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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1 부산비전중앙교회 주일오전예배
베드로의 통곡
마태복음 26:69~75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성경적인 관점을 조금 벗어나서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면 참 불쌍하신 분이다, 참 안됐다 하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인간적으로 평가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면 ‘그분 참 안됐다, 참 불쌍한 존재였다’라는 그런 말도 할 수 있고. 좀 세상적인 표현으로 ‘참 복도 지질히도 없는 분이었다’는 말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두었고, 그 제자들과 같이 3년 이상 먹고 자고 생활을 하면서 직접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 12명을 가르치고 난 결과가 어떠했느냐 하면, 1명은 배신하고 도망가서는 자살했죠, 11명은 예수님께서 잡히던 그 날 밤 다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여러분들, 한 번 보세요, 세상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이렇게는 안 하거든요. 세상에 수많은 종교도 있고, 또 잘못된 가르침을 주는 많은 단체도 있지만, 세상 사람들도 몇 년 동안 한솥밥 먹으면서 자기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면 –물론 안 좋은 사람들도 있겠지만-일반적으로 배반한다거나 그렇게 잘 안 합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보세요. 예수님께서 옆에서 정말 품어주고 안아주고 참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주었잖아요. 그런 제자들이 배신하고 간 겁니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많은 교주라든가 이런 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단 말이에요. 물론 조금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일반적으로 인간 이상의 삶을 살지는 못했고 평범한 인간과 같이 살아가고, 다 죄도 짓고 죄 가운데서 살아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추종하며 따르는 무리, 자기들의 교주를 위해 목숨 바치는 무리가 부지기수로 많이 나왔는데, 예수님께서는 3년 정도 가르치면서 정작 정말 선한 모습으로 살지 않았습니까?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선하게 가르치고 올바르게 다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다 떠나버렸어요. 참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점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참 안되셨어요. 3년 동안 제자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교훈하고 가르치던 이 가르침들이 허망하게 끝난 거죠. 사실 끝났죠. 그렇게 되었을 텐데, 예수님이 부활하면서 이제 반전이 된 겁니다. 부활하시면서 반전이 되고, 이 반전도 제자들이 만들어간 게 아니고 예수님이 직접 반전을 만들어가신 겁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찾고 한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자신의 부활을 알린 겁니다. 부활을 알리면서 제자들이 다시 자기를 따라올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목숨까지 걸고 자기들의 교주를 따르고, 또 잘못됐다 하더라도 추종하고 따르다가 교주가 죽으면 그 교주가 만든 종교에 심취해서 끝까지 이어가려고 하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아니하고 십자가 위에서 그냥 그대로 돌아가셨다면 제자들은 다 끝났을 거예요. 그분의 가르침을 다시 받아서 이어가고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이런 사람이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냥 끝나버렸을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참 안타까운 그러한 삶을 사셨고, 또 속이 무진장 썩었겠다 하는 것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또 예수님의 인성론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참 속이 많이 상했겠다.’ 제자들 데리고 다니면서 이리저리 가르쳐도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마음은 하나도 없는 거죠. 그저 주님이 병 고치고 죽은 사람 살리고 능력 행하고 하니까, 여기에 다 눈이 먼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그런 목적에 있어서 실제로 순전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런 잘못된 결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제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부름을 받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정말 헌신할 것처럼 외쳤던 베드로, -베드로가 수석 제자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베드로에 대해서 오늘 잠깐 조명해 보면서 우리 자신을 한 번 돌아보고, 그러고 나서 나중에 우리가 주님 앞에 같이 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절에 베드로의 통곡 장면이 나옵니다. ‘심히 통곡했다’라고 본문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미리 제자들에게 자기가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고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너희들이 다 도망갈 것이다’라고도 말씀하셨고, 그러고 나서 그다음에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3일 뒤에 부활할 것이다’, 이걸 주님께서여러 차례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이걸 안 믿었습니다, 제자들이. 아무도 안 믿었어요. 여자들도 믿은 게 아니에요. 믿어서 예수님의 무덤에 간 것이 아니라,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간 것이에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 게 정상이죠.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 이전에 그런 일이 없었잖아요. 구약 시대에도 그런 게 없었고, 그다음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서 어떻게 한다는 이런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이것이 제자들에게는 크게 와닿거나 어필이 안되는 말입니다. 