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國父, 샤를드골 前대통령 2차대전때 英에 임시정부 세웠죠. 당시 임정 국기에 쓰였던 십자가… 최근 마크롱이 궁 로고에 넣어
#에마뉘엘-마크롱 (Macron ·41)프랑스 대통령이 얼마 전부터 #엘리제궁#로고 에 #로렌십자가문양 을 넣어 쓰기 시작했어요. 보통 십자가는 가로·세로가 하나씩인데, 로렌 십자가는 가로 두 개, 세로 하나예요.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 로렌 지방에서 중세 시대부터 써왔지요.
이 #십자가 는 #샤를-드골 (DeGaulle 1890~1970 ) 전 대통령과 연관이 깊어요. 드골 전 대통령은 이 십자가를 제2차세계대전 당시 자신이 영국에 세운 임시 정부 '자유 프랑스'의 상징으로 삼았어요.
마크롱 대통령이 지지율이 떨어지니까 그걸 회복하려고 #드골 전 대통령의 후광을 빌리려 한다는 평도 나와요. 드골 전 대통령은 프랑스의 국부(國父)로 존경받는 인물이거든요. 어떤 업적을 세운 사람이었을까요?
◇ 드골, 영국에 자유프랑스를 세우다
파리의 대표 거리인 샹젤리제 에는 드골 전 대통령 동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것처럼요. 프랑스 국민이 드골 전 대통령을 얼마나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는지 와닿지요?
▲ 1944년 #샤를드골
(가운데 모자 쓴 사람)이 시민들과 함께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고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드골은 1912년 #생시르#육군사관학교 를 졸업하고 #페탱 (Pétain ·1856~1951) 대령이 지휘하는 #보병연대 에서 군인 생활을 시작했어요. #제1차세계대전 이 일어났을 때 #대위 로 #참전 했습니다. 전쟁 중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독일에서 포로 생활을 하기도 했어요. 전쟁 후 1921년부터 1년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 교수를 지냈지요.
드골은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공격했던 베르됭 지역을 끝까지 지켜낸 페탱을 존경했어요. 페탱도 드골의 재능을 인정해 전후에 드골이 교편을 잡을 수 있게 도왔지요.
하지만 군대를 어떻게 개편할지 입장이 갈리면서 둘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어요. 드골은 독일이 다시 프랑스를 공격하는 걸 막으려면 기동력을 갖춘 소수의 첨단 기계화 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어요. 페탱이 그 의견에 반대했고요.
그때 독일에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해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어요.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유럽에서 #제2차세계대전 이 시작됐답니다. 이때부터 드골과 페탱은 완전히 갈라섭니다.
1940년 5월 독일이 프랑스로 쳐들어오자, 국방부 차관이던 드골은 계속 항전하며 독일과의 강화 조약을 거부했어요. 하지만 페탱은 전세가 불리하니 한발 물러서서 휴전 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알베르-르브룅 (Lebrun·1871~1950)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페탱의 손을 들어줬어요. 페탱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하고 수도를 보르도로 옮겼지요. 그해 6월 중순 독일에 저항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낀 페탱은 휴전을 선언하고 독일군에 프랑스를 넘겨줬어요.
프랑스 영토의 3분의 2가 #독일군 손아귀에 넘어갔어요. 페탱이 이끄는 #비시정부 가 독일의 감시 아래 나머지 3분의 1일 다스렸고요. 비시는 프랑스 중부에 있는 도시 이름이에요. 기존 프랑스 헌법은 폐지됐고 그해 7월 신헌법이 발표됐어요. 국가 원수인 페탱이 입법·행정권을 장악했고 의회 기능은 정지됐어요.
비시 정부 아래 프랑스는 독일 눈치를 보아야 했죠. #유대인#박해#정책 이 프랑스에서도 실시돼, 프랑스에 있던 유대인들이 독일로 끌려갔어요. 프랑스 경찰들은 독일에 저항하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 #저항군 ) 대원들을 #체포 해 독일로 보냈죠.
페탱이 #친독일 성향의 비시 정부를 세울 때 드골은 런던으로 갔어요. 그해 6월 18일 드골은 영국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조국을 구하기 위해 런던에 모여 힘을 합쳐 함께 싸우자"고 호소했어요. 곧 드골 곁에 다양한 정치 성향을 지닌 군인·공직자·기업가·학자들이 모였죠.
드골은 프랑스 군인들과 피란민들을 모아 임시 정부 '자유 프랑스'를 만들고, 프랑스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어요. 프랑스 내에서도 비시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레지스탕스를 결성해 프랑스 해방을 위해 싸웠지요. '6월 18일의 호소'가 있은 지 열흘 뒤 영국 정부는 드골을 자유 프랑스 지도자로 인정했어요. 비시 정부는 드골을 '영국의 꼭두각시'라고 비판했어요.
◇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다
1944년 6월 영국·미국·프랑스 연합군이 북부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기습 상륙했어요. 일명 #노르망디상륙작전 이라고 합니다. 허를 찔린 독일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파리에 있던 레지스탕스 대원들도 독일군에 맞서 싸웠어요. 일주일 전투 끝에 독일의 항복을 받아냈지요. 그해 8월 드골이 드디어 파리에 입성했어요. 시민 100만 명과 샹젤리제 거리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행진을 했어요. #양규
비시 정부도 무너졌어요. 드골은 자유 프랑스를 프랑스 임시 정부로 정한 후 #임시대통령 이 됐어요. 드골이 이끄는 임시 정부는 페탱을 비롯해 비시 정부를 구성했던 관료들을 민족 반역자로 보고 간첩 혐의로 체포했어요. 드골은 프랑스를 회복한 후 영·미 연합군과 함께 독일을 추격해 전승국이 됐어요. 프랑스는 미국·영국·소련과 함께 독일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아냈어요. 1946년 #뉘른베르크#국제전범재판소 에도 #전승국 의 일원으로서 전범들을 심판할 판검사와 조사관들을 파견했죠.
드골은 #총리 와 #국방장관 을 지내면서 프랑스를 #안정 시켰어요. 1953년 정계에서 은퇴했다가 1958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나자 정계에 복귀했어요. 그는 국민투표를 통해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이 강력한 권력을 갖는 제5공화국을 만들어 초대 대통령이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