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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익산향토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귀희
제121차 부안답사 익산향토문화연구회 2009년 9월 12일(토요일) 대체로 맑음
오늘에 답사 일정은 영등1동 자치센터 앞에서 8시에 출발 예정 이였으나 조금 늦어져 8시 30분에 출발하여 →부안구암리지석묘군→실상사지→석두암(봉래정사)→직소폭포 →점심(부안바지락죽) →부안댐→새만금방조제→수성당(격포리 죽막)→금구원조각전시관 →유천리도요지→김상만가옥(줄포) →출발지도착→저녁식사. 오늘도 회장님(이택희)께서 해설을 맡아주셨는데, 답사 중 새만금방조제에서 회장님 자동차 고장으로 인해 수성당은 최옥환원장님께서 설명해주셨으며, 고장수리 후 회장님께서 합류하셨다.
부안 구암리지석묘군 사적 제103호 전북 부안군 하서면 석상리 707에 자리하고 있다. 지석묘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으로서 고인돌이라고도 하며,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인 바둑판식(남방식)이 있다. 구암리 유적은 1956년에 처음 조사되었고, 1982년에 사적으로 지정된 것으로 민가의 울타리 안에 있던 것이다. 처음 조사할 때는 모두 13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현재 10기만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대체로 자연암석을 떼어내 덮개돌로 사용한 바둑판식 지석묘이다. 구암리 고인돌 무덤 가운데 특히 뚜껑돌이 가장 큰 것은 길이 6.35m, 너비 4.5m가 되며 거북모양으로 생겼고 보통 4개의 받침돌을 이용하는데 반해 8개를 둥글게 돌려 세워놓은 것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원불교 변산 제법성지(制法聖地) 봉래정사[蓬萊精舍] 석두암
부안군 내변산탐방안내소에서 직소폭포로 오르는 길에 들어서 5분 남짓 걸으면 만나는 실상사지 인근에 있다. 직소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은 봉래 구곡 굽이굽이 돌아서 변산 앞바다로 흘러간다. 원불교 교조 소태산박중빈은 이 골짝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한 편의 시를 썼다.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 “이 뜻을 아는 사람은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고 했다.”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는 전남 영광에서 원불교를 개교하고 1919년 이곳 봉래산으로 들어와 새 회상의 교법을 반포하고, 1921년 석두암을 지었다. 봉래정사에서는 초기 교서를 초안하고 창립의 인연들을 만났으며 1924년 익산총부로 거처를 옮겼다. 6.25때 소실된 것을 1980년 이 터를 기념하여 일원대도비(一圓大道碑)를 건립하였다. 변산 제법성지는 대종사가 5년간 기거하며 교법을 반포한 곳 이였으며, 교법을 반포한 봉래정사(蓬來精舍)는 그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변산 제법성지는 소태산 대종사가 혈인 기도를 마치고 원기 4년 (1919) 10월 변산에 들어가서 교법을 제정하고 교단 초기 인연들 특히 익산 총부(현 중앙총부) 건설의 인연들을 만나면서 원기 9년(1924) 5월까지 기거한 곳이다. 대종사는 일찍부터 새 회상 창립의 준비를 위한 휴양처를 물색하여 원기 4년(1919) 3월에 오창건을 데리고 부안 봉래산(변산) 월명암에서 10여일 유한 후 돌아와, 7월말에는 다시 정산종사를 보내어 미래의 근거를 정하게 하더니 10월에 이르러 몇 해 동안 수양할 계획 아래 월명암에 행차하였다. 이 후 대종사가 월명암에 계신다는 소문이 인근에 퍼지자 전주, 김제 등지에서 송적벽 등이 달려와 모시기를 원하는지라 그 해(1919) 12월 봉래산 중앙지인 실상사 옆 몇 간 초당에 거처를 정하게 하고 몇몇 제자와 더불어 간고한 살림을 하시면서 심신의 휴양에 주력하였다.
부안실상사지[扶安實相寺址] 전북기념물 제77호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164에 있는 절터. 실상사는 내변산의 천왕봉과 인장봉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689년(신문왕 9)에 초의선사(草衣禪師)가 창건하였고, 조선시대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최근에 와서는 원불교 교조 박중빈(朴重彬)이 이곳에서 수련하여 도통하였다고 전해진다. 변산에는 실상, 내소, 선계, 청림 등 4대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고려시대에 만든 불상과 대장경 등 중요한 유물을 소장하고 있었으나, 1950년 6·25전쟁 때 사찰과 함께 전부 소실되었다. 또 이곳에는《효령대군원문(孝寧大君願文)》 《고사경(古寫經)》 《고인경(古印經)》등 수백권의 책이 있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와편 등이 출토되었고, 6·25전쟁 전에는 대웅전, 나한전(羅漢殿), 산신각(山神閣), 요사채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특히 대웅전 안에는 《화엄경소》 등 경판이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복원된 실상사는 대웅전과 산신각이 있다.