관련이 없으니까요. 그런 예도 없고. 그래서 이상하잖아요. 그렇죠? 여러분들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면서 도대체 뭘 보고 뭘 믿고 뭘 배웠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스스로 잘 돌아보셔야 합니다. 여러분들, 지금 수십 년 동안 교회 다니고 예수를 믿고 있어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뭘 배우고 뭘 믿고 그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정말 진지하게 한 번 돌아봐야 합니다. 돌아보아 베드로보다도 더 못한 자가 ‘나’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인 자세를 바르게 갖추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읽지는 않았는데, 26장 31절, 32절에 이래 놨어요.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죽기 하루 전날, 유월절 만찬을 하고 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즉 제자들이 다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32절에서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제가 이 본문들을 쭉 보면요, 제자들은 이 말씀 자체도 무슨 뜻인지 몰랐던 것 같아요. ‘도대체 주님이 왜 이런 말씀을 하는가?’ 했을 거예요.
이때 베드로가 아주 자신 있게 한 말이 33절에서 35절까지에 나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고 난 후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여기 다른 제자들이 다 주를 버리고 간다 하더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런 고백을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 말을 받아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 말씀이 나오자마자 베드로는 바로 또 이렇게 말합니다. 35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어떻게 내가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모른다고 하겠습니까’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도 엉겁결에 따라 말한 것 같아요.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그랬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주님이 죽으면 그 자리에 나도 가겠다, 주를 위해 나도 죽겠다’라고 그랬죠. 이게 여러분의 마음일 수도 있고, 저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요. 주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 주를 위하여 헌신하려고 하는 마음이 여러분들도 있고 저도 있고,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베드로와 같은 이런 상황에 봉착하면 문제는 조금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이때 신앙의 본래 모습이 나옵니다. 사람이 평상시에는 믿음을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과연 나에게 어느 정도 있는가를 여러분들이 스스로 평가해보려고 할 때, 위기 가운데서 내가 어떻게 주 앞에 대처해가는가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시련을 가장한 축복입니다. 성도에게 고난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왜 고난을 허락하시느냐 하면,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고 주님을 끝까지 믿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신실한 성도는 고난 앞에 강해집니다. 좋을 때는 그냥 평범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고난이나 어려움이 닥쳐 있을 때는 그 신앙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오늘 위기가 닥쳐왔을 때, 이런 어려움이 갑자기 닥쳐왔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 했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내가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 주님과 함께 죽는 데라도 가겠다’라고 말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몇 시간 전에 한 말을 베드로는 그냥 헌신짝 버리듯 버렸습니다. ‘주님과 함께 그렇게 가겠다, 당신을 따라가겠다.’ 했던 베드로. 그런데 다음 날 아주 깊은 새벽에 -정확한 시간은 우리가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약 1시경으로 봅니다- 갑자기 예수님께서 잡혔습니다. 로마 병사들이나 유대 병사들이 와서 예수님을 낚아채어 끌고 간단 말이에요. 이러니까 베드로가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하는 느낌을 안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이 베드로는 ‘주님이 잡혀가는데, 주님께서 설마 저대로 그냥 잡혀가시겠는가’라고 어쩌면 그렇게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평상시 주님을 보면 능력이 대단하셨거든요. 말 한마디로도 저들을 다 죽일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있는 것을 베드로는 확실히 보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저렇게 잡혀가더라도 저들을 가만히 안 둘 것이다’, 어쩌면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수도 있습니다, ‘오냐, 너희들, 주님께 대적해봐라. 주님이 그냥 놔두시지 않을 거다.’ 혹시 이런 기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혀가시는 것을 계속 따라갔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가서 일어난 사건이 오늘 본문이에요. 그래서 가다가 바깥에 베드로가 앉아있는데 어떤 종이 나타나서 -비자라고 했는데 종이에요- “너도 갈릴리 사람, 즉 예수님과 같이 있던 자가 아니냐?”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자기도 모르는 사람이 -고위직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보다 더 비천한 사람이라 볼 수 있죠- 와서 “너도 그 사람과 같이 있지 않았느냐?”라고 하는 말에, 베드로는 얼떨결에 본능적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던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모른다”, 이건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나왔다고 볼 수 있어요. 이게 인간이에요.
