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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전에서 말하는 공(空)이란? 삼동린포체 법련사 무차대회
작년 12월 31일 인도성지순례 갔었습니다. 10일간의 순례에서 사대성지를 포함하여 이곳저곳 성지를 둘러 보았습니다.
그때 본 것 중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티벳스님들입니다.
빨강가사를 특징으로 하는 티벳스님들은 어느 성지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보드가야대탑에서는 티벳주문이 끊임없이
흘러 나왔습니다. 마치 중얼중얼거리는듯한 반복되는 말입니다. 또 울긋불긋 천줄로 장식되어 있는 것도 큰 특징입니다.
성지에서 본 티벳스님들은 당당해 보였습니다. 풍채 좋은 스님들이 활보하고 다녔고 선글라스를 쓴 스님도 있었습니다. 숫자가
많아서일까 성지가 마치 티벳불교의 전유물처럼 보였습니다. 이에 비하여 테라와다스님들은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별하게 눈에 띄는 행동도 없었습니다. 겉으로만 본다면 티벳불교가 전세계적으로 가장 왕성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삼동린포체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달라이라마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스님이라 합니다. 이를 전하는 웹포스터를 보니 법회참석비용이 놀라웠습니다. 4박 5일 일정에 최고 70만원 달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황제강연’같다고 했고 해외상품을 파는 것 같다고 비판적 글을 쓴 바 있습니다.
해외패키지여행가면 사성급호텔에 머물고 최상의 음식을 즐기는 것이 보통인데, 린포체의 경주황룡원 법회도 이와 다르지 않게 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비판적인 글에 반론도 있었습니다. 여러 날에 걸쳐 법문을 듣고 수행을 곁들이기 때문에 그만한 비용이 들어 간다고 했습니다. 또한 어렵게 자리를 마련한 주최측에서 댓글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주최측에서는 자율보시에 의존하는 3시간 일정의 무차대회를 공표했습니다.
법련사를 향하여
2018년 12월 18일 삼동린포체의 무차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법련사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법련사는 송광사 말사로서
경복궁 동편 입구 사거리 부근에 있습니다. 동십자각 가까이에 있습니다. 법회시작 시간은 오후 1시부터입니다.
법회시간에 맞추어 여유있게 전철을 탔습니다. 종각에서 내려 법련사까지 걸어가면 됩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어떻게든 점심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평소 5천원 이상 식사는 하지 않기로 스스로 약속했기 때문에 마땅하게 해결할 곳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럴경우 햄버거가 적당합니다. 그런데 좋은 생각이 떠 올랐습니다. 조계사 식당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식권을 3천원에 구입하고 점심을 해결했습니다.
법련사는 이전에 와 보았습니다. 티벳만다라전 할 때 입니다.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이전에 와 보았을 때는 작은 절이라 생각했습니다. 늘 큰 절만 보아 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와 본 법련사는 무척 큰 절입니다. 도심에 이렇게 큰 절은 보기 드뭅니다. 건물 하나가 통째로 사용하기 때문에 공간도 넓직합니다. 더구나 지붕에는 기와로 되어 있어서 고풍스런 맛이 나기도 합니다.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꽉 찼는데
법회가 열리는 장소는 3층의 대법당입니다. 삼백명 가량 들어 갈 수 있는 너른 공간입니다. 법회가 시작 되기 전에 넓은 강당은 거의 다 찼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한 열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몰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티벳불교의 영향 때문일 것입니다. 전세계적으로 티벳불교가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달라이라마의 영향이 매우 크다고 봅니다. 두번째로 삼동린포체의 화려한 개인적 이력 때문이라 봅니다. 올해 79세의 린포체는 달라이라마와 함께 티벳불교를 이끌고 있는데 특히 티벳망명정부의 총리를 지낸바 있습니다.
오후 1시 법문이 시작 되었을 때는 통로는 물론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꽉 찼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으로 법회가 시작 되었습니다. 린포체가 티벳어로 법문하면 우리나라 사람이 통역하는 방식입니다.
글을 쓰기 위하여 노트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다지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초기경전에 근거하여 글을 쓰는 입장에서 새로울 것이 없었고 특별하게 와 닿는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 보다 한번 통역을 거친 말입니다. 그래서일까 감흥이 없었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끝까지 들을 수도 있었으나 십여분 후에 자리를 떴습니다.
환희심이 젖은 대중들은 눈물을
인터넷 검색에 따르면 삼동린포체에 대한 기사를 도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 긍정적인 보도입니다. 한겨레 휴심정에서 조현기자는 ‘불자들 울린 삼동린포체’라는 제목으로 글이 올려져 있습니다. 황룡원에서의 법문을 전하면서 “4박5일의 법문이 끝나자 환희심이 젖은 대중들은 눈물을 흘렸다.”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린포체의 법문은 보리심, 보살행, 공성(空性)이 특징입니다.
또 공성과 관련해서는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는 보살이 공성을 깨달으면 자비심이 강화될 수 있다.”라 했습니다.
