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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시집[간지]
黃 江
(1992. 4. 25. 도서출판 한강)
* 시인의 시정신 / 「황강 은모래의 꿈」 「주제의 상황적 변화」 「대학로에서 황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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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책머리에 대신하여
황강은 청순한 서정의 원류
언제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즐거움일 수도 있다. 어쩌다가 도시로 밀려와 치열한 생존경쟁의 틈서리에서 아직 작은 나의 존재를 확인할 때에는 더욱 고향의 질펀히 깔린 청순한 서정을 그리게 된다. 향수를 느낄 때마다 한결 푸근해지는 나의 젖줄 황강은 내 곁에 있어서 좋다.
--1991. 6. 13일자 <스포츠서울> 시작 메모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는 그리움이 하나 있다. 知名에도 밤마다 꿈길로 어른대는 노래가 있다. 그것은 지금도 정갈하게 남아 있을 고향에 흠뻑 젖는 일이다. 누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는 것은 즐거움이다. 하기야 분단의 저쪽에 두고 온 실향민의 고향에 미칠 수 있을까마는, 아리고 쓰라렸던 어린 시절의 애잔함은 나의 내면에서 어떻게 용틀임하였을까. 하나하나 더듬어서 집히는 데까지 아름다움으로 기억하리
라.
세 권의 시집을 내고도 허물을 벗어 던지지 못하는 자신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말라버린 마음밭에 신선한 청량제를 뿌리리라. 촉촉이 젖은 꽃망울을 오래 간직하리라. 고향에 질펀히 누워 있는 황강은 서정의 원류이다. 향수와 함께 찾아드는 황강이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주어서 무척 포근하다.
--1991. 11. 응시동인지 <응시> 제11집, 시작노트
黃江 . 1
-그대 목소리 들으며
어흠, 그대의 인기척이 들리면
문 활짝 열고
물 한가운데서 자라던 청청한 소나무
가지를 흔들던 바람 소리
너를 반가이 맞는다
내 몸속 잔뜩 부풀어 오른 꿈들
이내 소나무 가지에서 분해되고
문 열고 쳐다본 하늘
그저 별빛 몇 개 얼비치누나
어흠, 예대로 그대 오는 밤이면
어눌해진 이방에서 온 새 한 마리
청청하던 그대 목소이
이제사 제대로 들을 수 있겠구나
천년을 귓전에 울리는 그대의 노래를.
黃江 . 2
-그리움 하나 걸어놓고
서울의 밤에도 달빛이 비칩니다
빌딩을 벗어나 중천으로 솟아오른 중력만큼
달무리 지듯 고향이 거기에서 빙빙 돕니다
흙내음 배인 고샅길에 이슬 내리고
패랭이 삘기 질경이 냉이 민들레
거들끼리의 사랑으로 포근한 밤
산골동네에 깨어있는 적막은 그리움입니다
서울에도, 논뚝길에도 달은 뜹니다
밤마다 창틀에 걸어둔 그리움
한 올씩 풀어
너무 멀리 떨어진 사랑으로 흘러 보냅니다
산짐승 울음이 무서웠던 산아이가
지금사 달빛 하나로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 보는 달, 그것은
어린 시절 다가오는 그리움의 노래입니다.
黃江 . 3
--어린 유월의 기억
사랑방 등잔불이 모두 꺼지면서
당신의 손은 마냥 떨리고 있었습니다
산골짝 지천으로 널린 산머루 다래
다 함께 未明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묽은 완장 자위대가 竹槍으로 훑고 간 뒤
인민군 소년병들은 감홍시를 따먹고 있었습니다
낙동간 전투가 얼추 끝났다는 전갈을 받고
빨치산 야산대의 기슴이 당신을 떨게 했습니다
아아, 웃동네 김서벙이 끌려가서 죽고
우리집 씨암소도 질질 끌려가고
숨죽인 채 문구멍으로 들리는 군화발자국 소리
치맛자락 꼭 붙잡은 나도 떨고 있었습니다
전재의 위협이 깔리는 캄캄한 방안
흰색과 붉은 색 깃발이 뒤엉킨 당신의 분노
무너진 방공호 속에서
지금은 넋을 잃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黃江 . 4
--성묘길, 작은 멧새의 울음
오매요, 진자 섧대요
첩첩산중 천수답 몇 두락에 매달린 눈망울
대추나무에 걸린 달처럼 눈물나게 서럽대요
쟁기지고 소몰고 저물녘 돌아오는 아부지
가난도 운명도 모두 어둠으로 지워졌지요
마루 끝에 앉아서 풍년초만 빨아대는 울아부지
그래도 우리는 초록빛 꿈만 먹고 살았지요
요매여, 오늘은 흐드러진 진달래도 산나리도
대숲에 숨겨둔 작은 새들의 울음따라
긴 한숨만 길게길게 남았대요
다복솔 산길 칡넝쿨로 얽어서 오매요
한 평생 흘림 눈물 감싸 안은 채
아카시아 향내 그윽한 오늘밤은
농주 한 사발로 더욱 북받치대요
가엾은 우리 오매요--
黃江 .
--정월 대보름
보름달이 되고 싶었다
중천에 휘영청 웃음을 풀고 싶었다
텅 빈 논펄에서
겨울바람 눈물로 일어서고
달집에 불을 붙여라
오늘은 덩실덩실 풍물춤을 추고 싶었다
눈물 솔 아린 기원
밤새도록 내 얼굴 그을려도
재앙은 모두 태워 버려라
불길처럼 치솟는 신명을 듣고 싶었다
--이젠 그만 눈물 거두고 달 한 번 쳐더보소
소망보다 먼저 깔린 달빛
--올해는 풍년입니다
지화자 좋을시고 어화둥둥 풍물소리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우리 마실 밝힌 달아
어쩐지 예감 속 不吉을 지우기 위해
나는 보름달이 되고 싶었다.
黃江 . 6
--춘삼월
아직도 먼
그리움의 이슬 맺힐 때
산새 울어울어
한 아름 사랑가 흐드러진
산천에서 놀꺼나
쪽지 머리 진달래꽃 흔들면서
어절씨구 저절씨구
우리 모두 춤이나 출꺼나
바람아
아직도 풀리지 못한 내 사랑은
머언 발치에 전설로 쌓인 아픔이다
춘삼월 다가도록
아련히 남아있는 먼먼 그리움이다.
黃江 . 7
--우수. 경칩
아직도 바람이 차가웁다
우수 진고 경칩이 흐르는 도랑물
실눈 뜨는 버들강아지
겨우내 쓰린 몸살 오죽 했으랴
양지쪽 밭두렁
삼월의 순색 생명들이 꿈틀거릴 때
하나하나 꽃바람 흔들릴 듯
아린 그리움만 기지개를 편다
토담집 사립문이 열리면서
따수운 햇살이 아늑히 조을고
우수 경칩이 생명을 적시는 대지에서
피와 땀과 아픔과 그리고
그늘진 얼굴들
지금은 침묵이다
그저 깨어나고픈 꿈이다, 그런데
고향 먼 산에 얼룩진 꽃바람은
아직도 차갑기만 하구나.
