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창(梅窓)과 유희경(劉希慶)에 얽힌 이야기,
매창(梅窓)과 유희경(劉希慶)에 얽힌 이야기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성황산 서림공원입구에 매창시비(梅窓詩錍)가 있다.
이 비는 1974년 4월27일 매창기념사업회에서 다시세운 것이다.
시비의 주인공 매창은 선조 6년 1573년 부안현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소실에게서 태어났다.
그해가 계유년이라서 계생(癸生) 또는 계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본인은 스스로 매창이라고 이름 지었다.
매창은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 여류시인이다.
어려서 부친께 한문을 배웠고 시문과 거문고를 익혀 기생이 됐다.
아마도 어머니가 기생이 아니었나 싶다.
조선시대 여자들은 이름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매창은 이름과 자(字),호(號)까지 가진 기생이었다.
기생신분인 매창에게 수많은 남자들이 찝적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몸을 굴리지 않았으며 겁 없이 앙탈부리는
남자들을 멋진 시구절로 물리쳤다.
매창은 죽은 후 부안읍 남쪽 봉덕리 공동묘지에 분신처럼 아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 언덕을 지금도 ‘매창이 뜸’이라 부른다.
그녀가 죽은지 45년이 지나 후세사람들이 무덤에 비석을 세웠고
그 후 13년이 흘른 후 매창의 시 수백편을 모아 고을 사람들이 목판을 깎아
‘매창집’이라 이름 짓고 인근사찰 개암사에서 시집을 간행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봐도 일개 여인, 그것도 화류계에 몸담았던 여성의 글을
단행본으로 발간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이 시집이 나오자 너무 많은 주문이 몰려 발행처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날 정도였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17년 부안시인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세웠다.
지금도 음력 4월이면 부안사람들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
시조계의 대부 가람 이병기(李秉岐)선생은 매창의 무덤을 찾아 이렇게 노래했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 가건만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 않는다.
이화우(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비단적삼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남는다.'
매창의 묘는 부안읍 사람들이 돌보기전에는 나무꾼들이 돌아가면서
벌초도 하면서 돌봤다고 한다.
또 유랑극단과 가극단이 부안에서 공연할 때는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아
한바탕 신명나게 놀면서 선배 대시인의 넋을 기린다고 한다.
그녀의 묘는 1983년 지방기념물 65호로 지정됐다. 당대의 여류시인 매창이
살았을 때 한 연인이 있었으니 바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다.
유희경(劉希慶)은 자를 응길(應吉), 호를 촌은(村隱)이라 하며 본관은 강화로
조선조 대시인이요 유명한 학자다. 효자로 유명했고 예(禮)와 상례(喪禮)에 밝아
국상에서 부터 평민들의 장례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문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도운 공으로
통정대부가 됐고 광해군 때는 폐모상소 올리기를 거부한 후 은거,
후학을 가르쳤다.
당대의 대시인이요 풍류객인 유희경을 흠모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기생 매창이다. 매창은 유희경의 시에 매료돼 한번 겨뤄보고 싶었다.
어느날 부사 이귀(李貴)로 부터 촌은이 부안에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정말 뜻하지 않은 영광이요 기쁨이었다. 당시 매창은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곳에 초막을 짓고 거문고와 시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매창은 즉시 부안으로 달려간다.
유희경은 닷새 후 부안에 도착했다.
매창을 본 유희경은 술자리에서 거문고를 재촉한다.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거문고의 음률은 50대에 접어든 유희경의
가슴속을 헤집고 다닌다.
유희경은 지긋이 눈을 감고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유희경은 시한수를 짓고 거문고를 탄다. 일찍이 남국(남쪽)의
계랑(매창의 다른 이름) 이름을 들었는데 그녀의 시와 노래가 서울까지 들리더라.
오늘 가까이서 얼굴을 대하니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 듯 하구나
나에게 신비의 선약(仙藥)이 있어 찡그린 얼굴도 고칠 수 있는데 금낭속
깊이 간직한 이약을 사랑하는 네게 아낌없이 주리라계량이 화답한다.
"내게는 오래된 거문고 하나 있다오 한번 타면 온갖 정감 다투어 생기는데도
세상 사람들이 이곡을 아는 이 없으나 임의 피리소리에 한번 맞춰보고 싶소."
신기로운 선약, 금낭 속에 감춰둔 묘약은 과연 무엇일까.
쉽게 표현하면 사랑이지만 은유를 좋아하는 천재들의 표현 속에 감춘 의미는 무얼까.
한번 타면 온갖 정감이 생기고 아무도 그 의미를 모르는 거문고 소리,
계량이 말하는 그 의미는 또 어떤 것일까.
사랑하는 연인에게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약, 금낭 속에 감춰둔 그 약을
요즘 의미로 섹스라고 해도 좋다.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노래’를 계랑자신의 육체로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무에게나 헤프게 내돌리지 않은 은밀한 자신의 몸이라 생각하면 어떠랴.