69절,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절에서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여기서 보면 그 사람에게만 부인한 게 아니고 ‘모든 사람 앞에서’ 이랬거든요. 그 사람한테만 ‘아니다’ 하면 될 텐데, 다른 사람들 다 들으라고 큰 소리로 말을 했겠죠. 살짝 말한 건 아니란 이야기예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던 사람 아니다, 나 예수님 저 사람 모른다’ 하는 식으로 모든 사람이 다 수긍하도록 그렇게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한 모습이에요. 70절에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그렇게 하고 나서 베드로가 거기서 끝내고 돌아가는 게 오히려 좋았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또 혹시나 해서 계속 따라갑니다. 그래서 앞문에서 –들어가는 입구 문인지 어떤 문에서- 다른 비자가 베드로를 본 겁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던 자라” 하는 이 말에, 이번에는 베드로가 “나는 그 사람 아니다”가 아니고 -앞에 “나는 그 사람 모른다”고 많은 사람 앞에서 말했는데, 그다음에 "나는 모른다" 하면 또 조금 약하잖아요. 그래서 강조를 넣은 겁니다- 절대 모른다는 거예요, 맹세하여 모른다는 거예요.
거짓말이라는 게 있잖아요, 자기를 방어하기 위하여 한번 거짓말을 했다가 그걸 계속 하게 되면 거짓말의 규모가 커져 버려요. 굉장히 위험합니다. 어쩔 수 없이 평생 숨겨 둬야 할 비밀과 그걸 지키기 위해 하는 거짓말들, 어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그 순간에 하는 거짓말들, 이게 그 순간에만 끝난다면 다행인데, 그게 끝나는 게 아니에요, 이게 자꾸 불어난다고요. 지금 베드로가 딱 그 모습이에요. 인간의 모습이 그래요. 여러분들이나 저나 다를 바가 없다고요. 그래서 순간적으로 베드로는 이제는 모른다고 해서는 조금 약하다는 느낌을 받고 강조를 시켜버린 거예요. 거짓말에다가 그냥 막 더 얹어버려서 맹세하여 모른다는 표현을 합니다.
71절에서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그래요. “맹세했다”. 이 ‘맹세’라는 것은 사실 예수님이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것까지 다 잊어버린 거예요. 여러분들도 신앙생활 하다가 어떤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하나님 말씀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성경적으로 대처해야 할지 생각을 잘 안 하고, 인간적으로 피해갈 그런 방법을 생각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사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을 해버립니다. 자기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그냥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맞서 싸워서 거기에 대하여 어떤 신앙적인 모습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72절에 “베드로가 맹세하고”, 맹세하는 거예요. 아무나 맹세를 합니까? 하나님 말씀에 맹세하지 말라고 한다고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다 가르쳤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맹세까지 한다는 이것은 ‘절대로 나는 예수와 상관이 없다’는 -어떤 맹세였는지, 어디다 맹세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상당히 악한 짓이에요. 이게 자기 스승을 쉽게 말하면 완전히 죽이려고 하는 짓이에요. 가룟 유다보다 더 악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이 부인, 이게 스승을 죽이는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요. 스승을 죽는 데 내어두고 스승을 부인함으로써 자기는 살겠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이 베드로는 이런 식으로 했어요. 자신의 거짓을 숨기기 위해서 거짓을 또 만들어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조금 뒤에 다른 무리가 이 베드로에게 “너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자가 분명하다. 네가 말하는 게 똑같다.” 하면서 또 공격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맹세도 모자라 -그다음에 넣은 게 제일 강한 거죠- 저주까지 해버려요. 예수님을 완전히 저주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 버렸습니다. 73절에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절에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여러분들, 우리는 살아가면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때도 많이 있어요. 그러나 의도적인 거짓말이나, 또는 내가 거짓말을 함으로써 어려운 상황에서 모면하거나 내 목적이 달성되거나 하는 이런 아주 악한 거짓말들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악하든 선하든 우리가 거짓말 자체를 안 하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안 하는 게 좋지만, 라합과 같은 경우에는 거짓말을 했잖아요, 정탐꾼을 숨겨두고도 안 숨겨둔 척하면서. 이런 것을 거룩한 거짓말이라고 이렇게 포장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든 그런 거짓말이 있기도 합니다.