직소폭포 [直沼瀑布]
부안군 진서면(鎭西面)에 있는 폭포로 살상사지를 거쳐 약1,2Km를 더 오르면 직소폭포를 만난다. 선인봉(仙人峰)의 동쪽 산자락에 형성된 계류폭포(溪流瀑布)로, 높이 20m 이상을 비류(飛流)하여 옥수담(玉水潭)에 떨어진다. 그 밑에 제2·제3의 폭포가 또 있다. 현지인들은 이 폭포와 그 일대를 내변산(內邊山)의 제일 경승으로 치고, 변산 8경의 하나로도 꼽는다.
부안댐 [扶安─]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中溪里)에 있는 다목적댐이다. 1990년 2월에 착공하여 1996년 12월 완공되었으며, 총사업비는 620억 원이 들었다. 서해안 개발에 따르는 인구 증가와 산업화 및 도시화의 촉진으로 급증하는 용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성하였다. 댐 규모는 높이 50m, 길이 282m, 유역면적 59㎢, 체적 614t, 계획방류량 664㎥/sec, 유효저수용량 3600만㎥이다. 건조 형식은 콘크리트 표면 차수벽형 석괴식이다. 변산반도국립공원 내 남서부 산악지인 내변산(內邊山) 중계계곡에 있으며, 동진강(東津江) 유역에 인접해 있다. 부안읍에서 변산(邊山:508m) 쪽으로 18㎞ 떨어져 있다. 1990년 2월에 착공하여 1996년 12월 완공되었으며, 총사업비는 620억 원이 들었다. 댐 건설에 따른 용지보상 대상지역은 1군 2면 3개리(부안군 변산면 중계리·대함리, 상서면 청임리)이며, 수몰지는 295만 7000㎡에다 19만 1000㎡의 공사용 부지가 편입됨으로써 총 314만 8000㎡에 달했고, 이주민은 96세대 323명에 이르렀다. 현재 부안군·고창군의 상수원 역할을 하고 있으며, 새만금지구의 공업용수까지 공급한다. 댐의 완공으로 중계계곡에 물이 들어차 일대가 호수로 변하여, 기존의 갖가지 기암괴석과 어울려 절경을 이루면서 전라북도 지역의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었다. 주변 지세가 험하고 댐으로 들어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경치가 이어진다.
새만금사업[새萬金事業] 전라북도 서해안에 방조제를 세워 갯벌과 바다를 땅으로 전환하는 간척 사업이다. 2007년 11월 22일 국회에서 '새만금 사업 촉진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새만금 방조제는 기존에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알려졌던 네덜란드의 자위더르 방조제(32.5km)보다 500m 긴 33km의 길이로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가 되었다. 전라북도 군산, 김제, 부안 앞바다를 연결하는 방조제 33km를 세우고, 그 안에 땅 28,300 ha, 호수 11,800 ha를 만들 계획이다. 사업 자체는 전북 옥구군 옥서면을 중심으로 한 금강, 만경강, 동진강 하구를 둘러싼 갯벌을 개발하려는 옥서지구농업개발계획에서 출발하였다. 이는 나중에 새만금사업으로 바뀌었다. 원래 옥서지구농업개발계획은 1단계와 2단계로 나뉘어져있었다. 1단계는 금강 하구둑을 건설하여 배수시설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2단계는 김제지구에 방조제를 쌓아 갯벌을 간척하고 만경강 주변 농경지에 관개배수시설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1987년 12월 10일 대선후보로 출마하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의해 정치적으로 등장하였다. 행정 구역 지정 새만금은 전체 면적 401㎢ 가운데 현행 행정구역상 전체 간척지 면적은 71.1%가 군산시, 15.7%가 부안군, 13.2%가 김제시 관할이 될 예정이다. 이 때문에 자치단체간에 관할구역 지정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새만금의 명칭과 의미 ‘새만금'이란 명칭은 김제·만경 방조제를 더 크고 새롭게 확장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예부터 김제·만경평야를‘금만평야'로 불렀는데, 여기서‘금만'이라는 말을 ‘만금'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덧붙여 만든 신조어이다. 오래 전부터 옥토로 유명한 만경· 김제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이 일구어 내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새만금의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때는 1987년 11월 2일이다. 당시 정인용 부총리 주재로 관계장관회의에서 황인성 농림수산부 장관이 처음으로 서해안 간척사업을 '새만금간척사업'이라는 이름을 공식 사용하였다. 사업개요 - 사업명 : 새만금종합개발사업 - 사업목적 : 동북아의 경제중심지로 개발 - 위 치 : 전라북도 군산시, 김제시, 부안군 일원 - 사업면적 : 40,100㏊(토지 28,300㏊/담수호 11,800㏊) - 주요공사 : 방조제 33㎞, 배수갑문 2개소, 방수제 125㎞ - 사업기간 : 방조제(1991~2009년)/내부개발(2009~2020년)총30년 공사현황