임의 피리소리에 한번 맞춰보고 싶다는 것을 당신의 요구에 따르겠다는 의미로
넘겨짚어도 좋다.
무어라 해도 좋다.
이날 밤 두 사람은 원앙금침에 들었다.
계랑의 나이 열아홉. 유희경은 50세. 50평생 근엄한 선비의 지조가 무너지고
오랫동안 굳게 닫쳤던 계랑의 문이 열렸다.
문풍지는 두 사람의 거친 호흡에 펄럭이고 방안의 촛불은 정열의 열기에
녹아내렸다.
1590년경 부안에 내려왔다가 매창을 처음 만난 유희경.
유희경은 그러나 2년 뒤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매창과 이별하게 되었다.
그 때 매창의 나이는 방년 21세. 유희경은 매창의 가슴에 깊은 정을 남겼다.
그 정은 매창의 시심으로 피어났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라
부안읍내 성황산 서림공원 입구에 있는 매창의 '이화우' 시비
흔히 ‘이화우’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시는 매창의 여러 시 가운데
유일한 한글시조다.매창은 봄날 흩날리는 배꽃을 보고 이를‘이화우(梨花雨)’ 라고
표현했다. 하늘이 준 재주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표현이 아닐까.
아마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듯한 한시 한 편이 더 있다.
東風一夜雨(동풍일야우)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더니
柳與梅爭春(유여매쟁춘)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
對此最難堪(대차최난감) 이 좋은 시절에 차마 못할 건
樽前惜別人(준전석별인) 잔 잡고 정든 님과 이별하는 일
이러할 진대 그립기는 유희경도 마찬가지였다.
몸은 한양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늘 매창이 살고 있는
부안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娘家在浪州(낭가재낭주)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아가주경구)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상사불상견)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니
腸斷梧桐雨(장단오동우) 오동잎에 비 뿌릴 제 애가 탄다오.
유희경의 '매창을 생각하며' 시비
매창이 ‘이화우(梨花雨)’라니 유희경은‘오동우(梧桐雨)’란다.
두 사람이 이별할 때 계절은 봄이었는데, 그 새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로 바뀌었다.
두 사람은 두 계절 동안을 보지 못하고 지낸 셈이다.
그럭저럭 세월은 다시 수 년이 흘렀다.
유희경은 유희경대로, 매창은 매창대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게 되었다.
이런 경우 씻기 어려운 정한(情恨)을 안게 되는 쪽은 대개 여성이다.
특히 당시 매창은 ‘노류장화(路柳墻花)’랄 수 있는 기생 신분이었다.
마음에 이어 몸마저 상한 매창이 남긴 단장시 한 편을 소개하면,
相思都在不言裡(상사도재불언리) 말은 못했어도 너무나 그리워
一夜心懷鬢半絲(일야심회빈반사)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欲知是妾相思苦(욕지시첩상사고)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須試金環減舊圍(수시금환감구위)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 좀 보시어요.
한양(서울)과 부안. 서해안고속도로 개통으로 이젠 두어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이 거리를 놓고 마치 서로가 지구 반대편에라도 있는 듯하다.
핸폰과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두 사람의 사랑얘기는 마치 수 천년 전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얘기로 들린다.
문명의 발달로 편리는 해졌지만, 깊은 情, 가슴에 품은 恨은
이제 그 어디서 만날 꺼나....
哀桂娘 애계낭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 허균
妙句甚擒錦 (묘구심금금)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淸歌解駐雲 (청가해주운) 맑은 노래는 머문 구름도 풀어 헤치네
兪桃來下界 (유도래하계)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세계로 내려오더니
竊藥去人群 (절약거인군)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무리를 두고 떠났네
燈暗芙蓉帳 (등암부용장)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香殘翡翠裙 (향잔비취군) 비취색 치마엔 향내 아직 남아있는데
明年小挑發 (명년소도발)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때쯤이면
誰過薛濤墳 (수과설도분)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으리
凄絶班姬扇 (처절반희선) 처량타 반희가 부치던 부채
悲凉卓 女琴 (비량탁녀금) 구슬퍼라 탁문군이 타던 거문고.
飄花空積恨 (표화공적한) 날리는 꽃 공연히 한만 쌓이고
衰蕙只傷心 (쇠혜지상심) 시든 향초 다만 마음 상하네.
蓬島雲無迹 (봉도운무적) 봉래도라 구름은 자취도 없고
溟滄月已沈 (명창월이침) 푸른 바다 달빛은 하마 잠겼네.
他年蘇小宅 (타년소소댁) 훗날 소소(蘇小)의 집을 찾으면
殘柳不成陰 (잔류부성음) 시든 버들 그늘도 못 드리우리.
오래 사귀었으나 몸을 나누지는 않았다. 그녀는 음란함을 즐기지 않았고,
나는 난잡함에 미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오래 우정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제 그대가 나를 버리고 떠나니 나는 슬픈 눈물로 그대를 전송한다.
꽃다운 넋은 고이 잠들라.
명원 이매창 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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