黃江 . 8
--단오날
창포물에 머리감고
동백기름 자르르
갑사댕기 팔랑파랑
옆집 순이야
어서 그네를 뛰자구나
-임이 뛰면 내가 밀고
내가 뛰면 임이 밀고
옥색 고무신 남색 치마
허공에 머문 하얀 속곳
오 내 사랑이여
쌍그네 한 몸으로
나뭇잎에 가려졌다
-단오날 그네를 뛰면.
黃江 . 9
--夏至 무렵
천렵을 하다가 돌아간
빈 앞 개울가에
한 아이가 그냥 버린 달랑고추
길게 잠들었습니다
물뱀 도마뱀 개구리들이 우르르
몰려들다보면
그 달랑고추는 어느새
부끄러움도 아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무자맥질로 익힌 헤엄이
이젠 봇물을 틔우고 물꼬를 다독이는
따스한 행복을 얻었습니다
보릿짚 모자 치켜올린 벼 포기 사이
땀방울은 서럽도록 정답습니다
여름 한낮은 길기만 합니다.
黃江 . 10
--칠석날
나는 견우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눈물이 많은 누나
시집가는 날 흘린 눈물
한 웅큼 간지한 채
문살에 비친 먼 달빛을 타고
사랑을 익히는 작은 새입니다
문득 가녀린 바람에도
그리움 가슴 가득 조이는 새 한 마리
칠월 초승 어느 날 밤
눈물로 엉긴 별이 되었습니다
반짝반짝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오작교, 초이렛날 사랑의 등불 걸리고
까지소리로 그대를 만났습니다
진녀여 오오, 일년에 단 한 번의 만남
사랑은 지상을 온통 강물로 적셨습니다
사랑의 표현은 눈물뿐이었습니다.
黃江 . 11
--추석날이 되면
머리를 들어 저 달을 보고
추석날이 되면
할배도 할매도 어서 한 잔 드시지요
문어와 홍어 말린 것으로 끓인
탕국맛이 제맛이 아니라도
젯상 향불은 타고 잇는데
다시 머리를 숙이고 교향을 생각하면
휘황한 한가위 달맞이
김실아, 권실아 우리 모두 모여
음복술에 취할거나
대청마루 웃음소리 끊겼어도
가난한 바람소리는 들을 수 있는데
아아, 님이시여, 歆饗하옵고
도시의 골목 안을 맴도는 안개
걷으소서, 추석날 저 달은 밝은데.
黃江 . 12
--첫 눈
머물고 싶다
하얗게 그냥 하얗게
기도로 남고 싶다
구름 위를 떠돌던
마알간 내 영혼
어쩌면 실낱같은 소망마저
빛바랜 허물로 묻어둔 채
오래도록 샇이는 먼 노래
밤새도록 뒤틀린
너의 가슴앓이로 하얗게 흩날린다
그리움일가
기다림일까
스산한 산등성이에 잠들 수 없는 겨울나무
꿈이면 좋겠다
하얀 나의 그림자
함초롬히 젖어있는 진실이면 좋겠다.
黃江 . 13
--어머니
섣달 그믐날 밤
내 심연에 紙燈 밝게 켜들고 서있다.
黃江 . 14
--공암리에서
그냥 그대로 서 있더라
쪼무래기 몇 양지쪽에 앉아서
조잘대던 그 모습까지
지금도 그대로 포근하더라
이십 몇 년만에 안겨보는
너의 품안은 여전한 온기
반백으로 찾아온 나를
못잊어 반갑게 손 내밀더라
금줄을 걸꺼나
삽작 밖
붉은 황토흙 부려놓고
오늘은 혼자서만 흐느끼고 있더라
서울서 먼지로 떠돌다가
너를 향해 삭틔운 시인 김송배는
이 바람, 이 산천 그리워
텅빈 골짝을 혼자 찾아 왔더니라.
* 공암리 : 경남 합천군 용주면의 동리. 내가 생장한 고향임.
黃江 . 15
--연희동 편지
내가 처음 서울 가서 둥지로 정한
서대문구 연희동 산82번지
출근을 하고 수릉ㄹ 마시고 시를 쓰다보면
나는 항상 나는 새가 되고 싶었다
시민아파트 낡은 골방에 묻혀
담배만 빨아대던 절망의 산실
아, 그러나
구름 위에 떠도는 또 다른 나
영혼의 샘은 바로 여기였노니
허상에 묶이고
허탈에 질식하고
허망에 침몰하던 산번지
어느 날 푸근한 그곳에서
나는 문득 날개를 달 수 있었다
황강까지 훨훨 날아 올 수 있었다.
黃江 . 16
--대학로에서 띄움
시를 쓰듯이
지금 대학로에서
한 연(聯)의 삶을
조심스럽게 지워가고 있습니다
반어(反語)로 메워진 지난 세월
허탈로 채워지는 아득한 사랑
슬퍼하지 마시오
시를 쓰듯이 그대를 따라
낙엽과도 섞이면서
우리들이 묻어둔 황강의 전설이
조금씩 풀리리라 믿습니다
지금 대학로에서
한 줄의 시를 쓰듯이
슬프게 몸부림치는 저 마로니에 잎은
또 다시 나를 술 취하게 할 뿐입니다.
黃江 . 17
--함벽루 부근
이따금
어둠 깔린 수평선을 향해
끼륵끼륵 먹황새 한 떼
외롭지 않게 날아가고 있다
강줄기 돌아돌아
먼 먼 사랑의 감춰진 회상
어둠 함께 풀어 끼륵끼륵
바닷물에 몸을 섞으려나
이런 날은
머쓱해진 옷깃이지만
잃어버린 시간의
행방을 찾아야겠다.
黃江 . 18
--합천호에서
푸른 호수
깊숙이 침몰한 향수
스스럼없이 빨려 들어간
수몰민의 침묵보다
그를 받아들인
황홀함
안개빛 사랑이 소중한 호반
거기에 얼비친 내 마음.
黃江 . 19
--孔岩里 옛 집터
저녁놀이 스스로
제 운명을 감추다가
문득 어둠으로 사그라지는 노래
눈물로 주렁주렁 추녀 끝에 걸어둔 채
우리가 고행을 그리다가
어느덧 밤이 되면
별빛 가물가물
고향은 언제나 이슬에 젖어 있다
한 무리 안개가 스스로
제자리에 머물 수 없어
까막까치 그리 울던 산길 홀로 내려가고
야호야호 산 메아리 멎은 초가지붕
지금은 그렇게 떠도는 휘담(諱談)이었나
뜬구름 저 만치
동구 밖 정자나무 가지를 몸채로 흔들고
노을 속에 지워지는 나의 옛 집터
옹, 공암리의 스산한 밤이여.
黃江 . 20
--해인사에서
분명히 이승이다, 아름드리
길목 잣나무 잔잔한 회상
지금도 멈추지 못하는
홍류동(紅流洞) 계곡 물소리
어쩌면 우리 사랑을 잊어버린
날들이 한꺼번에 씻겨지는
은은한 숲 내음
그대여, 오늘은 목탁소리 귀기울이다가
가야천 드리운 나뭇잎 하나
둥둥 떠내려 보내지만
묵은 텃밭에 웃자란 잡풀 뜯어내어
고뇌와 묶어 흘려보낼 수야 있을까마는
삐리삐리 삐리리 산새 울음
젖은 가슴 속 회오리치면
그대여, 절반쯤은 극락이다
일주문 지나 봉황문 홍하문 해탈문 안으로
대적광전 큰 부처님 환한 미소
오오, 나무관세음보살--
가야산 먼 흰 구름 한 점은.