여러 기사를 종합해 보면 티벳불교의 키워드는 ‘공사상’이라 볼 수 있습니다. 18일 법회도 주제가 ‘밀교와 공 사상’이었습니다. 티벳불교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아우르는 종합불교로서 성격을 띠고 있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건데 공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공성은 달라이라마가 법문에서 늘 강조하는 것이라 합니다.
종합불교로서의 티벳불교
전세계적으로 티벳불교는 독특합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와 함께 티벳불교는 세계 3대 불교중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티벳불교가 널리 알려진 것은 달라이라마의 영향이 절대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달라이라마 없는 티벳불교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달라이라마 사후의 티벳불교는 어떻게 될까?
한국은 불교백화점과 같습니다. 전체인구 중에 불자는 16%가량에 불과한 칠백만명 가량 밖에 되지 않지만 전세계에 알려져 있는 모든 불교가 다 들어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한국불교를 ‘통불교’라 합니다.
통불교라는 말은 회통불교라는 말과 같습니다. 또 융합불교와도 같은 말입니다.이를 ‘혼합불교’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불교가 대승불교를 기본으로 한 선종이지만 밀교적 요소도 있고 최근에는 초기불교도 수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불교에서 밀교는 티벳불교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고려시대 원나라의 영향력하에 있을 때 라마교와 함께 들어 온 것이 그 시대의 티벳불교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한국불교자들은 티벳불교를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것 같습니다.
논장을 중시하는 불교
세계 3대 불교중의 하나인 티벳불교는 불교역사가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기불교를 바탕으로 하여 대승불교, 밀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불교가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티벳불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논장입니다. 이는 용수의 중론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래서일까 티벳불교에서는 경장 보다는
논장을 더 중요시하게 여깁니다. 이는 경장을 중요시 하는 테라와다불교와 대비됩니다. 이와 같은 논장은 대승불교의
아버지이자 제2의 석가라 칭송받는 용수의 중론에 따른 것입니다. 이는그래서 공성이 강조됩니다.
공성이란 무엇일까? 이는 중론게송에서 “연기인 그것 바로 그것을 공성이라고 말한다.”(24-18)로 알 수 있습니다.
연기가 곧 공성인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공성을 바탕으로 하여 “바로 그것에 의지하여 시설된 것 그 자체가 중도이다.”(24-18)라 합니다.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공성인 것을 말하는데, 공성은 연기된 것이므로 결국 ‘연기가 중도이다’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공(suñña)이란?
언제나 그렇듯이 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혼란스러워집니다. 더구나 공성이라 했을 때 더욱 더 난해하고 심오한 느낌입니다.
여기에다 공, 가, 중 삼제로 설명할 때 오리무중으로 빠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공이라는 단어가 갖는 모호함 때문일 것입니다.
가급적 공이나 공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의미가 불분명하고 잘못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모두 공한 것이다’라 했을 때 허무하게 느낄 것입니다. 공한 것도 공한 것이라 했을 때 무기력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공이라는 말 대신
‘연기’라는 말을 사용하면 명확해집니다.
부처님은 공이나 공성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애매모호함 때문인지 모릅니다. 부처님이 공이나 공성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는 주로 ‘비어있음(mptiness)’의 의미입니다. 이는 부처님이 “이 마가라뚜 강당에는 꼬끼리들, 소들, 말들, 암말들이 공하고 금이나 은도 공하고 여자나 남자들의 모임도 공하다.”(M121)라고 말씀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연기이기 때문에 공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그러나 단지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 (M121)라 했습니다. 공하지 않은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열반을 말합니다. 열반을 공한 것으로 보고서 부처님은 “아난다여, 나는 요즈음 자주 공에 든다. (Suññatāvihārenāhaṃ ānanda)”(M121)라 했습니다.
부처님이 공에 들어 머문다고 했을 때 이는 열반을 말합니다. 이는 공을 수관하여 얻은 아라한과의 증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맛지마니까야 ‘공에 대한 작은 경’(M121)에 따르면, 7단계로 청정한 공의 경지를 규명해 들어갑니다. 청정도론에서는 공해탈이라 하여 “그들에게 실체없음으로부터 출기가 있다면, 그들 세 사람은 영지가 강해져서 지혜의 능력을 얻고, 있음의 여읨(공)에 의한 해탈을 통해 해탈하고, 첫 번째 길의 찰나에 진리를 따르는 님이 된다.”(Vism.21.89)라 했습니다.
초기경전에서 공은 기본적으로 빈 것입니다. 이는 빠알리사전에서 순냐(suñña)에 대하여 ‘empty’의 뜻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티벳불교에서는 공성이라 하여 최고로 추구해야 할 가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공이나 공성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대개 ‘실체 없음’의 뜻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고성제와 집성제와 관련하여 “항상하고, 아름답고, 안락하고, 실체가 있는 상태가 없는 까닭에 텅 빈 것이고, 불사의 진리에는 실체가 텅 빈 것이다.”(Vism.16.90)라 했습니다.
