터다.
정상에 다다를 무렵 씽 차 한 대가 지나간다.
어이쿠, 임도가 바로 옆에 있다. 정상 부근까지 차들이 오를 수 있나 보다.
예전 노고단에 오를 때 고생고생하며 오른 길을 봉고차 한 대가 쓱 지나는 걸 보며 무지 허탈해 하고 황당해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를 타고 온 이들이 안타깝고 짠스럽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길을, 싱그러운 숲을 느끼지 못하다니. 쯧쯧
진지동굴이 보인다. 군산오름에만 9기가 있단다. 8기는 길이가 무려 180m나 된다.
일본놈들은 이곳까지 전쟁의 참호로 만들어 제주의 땅을 유린하고 있었구나.
평화교육의 장으로 남겨놓은 진지동굴,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곳이다.
군산오름 정상이다.
산방산, 송악산, 형제섬이 보인다. 날이 맑으면 마라도 가파도도 보이련만.
내려가는 길. 제법 경사가 느껴진다.
스틱 챙기기를 너무 잘했다. 스틱을 의지해 별 힘 들이지 않고 깡총깡총 내려간다.
역방향으로 걷는 이들은 다리 꽤나 아프겠는 걸.
감산마을 지나는 길. 깊은 계곡들과 소들이 여러 개 이어진다.
예전에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마을길로 갔었는데 계곡 옆으로 데크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지루했던 길이 계곡을 바라보며 지나는 흥미로운 길이 되었다.
개화를 시작한 매화나무를 만나고 그 향에 취해 사진도 찍는다.
어여쁜 동백꽃이 덜렁 혼자서 매달린 나뭇가지, 한 송이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안덕계곡이 나타난다.
커다란 암반 덩어리들이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도록 길을 내준다.
계곡을 곁에 두고 데크길이 쭉 이어진다.
이곳 역시 주변 정돈이 잘 되어 있다.
한참 전 걸었을 때 9코스에 대한 느낌이 별로였다. 그저 그런 길, 별로 걷고 싶진 않은 길.
비오는 날이 오히려 좋았던 걸까.
오늘 걷는 길은 내내 상급의 텐션을 유지하며 9코스 선택에 최상의 만족감을 느끼며 걷게 한다.
아무래도 사유지 곁길을 내어주었나 보다.
귤밭 옆으로 좁은 길이 한참을 이어진다.
9코스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진모르 동산을 지나자 화순항에 있는 화력발전소가 보인다. 줄기차게 뿜어대는 하얀 연기ㅜㅜ
시멘트 바닥을 위태롭게 지나가는 게 한 마리. 너는 어쩌다 이곳에 나타난 거니
발전소 옆에 나누리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발전소를 짓고 환경이 오염되는 것에 대한 면피용으로 지어 놓은 것 같은 느낌. 사람들의 발길이 많지는 않을 것 같은 곳.
개나리를 닮은 잎들이 바닥에 옹기 종기.
탁 트인 바다가 나타난다.
금세 화순 금모래 해변에 다다른다.
오늘의 종착역
어제 걸었던 7코스가 처음에 화려하게 타오르다 사그라지는 길이었다면, 여긴 내내 얕은 감탄 내뱉으며 걸었던 곳.
9코스 승!!
첫댓글 굳이 잴 이유도 없었겠지만 9코스 11.8km에 시간은 얼마나 걸리던 가요.
이제 곧 설 연휴가 시작되어요.
너무 잘하겠다고 무리하지 마시고 풍요로운 설 명절 되세요.
4시간 조금 넘게 걸었어요
즐거운 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