黃江 . 21
--황계폭포
펑펑 눈물 같은 나의 시가 쏟아진다
참꽃 피는 삼월 삼짇날
우리 형수 화전놀이 갈 적에는
쿵다닥 쿵닥 너의 장단만큼
내 가슴도 술렁거렸지
산속 홀로이
무슨 애타는 사연 아름으로 엮어
천 년을 울고 있는 그대여
먼 역사의 축을 굴리며
벼랑에 걸려있는 나의 눈시울
그대가 바람으로 잠들 수 없을 때
내가 감싸안을 가슴은 비어 있었다
낙차(落差)의 물보라
다만 여울진 무지개는
자연정(紫煙亭) 햇살에 묻어둔 채
밤이면 펑펑펑
쏟을꺼나 슬픈 나의 시 한 소절.
*황계폭포 : 합천군 용주면 황계리에 소재한 폭포. 합천 10경의 하나.
*자연정 : 폭포 아래에 위치한 시인묵객들의 쉼터.
黃江 . 22
--春窮說
고향에 가면
지금도 고향엘 가면
어쩐지 배고픈 냄새가 난다네
청보리 수염 깜부기로 변할 때
허기진 꽃들이 나보다 먼저
길섶에 쓰러지고
아아, 아픔이어라. 들판에서
지금도 잠들지 못한 전설 한 토막
오뉴월 볕자락 엉긴 눈물이어라
보리고내 너머
몽롱한 하늘빛이
자운영 풀씨로 뿌려진다네
오늘도 고향엘 가면
쑥밥으로 버무린 윤사월
저물도록 떠돌던 신음이여
땅속 깊숙이 숨죽인 채
그날의 희뿌연 노래만 들리네.
黃江 . 23
--災殃說
갑자기 새털구름이
부드러운 정사를 나눈다
쏟아져 내린 배설물을 뒤집어 쓴 채
우리들은 웃다가 울다가
어느 날 허둥지둥
불어난 냇물을 건너가고 있었다
이제는 세찬 물살로 잃어버린
징검다리 더듬으며
오, 하느님 이제는 제발 그만
어느 한적한 정오에 봄비가
꽃잎을 애무하는 밀어를 나눈다
적당한 웃음소리와 은밀한 속삭임
어쩌다가 정말 어쩌다가 오, 하느님
목타는 대지에 던져진 내 육신
허연 골체(骨體)를 드러냈을 땐
구름의 정사가 그립다가
허탈한 이 여름
........................?
이 세상 모든 것은 ㅇㅅㅂㅁㄹㄷㄴㄱ??
그래도 사람들은 ㅁㅇ+×÷....???
오, 전능하시 하느님이시여.
黃江 . 24
--여름밤 說話
서울의 밤은 너무 어둡네요
나의 별은 황강의 밤으로
밤마다 낡은 상상력의 비늘을 세우고
어둠 속 매캐한 모깃불처럼
스멀스멀 피워 오르던 다부진 꿈들은
글쎄, 어느 날 마른 수숫대로 서 있었네요
정자나무 그늘에서
우물꼰을 돌다가 막혀버린 꿈들은
눈물보다 먼저 희뿌옇게 번지고
밤새도록 귀신 이야기만 들었네요
주뼛주뼛 일어서는 오 내 가녀린 가슴
그것이 비록 오늘 밤 창가에 서성이며
지독한 불면으로 남는다 캐도
우짜겠노 시인이여
풀쐐기 독침처럼 번득이는 꿈 하나로
여기 가득찬 눈물 항아리
펴 낼 수 없는 일이라 안카나
글쎄, 모깃불 연기가
서울의 여름밤 하늘을 가득 메운다 캐도.
黃江 . 25
--伐木
우리는 한꺼번에 목이 짤려다
모질기도 한 목숨의 물줄기와 함께
그동안 얼마간의 苦樂과
얼마간의 부푼 희망들이
모두 부서져 나갔다
이제 물기마저 말라버린 육신이
민둥산 중턱에 누워 마지막 꿈을 꾼다
누구는 다른 세상으로 바삐 떠나서
환생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내장부터 썩어가는 한을
햇볕에 지금도 말리면서 지쳐있다
벤자와 베인자의 의미가 지워지는 잿더미 속
짤린 목들이 다시 모여
불꽃으로 사그라지는 마지막 애상곡을 부른다
활활 태워지는 은총의 노래
그러나 짤리지 못해 잡목으로 서 있던 나도
그냥 칡넝쿨에 휘감긴 채 신음하고 있었다.
黃江 . 26
--병정놀이
우리 땅이 정말로 빼앗기면 큰일이다
죽는 힘을 다해 싸워야 한다
땅땅 따당땅....너는 죽었어
병정놀이에선
가장 편하게 죽을 수 있었다
땅땅땅
미운 애들을 적군으로 만들고
뒷산 솔밭을 열심히 기어 다녔다
숫검정으로 얼굴을 칠하고
풀잎으로 등을 감축 채
땅땅 막대기총은 불을 뿜었다
어느 날 진짜 군인이던 순돌이 아버지가
하얀 잿봉지에 싸여 돌아오고
우리는 모두 논뚝 길가에 늘어서서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항상 앞장서서 돌격하던
용감한 순돌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아, 밤 깊도록 하늘을 찢는 저 통곡소리
그날 이후 우리들의 전장
뒷산은 텅 비어있었고
초롱한 순돌이의 눈망울도 흐려져 있었다.
黃江 . 27
--별에게
이제 사랑을 노래할 때가 왔습니다
강물 속을 훔쳐보던 사랑 이야기
뼛속으로만 흐르는 눈물임을 알 것 같습니다
차라리 어두움이 두려울 때
햇살 반짝이는 영롱한 풀잎에 젖어
그동안의 눈물을 사랑하려 합니다
그대 혼자 응시하던 먼먼 흰 구름
당신 품으로 와르르 무너지는 이제사
나는 외롭게 띄워진 나뭇잎 하나임을 알았습니다
언제인가 마지막 정박지에 닻을 내리고
지우면서 말갛게 지우면서 떠나온 그대
오, 지나온 그 길섶에는
무슨 빛깔의 꽃이 피었던가
빨강 파랑 노랑.....
이제 사랑의 꽃망울을 틔울 때가 왔습니다
이제 홀로 세운 이정표가 강물에서도
확연히 빛나고 있음을
나도 알 때가 된 것 같습니다.
黃江 . 28
--바람에게
요즘 어쩌다가
논두렁에 서면
한 줄기 바람이 되고 싶다
고만고만하게 살아보겠다고
이 흙을 지키겠다고
뙤약볕에 엎디어 논을 매는
까맣게 끄슬린 저 얼굴들
그 애절한 소망을 위해서
시원하게 아주 시원히 불어주고 싶다
구부린 잔등 위에 가끔 하늘이 내려앉고
예끼, 흙 버리고 떠난 놈들
그저 그만한 땀 흘리면 어디선들 못살랴
오늘은 쇠파리만 웽웽, 바람도 안 부노?
