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의 살아냄과 아이아스의 자살
<오이디푸스 왕>을 읽을 때는 오이디푸스의 ‘자살하지 않음’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스스로 시력을 잃게 할 정도의 마음이었다면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게 낫지 않나 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섣부른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섣불렀음을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를 읽으면서 더욱 분명히 인식했다. 아이아스는 오이디푸스와는 달리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직면하게 된 현실로부터 벗어난다. 두 인물의 선택은 사뭇 다른 것이다. 아이아스는 죽음으로써, 오이디푸스는 살아냄으로써 자신으로 인해 빚어진 비극-그것이 비록 신의 농간이라 할지라도-에 대처한다. 그 각각의 선택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두 인물이 겪게 되는 불행에는 소위 ‘신’이 개입되어 있다. 아테나니, 아폴론이니 하는 신의 복심이 곳곳에 드러나며 그 작용이 인물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은 실상 인간이 어찌해 볼 수 없는 ‘운명’의 다른 이름이라 이해해야할 것이다. 인간은 나름대로 최선의 판단과 결정으로 ‘선택’이란 것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간의 선택은 완전할 수 없다. 애초에 ‘불완전함’이 전제되어 있는 인간이 하는 선택이 제아무리 최선의 것이라 한들 완벽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는 결론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선택은 언제나 결함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 인간의 선택은 더러 오판이고 더러 오류가 되어 삶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에게 주어진 비운을 피하기 위해 애써 양부모의 집을 떠나기까지 했지만 결국 제 운명을 비켜나가지 못했던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성격적 결함과 어리석음이 불행을 초래한 부분도 없잖아 있지만 그것 또한 인간으로서는 태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불완전성이기에 그가 겪어야 했던 불운이 같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로 와닿는다. 순전히 오이디푸스만의 잘못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억울한 면이 있는 것이다. 한편 아이아스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갖지 못한 것에 분노하여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모든 동료 장수와 병사, 심지어 왕까지 죽이려 했던 선택은 결코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아테나의 부추김도 한몫 했지만, 아이아스의 타고난 성정으로 인해 빚어진 참극이라고 볼 여지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아이아스는 광기에 사로잡혀 가축들을 잔인하게 살육한다. 물론 그는 가축들을 죽이려던 것이 아니었다. 아테나의 개입으로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아스는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가축을 죽임으로써 살인은 피하게 된다. 그렇다 해도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벌인 이른바 ‘위대한 장수’ 아이아스의 이와 같은 행태는 사실상 ‘미친 짓’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야말로 미쳐 날뛴 꼴이다. 광기에서 깨어난 아이아스는 몹시, 미치도록 몹시 자신이 벌인 일에 수치스러움을 느낀다.
이러한 두 인물은 나름의 참담한 현실을 마주하지만 그 선택은 극명하게 다르다. 제 아버지를 죽이고 제 어머니와 결혼하여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자식을 낳은 오이디푸스는 그 끔찍한 상황을 마주하고도 ‘살아내기’를 선택한다. 비록 스스로 눈을 찔러 실명을 하지만 현실에서 달아나지는 않는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주어질 혹독한 삶의 여정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오이디푸스에 비하면 아이아스의 상황은 오히려 나아 보인다. 살육을 했으나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으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비난을 받아들이며 반성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법한데 아이아스는 기어이 죽음으로 삶을 끝내고 만다. 두 인물이 마주한 참혹한 현실의 무게를 명확하게 수치화하여 누가 더하네, 누가 덜하네,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그들의 다른 선택은 오이디푸스의 ‘살아냄’이라는 선택의 위대함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오이디푸스가 팍팍한 현실의 삶을 살아내겠다고 작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선택인지를, 아이아스의 자살을 보면서 새삼 인식한다. 대단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더라도, 아니 오히려 그것과는 전혀 별개로, 개개인이 처한 척박하고 고단한 삶을, 혹은 너무나 시시한 삶이라도(시시함의 정도는 물론 개인의 관점에 따른 것이겠지만), 그 어떠한 삶이든 그저 손쉽게 끝내지 아니하고, 기어이 살아내려는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처절한 것이며 그 처절함만큼이나 ‘살아냄’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두 인물의 다른 선택을 대비해봄으로써 더욱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너무 하찮고 시시해서 견딜 수가 없는 삶일지라도, 혹은 너무나 사는 것이 힘에 겨워 다 그만두고 싶을지라도 쉬이 삶을 단정 짓거나, 쉬이 삶을 끝내는 우(愚)를 범해서는 아니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