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년 전의 타임캡슐, 신창동 유적
2,000여 년 전 광주 신창동의 영산강변에는 당대 최고의 하이테크 기술력을 지닌 선진 집단의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유적은 1962년, 서울대학교 고고학 팀이 53기의 옹관(독무덤)을 발굴 조사하면서 알려지게 된다.
옹관 발굴이 있은 지 30년이 지난 1992년 5월, 국립광주박물관 조현종 학예연구사가 구불구불한 국도 1호선 길을 직선화하는 공사 현장인 신창동을 찾는다. 30년 전 옹관이 출토된 곳에서 150미터 정도 떨어진 농경지 유적의 가능성이 있는 퇴적층의 모래와 흙을 긁어 연구실로 가지고 온 조 연구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흙에서 볍씨와 토기편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공사는 당장 중단되었고, 공사 범위에 들어있는 9평의 저습지에 대한 발굴이 시작된다.
국내에서 한 번도 조사되지 않았던 저습지 유적이 확인된 순간이었다. 저습지 유적은 호소(湖沼)와 같은 습지나 그 주변에 형성된 유적으로 유기물 보존이 양호하여 유구나 유물, 식물유체 등이 잘 보존되는 특징이 있다. 신창동에서 확인된 저습지는 원래 영산강변에 형성된 늪과 못으로 둘러싸인 습지로, 주변에서 당시 사람들에게 생활용수로 이용되던 곳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사용하던 도구나 물건들이 버려지거나 영산강이 범람하면서 이곳이 메워진 것이다.
9평의 기적, 그 좁은 공간에서 엄청난 유물이 쏟아진다. 나무로 만든 머리빗 · 칠기굽잔·칼자루 등의 목칠제 유물과 높은 굽이 달린 접시 · 점토대 토기 등의 각종 토기류도 출토된다. 이 조사 결과, 신창동 유적은 학술적 · 문화적 가치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곧바로 사적 제395호로 지정된다(1992. 9).
그러나 발굴은 곧 중단된다. 유물이 습지 속에 있을 때는 2,000년을 견뎌왔지만 일단 퇴적층이 햇볕에 노출돼 유기물이 산화되면서 토양의 색깔이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유물의 산화도 급속하게 진행돼 섣불리 경험 없는 발굴을 강행하면 유물 전체를 한 순간에 망가뜨릴 수 있었다. 저습지 발굴 경험이 전혀 없던 발굴팀은 2년간 조현종 학예연구사를 일본 나라 문화재 연구소로 보내 일본의 저습지 유적 발굴 기법을 공부하게 했다.
1992년부터 시작된 유적 발굴은 2012년까지 13차례나 계속된다. 발굴이 진행될 때마다 최 초·최고의 수식어가 붙는 엄청난 유물이 쏟아진다. 저습지 유적의 조사방법론을 계획적으로 적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유적지, 신창동 유적의 최초·최고의 타이틀을 확인해보자.
신창동에서는 벼, 조, 밀 등의 다양한 재배 작물과 155센티 두께의 벼 껍질 압착층, 벼를 재배한 밭과 논이 확인된다. 그 중 밭벼 재배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155센티의 벼 껍질 압착층은 중국에서 발굴된 72센티를 크게 앞지르는 유적으로, 벼의 무게로 환산하면 500여 톤에 달하는 규모다. 10톤의 덤프트럭 50대 분량에 해당하는 벼 껍질 압착층은 현재까지 조사된 세계 최대 규모의 유적이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870여 점의 목기도 출토된다. 이들 목기는 무기·농기구·공구·제의구·방직구·악기·수레부속구 및 기타 생활용품으로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농기구와 공구 자루 및 수레바퀴는 단단한 참나무가, 북은 울림이 좋은 버드나무가 사용되고 있다. 2000년 전 신창동 사람들은 놀랍게도 나무의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용도에 적합하게 나무를 사용하고 있었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완성된 칠기 뿐 아니라 칠기 제작을 알려주는 칠이 묻어 있는 천조각과 칠이 담긴 용기, 칠 주걱 등도 우리나라 최초로 출토된다. 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극락강의 옛 이름은 칠천(漆川)이다. 신창동 유적지에서 초기 철기 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의 것까지 연이어 출토된 칠기는 2,000년 전부터 이 지역에 고도의 칠기 제작 기술을 가진 첨단 기술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발화막대, 발화막대집, 발화대 등 발화도구도 출토된다. 이들 발화도구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화도구일 뿐 아니라 시기적으로도 가장 빠르다. 함께 출토된 관솔은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조각으로 한쪽에는 불을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신을 만들 때 사용하였던 틀인 신발골도 출토된다. 전체적인 형태는 발의 모양과 흡사하지만 앞과 뒤가 약간 들려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삼한 사람들은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는 기록이 있다. 신창동 출토품은 신코가 경사져 있어 동이전의 기록에서와 같이 가죽신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2년 만에 이름을 찾은 유물도 있다. 땅을 일구는데 사용된 따비가 그것이다. 1997년 출토 직후 곡병부괭이로 보고된다. 그러나 12년이 지나는 동안 관련 자료와 일본 지역의 따비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농경문청동기에 묘사되어 있는 것과 같은 쌍날따비임을 알게 된다.
신창동 저습지 유적 발굴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유물이 쏟아질지 정말 흥분된다. 지난 20년간 엄청난 유물을 쏟아 낸 유적지에는 30년 역사 교사인 필자에게도 알기 어렵게 써진 안내판만 휑하니 서 있을 뿐 그 흔한 전시관 하나 없다. 창조 도시 광주의 기원이 된 신창동 유적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 여전히 낯선 이유다.
신창동 발굴, 빅3
1997~98년의 발굴은 일반인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고 있다. 신창동 발굴 유적의 빅3로 불리는 현악기와 베틀 부속구인 바디, 수레바퀴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발굴된 현악기는 길이 77.2센티, 폭 28.2센티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에 “삼한은 방울과 북을 메달아 귀신을 섬기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출 때 사용하는 슬(瑟, 큰 거문고)이 있는데 그 모양이 중국의 현악기인 축(筑, 거문고 비슷한 대로 만든 악기)과 같다. 이것을 타면 소리와 곡조가 나온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현악기를 복원한 결과 10현임이 판명되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현악기인 신창동 슬은 대전 월평동 출토품 및 신라 토우에 보이는 현악기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베틀 부속구인 바디(베를 짤 때 위쪽에서 밑으로 당기는 도구)가 옷감을 짜기 위해 실을 만드는 가락바퀴와 실의 탄력을 일정하게 하기 위한 실감개, 한국 최초의 비단인 천조각과 함께 출토된 것도 획기적이다. 출토된 바디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 출토품 중 가장 완전한 형태였고, 천을 짤 때 날줄과의 마찰로 바디의 날에 세밀한 수직 마찰흔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바디의 출토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마한조의 “양잠을 알고 옷감을 만들었다”는 내용과 함께 당시 직조 기술과 의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해주었다.
수레의 발굴은 더욱 극적이다. 출토된 수레바퀴통은 바퀴살이 박혀있고 빠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특히 가로걸이대의 고삐고리에서는 마차를 사용한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는 “마한인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르며 장례에 다 써버린다”는 후한서 동이전의 기록이 틀렸음을 알게 해 주었다.
- 남도역사연구원장 노성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