어럴럴 상사디야--
이 논배미 김을 매어 어럴럴 상사--
나의 사랑 오, 목타는 이 흙에서
홀로 불고픈 바람이고 싶다.
黃江 . 29
--통화중 / 하나
긴급구조를 요청함
조난당한 집들만 유령으로 남아있는 마을
기분 나쁜 늑대 울음소리만 들림
잡초와 함께 몇 년을 앓고 있는
문전옥답이 수확을 포기한지 오래임
어쩔 수 없이 떠나지 못한 村老 몇 명으로는
이 일을 해결하기엔 지극히 어렵씀
뚜뚜뚜뚜- 긴급 구조를 다시 요청함
네? 농산물 개방 압력이 심하다고요?
그럼 폐헙니까?
골프장이나 만들자고요?
아, 네에, 그럼 우리의 긴급 구조는?
#$%^&*@.....
黃江 . 30
--통화중 / 둘
색시감을 찾심더
중신을 좀 해 주시이소
아랫마을 순이도 분이도
농촌 싫다카면서
말카 부산으로 대구로 떠났심더
--오냐 알았느니라
인건비도 안나오는 영농후계자
참말로 내 잘못이 크구나
그래 쪼끔만 더 기다려 보거레이
인제 그만 지쳤심더
하늘도 무심하지
지끔 농촌은 예 살맛이 전혀 없심더
차라리 서울가서 막노동이라도 할낌더
이 피 마르는 심정 쪼매 이해해 주시이소
--아, 여보세요. 아직도 통화증.
黃江 . 31
--족보를 펼치며
촘촘히도 얽어 놓았다
빛바랜 실핏줄
흩어지지 않게
이름자로 묶어
고층 아파트 층층으로 쌓아 두었다
보이지 않는 물줄기
위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꼭대기에서 멈춰진 희미한 한 점
내 생명의 原音을 듣는다
의성김씨(義城金氏)의 강물은 흐르고
손때 묻은 책갈피 속에서도
면면히 그리고
맑게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黃江 . 32
--나를 닮은 아내
별 하나
흔들릴 때마다
눈물만 질겅질겅 씹는다
꿈을 꾸면서도
황강에서 바람으로 떠나온
여자의 순명을
차곡차곡 쌓고 있다
저렇듯 빈 뜨락에서
목까지 차오른
지나간 어둠
--지친 세월 속
내 곁에 언제나 푸른 나무 한 그루
그리고 밝게 피어나는 꽃봉오리 둘
눈물 옷소매에 훔치며
나를 닮을 때마다
오직 한 곳으로 스며든 꽃향기
아, 아련한 별빛은
그대로 있어서 아름답다.
黃江 . 33
--버들피리
그냥 버리고 온 산이며 나무들
그 잎사귀 하나하나
해어름이면 속으로 사무치는
울음이 들려온다
골골마다 텅 비어 밤이슬로 몸부림치는
집들, 집들 흐느낌도 들린다
이랴이랴, 저 논뚝길에 멈춰버린 소울음
언젠가 까무라쳤던 길섶
한 무리 풀벌레의 悲愴이니리
개골개골 청개구리여
지금 슬픈 나의 시혼이여
필니리 피일니리 순박한 노래여
추녀 끝 박꽃이 지고
저녁답 연기따라
내가 섧게 울어도울어도
지울 수 없는 저 버들피리 소리.
黃江 . 34
--아침 까치
무서리 내린 새벽
사랑채 감나무 가지에서
저리도 까치가 울면
혹시나 내 친구 반가운 소식이 오려나
여기 저기
논밭뙤기 버린 채 떠난 친구
가치밥 우러르며
까치 까치가 울면
여직껏 매달렸던 그리움 하나
오늘은 너를 만날 수 있을까
묵은 밭고랑 풀잎이 울고
뒷산 풀꾹새 혼자 서러울 때
가치야, 울어라 울어라
친구야 쟁깃날은 녹이 슬고
언덕 너머 음매음매
송아지 목맨 선율은 없어도
아침 까치가 울면
어쩔거나, 지금도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
黃江 . 35
--초승달
마알간 손톱 하나 짤라
어둠 속에 던졌다
무심코 쳐다본
어느 산골 초승달이 되었나
생명의 발원인가
중천에서 침몰해버린 조각배였나.
黃江 . 36
--복숭아
언제나 너를 먹고 싶었다
잘 익어 부풀은 너의 젖가슴
물결처럼 일렁이는 시간 소긍로
너를 마시며 취하고 싶었다
사랑아
꿈에서도 안개가 너를 따먹기 전에
아아, 너의 두 볼을 부비고 싶었다.
黃江 . 37
--박꽃
어릴 적 꿈
하얗게 번지는 초가지붕 위
어스름 달밤
아리아를 듣는 환상의 조련사.
黃江 . 38
--개똥벌레
우물가 풀섶
오랜 정적의 불꽃 일깨워
절규 절규 목이 멘 절규
신비를 꽁무니에 매단 채
비상하려는 동화 한 편
지금은
꿈에서나 본 듯한 오브제.
黃江 . 39
--망개나무 열매
작은 소망들이 올망졸망
가을 햇살에 익어가고 있다
영글은 선지자의 눈빛처럼
서둘러 손짓 보내고
그냥
발갛게 무리지어 타고 있다.
黃江 . 40
--들국화
돌틈 허허로이
서리 맞은 잡풀들과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어
계절이 때로는 제 모습을 버릴 때
내 곁에는 슬픈 한 자락 노래뿐일러니
조용히 다가오는 이 그 누구시오
초롱한 눈매
한 점 구름을 모두우고
멀어지는 바람.
黃江 . 41
--무지개
얼굴 붉히며
차마 건네지 못하는 뜨거운 언어
삭이며 그냥 떠 있기만 했다
허공을 빙빙 돌면서도
창밖
너의 애타는 숨소리만 들었다
지금사 겨우 알 것 같은
형형색색의 영롱한 눈빛.
黃江 . 42
--시냇물 소리
새로 나온
시집 한 권을 너에게 보낸다
--첩첩산중에서 흘러내린
정갈한 물소리
--황강물로 유유히
바다로 이어지는 노래
--온 몸 생채기 휑구어
모래톱에서 환생을 꿈꾸는 진통
다시 한 아름 맑은 이슬로 내려
되돌아오는 잔잔한 시냇물 소리
너에게만 간직한 향내인가
해맑은 나와의 약속인가.
黃江 . 43
--도깨비불
누가 못다한 한을 묻었을까
앞산 뒷산 표류하는 흐느낌
누가 어둠보다 먼저 와서
황톳길에 뿌리면서
번쩍번쩍 눈짓을 보내느냐
고요가 짓누른 산촌 밤동네에는
간간이 길 늦은 장꾼들의 헛기침 소리와
아직도 사랑방 등잔불이 조을고
풀잎 이승 서걱서걱
서럽게 어둠을 삼킨 사람아
어찌할고, 잦아든 밀어 속에
사랑의 불빛은 꺼지고
내 온몸으로 마지막 너를 껴안으리
누가 보았을까
별들이 길게 울고 내가 함께 우는
오늘밤의 신화를,
앙 그것이 죽음을 예언하는
한 줄기 절망의 불꽃일지라도
헛것이어라, 진실로 헛것이어라.