중론 게송을 보면 공성에 대하여 연기가 곧 공성이라 했습니다. 이는 연기와 공이 같은 말임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연기공은 청정도론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청정도론 17장 지혜의 지평에 따르면 “열두 가지 공성이 있는 까닭에 그 존재의 수레바퀴는 공하다.” (Vism.17.283)라 했습니다. 여기서 열두 가지 공성이란 십이지연기의 고리를 말합니다. 중론에서 말하는 연기가 곧 공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초기불교에서 공은 기본적으로 빈 것입니다. 빈 것은 ‘실체가 없음’을 말합니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연기함을 말합니다. 실체가 없는 것은 오온도 해당됩니다. 실체가 없는 오온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형성, 유지, 붕괴 이 세가지에 대하여 “누구라도 지배를 행사하지 못한다. 그러한 지배를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Vism.20.47)라 하여 무아를 공으로 설명합니다.
부처님은 가급적 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공이라는 말은 비어 있음의 의미로 사용될 것을 염려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모든 것이 비어 있다면, 모든 것이 없다면 허무주의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혼란을 야기하고 애매모호한 공이라는 말 보다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연기, 무아, 열반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공성은 연기, 무아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굳이 용수의 중론에 의지하지 않아도 초기경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두 부류의 불교가 있습니다. 한편은 전통을 지켜내려 하는 쪽이고 또 한편은 끊임 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쪽입니다. 전자가 테라와다불교이고 후자는 대승불교입니다. 이를 종합한 불교를 티벳불교라 합니다.
전통을 고수하는 불교에서는 부처님 가르침 그 자체로 완전한 것으로 봅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밤부터 열반의 밤에 이르기까지 설한 것이 똑같음을 말합니다. 나이에 따라 세월에 따라 새롭게 깨달은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또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부처님 당시의 가르침을 가장 완성된 것으로 보고 후대로 갈수록 가르침이 오염되었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전통을 고수하는 입장입니다.
이에 반하여 대승불교에서는 경전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을 도입했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후대 부처님과 버금 가는 아니 부처님 이상 되는 성자가 나타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완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일까 대승에서는 끊임 없이 변화를 추구합니다. 시대에 따라 새로운 경전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중관학, 유식학, 여래장 등으로 끊임 없이 변화 시켜 나갔습니다. 중국에서는 선불교로 정착 되었습니다. 이렇게 끊임 없이 변화를 추구한다면 21세기에 맞는 불교가 출현해야 하고 21세기에 적합한 경전이 편찬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보리심과 자비심에 대하여
전통을 고수하려는 테라와다와 혁신을 강조하는 대승불교와 달리 티벳불교에는 논장에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이는 대승불교의 아버지이자 제2의 석가라 불리우는 용수를 매우 중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티벳불교 논서에서 말하는 것들은 초기경전에 모두 다 있다는 사실입니다.
티벳불교에서 말하는 ‘보리심’이 있습니다. 보리심을 내기 위하여 ‘일체중생을 어머니처럼 여겨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상윳따니까야 ‘어머니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찍이 한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S15.14)라 했습니다. 한량없는 윤회를 하면서 누구나 한번쯤 나를 낳아 준 어머니였을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경’에서는 오랜 세월을 거쳐서 일찍이 한번도 어머니가 아니었던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다.”(S15.15)라 했습니다. 형제와 자매, 아들과 딸도 마찬가지입니다.
티벳불교에서는 보리심과 함께 ‘자비심’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자비심은 자칫 잘못하면 가진 자의 입장에서 시혜하는 형식이 될 수 있습니다. 걸인을 보았을 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라며 연민의 마음을 낼 수 있으나 연민의 대상이 되는 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유쾌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것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S15.11)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행하고 가난한 자에 대하여 대하는 가장 중립적이고 공정한 태도일 것입니다. 상대가 행복하고 부자라면 역시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은 니까야에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초기경전을 보면 논장에서 말하는 것들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경장에 쓰여 있는 부처님 가르침이 원류입니다.
그런데 논장을 중시하는 티벳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 보다는 논사들의 가르침이 더 중시되는 듯합니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삼동린포체의 강연을 다 듣지 못하고 초반에 자리를 떴습니다.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후기를 남기는 것이 구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그날 느낀 것을 기록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있는 그대로 써야 합니다.
린포체의 강연에 법당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는 것은 가르침에 대한 갈망 때문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린포체의 법문에 누군가는 가슴에 와 닿았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환희심에 눈물을 흘린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전에 듣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시대에 이와 같은 큰 스승이 있다는 것은 축복일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승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외국의 스님이 강연할 때 성황을 이루는 것도 스승이 없음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승이 없는 시대에 불자들은 누구를 스승으로 해야 할까? 부처님은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 라고 말씀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논파할 수 없는 부처님 가르침이 스승임을 말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스승입니다. 불자들이 삼귀의 할 때 가르침에 귀의 하듯이, 불자들은 스승이 없는 시대에 가르침을 스승으로 삼아야 합니다.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바로 스승과 만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우리 앞에 있는 듯합니다. 부처님이야말로 진정한 불자들의 스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