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집『서울허수아비의 수화』
불화(不和)의 시각과 명징(明澄)의 시
李 秀 和 (시인. 한국문협 부이사장)
1.
오늘날의 우리 시는 숱한 산문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시대적 위험에 처해 있는 것같이 느껴진다. 이런 시대에는 시라는 게 오히려 불확실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러한 진단은 아마도 피상적인 것에 불과할지 모르나 시의 당대적 상황은 독자에게나 시인 자신들에게나 불안스럽기 짝이 없을 터이다. 이런 원인을 주의해서 살펴보노라면 시창작에 부적절하며 시 그 자체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갖게하는 그런 문화적인 상황이 산업사회의 필요악이랄 수 있는 갖가지 산문의 범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이 시대의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산문 중에는 상상력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에 의해서 사물을 파악하게 되는 기능을 저해하는 독소가 허다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문, 연설, 논문, 방송, 논고, 강의, 안내문, 광고 따위의 홍수에 휘말려 있다. 따라서 이미지로 표현할 수 있는 삶의 진실성은 거듭 결핍돼 가고 우리들이 경험하는 삶의 진정성과 허위를 발견해내는 능력도 결여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 딜레마를 깨어있는 정신의 시각으로 이겨내려는 시인을 만남으로써 비로소 그 우리의 일상을 어리둥절케 만드는 산문적 삶의 실체를 내면 깊숙이 응시할 수 있을 터이다.
「서울허수아비의 手話」는 김송배의 첫 번째 시집이다. 그의 깨어있는 시각이 이 시집에서는 어떻게 문학적으로 형태화되고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김송배의 시세계와 그 포에지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2.
김송배의 시각이 부단하게 객관화하고자 하는 시점은 자신의 내면적 고뇌이다. 이는 대개의 깨어있는 동시대 시인들과 다를 바 없겠으나 그가 그 고뇌의 코아로 보이는 삶의 바람직한 정체에 대한 완결성을 추구하는 치열한 포에지를 지녔다는 사실은 그 나름의 변별점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그의 내면적 고뇌를 극복해내고자 하는 시정신은 삶의 존재론적 추구가 아닌 상황에 대한 인식론적인 애씀이고 현실에 대한 관심의 시각화에 값하는 동력원임을 알 수 있다.
그의 포에지는 곧 고뇌이다. 그 고뇌의 코아는 그가 진실한 삶 혹은 인간다운 삶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상황적 인식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현실 인식은 그렇다면 어떠한 시각이며 그에게 어떻게 부자유한 불화의 세계로 인식되고 있는가? 이 물음은 그의 시집명 『서울허수아비의 手話』가 단적으로 드러내 주듯, 도시적 삶의 불모성에서 오는 인간의 내면성-진실한 삶 혹은 인간다운 삶-이 박제된 현실의 의미와 구조를 밝힘으로써 해명되리라 보아진다.
『서울허수아비의 手話』에 실려있는 많은 시편들은 성급히 결론적으로 말하면 공통적으로 ‘나뭇잎과 영혼’의 이미지가 지탱하는 의미구의 구조로 되어 있다. 제1부 ‘아침 情景’에서 제5부 ‘홑꽃잎 뒤풀이’ 15편이 모두 그러한데 그 식물성 이파리의 빈번한 은유적 처리는 얼핏 보아 상투형으로 보일 정도이지만 단순히 비난해 버릴 수 없다는 데에 김송배 시학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1)‘허기진 은행잎 하나 / 나폴대다 / 바람이 되어 간다 / 떠나는 바람의 행방을 / 알 수 없어 / 아내의 눈망울은 흐려진다.(「아침 情景」)’이라든가,
(2)‘빈 하늘 / 달빛이 시려오고 / 젖은 이파리들이 / 울거나 혹은 잠이 들었다.(「空閑地에서」)’,
그리고 (3)‘한 웅큼의 넋이 고인 좁은 세상 / 한 사발의 절망을 어지럽게 퍼내고 / 마른 풀잎, 나의 草地 위에 / 물 한 모금은 뿌려진다 / 아린 속잎은 어둠만 핥고 / 흙의 열기로 찌드는 실뿌리 / 비집고 나갈 문은 잠겨 있어 / 좁은 공간, 끝없이 치닫는 허우적임 / 나의 영혼은 黃砂 속을 멀어져 간다.(「花盆」)’ 등의 시구에서 보이는 이파리 와 영혼의 세계는 다름 아닌 인간다운 삶 혹은 진실한 삶을 저해하는 현장이다.
(1)에서 보이듯, ‘은행잎’은 곧 그러한 현장내의 존재인 시인 자신이며 ‘바람’은 그 세계 속에서의 상황이다. 그래서 알 수 없는 바람의 행방은 자연스럽게 삶의 불확실성을 의미하게 된다.
(2)에서 보이듯, ‘이파리들’은 곧 시인 자신을 포함한 그의 분신들인 가족(특히 자녀)들이 ‘빈 하늘’과 ‘공한지’의 상황이기 때문에 울거나 혹은 잠들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울거나 잠든다 해도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이 시인의 시각적 구조이다. 그럼에도 그의 영혼은 왜 초지 또는 공한지를 벗어나기 위해 ‘끝없이 치닫는 허우적임’이어야 하는가?
