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양(咸陽)의 유학 허인두(許寅斗)가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먼 지방의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훌륭한 조상의 불초한 손자일 뿐입니다. 지식은 아무 것도 없는데 어찌 감히 중대한 예(禮)에 대하여 말을 하겠습니까마는, 대략 타고난 성품을 갖고 있는 자는 병으로 아프면 반드시 하늘과 부모에게 호소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지금 번독함을 무릅쓰고 아뢰는 것은 바로 병으로 아파서 호소하는 격이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의 선조 좌의정 문경공(文敬公) 신 허조(許稠)는 관향(貫鄕)이 하양(河陽)입니다.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식견과 도량이 깊고 밝았는데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날마다 《소학(小學)》ㆍ《대학(大學)》ㆍ《중용(中庸)》을 외우고, 장성해서는 문충공(文忠公) 신 권근(權近)을 스승으로 섬기며 성현의 사업을 독실히 닦고 정밀히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니, 문충공이 자주 칭찬하기를, ‘뒷날 우리나라에서 예를 맡을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태조 정축년(1397)에 성균관 전적이 되어 석전의(釋奠儀)를 개정하였고, 태종 정해년(1407)에 서장관으로 중국에 조회를 가서는 제도에 관계된 일은 모두 채집하여 기록해 가지고 귀국하였습니다. 궐리(闕里)를 지나다가 공자묘(孔子廟)를 배알하였는데, 공자묘에 강도(江都)의 정승 동씨(董氏)와 노재 허씨(魯齋許氏)를 종사(從祀)하고 양웅(揚雄)을 내친 것을 보고, 조정에 건의하여 문묘(文廟)에도 이와 같이 시행하게 하였습니다. 뒤에 예조 참의가 되었는데 고려말의 《오례의(五禮儀)》가 전해지지 않는 것을 개탄하여 당송(唐宋)의 법전을 끌어다가 조묘(朝廟)의 예악(禮樂)과 사서인(士庶人)의 상제(喪祭)를 취하여 고금(古今)을 참작해서 모두 찬정(撰定)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항상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의 제조를 맡아 학당(學堂)을 세울 것을 상소하고 또 사부(四部)에 학당을 둘 것을 청하니, 모두 따랐습니다. 봉상시 제조가 되어서는 봉상시의 일에 대해서 마음을 다해 조처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폐지된 것은 일으켜서 크고 작은 것이 모두 펴지게 되었는데, 모두 의식(儀式)에 맞았습니다.
임인년(1422, 세종4년)에 태종이 승하하자 조정에서 백관의 상제(喪制)를 의논하였는데, 뭇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미 장례를 지냈으니 최복(衰服)을 벗고 담복(淡服) 차림으로 원묘(原廟)에 배제(陪祭)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문경공이 반박하기를, ‘군신(君臣)은 일체이다. 지금 성상의 효성이 독실하고 지극하여 최질(衰侄)을 하고 삼년상을 마치려고 하는데, 유독 신하들만 이미 장례를 지냈다고 길복(吉服)을 입어서야 되겠는가. 정사를 볼 때는 담복을 입고 배제할 때는 최복을 입고 삼년상을 마치소서.’ 하니, 상이 그 의논을 따랐습니다. 세종 계묘년(1423)에 명을 받들어 《속대전(續大典)》을 만들고 말하기를, ‘이 책은 국맥(國脈)을 배양하는 근본이니 가혹하고 각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고, 무릇 당시의 엄격한 법을 모두 고쳤습니다. 당시의 풍속이 부모를 위해 단지 백일상(百日喪)만 지냈는데, 문경공이 예로써 백성을 타일러 삼년상을 지내도록 권하였습니다. 당시의 풍속이 초상을 치르는 때에 부처를 숭상하였으나, 문경공은 부모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를 따르니 사서인(士庶人)도 그것을 준용하였습니다.
무오년(1438, 세종20)에 우의정에 제수되었고, 좌의정에 올라서는 영상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함께 한 마음으로 정사를 보필하여 일세(一世)를 삼대(三代)의 다스림에 두었습니다. 《유선록(儒先錄)》에 이르기를, ‘세종 대왕은 참으로 동방의 순(舜) 임금과 탕(湯) 임금인데, 재위 30여 년 동안 태평을 누린 데는 어진 재상을 얻는 것으로 근본을 삼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조 같은 이는 공명정대함으로, 황희 같은 이는 식견과 체통으로 나아가 재상이 되었으니, 당시 인재의 성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허조가 죽은 뒤에 2년 간 그의 자리를 비워 두었고, 이러므로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금호서원(琴湖書院)에 사액(賜額)을 내렸으니, 조정의 숭보(崇報)와 사림의 존모(尊慕)가 이와 같이 중하고도 컸으며 4백여 년 동안 제사를 받들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원(書院)이 몇 해 전에 철폐하는 대상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많은 선비들이 답답한 마음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조정의 흠이 되는 일이어서, 실로 자손이 통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미(李瀰)가 문경공의 유사(遺事)에 서문을 쓰기를, ‘국조(國朝)의 재상의 사업은 번번이 「황희와 허조가 으뜸인데, 익성공 황희는 기량(器量)으로, 문경공 허조는 예행(禮行)으로 3년 동안 조정에 함께 있으면서 융성한 정치를 도와서 이루었다.」 하였는데,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기량으로 공로를 세운 것에 득력(得力)한 것은 드러나서 알기가 쉽고, 예행으로 집안과 나라가 효험을 받은 것은 미세하여 알기 어려우나, 예행의 효과는 공로를 세우는 것과 우열이 없습니다. 옛날 성현의 경서(經書)의 가르침을 가지고 몸을 단속하고 행실을 닦는 일은 유독 문경공이 맨 먼저 주창하였고, 그 뒤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彥迪),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잇따라 나와서 수사낙민(洙泗洛閩)의 계통을 크게 열었으니, 사림이 회재와 퇴계를 높이고 받드는 마음으로 공(公)을 받들어 사모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경공은 익성공 황희와 공(功)은 마찬가지이지만, 학문과 예교(禮敎)의 공은 더욱 구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익성공을 배향하는 서원은 예전처럼 봉향(奉享)되고 있는데, 문경공을 배향하는 서원은 무성한 풀로 가득차 있습니까. 이것은 조정에서 차별없이 대우하는 예에 손상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신은 인정과 도리상 느끼는 바가 있어 외람되고 참람하다는 책망을 피하지 않고, 성상께 목놓아 울면서 진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굽어살피고 양찰하시어 특별히 문경공을 배향하는 서원을 다시 세우라는 명을 내려 주신다면, 신령(神靈)도 반드시 저승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며, 후손들도 살아서는 목숨을 바칠 것이며 죽어서는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신 등은 두려움에 떨며 간절히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서원을 다시 세울지의 여부는 본손(本孫)으로서는 상소할 문제가 아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