사실 베드로가 처음에 한 거짓말은 본능적으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갑자기 상황이 닥치니까 그랬다 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거짓말은 아주 악합니다. 세상적인 용어로 말하면, 지능적 거짓말입니다. 이거는 그냥 하는 거짓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리스도 너는 죽어도 좋다, 나는 살아야 하겠다’라는 거짓말인데, 몇 시간 전에 자기가 했던 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평상시에 가르치실 때 증거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싹 잊어버렸어요. 우리 성도는 위기의 순간에 말씀이 생각이 나야 해요. 어렵고 힘들 때 말씀이 생각이 나야 한다고.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통해 그 어려움을 회피해 보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악한 짓이에요.
베드로가 딱 그런 짓을 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세 번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모른다고 딱 하고 나서 닭이 울었습니다. 닭이 우니까, 주님의 말씀이 바로 생각이 난 겁니다. 연상이 되어서 바로 생각이 난 거예요. 그게 75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했어요. 엄청나게 운 거죠.
왜 울었겠습니까? 정확히 알 수는 없죠. 이게 회개의 눈물일 수도 있고, 또는 자기의 잘못을 돌아보면서 하는 회개의 눈물이라기보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그런 통곡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베드로가 이렇게 통곡을 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사실 “너 예수님과 같이 있었던 자가 아니냐, 너도 그 당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가 “그래, 맞다. 나도 예수님과 같이 있었던 자다.” 해도, 베드로가 당할 불이익은 없습니다. 없잖아요. 왜 없습니까? 지금 이들이 잡으러 온 사람은 제자들이 아니에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만 잡으면 자동으로 다 해결이 되거든요. 이들은 제자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음을 인정하고 따라가기만 해도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단 말이에요. 자기가 당할 불이익은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어떤 불이익을 당하겠어요? “그래, 내가 예수님과 같이 있었다” 그냥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베드로를 잡아서 고문하거나 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일단 두목을 잡았잖아요. 두목을 잡으면 졸병들이 그냥 흩어지는 거 당연한 이치란 말이에요. 그런데 베드로는 이것마저 다 놓친 겁니다.