黃江 . 44
--파랑새
그 새가 되고 싶었다
자고나면 뒷산 소쩍새 울음 그리울 때
윤사월 기나긴 해가 원망스러웠다
풋보리 몇 웅큼
거을린 얼굴 주름살 함께 엉기어
그 새는 들꽃 향기로 살아갔다
포로롱 밭고랑을 누비며
하늘로 치솟아
한가로운 노래만 불렀다
파랑새여
어쩌면 너를 닮겠다고
지금도 그 꿈을 깨지 못하고 있다
허연 머리칼 날리면서
포로롱 포로롱 파란 꿈만 꾸었다.
黃江 . 45
--물레방아
하루 종일 비워야 했다
어떤 날은 밤을 세며 비워내기도 했다
우리들 기슴은
물 한 그릇 담을 크기밖에 못되는 것인가
비워도 비워도
가득 가득 채워지는 욕망의 거품
물보라에 비친 무지개를 찾기 위해
오늘도 삐거덕삐거덕 비우는 일뿐이다.
黃江 . 46
--상여집
한생이 끝나는 침묵을 담았다
별빛 흐트러진 산모퉁이에서
또 누구를 기다리나
떠나버린 상두꾼 발자국에
상여소리만 허공에 떠돌고
하관(下棺)한 삼베치마 자락이
나무 끝에 걸려 있다
산역(山役)꾼들 잠든 밤에도
불두화는 희게 피는데
북망산천 띄워 보낸 곡(哭)소리
푸석푸석 이엉 끝에 걸려있다.
黃江 . 47
--산 메아리
ㄱ ㅣ ㅁ ㅅ ㅗ ㅇ ㅂ ㅐ--
~~~~~~~~~~~~~~~~
달빛 한 모금 삼키고
네 품속으로 나를 침몰시키고
시오리 길 면소재지
삼십리 황강까지
마른 이파리의 상처인가
아직도 곷잠 속 꿈인가
달 그림자로 ~~~~~~~~
ㄱ ㅣ ㅁ ㅅ ㅗ ㅇ ㅂ ㅐ--.
黃江 . 48
--신 그림자
뉘엿뉘엿
사라지는 산 그림자
피라미 중태기 물방개 올챙이
모두 별빛 줍는 꿈을 찾아 제집으로 돌아간다.
아직도 제자리에 남아 흔들리는 억새풀
어둠의 빗장을 풀어 헤치고
저 멀리 동구 밖
한가롭게 깔리는 바람 소리
오늘은 달빛에 젖기 위해
산골밤을 준비하고 있다.
黃江 . 49
--날지 못하는 白鷺
자, 날아보자
황강 이백 팔십리, 백로여
아득한 넋두리 꿈틀거리매
읍내에서 용주골 접어드는 벼랑 아래
희 나래 접은 내가 서 있다
날이 가면 갈수록
부끄러운 사랑이 쌓이고
긴 시간 떴다가 지워지는 무지개-
오죽하면 네 곁에서 머물지 못하고
질펀한 네 품에 안기지 못하고
황매산 갈매산 철매산
남빛 꽃바람에 일렁이고 있구나
자, 이제 날아 볼꺼나
은빛 모래 위에서
내 스스로 가늠된 희미한 하늘
나의 어눌한 영혼이여.
黃江 . 50
--은하수
차라리
밤마다 은하수를 지울일이다
앞뒷산 도깨비불이 무서워
요즈음도
상여집 모퉁이를 지나가지 못하는 아아
오뉴월 긴긴 햇살이 밤이며 길게 눕는다
풀꾹풀꾹 풀꾹새
배고파 우는 저 울음이
내 가슴 속 묻혔다가 되살아나는
밤이면 차라리
반짝이는 은하수가
얼룩진 눈물자국인인가
그날의 가녀린 물결인지 묻고 싶다
이슬 받아 잠기는
하얀 조약돌이고 싶다
어쩌다가 삶을 지워나가는 일로
지새우는 밤이면 차라리
그 먼 하얀 강을 건너가고 싶다.
黃江 . 51
--지신 밟기
우리는 신명나게 마당을 밟아야 했다
행여나 물알로 떠내려가지 못한
잡귀 잡신들을 밟아서 없애야 했다
성주님 조왕님 천륭님 측신님.......
목청 높혀 불러 묘셔 와서
손 비비고 절 올리며 정성으로 빌었다
우리 집을 지탱하는 신들이여
밟아서 받을 수 있는 복이라면
꽹과리가 깨지도록 밟으리이다
우리 집 지신님들 부디 흠향(歆饗)하옵소서
신명 속 땀방울로 얼룩진 저 기원
얼싸절싸 땅이 꺼지도록 밟아야 했다
黃江 . 52
--사랑가
텅 빈 산에서도 꽃은 피는가
단오날 창포꽃은 홀로 절망을 삼킨 채
곱게 머리빗은 큰 애기만을 기다린다
그네 위 훨훨 날리던 붉은 댕기는
언듯언듯 잿빛 구름 사이
꽃물 곱던
분홍빛 사랑
아침에우는새는배가고파서울고요
저녁에우는새는임이그리워우운다
너어냐나아야두리둥실노올다가아
밤에밤에나낮에낮에나참사랑이로고오나-
오월 꽃창포는 전설오 피었다
동박새 사랑 울음
치렁치렁 머리 풀고
내 눈빛으로 쏟아지는
막막한 그리움 하나.
黃江 . 53
--방아타령
오호오 방아여
쿵덕쿵덕 디딜방아
으깨어진 뭉수리
오 나의 눈빛
발자국도
그림자도
몸부림까지도
한 바가지 쏟아 붓고
짓이긴다 짓이긴다
쿵덕쿵덕....
다시 부를 노래를 위하여
오호오, 아름다운 약속을 위하여
쿵덕쿵덕 디딜방아
오호오 방아여.
黃江 . 54
--농부가
어화벗님네야이내말쌈들오보소천지지간만물중에사람귀타않했더뇨사내나이지명(地名)이면반백은됨직타만이날이때흙만파고어화둥둥살았겄다산천초목수려해도귀튼사람어디가고골골마다텅비었노일손없어시름놓고논두렁에걸터앉아곰방대만뻐끔뻐끔이노무세상살이조상탓도아닐진대어이어이벗님네야올농사는대풍(大豊)이요꼬부랑탱탱마누라야농촌싫타도시살림며눌아기기별해서쌀가마니나부쳐주고농군싫어순명어긴짐실이도불러다가양념깨나챙겨주소오호통재라농부님네피땀으로거둔곡식비료값은그만두고사람없어못살겄네귀하도다귀하도다흙보다도더한것이사람일줄내몰띾네-.