(3)은 그의 영혼이 끝없이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의 시각세계가 진실한 삶 혹은 인간다움을 허용치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린 속잎은 어둠만 핥고 / 흙의 열기로 찌드는 실뿌리’가 비집고 나갈 문도 잠겨있는 세계에서는 시인뿐만 아니고 우리 모두가 생명력을 상실해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이파리’의 세계는 인간다움의 토양이 척박한 공간인 것이다.
3.
그렇다면 ‘이파리’의 세계란 터무니없이 비인간적 안티 휴머니티의 공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일까. 달리 말하면 ‘이파리’의 현실은 대체 왜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가? 여기에 이르면 김송배의 시각은 정지한다. 그의 현실에 대한 시야는 결코 확대되지 않는다. 다만, ‘허물을 벗는다 / 흙먼지 하늘 가득 / 진눈깨비와 석이는 날은 / 한 까플씩 / 껍질을 깎아내는 / 아픔이 남는다 / 하루 열 두 번은 / 맨살 할퀴는 바람이 불고 / 피 흘리며 벗겨도 / 다 벗지 못하는 우리의 허물 / 제자리에 서 있으려는 / 끈끈한 핏기 위에서 / 날마다 / 허물을 벗어야 하리(「허물벗기 연습」)’ 등에서와 같이 , 이들 세계 속에서의 삶은 ‘허물’ 투성이임을 거듭 표명하며 ‘안개도 걷히고 / 오늘은 쾌청 / 한치 앞 可視거리를 잊은 / 우리의 일상(「겨울일기」)’에서처럼 이 세계에서 인간다움 혹은 진실한 삶을 추구하는 일도 충족될 수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세계의 정체를 좀처럼 해명하지 않는다. 왜일까. 시인의 진술에 따르면 ‘회오리바람 한 올에 / 표백되는 꿈 조각 / 구멍 뚫린 가슴들은 / 지평선 위에 버려져 / 맑지 못한 웃물 / 천년을 흘러내려도 / 우리들은 그 아랫물만 마신다(「아랫물을 마시며」)’에서와 같이 시인은 물론이고 모든 동시대인들이 ‘맑지 못한 웃물’을 아마도 더러운 줄 알면서도 용인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멀리 쓰러진다 / 누군가 마른 풀씨만 씹다가 / 썩지 않은 마음 한 쪽 남겨놓고 / 한생의 막을 내리는가 // ....오늘밤 / 귀에 젖은 물소리는 / 밤의 중심으로 흐르고 / 홀로 잠들지 못하는 섬 하나 / 거기에 나는 / 그리움처럼 남아 있다(「바람」)’와 같은 구절들에 잘 드러나듯이 모든 동시대인들이 고립된 개인으로 절망적인 자폐증에 이를 것이며 세계와의 갈등에 의해 초래된 그러한 증세의 심화는 마침내 화해할 뜻조차 포기하는 데에 기여한다. 일종의 세계 상실이다. 시인 역시 그러한 자폐증의 심화로 결국은 자아 방기를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그의 절망적인 세계로부터 구원될 수 있는 길이 전혀 막혀있는 것만은 아니다. ‘싸릿대 울안에 / 오색빛깔이 깔린다 / 겨우내 잠겨있던 / 빗장을 열고 / 헛간 구석까지 돌아보는 / 아버지의 음성 / 봄바람 잠 깨우는 오두막 / 활짝 문은 열리고 / 살아있는 개울물 소리 / 소리의 긴 설레임 끝에 / 무거운 나의 짐을 부리고 / 하품하던 영혼의 씨앗은 허물을 벗고 새옷을 입는다.(「바람四季.2,봄」)’에 이르듯 김 시인이 구원을 추구하는 적극적 세계에는 자폐증의 시각보다 훨씬 건강한 눈이 열려져 있다.
‘아버지의 음성’이라던가, ‘새옷’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이미하든지 간에 그리고 이 세계와 그와의 불화가 ‘무거운 나의 짐을 부리고’로써 극복되었든 아니든 간에 이러한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영혼의 씨앗’이 ‘허물’을 벗어났다는 시인의 뜨거운 열의는 다음과 같은 명징(明澄)한 삶의 적극성이 생동하는 작품을 완성시키게 된다.
나는 바람일레
너는 풀잎이거라
먼 산마루에서
입김 가득 부을 때
이른 새벽
이슬 한 모금으로 일어서는 너
나는 꽃바람일레
너는 풀꽃을 피우고
마침내 나의 손짓으로
햇살이 비워둔
시린 품에 돌라와
젖은 꽃송이 달래면서
어두운 그림자는 지우거라
나는 고운 바람일레.
--「手話」 전문
이처럼 소박할 정도로 명징한 원망(願望)의 세계가 그의 불화의 세계이다. 건강함은 말할 나위 없겠다. 다만, 시집 전체로 보아서 이와 같은 건강한 세계가 오히려 불화의 세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소지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연작시 「홑꽃잎 뒤풀이」의 다양한 정서적 양식화라든가 적절한 통사적(統辭的) 스타일은 시인 김송배의 앞으로 보다 견실한 포에지의 시각과 함께 기대해도 좋으리라 믿는다.(‘89. 2. 『예술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