어쨌든 예수님과 같이 있었다 하면 자기도 뭔가 불이익을 당하거나 잡혀갈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는데, 베드로의 이런 나약하고 악한 모습이 베드로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에요. 주님이 이걸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베드로와 다를 바가 없는 우리의 모습을 여기서 지금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택할 때, 지식 있고 명예 있고 권위가 있는 사람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전혀 택하지 않고, 배운 것도 없고 무식하고 공부 못 하고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를 정도의 그런 어부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어부들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성격이 강합니다.뱃사람들이 강하고 독합니다. 쉽게 말하면, 성질이 좀 안 좋았던 사람들이라고. 베드로가 성질이 좀 안 좋잖아요. 표시 납니다. 다른 제자들 또한 뭔가 내세울 거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다거나, 훌륭한 가문 출신이라거나, 뭔가 힘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정말 볼품없고 값어치 없는 못된 인간들을 뽑은 거예요. 아주 나쁜, 자기밖에 모르는, 뭔가 성공의 욕심을 갖고 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 정도까지는 성경에는 안 나왔으니까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아주 보잘것없는 인간들을 예수님은 제자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지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그래도, 이들에게는 귀에 안 들어오는 거예요. 들을 때는 얼마나 눈을 반짝이면서 듣는 척했겠어요? 그러나 듣는 척했을 뿐이지, 그것이 가슴에 와닿아서 그들에게 정말 생명이 될 정도는 안 됐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교회에 엄청나게 자주 옵니다. 1년에 52번 오죠. 수요일까지 오면 100번이 넘어요. 그리고 이런저런 걸 하면 수도 없이 하나님 말씀을 듣죠. 또 이것도 부족해서 맨날 기독교 방송 듣잖아요. 듣고 찬양 듣고 나오는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하잖아요. 이런데도 우리는 베드로만도 못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베드로 이상의 악한 짓을 하고, 그리고 어쩌면 무서운 결정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진짜 의리 없잖아요. 의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함께 고난을 짊어지고, 함께 어려움을 짊어지고, 죽더라도 함께 죽자 하는 게 의리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의리가 없다고요. 그리스도인들이요, 진짜 의리가 약합니다. 이거 여러분들 솔직하게 인정하셔야 합니다.
여러분들, 예수님에 대한 의리도 진짜 중요하지만, 사람들 간에 믿음의 의리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내게 조금 마음에 안 들고 거슬린다고, 그냥 무 베어 버리듯이 잘라버리고 두부 자르듯이 탁 잘라버리고, 그렇게 아주 냉정한 모습으로 바뀌어버리는 모습들이 우리에게서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맺으면 풀 줄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풀어요. 그들은 그들의 원리와 방법대로, 세속적인 방법으로 잘 풀어요.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인 방법은 잘 알면서 그 방법대로 풀려고 하지 않습니다. ‘너는 무조건 틀렸다. 넌 잘못됐다’, 딱 나름대로 선을 그어버려요. 이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앞으로 세상이 많이 힘들고 어려워지면, 진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잘 되면서 마음이 모여지면서 함께 손잡고 가야 하는데, 손잡으면 ‘이거 치워라. 너하고 같이 가다가 나도 죽겠다’ 하면서 ‘죽으려면 너만 죽지. 왜 나까지 끌고 가냐?’ 이런 식으로 하고, 그리고 뭔가 조금 토라지면 그냥 이간질하는 이집사라든가, 고집불동 최집사라든가, 바가지 박박 긁는 박집사 이런 식으로 하면서 끼리끼리 모여서 교회에서 성도들 간에 위화감을 조성하고 당을 짓고 하는 이런 모습이 사실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참 나쁜 자들이에요. 베드로도 그렇고 제자들도 마찬가지예요. 의리 없습니다. 헌신짝 버리듯이 그냥 차버리고 떠나간 자들이에요. 왜 그랬습니까? 이 제자들은 주님을 위하여 그분의 사역에 동참하기 위하여 따라다니던 것이 아니고, 주님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따라다녔습니다. 이게 한국교회가 위험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수많은 성도가 교회에 와서 처음에는 자기의 욕심이 있어요. 하나님에게서 어렵고 힘든 일들을 해결 받거나 복 받기를 원하는 모습은 초보 신앙에서는 일반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1년 지나고, 2년 지나고, 5년 지나고, 10년 지나도, 맨날 그런 기도만 해요. 그러니까 자기의 목적 달성이 필요하단 말이에요. 내가 세상에서 좀 성공하고 싶고 내가 세상에서 폼 잡고 살고 싶어서 주님을 끌어다 놓는 거예요. 주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이런 현상입니다.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불리할 때는 다 떠나버려요.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순전해야 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건 없이 목숨을 주셨듯이 우리도 순전하게 주님을 따르면, 그다음은 주님이 하실 차례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님이 공급해 나가십니다. 이걸 인정하지 않고 믿지 않으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제자들은 자기의 목적을 위해 따라다닐 뿐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목적을 이루어줄 스승이 잡혀가 버리니까 다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다 버렸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거예요. 내 목적에 저 사람이 이득이 된다 싶으면 그 사람과 교제하고 듣기 좋은 말 하고 따르기도 하고 섬기기도 하는데, 내 목적과는 영 안 맞다 하면 보지도 않고 손절해 버리고 하잖아요. 베드로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발견하지 않았겠습니까? 심히 통곡하면서, 추잡한 자기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통곡의 눈물.