黃江 . 55
--나뭇꾼의 노래
풀잎 몰아세우는 새벽
강산성(强酸性) 이슬 흔드는 바람이었나
심심산천을 가르는
초부(樵夫)의 목쉰 육자배기였나
영광스럽던 꿈 다발
빈 지게에 마른 풀잎으로 쓰러진 채
햇살은 중천을 기울어
산 그림자가 어눌하다
아디선가 철 지난 바람 줄기
꽃잎 지워도 다시 지워도
계절의 향내 위로 노을이 눕고
헤어름 잔잔한 그대 말씀이 머문다
이윽고 산그늘 지워진 낯선 밤에선
여린 내 마음도 깊게깊게 눕는다.
黃江 . 56
--강물의 노래
그 무엇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은
걸어온 발자국을 먼저 씻어내는 일이다
걸어가야 할 시간보다
애써 걸어온 시간은 아직도
긴 강물에 애증(愛憎)으로 넘실거림에야
막연한 그 무엇의 기다림보다는
차라리 꿈을 앞세우고
서둘러 가봐야 하는 우리네 삶이다
언제나 흙먼지 풀풀한 갈대밭에서
한 송이 꽃 아름다운 내 가슴 채울 수 없는
수평선 저 너머 어디엔가
어쩌면 한 웅큼의 희망이 등불로 켜지고
내 몫의 노래 몇 소절도
가녀리데 흐르고 있을 테지
살아가는 일들이 마치 허망뿐일지라도
그 무엇을 바라보며 오늘도
하염없이 떠나야 할 일뿐이다
이렇게 영혼마저 씻겨가는 일뿐이다.
黃江 . 57
--겨울 연가
당신의 창가에
불빛 따라 얼기설기 나풀대는
사랑의 예감을 훤히 볼 수 있습니다
일렁이는 가슴 속 마알간
등불이 밤새도록 타오르고 있습니다
창가에 불꺼지도록
이슬 받는 내 영혼
야삼경 물레소리 잦아질 만큼
한 꾸리 실로 둥글게 감겼습니다
등불이 밤새도록 타오르고 있습니다.
黃江 . 58
--소심도(素心圖) / 하나
--탈색된 화폭
지게 바지게 삼태기 대칼쿠리 쇠코뚜레 쇠핑경 비겨미 쟁기 써레 괭이 삽 호미 쇠스랑 꼭갱이 낫 톱 도끼 망치 노루발장도리 쇠죽가마 구유 돼지죽통 개밥그릇 소여물통 멍에 길마 가래 물레 씨아 베틀 도투마리 가마니틀 고무래 돌꼈 목달구 함지박 채광주리 목기 다래끼 체 어레미 미투리 도리깨 도롱이 멍석 맷방석 대소쿠리 키 디딜방아 절구통 맷돌 다듬이돌 싸리빗자루.......
--거미줄 엉긴 헛간에서 승천하지 못한 원혼(冤魂)들
저승문을 두드려도 하염없이 삭아가기만 하는데.
黃江 . 59
--소심도(素心圖) / 둘
무너진 토담
잡초 우거진 마당
장독대 자리-깨어진 사금파리
그 옆에 말라버린 마당샘
막힌 수채구멍
일그러진 흙죽담
삐걱거리는 대청마루
부러진 문살
대들보에서 삭아 얼룩진 빗물자국
행랑채 썩은 용마루 위에서
깍깍대는 까치 한 마리
그 위에 말을 잊은 저 구름
오오, 이 일을 어찌할꼬
안채 아랫목에서 갑자기
체온이 식어 굳어버린 나-
黃江 . 60
--소심도(素心圖) / 셋
가, 갸, 거, 겨........
까막눈 깨칠라고
호롱불 심지를 돋군다
아무렴
낫 놓고 ㄱ자는 알아야재
무딘 손끝에서 경련하는 몽당연필
‘가’와 ‘거’가 도무지 구분되지 않는 밤
하마 샛별이 감나무 가지에 걸렸다
나, 냐, 너, 녀......
새벽닭 홰치는 소리
두고 보이소
내 눈으로 옥단춘전은 읽을 낍니더.
黃江 . 61
--소심도(素心圖) / 넷
산토끼를 잡으려 했다
넓적한 돌막에 칡넝쿨을 감아
산비탈 나무에 걸어 덫을 놓았다
간밤에는 눈길에서 산토끼 쫓는 꿈만 꾸었다
꿩을 잡아야겠다
콩알을 뚫어 비상(砒霜)을 넣고
겨울 밭고랑에 놓았다
까투리 장끼 산비둘기 한 마리 날지 않았다
오늘밤에는 참새를 잡을꺼나
사다리를 올라 추녀 끝을 더듬다가
체온이 식어버린 참새를 만났다.
웅 어머니--
(얘가 웬 식은땀을 많이 흘리노?)
黃江 . 62
--소심도(素心圖) / 다섯
겨울 미루나무 가지에
아침해가 걸렸다
가지 끝 가지런히 안긴
붉은 까치집 하나
먼 곳으로 비상(飛翔)하려는
내 깊은 한시름 가두어 두었다.
黃江 . 63
--소심도(素心圖) / 여섯
외딴 눈길 주막집
밤새도록 들리는 한풀이 노래-
휘휘한 산마을
길손의 취한 발걸음 위에 마구 쏟아지는
새벽 별빛.
黃江 . 64
--소심도(素心圖) / 일곱
정월 명절은 마냥 즐거웠다
남정네는 윷을 놀고
아낙들은 널을 뛰고
때때옷 곱게 입은 내 눈망울은
오직 둥실 떠오른 꼬리연이 좋았다
형들 제기 차는 한구석에서
뒷집 순돌이가 팽이를 제법 잘 돌린다
눈발 속에서도 모두가 흐뭇함에 젖어
설명절 마당에는 마냥 웃음이 넘친다.
黃江 . 65
--소심도(素心圖) / 여덟
立春大吉
建陽多慶
대문 입춘첩 온기가
뒤안까지 깔려 화사하다
코뚜레 풀어진 송아지
들마당에서 어미소와 한가롭다
가끔 나폴대는 배추 흰나비
흙담장 너머 기웃거리고
바지랑대에 매달린 하얀 빨래
봄바람에 나부낀다
입춘날이면 위엄 있게 다가오는
햇살 듬뿍 입춘대길 건양다경.
黃江 . 66
--첫사랑
젖은 눈망울 둥둥
하늘에 띄우고
내사 비워진 가슴
자운여 풀꽃 머리띠 엮어
네 마음 서리서리 풀어낸 사랑
아, 사랑이어라
그것이 첫사랑이어라
달빛 휘영청
밝은 만큼 멀리 떠난 너
그대 곁에 가까이 머물고픈
기다림은 투명하다
이렇게 쓸쓸한 밤
그림자 허허로이
달빛으로 지우는 서툰 언어.
黃江 . 67
--계곡이 있는 풍경
계곡은 스스럽다
울창한 수풀 헤치고
미답의 길 기어오르는 자벌레
마지막 갈증이 풀리는 사랑
그 메아리의 진폭
깊은 산속 호올로 흐르는
오, 그대의 쓸쓸한 눈빛
가녀리게 들리는 긴 호흡
어디로 가나, 기약 없는 예감
거기에 잠든 날다람쥐 한 마리.
