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들(4)
백파 홍성유 소설가
‘맛있게!’
백파 홍성유(伯坡 洪性裕) 소설가는 어떤 행사나 모임의 식사 자리에서 술잔을 높이 들고 이렇게 외친다. 일종의 건배제의에서 선창하는 구호이다. 동석한 일동들은 ‘즐겁게!’ 하고 후창을 외친다. 당시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건배제의 구호를 ‘지화자!’ ‘조오타!’로 한 것에 대비되는 구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때 어느 일간지에 ‘맛자랑 기행’을 연재하면서 전국의 유명 음식점을 순회하고 있었기에 식도락에 관하여는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건배구호를 창안하게 되었으리라.
그와 처음 만나 것은 1987년 초, 내가 예총에 입사할 때 조경희 회장 앞에서 그와 성춘복 시인이 입사보증인으로 도장을 찍어 주었을 때부터이다. 그는 문협의 이사와 예총 이사여서 거의 매일 그를 만나는 행운이 왔다.
그후 예총에서 발행하던 월간『예술계』가 어찌어찌한 사유로 1988년 12월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잠시 휴식기를 거쳐 재창간 작업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주간으로 초빙되고 나를 편집부장으로 발탁하여 계간『예술세계』를 1989년 6월에 탄생시키면서 같은 사무실에서 있게 되었다.
그는 무보수였지만 열과 성으로 잡지 만드는 일에 진두지휘했다. 필자 선정과 편집 방향 등 그동안 쌓아온 문화적 예술적 감각을 동원하여 ‘진정한 민족문화의 정립과 순수예술 창작의 활성화로 민족자주 정신의 고양을 통한 계도적 기능 확대’라는 창간 목적을 발간 지침으로 내세웠다.
그를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황 명, 김시철, 정벽봉, 성춘복 시인을 비롯하여 안장환, 유재용, 김병총, 조수비, 김녕희 등 소설가들이 매일 방문하여 나는 그들과의 교감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당시 무형문화재(태평무)인 강선영 예총회장과 최절로 사무총장이 재임하고 있어서 무용가, 화가, 서예가들과도 많은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가 ‘맛자랑 기행’ 취재가 있는 날이면 나를 동행시켰다. 물론 그의 친구나 문인들을 대동해서 탐방한 음식점에서 칙사대접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나면 음식점 사장과의 대담이 시작된다. 주 메뉴에서부터 특징과 규모, 역사 등 세세하게 메모를 하여 다음날 집필을 하는 것이다.
그는 계간『예술세계』가 월간으로 발전할 무렵 나에게 주간직을 맡기고 한국소설가협회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소설가협회의 세미나, 문학기행, 소설 낭독회 등 행사 때마다 나를 불렀다.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하와이 이민 100년 기념 문학세미나, 한-터어키 문학 교류, 한-몽골 세미나, 대마도 문학기행 등에 동참하게 된 것도 그가 나를 협회 준회원으로 등록을 해놓았던 덕분이었다.
나는 거기에서 많은 소설가들과 친분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지금까지도 그 우의를 돈독하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의 중후한 인품과 온화한 표정으로 항상 동료와 후학들과 대화를 즐기면서 술도 마시고 여행도 함께 즐기는 낭만적 기질에 모두가 존경하고 따랐던 것이었다.
그가 고희(古稀)를 맞아서 기념문집『고희의 언덕에서-79인의 회상-내 마음 속의 백파』를 간행하고 세검정 어느 중국 요리집에서 성대하게 잔치를 한 일이 있었다. 이 책에 수록된 나의 글 중에서「천년의 학」이라는 시를 그날 축시로 낭독했다.
웅비의 나래 활짝 펴고 / 창공 저 햇살로 빛나리 / 거기에 / 지혜가 넘치고 / 슬기가 충만한 거기에서 / 우리는 불타는 청운을 보았느니 / 아아, 찬연한 필봉 / 불꽃으로 일렁이는 혼이여 / 이 산하 가득 / 뜨거운 가슴 속에 무르녹아 / 흐르는 정감 / 그 물결 따라 / 거대한 옥토가 무성하리 / 한 점 이슬 / 옥구슬로 영롱하리 / 우리 모두 영원히 / 그 비상, 그 혼불을 닮으리 / 천년을 예감하는 우리의 학이여.
사실은 그와 함께 지낸 2년여의 시간을 제외하곤 그를 잘 알지 못했다. 옛날에 읽은「태양에 감사한다」와 영화로 본그리고 그후에 드라마로 본「장군의 아들」의 작가라는 정도의 인식뿐이었다. 그를 대하면서 한국의 문단과 문학의 범주가 광범위하고 다양하다는 점도 배우게 되었다.
어느 날 그가 들려준 에피소드 한 토막은 잊을 수가 없다. 「장군의 아들」을 집필하던 중 김두한과 기생들이 명월관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한 기생이 ‘홍도야 울지마라’를 열창하는 대목. 그 노랫말을 글 중에 삽입해야 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문득 떠올린 것이 문인들 중에서 누가 이 노래를 18번으로 부르냐였다.
아. 박재삼이다. 그는 즉시 전화를 걸었다. 새벽 2시. 깊은 잠에서 깨어나 수화기를 집어든 박재삼 시인. 몇 마디의 인사가 끝나고 ‘아아랑을 알고아는 이아람옥에...’ ‘뭐라꼬? 잘 안들려!’ ‘그래? 아아랑을 알고아아는...’ 깜깜한 밤중에 수화기에대 대고 ‘홍도야 울지마라’를 구성지게 부르고 그는 받아 적었다고 한다.
당시 박재삼 시인은 고혈압으로 쓰러져 발음이 어눌한 상태였다. 정작 놀란 것은 박재삼 시인 사모님이었다. 잠자다가 일어나 전화 한 통 받더니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니. 이 양반이 미쳤나?하는 것은 사모님의 솔직한 심정이라고. 그는 후일에 사모님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다는 것이다.
그는 야구광이었다. 특히 청룡기 고교 야구를 좋아했지만, 야구에 있어서는 해설가 못지않게 일가견을 가졌다. 야구경기가 있는 날은 만사를 제폐하고 동대문야구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한편 그는 낚시도 즐겼다. 그 외에도 바둑, 마작, 고스톱 등 잡기(雜技)에도 아주 능했다는 주변 문인들의 전언이다. 이처럼 그는 작가이기 전에 야구광이며 여행가이며 식도락가이며 잡기의 고수이지만 ‘신사’라는 작위가 어울린다. 동료들에게 친근하고 후배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노신사였다.
또한 그는 착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다도(茶道)에 심취한 인기 소설가로서 「비극은 없다」(1958),「비극은 있다」(1973), 「장군의 아들」(1987) 등 유명한 장편소설과「한국 맛있는 집 1010점」등을 발간하여 한국문단의 큰 별로 빛났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歲月不待人)는 옛말처럼 그도 이런 섭리를 거역하지 못하고 2002년 12월 24일 그토록 사랑하던 외동딸 다영이를 남겨둔 채 우리들 곁을 떠나 서울 우이동 카톨릭묘원에 영면하였다.
(문학공간 08.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