사실 어떤 종류의 눈물이라도 눈물은 본인들에게 유익이 됩니다. 많이 울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여러분들도 많이 우세요. 그런데 보통 나이가 들면 눈물이 잘 안 납니다. 특히 남성들은 더 눈물이 안 나요. 왜냐하면, 사내는 평생에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식으로 어릴 때부터 세뇌 교육을 받고 자랐잖아요. 태어날 때 한 번 울고, 부모님이 죽을 때 한 번 울고, 그다음에 또 언제 울라고 그랬어요? 어쨌든 세 번 이상은 울지 마라는 그런 게 있다 보니 완악하게 된 거죠. 눈물이 나야 돼요. 아주 조금이라도 눈물이 나고 그래야 치료도 되고 위로도 받고 합니다.
대장암 클리닉 원장인 이병욱 박사란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들이 암 환자를 치료하면서 그들의 여러 가지 아픔들을 접하고서 그분이 느꼈던 내용인데, 환자들의 마음에 응어리진 것을 풀어주는 데 있어서 최고의 방법은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7무의 울음 법칙’을 이분이 이야기했습니다. “7무. 무조건 울어라. 무차별적으로 울어라. 무시로 울어라. 무수히 울어라. 무릎 꿇고 울어라. 무안을 당해도 울어라. 무엇보다도 먼저 울어라.” 이렇게 일곱 가지 무무무무 하면서 권고를 했어요. 그러면 마음에 응어리진 것이 풀어지는 일을 많이 보았다는 나름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통곡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우리는 베드로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 베드로는 성령 받고 회심한 뒤의 베드로가 아니고 그 전의 모습입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원래 모습이에요. 이렇게 나빠요. 여러분들 모습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주님을 믿고 있는데, 왜 믿는지, 무엇 때문에 믿는지, 혹시 여러분들도 이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처럼 자신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 제자들처럼 굉장히 위험합니다.
베드로의 통곡 모습을 통해서 다섯 가지 성경적 교훈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주님에 대한 믿음의 확신은 가지되, 자신의 신앙에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신앙에 대해 절대 자만하면 안 돼요. 겸손해야 해요. “내 신앙에 대하여 나는 자신이 있어”, 베드로가 그랬잖아요. “나는 주와 함께 죽을 수 있어. 나는 끝까지 주님을 따를거야”라고 말했어요. 자신감 아닙니까? 이거 쓸데없어요. 믿음의 확신을 가져야 하지만, 신앙의 자신감은 위험합니다. 굉장히 위험해요. 겸손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말로 주의 일을 하지 말고, 말없이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말 많은 자가 주의 일을 하면, 주의 일도 시끄러워집니다. 말 많은 자가 교회에서 이런저런 봉사를 하게 되면 봉사는 되지만, 말로 인해서 교회가 굉장히 어지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 간의 대화에서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이 해야 할 말은, 힘과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입니다. 타인을 험담하고, 깎아내리고, 그 사람을 뭔가 문제 있는 사람으로, 악한 사람으로 은근히 만들어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60대 지나서 절대 사귀어서는 안 될 사람 가운데 1순위가, 험담하는 사람입니다. 이건 세상 사람들도 하는 이야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말로 주의 일을 하지 말고, 일로 주의 일을 해야 해요. 베드로는 말뿐이었어요. 베드로가 주를 위해서 한 일이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말만 번지르르하게 너무너무 잘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말로 주의 일을 하지 말고, 말없이 주의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다음에 나도 베드로처럼 될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알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평가 하거나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큰 잘못 중의 하나가, 상대방에 대한 판단이나 정죄를 너무 쉽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 당시에는 자기 자신이 발랐을 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자기가 욕하고 비판하고 정죄했던 그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로 나도 갈 수 있다고요. 이것은 인간이 전혀 알 수 없는 일들입니다.