1호 방조제 - 1호 방조제는 변산면 대항리와 가력도를 연결하는 4.7km 구간으로 평균 높이20m, 평균 밑너비 201m로 대우건설에서 시공 하였으며, 98년 12월 준공되었다. - 이구간은 새만금 방조제 전구간 중 유일하게 개방되어 현재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가력배수갑문 군산시 가력도에 축조된 가력배수갑문은 콘크리트 구조물에 수문(8련)을 제작 설치하여 홍수시 홍수배제 등 담수호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설치되었으며, 2003년 12월 준공되어 현재 운영 중에 있다. 2호 방조제 2호 방조제는 가력도와 신시도를 연결하는 9.9km 구간으로 평균 높이 35m, 평균 밑너비 290m로 현대건설에서 시공 중에 있으며, 2006년 4월 물막이공사를 완료하고 현재 단면완성을 위한 공사를 시행하고 있다. 3호 방조제 3호 방조제는 신시도와 야미도를 연결하는 2.7km 구간으로 평균 높이 16m, 평균 밑너비 198m로 대림산업에서 시공 중에 있으며, 1994년 7월 물막이공사를 완료하고 현재 친환경부지 조성공사를 시행하고 있다. 4호 방조제 4호 방조제는 야미도와 비응도를 연결하는 11.4km 구간으로 평균 높이 20m, 평균 밑너비 290m로 대우건설에서 시공 중에 있으며, 1994년 7월 물막이공사를 완료하고 현재 친환경부지 조성공사를 시행하고 있다. 신시배수갑문 군산시 신시도에 축조된 신시배수갑문은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배수갑문으로서 홍수시 홍수배제 등 담수호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콘크리트 구조물에 수문(10련)을 제작·설치하였으며, 2006년 12월 준공되어 현재 운영 중에 있다. 새만금의 미래 농업단지 조성 : 친환경 복합농업과 생태작물 재배를 통해 국가경쟁력을 확보하고 고부가가치 농산물생산과 식품산업시설을 조성한다. 첨단산업단지 : 기계, 신재생에너지, 첨단소재, 조선기자재 등을 유치시켜 자연이 품은 첨단산업활력도시로 개발한다. 신재생에터지단지 : 미래 신·재생에너지 산업 및 연구시설을 집중 육성하고 친환경적인 녹색에너지단지를 조성한다. 관광단지 : 가족형 관광과 해양레저가 함께하는 관광도시로 개발하고 해양·생태· 환경교육시설 및 레저시설을 건설한다. 배후도시 : 자연과 어우러진 주거 문화공간을 마련하고 살고 싶은 곳, 머무르고 싶은 곳으로 조성한다. 국제업무단지 :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성장 기반을 마련하고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비즈니스 시설을 조성한다. 신항만 물류단지 : 국제물류 거점항으로 육성하고 아시아 중심 거점항으로 성장할 시설을 도입한다. 과학연구단지 : 첨단과학단지 건설을 통한 국제경쟁력 확보하고 미래형 첨단과학단지를 조성한다. FDI 첨단산업단지 :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첨단산업단지 조성하고 특화된 미래 유망 첨단산업시설 유치한다. [4]
수성당[水城堂] 전북유형문화재 제58호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산35-17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 1974년 9월 27일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이 지방의 해안마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을의 공동 신앙소로, 건평 4평의 단칸 기와집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수성당에서 칠산(七山)바다를 수호하는 수성할머니라는 해신(海神)을 받들어 모셨는데, 이 여신은 키가 매우 커서 굽나무깨신을 신고 서해바다를 걸어 다니며 깊은 곳은 메우고 위험한 곳은 표시를 하여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랑을 다스려 고기가 잘 잡히게 해준다고 한다. 또 수성할머니는 딸 여덟을 낳아 각도에 딸을 한 명씩 시집보내고 막내딸만 데리고 살면서 서해의 수심(水深)을 재어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그래서 수성당을 구낭사(九娘祠)라고도 한다. 신당 인근 주민들이나 어부들은 해신과 그의 딸 8자매 신을 정성껏 모시고 있다. 매년 음력 정초에 격포(格浦)마을에서는 삼색 실과와 술·과일·포(脯) 등을 차리고 궂은 일이 없고 생기복덕한 제주(祭主)를 뽑아 정성껏 제사지낸다. 제일(祭日)은 정월 초사흗날인데, 근동 어민들이 모두 모여 정성스럽게 치성을 드린다. 당 안에 무신도(巫神圖)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불타 없어졌다. 상량(上樑)에 ‘崇禎紀元後四甲子朝鮮純祖四年, 1804 六月’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850년(철종 원년) 이전부터 신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1864년(고종 원년)에 3차로 중수한 것으로 보이며, 1940년에 4차로 중수하였다. 옛 원형은 찾아볼 수 없고, 지금의 신당은 1973년에 중건한 것이다. 이 수성당 주변은 성스러운 곳으로 함부로 접근이 금지되었으며, 절벽 주변에는 동백나무와 시누대가 무성하다. 1960년대 초까지 수성할머니의 영정이 있었는데, 외부인의 출입이 많아지면서 없어졌다 한다.