黃江 . 68
--가을 저녁놀
그대 이 가을에
볼 붉은 웃음 앞세운 채
내게로 다가와 안길 때
별빛 지워진 그 자리에
풀꽃들이 저리도 피었네
그대 항상
이 산천초목 숨결 그득 머금은 채
서울 하늘에서 일그러진
내 모습을 보았네
굽이굽이 가을로 흐르는 그리움
산 끝에 불현 듯 걸렸더니
아아, 밤으로만 멀어진 그대 그림자
질척질척 빗겨간 발자국
창호지에 번진 물감으로 보겠네
이제사 바보같이 사랑으로 알겠네.
黃江 . 69
--동짓날 밤
밤이 짧았다
겨울새 홀연히 날아간 빈 가지
마른 나뭇잎 홀로 밤을 지새우고
차갑게 기다리는 한 마리의 새
그 새가 되고 싶었다
동지섣달 긴 밤, 허망으로
훨훨 날아간 그대
문살에 어른대는 그대 그림자
황진이의 사랑은 날밤인가
어쩐지 오늘 밤은 짧기만 하다.
黃江 . 70
--추억에서
1.
봄내음 향긋한 들녘
갯버들 하늘하늘 개울물 소리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순이야, 붉으레한 입술은 다물고
춤을 출거나 두둥실 춤을 출거나
두 손 꼭 잡고 아아, 오래도록...
2.
안개 속에 만약
네가 은비늘로 내린다면
바람 감싸안은 내가 뜨겁게 받으리라
미몽에서 다시 확인된 뽀얀 살결
깨물고 싶어라 촉촉한 향내음
희미한 기억으로
으스러진 채 풀려나간 허망.
黃江 . 71
--윷놀이
윷이야 모야
처음부터 내가 떠나야할
지점은 점지되어 있었다
무거운 등짐 지고
겨우 한 걸음 내 딛는 발걸름
갠가 걸인가, 윷판처럼
떨리는 한 생애가 질펀히 보인다
돌다리 두들겨 건너가듯
먼저 가버린 발자국을 닮을거나
차들이 죽죽 빠져나가는 새벽길
그 환희는 어느새 체증만 남고
어차피 가야하는 행보라면
석동무니 넉동무니 함께 업어
찌도까지라도 뛰어야 하리
도냐 개냐, 뒤돌아보디 마라
시퍼런 칼날 세우고 쫓고 쫓기는 나
안찌로 피할 나뭇숲은 보이지 않는다
뒷도로 돌아가는 저 먼 길
한 생의 종말 지점도
그렇게 점지되어 있을지라도.
黃江 . 72
--장승의 말
나는 너무 오래 여기 서 있는 게다
함께 살아온 얼굴들이
짐바리를 몰고 한숨지으며
더러는 눈물로 내 앞을 떠났어도
밤되면
나를 못잊어 차마 못잊어
내게로 향하는 그리움
별 하나하나 헤듯 쌓을 게다
그러나
나는 오래도록 여기 서 있어야 할 게가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씩
이젠 안식을 위해
어허흥 어허흥 눈물로 돌아오고
뒤따르는 면식 없는 아이들
아,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한다
동구 밖 길모퉁이에서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육신
이 몸 바스라질 때까지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게다.
黃江 . 73
--가재잡기
산골짝 개울물이
겨울잠을 채 깨기도 전에
절골로 삼거리골로
우리는 가재를 잡으러 갔다
먼발치에서는
아직 눈바람이 차가운데
개나리 산철쭉 찔레 산딸기 망개나무...
봄내음 알아차린 듯
잎눈 움추린 개울물이
돌 하나 들출 때마다 꿈처럼 누워 있는
도룡용, 개구리 알,
돌 치켜든 채 자세히 살펴보면
나의 꿈 한 조각도 마알갛게 갈려 있었다
썩지 못한 나뭇잎
갈갈이 찢겨진 내 꿈과 섞일 때
아서라, 이미 산그늘이 내리고
가재 한 마리 잡지 못한 채
가시덤불에 걸린 망개열매만
나와 함께 퇴색하고 말았다.
黃江 . 74
--낫을 갈면서
내 몫은 해야겠다
어제는 동생과 함께 뒷동산
나무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한테 꾸중을 들었다
개미와 베짱이의 교훈을 들으면서
나도 내 몫은 해야겠다
숫돌에 물을 적시고
낫날을 시퍼렇게 세운다
한 짐 지게의 풀을 벨꺼나
지게 목발이나 두들기며
육자배기 한 대목을 부를꺼나
에요, 요기, 에요, 요기...
타작마당 도리깨 후리는 소리
오늘 아버지의 선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들린다
무엇이든 내 몫은 해 내야겠다.
黃江 . 75
--현해탄을 생각함
아버지는 필시 선지자였다
1945년 8월 일본 천황의 항복 음성은 고향에 도착한 후에야 들었다
만세, 만만세--
어쩌면 원자탄 섬광 속 한 줌의 재로 변했을 나는
지금 행복하게 엄마 등에서 새록새록 잠들 수 있었다
만세, 해방이다
부웅 붕 관부연락선
늦은 봅 해풍이 선실에 낮게 깔리고
히로시마 원폭투하 방송은 계속 들렸다
만세, 만세, 침묵만 흘렀다
현해탄에 햇살 뿌리며 사그라지는 물거품
살아 돌아가야 한다. 오오,
우리 아버지는 선지자였다
해방이다, 광복이다, 만세, 만세, 만세---
黃江 . 76
--맷돌을 돌리며
비가 내린다
꽃들도 짓이겨지는 삭막한 오솔길
오늘밤은
나와 함께 흥건히 젖는 일뿐이다
지난밤 빗물에
떨어진 꽃잎 하나
우직스런 발자국에 다시 피 토하고
아마 나의 사랑
눈물의 무세만큼 스멀거린 아지랑이
비가 내린다
물에 불려진 콩알처럼 잘게 갈려져
만신창이로 일어서는 나
새로 탄생해야 할 영육(靈肉)의 조화.
黃江 . 77
--가야산 枯死木
이승과 저승
모두를 굽어볼 줄 아는 혜안이
꼭 필요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해돋이를 기다리던 나는
당대의 청청한 거목이었습니다
해가 뜨지 않는 날엔
어쩐지 구름 한 조각이라도 그리워졌습니다
어느 날 시나브로
내장까지 훑어간 역사를 간직한 채
그냥 서서 긴 잠에 빠졌습니다
지금까지 편안하게 잠들어 있습니다.
산을 오르고 내려가는 등산객
그들의 대화는 바람 소리뿐이었습니다
원망스런 이승의 마음은
한 뼘씩 내 육신을 몰락케 하고 있습니다
저승을 보는 눈만
왠지 멀겋게 열려 있습니다
뼛속까지 스민 찬바람과 함께
떠나야 할 시간을
내가 먼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黃江 . 78
--부고장을 받은 밤
어깨가 결리고 온몸이 쑤신다
봉창에 기우는 달빛
나와 함께 누워 낯선 밤을 떠간다
밤늦게 재넘어 온 기별
발자국 소리부터 불길하다
또 누가 먼저 그 길을 떠났나보다
밤으로만 후두기던 나뭇잎
온몸 식어가는
그의 마지막 숨소리를 듣는다
가늘게
내 눈길보다 먼저 간
이름 석 자만 주섬주섬 챙긴다
싸늘해진 이승에서.