저는 예전에 주일을 안 지키면 지옥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 주일 성수는 어떤 것인 줄 압니까? 밤 12시부터 주일날 12시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오직 교회에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하는 이것만 해야 올바른 주일 성수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그렇게 해 왔습니다. 고3 때 공부하다가 12시 딱 되면, 스톱을 합니다. 주일날 공부하는 것도 죄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공부를 스톱 합니다. 우리는 월요일마다 시험을 쳤기 때문에, 주일날 공부를 안 하면 성적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일이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교회에서 그때는 저녁예배가 다 있었습니다. 저녁예배 마치면 한 10시쯤 돼요. 밤 10시쯤 돼서 12시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공부하려면, 2시간 동안요. 그럼 기다리다가 어떻게 됩니까? 그냥 자버린다고, 피곤하니까. 저는 그런 여건과 환경 속에서 자라서, 내가 느끼고 판단했던, 내가 배웠던 것에서 벗어나면 다 지옥 가는 줄 알았다니까요. 아직 술, 담배 하시는 분 있죠? 여러분들, 저 술, 담배 하면 지옥 가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정말 그랬어요. 그래서 타인에 대하여 아주 쉽게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판하고 그랬어요. 왜냐하면, 그때 제가 엄청나게 기도 열심히 했고 정말 거룩한 척 많이 했거든요. 교회 갈 때 -저희 집에서 교회까지 한 10분에서 15분 걸렸는데- 집에서 나올 때부터 성경책을 가슴 위로 딱 보이게 잡습니다. 성경책을 들고 어떻게 덜렁덜렁 걸을 수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귀한 성경책을 어떻게 이렇게 소홀하게 경망스럽게 대하느냐 하는 관념이 박혀 있어서 나온 모습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잡고 거룩한 모습으로 가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정말 이상한 사람인 거예요, 내 눈에 보기에는.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보니까 그게 아닌 거예요. 나도 똑같이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그래서 깨달아지는 겁니다.
제가 완벽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사람입니다. 뭘 하나를 하더라도 확실하게 안 하면 굉장히 불쾌하고 뭔가 속이 상하고 말이죠. 목사 되고 나니 성질도 못 부리겠대요. 성도들 보면 마음에 안 들어요. 청소도 마음에 안 들고 이것저것 어질어져 있고. 저는 다 정돈이 되어 있어야 하고, 여기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문 같은 것도 다 요래 봤어요. 저게 지금 약간 떨어져 있잖아요. 저것마저도 내 눈에는 거슬리게 보이는 거예요. 저것도 다 똑같이 맞아야 되고 있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결벽증이나 이런 건 아니에요. 그냥 성격 자체가 그러다 보니까, 그게 참 잘 안 돼서 뭔가 모르게 완벽주의 비슷한 계획도 짜고 이런 식으로 하는데요. 하나님 앞에서 목사 하려면 그러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만큼의 그게 안 되면 전부 다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이거든요. 그러면 나 말고는 전부 문제 있는 사람으로 다 보여버린단 말이에요. 그리고 성도들도 그렇게 되도록 막 강조를 하는 거예요. 그게 신앙인 것처럼, 믿음인 것처럼, 그렇게 해야 된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저하고 처음부터 같이 오신 분들, 예전에 고생을 많이 했죠. 뒤늦게 합류한 분들은 참 행복하죠, 예전에 비하면.
우리 인간은 이 베드로와 같은 실수를 죽을 때까지, 언제 어느 순간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조금 괜찮은 것 같다고 해서 함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정죄하는 것은요, 한 5년, 10년 더 살아봐요, 그러면 자기도 그 자리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고요. 그래서 나 자신도 베드로처럼 될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요. 성경 말씀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 그랬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정죄할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해요, 그걸?
