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내앞마을로 시집가신 종고모께서 좋은 신붓감이 있다고 선을 한번 보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다. 잠시 생각 끝에 아버지, ‘처음으로 말씀드리는데요. 시내 관공서에 다니는 아가씬데 서로 결혼을 약속하고 사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정색하시면서 그래, 그러면 됐구나. 성씨는 무엇이고 어디에 살며 부모님은 어떤 분이신지 수일 내로 알아 오라고 하신다.
며칠 뒤 아버지 앞에 꿇어앉아 자초지종 말씀드렸더니 묵묵히 듣고 계시다가 ‘안 되겠다. 이 혼인 하면 내가 친구들 앞에 설 수가 없어. 담수회 회원들 볼 낯도 없어. ‘이 혼인 절대로 안 돼. 못해’하시면서 일언 지하에 거절하신다.
이거 어떡하지? 생각도 못 한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정말 난감했다. 아버지 앞을 물러 나오면서, ‘시간이 해결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느긋이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는데, 이틀이 못 가 맞선 날짜를 잡으라고 난리 시다. ‘아버지, 이번 한 번만 제 요구를 들어주시면. 앞으론 무슨 일이든 모두 아버지 말씀을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한번만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내 앞에 무릎을 꿇으시면서 ‘내가 이렇게 안 된다고 하는데도 그 신부와 결혼하려거든 호적을 파가라’시며 아주 단호하시다.
계속되는 아버지의 압력 속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달포나 고민한 끝에 사귀던 아가씨를 만나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그동안 받았던 선물들을 돌려주고 헤어졌다. 그 뒤 아가씬 직장까지 그만두고 다른 도시로 갔다는 소식을 지나가는 바람을 통하여 전해 듣고 오랜 시간을 괴로워했다. 지금 아내는 이렇게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억지로 만나 나의 반쪽이 된 사람이다.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일이다. 퇴원하는 아내와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서류 정리를 하던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서류를 보고 또 들여다본다. 이런 일을 두고 하늘이 무너진다고 했던가? 어찌 내게 이런 일이……아기 혈액형이 우리 부부 사이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이 일을 어쩐다. 어떻게 하지? 하늘이 노랗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순간 생각이 멈춘다.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서류 그만 치우고 아기 눕히게 비키세요.” 하는 아내의 말에 앉은 자리에서 미적거리며 겨우 자리를 내어주는데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하고 밝은 모습으로 아기를 어르는 아내의 모습이 역겹고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어쩜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난 더 약이 오르고 화가 치밀었다.
아내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남자들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옷핀으로 아래위 속옷을 둘러 가며 연결해 두는 등,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무지 노력하던 깐깐한 사람이었다. “화장실을 드나들 땐 무지 불편했을 텐데” 하는 내 말엔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던 빈틈 없던 여자였다.
당시에 난 ‘참 별난 사람도 다 있구나.’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는데 이런 일이 생기자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각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자꾸만 심연의 늪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결혼만 하더라도 만혼에 6살이나 어린 사람을 아부지의 압력에 종고모의 소개로 만나다 보니 착한 마음씨에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면서 나완 다르게 조곤조곤 쉴 틈 없이 조잘거림에 끌렸고, 꼬깃꼬깃 구겨진 손수건이 보기 싫었던지 만날 때마다 손수건과 담배 한 갑씩을 챙겨 나와 건네주고, 구두 닦는 곳까지 나를 끌고 가서 구두를 닦아주면서까지 날 챙기던 여자였다.
점심 먹고 교실로 들어서는 내게 아이들이 선생님, 어떤 아가씨가 선생님 구두 닦아놓고 갔어요. 하는데 신발장 속 구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내가 대충 차려입고 꾸미지 않고 다니는 모습이 무지 눈에 거슬렸는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날 향한 일편단심에 내 마음이 꽂혔다.
종 고모의 시댁과 장모님이 한 마을이고 일가라 집안이 서로 얽히고설켜 후다닥 해치웠으니, 이게 누구의 책임인가를 따지기 전에 이혼 자체가 가문의 수치고 누가 되는 일이었다.
나와 장인어른 모두 교직에 몸담고 있어 이 또한 녹록하지 않아 주어진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조용히 묻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맘먹기까지 몇 날 며칠을 고민 속에 지냈다. 이런 사실을 아내는 모른 체 시간은 흘러갔다.
일주일쯤 되었을까? 형님이 오셨다.
“돈구야, 아 혈액형이 뭐고?” “AB형요.”
“제수씨는?”
“저랑 같은 B형인데요.”