黃江 . 79
--어는 원폭증 할머니
짓무른 나뭇잎이
스스로 생명을 저주하고 있었다
갓 피어난 새순은
마흔 해를 그냥 떨고 있었다
병명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이유라면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의 하늘
갑자기 쏟아진 섬광으로 기절한 일뿐이었다
잎은 마르고
거지는 뒤틀려 아아
여섯 살 때 하늘 한번 쳐다보고
녹아내린
나무껍질
하늘이여, 천형이었아이까
굳어지는 나의 몸으로는
그때 차라리 죽음에 묻힐 것을,
합천땅 내곡마을 어느 처녀 할머니
그냥 혜설픈 몸짓으로 웃고만 있었다
아아, 바섯구름-백혈구가 타고 있었다.
黃江 . 80
--시집살이
새악시가 물동이를 이고
새벽 낯선 눈길로
참새미에 물길르러 간다
친정 엄마는 잘 계실까
행주치마에 눈물 한 바가지 퍼붓고
또아리 끈만 잘근잘근 씹는다
초가지붕 위 청솔가지 타는 연기
검둥이 멍멍멍
치맛자락 따라오고 있다
행여 시어머니 새벽잠 설칠가봐
조심조심 정지문을 열었지만
벌써 사랑방 장죽 터는 소리가 들린다.
黃江 . 81
--장날에
검게 그을린 김서방 이마
주룩주룩 땀이 흐른다
어제는 삼가장
오늘은 합천장
내일은 대병장
휘어진 잔등 위에
들깨, 참깨, 마른 고추, 육종마늘...
이리가도 삼십 리길
닷새마다
재 너머 사돈댁 안부가 들리고
안골댁 혼담도 건네며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보는 막걸리 한 사발
장국밥에 구름이 떠돌고
김서방 마른 기침소리 들리면
벌써 파장인가
약장수 요굴구경 한 번 못한 채
간생선 몇 마리만 지게 목발에 매달린다
서산에 지는 해야, 에헤이요
장돌뱅이 되겠네, 에헤이요 에헤이요.
黃江 . 82
--서낭당
한낱 죄로 더덕더덕 누빈 육신
그대 앞에 한 껍질씩 벗어던지노니
어엿비 어엿비 받으시라
누가 새벽길에 먼저 와서
왼 새끼줄에
사죄의 오색 깃발을 걸어둔 채
한 무더기의 아픔을 쌓아 놓았나
그대 곁을 지날 적마다
지원도 다시 엉기는
어쩔 수 없는 삶의 찌꺼기
합장하고 다시 버리노니
오오, 이 부끄러움
한생을 기원으로 감쌀 수 있을까마는
오늘도 그대 제단에 뿌려지는 안개비
그 징소리의 여음을 듣고 있노니.
黃江 . 83
--폐묘(廢墓)
너무 숲 그늘에서 고이 잠들다가
몇 수년 알 수 없는 세월
이젠 지쳐서 그냥 버려졌나
조각난 빗돌(碑石) 뒹굴어
이름 한 자 기억할 수 없는 억새풀
풀잎에 가리워진 영혼의 울부짖음
아, 한 세대를 풍미하다가
잠든 양지쪽에서 흙이어라
흙이어라, 한 줌 비옥한 흙으로 남아
땅속 깊이 스민 풀뿌리로 만나리라
수맥처럼 내 혜진 육신으로 파고들 때
아픔도 없는 시간 그 언저리에
가끔 지나가는 바람소리나 들을꺼나
깨진 빗돌 다시 원석으로 세워질
아. 지금은 파혜쳐진 무덤 자국
예나 제나 그 위엔 눈부신 햇살 뿐.
黃江 . 84
--이별가
어둠은 연민으로 불타고 있었다
아마도 애태움에 익숙해진 걸까
오늘 청청하던 나뭇잎 사르라지고
쌓인 응어리
모두 묻어 버렸다
--차마 재 한 줌의 눈물은 없을 테지
한 방울 눈물로는
숨겨둔 밀어를 용해할 수 없었다
헤어진다는 거
눈물로 떠난다는 거
이 모두가 내 짊어진 고통일지라도
한 오라기 미움은 남기지 않았다
새벽녘에
황강 은모래 뿌리며
흩어지는 저 바람소리
오 원죄 한 웅큼만은 남아 있었다
밤으로만 무너지는 저 피울음.
黃江 . 85
--산신제(山神祭)
산신이여
당신이 지배한 맹수와 독사는 멀리 하소서
어딘가 감추어 둔 수렁은 버리소서
여기저기
독초가 무성하고 목충이 우글거리는
이 산천을 친히 다스리소서
산신이여, 떨고 있는 저 풀잎을 사랑하소서
우리가 일용할 한 줌 햇살과
물기와 기름진 토양만을 베푸소서
이름 없는 풀꽃들을 피우고
작은 벌레 하나라도 함께 있게 하고서
우리의 산신이여
--안개 걷힘. 산봉우리를 넘어가는 달은 아룸답다
--바람이 붐, 되살아난 산골짝 물소리와 어우는 산새소리가 우리의 아픔을 지운다
-태양이 붉게 타고 있음, 詩......
黃江 . 86
--오늘의 輓章
영구차 한 대가 서 있다
비를 맞으며 영원으로 진입하는
한 소님을 기다리는 중이다
영안실 문이 열리고
철책 담장 사이 솟아난 풀 한 포기
아침이며 제 목숨을 확인한다
출근길 세브란스병원 후문에
영구차 한 대 서 있는 날엔
술 마시는 날이다
섬광처럼 번쩍여야 할 노래
어쩌면 흐릿한 그림자로 누워
질척이는 목로에서 나와 함께 술을 마신다
퇴근 무렵 영구차가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한 번 벗어야 할
무거운 짐 훌훌 던졌나보다
그런데 어디로 갔을까
비어 있는 퍼도(鋪道)에
남아 있어야 상도꾼도
들려야 할 종구잡이 상여소리
오오, 모두 빗물에 흥건히 씻겨 갔을까.
黃江 . 87
--졸곡제(卒哭祭)
어쩌면
죽어서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을는지
알 수 없는 이 산천
향불 냄새로 가득하다
지곡(止哭)하라, 지곡하라
이승의 창가에는
곡소리만 애달파도
저승의 이정표는
황토흙 무덤 하나
어둠 속 깊게 빠져 들면서
이젠 산꿩 울음이나 들을 일이재
그리하여 이슬 젖은 풀꽃들이나
길게 기억하는 일뿐이재
하산(下山)한 외할머니 웃음 띤 영정 앞에
촛불만 가물가물
어쩌면 고향산천으로
나 죽어서도 돌아갈 수 있을까.
黃江 . 88
--회상의 노래
지금도 밤마다 내개 필요한 것은
고요로움 넘치는 고향입니다
새벽 별 하나씩 지워지듯
떠나간 사람들 모여
어디선가 비 젖는 소리에 귀기울입니다
어느 듯
비 젖은 밤이 십 수 년을 황강으로
나의 꿈 풀어 보내지만
어둠 속 감추어진 눅눅한 언어가
아름답기만 할 뿐입니다
밤마다 적막 속 따스한 꿈과 함께
고향을 찾아가는 일로 살아갑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