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이만큼 먹고 보니 어지간해서는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둔해진 내 가슴을 설레게 하는 드라마가 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목만 보면 어쩐지 어린 아이 젖 달라고 떼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제목에서 실상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말해줘’일 것이다.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 진우에게 모은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짐작했다.
이들의 사랑이 왜 새삼스러울까.
우선은 눈빛, 혹은 눈맞춤이다. 소리 언어를 쓰는 이와 손 언어를 쓰는 이가 만나 대화를 나눈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서로의 마음이 궁금하다. 궁금한 마음을 알려니 자연스레 눈을 마주치게 된다. 눈짓과 눈빛으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한다. 희한하게도 그것은 잘 작동한다. 거기에 찡그림과 미소와 끄덕임이 더해지면 별 장애 없이 마음이 전달된다. 신기한 장면이었다. 특히나 듣지 못하는 진우가 모은의 입모양에 집중할 때 지그시 바라보는 그 눈빛이 어찌나 다정하던지. 단 하나의 단어도 놓치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어찌나 애틋하던지. 저렇게 바라봐준다면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문득 생각해본다. 듣지 못하는 진우가 그랬듯 우리는 온전히 상대에게 집중하며 들을까, 온전히 눈을 맞추며 상대의 이야기에 집중할까. 진우처럼 그토록 간절히 한 음절 한 음절에 귀를 기울일까. 굳이 연인 사이가 아니더라도 들을 수 있어서 오히려 쉬이 흘려들을지 모른다. 진우와 청인인 진우의 학생이 나눈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학생이 말했다. 들을 수 있다고 다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때로 듣지 못하는 선생님이 부럽기도 해요. 진우가 대꾸했다. 듣지 못한다고 늘 나쁜 것만은 아니니까. 물론 듣지 못해서 겪은 오해와 불편이 있다. 그러나 들을 수 있다고 오해와 불편이 없을까. 알고 보면 삶이란 게 원체 덫투성이인 것을. 실상 편견에 갇혀 보이는 것만 보는 어리석음일 것이다.
장애를 장애로 보지 않고 특별함으로 느낀 모은은 기꺼이 진우를 사랑한다. 고백의 장면도 잊을 수 없다. 음악마저 마음을 흔들었다. ‘승관’이 부른 ‘그대가 오면’. 노랫말과 음률과 음색과 고백의 장면이 한데 어우러져 쉬이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본 기분이다. 모은이 코 언저리에서 주먹을 돌리며 수줍게 ‘좋아해요’라고 수어를 하는데 놀랍게도 나는 그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웬만한 멜로로는 꿈쩍도 않던 내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며 덩달아 그들의 사랑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을 향해 가면서 뭇 드라마들이 그렇듯 그들에게도 갈등이 찾아온다. 슬그머니 균열이 생기려 한다. 툭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깬 모은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는 진우를 보며 불현듯 느꼈을 고립감. 같이 있으나 같이 있지 않은 묘한 엇갈림. 비로소 들을 수 있는 사람과 들을 수 없는 사람이 함께 지낸다는 것의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드러난다. 같이 있으나 같은 얘기를 듣지 못하고 같이 있으나 벽 너머 다른 곳에 있는 것만 같은 연인을 바라보는 서늘한 쓸쓸함이 아프게 다가온다.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하는 모은의 얘기가 궁금하지만 알 길이 없는 진우의 막막함, 외로움. 공유하고픈 것을 공유할 수 없는, 혹은 하기 어려운 이들의 사랑이 마침내 어떻게 될까. 어떻게 그 사랑을 완성해갈까.
이 드라마를 보며 새삼스레 알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어떠할지. 모은이 말했다. 진우가 받은 오해에 대해 오히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오해’에서 생긴 오해라며, 그 오해는 진우의 잘못이 아니라는 모은의 말. 그런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듣지 못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어릴 적 손짓을 하며 수어로 대화를 하던 사람들을 한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때 신기해하며 돌아보았던 기억이 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길거리를 가다 문득문득 생각해본다.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 혹은 버스를 탄 사람, 그 중에 누군가는 듣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라고. 너무 생각 없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또 한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