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선한 목자는 그 좋은 목자라는 뜻으로 내가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알아본다는 뜻이다.
2) '기노스코마이'는 ‘하나 되어 알다’는 뜻으로 양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라는 뜻이다.
3) 겉 사람이 끝나고 마음 너머의 속사람이 될 때 온전히 하나 될 수 있다.
4)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계보는 믿음의 선진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빛에 관한 표현이다.
나. 본론
1) 선한 목자는 그 좋은 목자라는 뜻으로 내가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알아본다는 뜻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 10:14)”
(에고 에이미 호 포이멘 호 칼로스’ 카이 기노스코 타 에마, 카이 기노스코마이 휘포 톤 에몬)
(바른 번역은 나는 그 좋은 목자다. 나는 그 나의 양들을 알고(기노스코) 그 나의 양들도 그 나에 의해 하나 되어 알게 된다(수동태).)
“기노스쿠시 메타 에마” 번역하기가 어려운 문장으로 번역이 잘못되었다. ‘기노스코마이 휘포 톤 에몬’은 한글 번역에서 빠져 있다. 직역한다면 ‘그 나의 것들에 의해 하나 되어 알게 되다’ 인데 ‘나의 것들(에몬)’이 소유격 1인칭 복수다. 소유격 1인칭 복수는 양들과 예수가 하나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 양들이 하나 되어있다. 1인칭이다. 번역한 한글 내용은 양과 예수가 분리된 것으로 잘못 번역되었다. 예수와 양은 하나가 맞다.
2) '기노스코마이'는 ‘하나 되어 알다’는 뜻으로 양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라는 뜻이다.
‘기노스코마이’는 동사 현재 수동태로 ‘하나 되어 알게 되다’다. 양들이 예수와 하나 되어 있는 내용이다. 이래야 겉 사람과 속사람이 온전하게 소통이 된다. ‘좋은 목자이신 예수와 하나 되어있다.’라는 전제가 되어야 요 10:1부터 말씀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경 말씀을 알 수가 없다. 이들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섬긴다. 마가의 다락방 사건 이전의 예수 제자들 또한 그러했다.
본문 14절의 의미는 알란드역과 스데판 역이 같다. ‘알고’ ‘아는 것’으로 번역한 ‘기노스코’는 ‘하나 되다’, ‘한 몸을 이루다’다. 하나님과 하나 되어 모든 것이 열린 상태가 되어야 알게 되므로 마음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초월함이다. 이 의미를 따라 다시 번역해야 한다. 성경 전체를 다시 번역해야 할 이유다.
3) 겉 사람이 끝나고 마음 너머의 속사람이 될 때 온전히 하나 될 수 있다.
겉 사람과 속사람이 온전히 하나 된다는 내용은 잘못된 것이다. 이처럼 파로이미아는 비유(파라볼레)로 오신 예수와 하나 되어 체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다. 예수의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 사건의 체험을 통해서 구약에서부터 말씀으로 이어온 닫혀 있던 이 파로이미아를 자신 안에서 열게 되었다.
마가의 다락방 사건의 체험이 파로이미아를 여는 파라볼레다. 파라볼레가 온전히 드러나면 예수 그리스도 곧 에고 에이미는 실제가 된다. 그러므로 예수가 파라볼레로 오신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말씀을 여는 열쇠는 파라볼레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나와 하나인 에고 에이미가 되어야 한다. 이 일은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꾸란에 나오는 하나님 아브라함 예수와 그 내용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 꾸란은 성경 말씀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전혀 다른 기록이다. 모두 대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계보는 믿음의 선진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빛에 관한 표현이다.
창세기 5장의 기록에 나오는 하나님 그리고 아담의 계보에 나타난 셋 에녹 노아 그리고 마태복음 1장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이삭 다윗 예수는 역사적으로 나타난 믿음의 선진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내면에 임한 생명의 빛들이다. 역사적으로 나타난 이들 역시 자신 안에서 하나님에게서 온 생명의 빛들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다.
창세기 5:1은 크나큰 오역 중 하나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는 내용이 전혀 아니다. 바라와 아사와의 관계가 무엇인지 모르는 데서 일어난 일이다. 생명의 빛들에 대하여 창세기 1:14 이하에 잘 나와 있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