금구원조각전시관
부안유천리도요지[扶安柳川里陶窯址] 사적 제69호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10-1. 가마터는 강진 대구면 가마터 다음가는 우수한 재료와 제작기술을 이용하여 고려왕실과 귀족층이 사용하는 최상급 도자기를 생산한 곳으로서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부안면 유천리 도로변에 있으며 유천리 도요지는 1963년에 사적 69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강진과 함께 고려청자의 2대 생산지로서 12세기 중엽에서 말엽까지의 최전성기에는 80여개의 가마가 있었을 만큼 대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발굴되기 시작한 이곳 가마터는 우수한 파편을 지닌 요지의 퇴적층은 거의 파괴되었다. 또한 이곳에서 나온 수백 점의 고려자기는 대부분 일본으로 빼돌려졌고, 더욱이 1945년 해방 후에는 야산 개간허가를 내주어 더욱 파괴되고 말았다. 이 가마터는 일제가 이미 1939년에 사적으로 지정한 만큼 해방 후 곧바로 보호조처를 했더라면 어느 정도 원형 보전이 가능했으리라는 아쉬움이 크다. 지금은 대부분 밭과 과수원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늦게나마 이곳 유천 가마터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67년 국립박물관 조사반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이 때 보물 제346호로 지정받은 청자상감진사모란문매병 등 국보, 보물급 문화재 가치를 지닌 청자가 수십 점 발굴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중앙박물관과 이화여대 박물관 등 다른 곳에 소장돼 있어 이 지역 사람들조차 이곳의 진가를 잘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이곳 요지에서 출토된 자기편을 수습해보면 그 모양은 투각 돈(墩)을 비롯해서 네모난 청자판, 대반, 접시, 탁잔, 화분, 합, 발, 완, 각종 매병, 술병, 기름병, 향로 등 다종다양하며 특히 1m 이상 되는 매병도 있다. 문양의 표현 기법은 음각, 양각, 투각, 상형, 상감, 퇴화, 진사, 철화, 철채 등 다양하며 국화, 모란, 연꽃, 운학, 구름, 운룡, 파도, 물고기, 석류 보상화, 봉황 등은 상감기법으로 표현되었다. 유색도 녹청, 담청, 담록, 녹갈, 황갈, 천청색 등 다채롭다. 또한 이곳에서는 고려백자와 진사상감, 회청자, 퇴화문, 흑유청자, 철사 등도 발견되고 있다.
부안 김상만가옥[扶安金相萬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50호 전라북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 445에 있는 한말의 가옥. 1984년 1월 10일 중요민속자료 제150호로 지정되었다. 이 가옥은 김상만(1910∼1994)의 아버지인 김성수(金性洙:1891∼1955) 선생의 고택이다. 김성수 일가는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 부락에서 살다가 화적떼들의 횡포로 이사와 1895년에 이 집을 지었다. 전통적인 초가집으로, 1895년에 안채· 사랑채·헛간채를 지었고, 1903년 안사랑채와 곳간채가 추가로 지어져 완성되었다. 1982년 억새풀로 지붕 이엉을 바꾸었고, 1984년 문간채를 중건하였다. 1998년에 본래의 볏짚 이엉으로 지붕을 다시 꾸몄다. 김성수는 친아버지와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양아버지는 큰 부자여서 줄포리에서 가장 좋은 터를 골라 집을 지었다. 안채는 서향이며 정면 6칸 반이다. 사랑채는 4칸으로 남향이다. 헛간채도 남향으로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있다. 안사랑채는 서향으로 일자형 평면이며, 정면 3칸이다. 곳간채는 동향이며 남북으로 길게 지어졌다. 이곳의 해설은 관리자인 맹기풍씨가 해주셨다. 우리는 이곳을 마지막으로 즐거운 답사를 마치고 출발지로 돌아와 요즘 신종플루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청국장으로 즐거운 저녁식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우리회원님들 다음 답사 때 까지 청명한 가을 하늘처럼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이번에 참석 못하신 회원님들 다음 달에 꼭 만나요. 이곳에 다 올리지 못한 그림은 답사앨범에 올리겠습니다. 회원님 사진은 회원폰앨범에서 만나보세요. "라마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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