그다음에 네 번째인데, 자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지 마십시오. 목적 달성에 주님을 이용하지 말라고. 여러분에게 복 주려고 세상적인 복 많이 주고 출세시키려고 주님이 오신 거 아닙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여러분의 죄를 씻고 용서하기 위해서라고요, 다른 게 아니고. 그게 최고의 복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예수 믿는 것 하나만으로 기뻐하고, 예수 믿는 것 하나만으로 평생 주를 위하여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귀한 믿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내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고 주님이 도와주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나에게 주어진 삶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면,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면, 인도해 가시는 분은 주님이시란 말이에요. 주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그 자리로 우리를 이끌고 가십니다.
이번에 학생들이 대학에 몇 명 들어가게 되었습니다만, 제가 대학 가는 학생들에게는 늘 이런 이야기를 해요. “어느 대학 가게 될지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이 너에 대해 보는 것은 좋은 대학을 보고, 명문 대학을 보고, 이런 걸 보는 게 아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 잘 섬기고 믿음 잘 지키고 신앙적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네 삶을 교정해 나간다. 네가 이것이 부족하니까 이것을 채울 수 있도록 다른 방법으로 길을 열어주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다 이끌고 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지키며, 나에게 주어진 삶에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사업이 실패할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사기당할 때도 있다고. 그래도 구원받았잖아요, 여러분. 그래도 구원받았잖아요. 하나님의 자녀 된 것, 이것에 감사하면서 일어서서 가면, 여러분들을 향한 큰 계획을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주님을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에 관한 오늘 말씀에 다 나오는 내용이죠.
마지막으로, 모든 욕심을 버리고 주님을 순전한 마음으로 따르며 믿으세요. 욕심 다 버리세요. 결국,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은 다 욕심이에요. 욕심은 우상숭배이고 죄입니다. 욕심을 갖지 말고, 순전하게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내가 오늘 이렇게 하면, 주님이 또 어떻게 해주시겠지? 이런 계산 자체를 대지 말아요. 특히 여러분들 헌금을 할 때도 계산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하나님이 또 어떻게... 이렇게 할 필요가 없어요.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그냥 여러분들이 분수껏 하면 되는 겁니다. 복 받는다면서 선십일조니, 선헌금이니, 또 지난번에 얘기한 일천번제니 이상한 걸 만들어서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 거요, 이거 죄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회하면서요, 우리 성도님들도 알잖아요. 단 한 번도 헌금에 대하여 이야기를 안 합니다. 이건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믿음이 들어가면 분량만큼 합니다. 그리고 물질이 없고 부족한 그런 사람을 찾아가서 “십일조를 해라. 네가 십일조를 안 해서 그렇다. 그걸 하면 복 받는다.” 그래서 십일조하고 더 망해서 교회서 나가는 사람이 천지입니다.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거짓말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도와주고 지원해주고 일어서도록 해야지요. 나는 어쩌다가 우리 성도님들이 십일조를 크게 하면요, “이러면 생활이 좀 어려울 텐데, 이거 좀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그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아직 그렇게 크게 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이런 이야기를 못 해봤습니다만.
우리가 욕심을 버려야 해요. 제가 처음에 목회할 때, 욕심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목회 10년 계획, 목회 20년 계획, 목회 30년 계획 하면서, 언제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하고 그렇게. 하나님은 기가 찬 방법으로 이걸 깨어버리셨습니다. 그런 성격을 다 깨어버립니다. 그게 안 깨어지면 지금 내 속이 뒤집혀서 목회 못 합니다. 성도 이리 앉혀놓고 목회 못 한다고, 속이 뒤집혀서요. 그런데 편안하잖아요. 우리 성도님들이 너무 고맙고요.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비웠더니, 다 감사한 거예요.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켜주고 신앙을 지켜주는 그 하나가 저는 너무 고맙고 감사할 뿐이라고요.
오늘 베드로와 같은 이런 모습이 언제나 나타날 수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순전하게 따라주셔서 참 감사하고, 앞으로도 순전하게 욕심을 버리고 그냥 그렇게 믿음생활을 쭉 해가면, 여러분들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면서 찬양을 같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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