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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4)
진정한 복을 누리는 한 해
롬 2:17~29
I. 서론
20세기 최고의 강해설교자로 알려진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매주 금요일마다 로마서를 설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다 마치는 데까지 무려 13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목사님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듣고 있는 성도님들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설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로마서에 나오는 핵심적인 부분들을 위주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로마서를 한 절씩 보지 못하기 때문에, 로마서 전체의 구조를 머릿속에 넣어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로마서는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면,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롬 1:18~3:20), 하나님의 은혜 (롬 3:21~8:39), 하나님의 계획 (롬 9:1~11:36), 하나님의 뜻 (롬 12:1~15:13).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의 진노에 해당합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 하기 전에 하나님의 진노를 먼저 다루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두신 신의식과 하나님께서 자연 속에 두신 피조물을 합하여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해서 내버려 두는 것으로 심판을 하셨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이 부분까지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은 이방인과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한 두 가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율법과 할례입니다. 이 두 가지는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신뢰했던 것입니다. 빌 3:4~5,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바울이 신뢰했던 것은 할례와 가문과 율법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모든 유대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은 할례와 율법입니다. 베냐민 지파, 즉 자신이 이스라엘 초대 왕족의 가문이라는 것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의 과거에 의지했던 것들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우리가 잘 알듯이, 바울과 같이 배설물로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 3:8)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하고 신뢰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다시 한 번 더 깨닫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1. 율법
17~18절,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바울의 첫 마디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우리가 이 부분을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7~18절은 어느 정도,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의지한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 가운데에서 그들을 택해 주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후, 나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주신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보면서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여기까지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1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그 결과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 다음 구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19~20절,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이 말씀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말씀으로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이 해야 할 이방인들에 대한 책임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 42:6~7,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이방의 빛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한 것을 분간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맹인과 같이 어둠 가운데에 있는 이방인들을 가르쳐서 그들이 빛 가운데서 행할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는 것이 바울의 결론입니다. 21~23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르치고 자랑했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시면, 조금 이상한 내용이 나옵니다. 21~22절에서 바울이 세 가지 예를 들었는데, 마지막으로 예를 든 것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우상을 숭배하느냐. 이렇게 되어야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바울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멸망 당했던 직접적인 이유가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이렇게 기록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방 신전에 들어가서 신전 물건을 도둑질 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예가 사도행전 19장에 나옵니다. 지난 시간에도 잠시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전에 에베소에서 약 2년동안 사역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자, 은으로 아데미 여신의 우상을 만들어 파는 데메드리오 일당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 에베소의 서기장이 한 말이 인상적입니다. 행 19:35~37, “서기장이 무리를 진정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시가 큰 아데미와 제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신전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이 일이 그렇지 않다 할 수 없으니 너희가 가만히 있어서 무엇이든지 경솔히 아니하여야 하리라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비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붙잡아 왔으니” 37절을 보시면, 당시 유대인들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아데미 신전, 제우스 신전 같은 신전에 들어가서 그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며 그 신전을 더럽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도둑질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도둑질에 대해서는 본문 21절에서 이미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 신전에 들어가서 신전 물건을 훔치고, 그 신전을 더럽혔던 것입니다. 저는 37절을 유심히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 시의 서기장은 바울과 그의 일행을 면밀히 조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바울과 그의 일행은 신전의 물건을 도둑질하지도 않았고, 아데미 여신을 비방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다른 종교에 대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 놓은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종교를 더럽히거나 다른 종교를 비방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다른 종교와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속된 말로,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 사람들을 우리가 심판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 뉴스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땅 밟기를 한다는 명복으로 다른 종교 단체의 영역에 들어가서 소리 높여 기도하거나 찬송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런 행동 때문에 기독교가 사회에서 지탄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쓸 당시, 유대인들이 그러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 때문에 모독을 받게 된 것입니다. 24절,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우리가 적용할 점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는 것이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도 먼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가르쳐 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믿지 않는 이웃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종교와 종교인들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할례
이제 두 번째 주제로 넘어 가겠습니다. 유대인들이 두 번째로 신뢰했던 것은 할례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할례를 율법을 행하는 것과 연관시켜서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25절,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바울은 왜 율법을 행하는 것과 할례를 연관시켜서 설명하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행하는 것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존 스토트, “할례는 하나님께서 주신 바,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표시이며 보증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법 의식이나 부적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순종의 대용품이 아니라 순종하기로 헌신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이 받은 할례가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거의 미신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랍비들의 경구가 그것을 표현해 준다. 예를 들어, ‘할례받은 사람들은 게헨나(지옥)로 내려가지 않는다. 할례는 이스라엘을 게헨나(지옥)에서 구해 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할례가 마법 의식이나 부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그 할례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이것을 잘 드러내 주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만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언약궤가 일종의 부적이 된 것입니다. 그 사건을 조금 읽어 보겠습니다. 시대는 사사 시대 말기입니다. 삼상 4:1~3,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언약궤가 없는 상태에서 몇 명이 죽었습니까? 4천 명이 전사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실로에서 언약궤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자신들을 구원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삼상 4:10~11,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언약궤가 있는 상태에서 몇 명이 죽었습니까? 3만 명이 전사했습니다. 언약궤가 없이 4천명 전사, 언약궤가 있고 3만명 전사.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언약궤와 같은 상징물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무엘의 진단을 들어 보겠습니다.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의 진단은 율법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라 ~~ 그만을 섬기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긴 율법의 첫 번째 계명부터 지키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그러니까, 언약궤와 같은 상징물이 수 백개가 있어도,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그 언약궤가 아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따르자,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삼상 7: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 놓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쳐들어 왔는데, 이번에는 여호와께서 큰 우레를 발하셔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약궤와 같은 상징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할례를 부적처럼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바울이 흥미로운 질문을 하나 합니다. 그렇다면,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어떻게 될까요? 26~27절,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은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설령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려고 해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 누구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다음으로, 누가 진정한 유대인인가, 즉 하나님의 백성인가에 대해서 말합니다. 28~29절,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여기서 표면적 유대인이란 외형적으로만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유대인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육신에만 할례를 행한 사람과 마음에 할례를 행한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형식적으로만 할례를 받은 사람은 마음의 변화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은 마음의 변화, 전인격의 변화가 있습니다. 신 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라는 말씀은 전인격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누가 마음을 변화시키고 전인격을 변화시키는 할례를 행하십니까? 하나님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주체가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영”은 “성령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우리의 마음이 변화되고 우리의 전인격이 변화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율법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주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좁은 의미에서는 유대인들이 의지했던 율법이라고 말할 수 있고, 넓은 의미에서는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던 양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다루지 않고 넘어 왔는데, 오늘 본문 앞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이 그들에게 율법이 되어, 양심이라는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된다고 말을 합니다. (롬 2:15) 그러니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님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율법은 치명적인 질환이 있다는 진단을 해놓고도 아무런 치료도 할 수 없는 의사와 같다.”
여기서 로마서가 끝났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요? 하지만 로마서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3:21이 다음과 같이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롬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이제는”입니다. 지금까지는 소망이 없었지만, 이제는 소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심으로 우리가 더 이상 잘못된 것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의 마음이 변화를 받아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할례에 관한 부분을 살펴 보았습니다.
III. 결론
그렇다면, 본문에서 우리가 적용할 점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 외형적인 세례를 받았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야 할례가 가치가 있듯이, 세례도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방법은 참된 유대인이 되는 방법과 같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세례를 베푸셔서, 우리의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2023년 구정을 맞이하며, “진정한 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진정한 복”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복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변화를 받아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이 2023년 한 해 동안, 우리 모든 성도님들과 늘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