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정치는 까불이 정치다. 어떻게든 언론에 노출된다. 거기까지는 성공이다. 문제는 가십성이라는 점이다. 서울역에서 과천청사까지 커피에 도너츠를 손에 들고 왔다는 식이다. 도너츠 들고 사진 찍기는 어린이도 할 수 있다. 위엄이 아니라 경멸이다.
사랑이든, 행복이든, 명성이든, 성공이든 사람들의 관심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 시작이 아니라 종결에 가 있다. 영화 더 문이 망하는 이유다. 외계+인이 망하는 이유도 같다. 시작은 엉성하고 종결은 화려하다. 관객에게 보상을 주려고 하면 영화는 폭망한다.
먼저 각인 단계를 거쳐야 한다. 고통을 통해서 잘 각인된다. 영화 초반에 주인공이 고통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각인에 성공하면 다음은 그것을 재확인한다. 키스를 하고 '사랑해!' 하고 말하는 것은 각인의 재확인이다. 망한 영화는 각인없이 재확인만 한다.
전율과 고통과 각인과 약속으로 세팅된다. 준비가 갖추어진다. 영화도 그러하고 정치도 그러하다. 노무현은 청문회의 전율과, 후단협의 고통과, 탄핵의 각인과, 열린우리당의 약속을 통해서 완성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 다음은 국민이 알아서 할 일이다.
각인되지 않는 상태에서 재확인은 의미없다. 약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상은 의미없다. 개를 길들이는 방법과 같다. 유기견을 입양해서 친해지는 방법은 좁은 공간에 견주와 함께 있을때 무서운 아저씨가 들어오는 것이다. 개가 견주 뒤에 숨으면 각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