“네가 B형이고 제수씨가 B형인데 아가 어째 AB형이 될 수 있나?”
“형님, 목소리 좀 낮추세요.”
“아가 바뀐 거 아니냐? 내일 당장 병원에 가봐라.” “가서 뭐 하게요?”
“밝혀야지”
“뭘 밝혀요? 밝혀 서는요? 어쩔 수 없죠. 운명인데 제가 안고 가야지요.” 하는데, 눈에 잔뜩 힘을 준 아내가 방문을 ‘쾅’하고 밀치며 들어서더니 시숙 앞임에도 아랑곳없이 앙칼진 목소리로
“뭐, 어쩔 수 없다고요? 뭐가 어쩔 수 없단 말이에요? 애가 바뀌었으면 우리 앨 찾아와야 하고 혈액형이 틀렸으면 바로 잡아야지요.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요? 혼자만 끙끙 대지 말고 진작 내게 말했어야지요. 내가 남인 가요? 우린 아이 부모예요.” 하며 속사포처럼 쏘아대고 돌아서는 아내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여보, 우리 운명으로 받아들여요.” 이 한마디가 아내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운명요? 당신이나 운명으로 받아들이세요. 당신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기 아빠 맞아요? 날 의심하는 거잖아요.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에 그리 태연할 수가 있어요. 정말 실망했어요. 날 밝는 대로 당장 같이 병원에 가요.” 하곤 ‘쾅’하고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난 지금껏 아내의 이런 앙칼지고 단호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요즘 같았으면 병원에서 애들이 바뀔 수도 있다 생각했겠지만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병원에서 애가 바뀐다는 것을 들은 적도 없던 시절이었다.
“제수씨 말씀이 맞다. 내일 같이 병원 가봐라.”
이런 우여곡절 끝에 다음날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아내를 달래가며 아기가 태어난 파티마병원을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께 “아기 혈액형이 잘못된 것 같아요. 우리 부부가 B형인데 아기가 AB형이 나와서요. “하며 출생증명서를 내밀었더니 증명선 보지도 않고 대뜸
“아기 혈액형은 여기서 했으니 틀릴 리 없고요. 어머님, 아버님 두 분 혈액형이 B형 맞습니까?”
“예”
“언제 어디서 검사하셨어요?”
“둘 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했어요.”하고 대답하자
“10분이면 결과가 나올 테니까 일단 두 분 검사를 해보지요.”
하며 피를 뽑고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10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졌던 적은 여태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이 모두 B형으로 수십 년 넘게 살아왔어. 틀릴 리가 없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형님까지 아시는 마당에’ 머릿속은 생각들이 서로 뒤엉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아버님은 B형이 맞으시고 어머님이 A형이네요.”
간호사의 말에 ‘아!’ 됐다. 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모든 문제가 한 방에 해결됐다. 돌아오는 길 반쪽은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당신 나 의심한 것 맞지요? 그렇게 생각했다는 자체가 무지무지 기분 나빠요. 앞으론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하는 아내의 말을 애써 외면하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애먼 하늘만 쳐다본다. 병원 들어설 때 천근만근이었던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아내를 위하고 가문을 위한다는 것도 용서할 수 있다는 오만도 모두 이기심의 발로였고 내가 편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것을 아는 데 40년이 걸렸다.
가정생활은 혼전의 약속대로 퇴근해 오면 먼저 그날 있었던 아내의 얘기를 한 시간 들어 주곤 혼자 벌어서 먹고살기 힘들다며 내방에 틀어박혀 출판사 문제집 원고 쓰는 일에 몰두하며 20년을 넘게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 아이 둘, 돌봄은 물론 교육과 건강까지도 모두 아내 차지였고, 집안의 대․소사 까지 모두 아내에게 맡기고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당당하게 살아왔다.
그저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대로 한 살 한 살 먹으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왔으나 아들을 군에 보내면서 내 삶은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아들이 군에 가던 날 반쪽과 함께 논산 훈련소 연병장 사열대 위에서 입대하는 늠름한 모습의 아들을 바라보면서 지금껏 나라의 도움만 받고 살아오던 내가 나도 이제 나라에 보답하는 일을 하고 있구나! 애국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한다.
주악이 울리고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하며 국기에 대한 맹세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항상 현역 생활을 하지 않은 것이 나라에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군대 얘기만 나오면 몸 둘 바를 몰랐는데 건강한 아들을 군대에 보내게 되어 이제 내가 나라에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고 생각하니 감격해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옆에 선 아내가 알아챌까? 신경이 쓰여 조심조심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다.
대학에서 군사훈련과 방학이면 병영훈련도 받고 졸업과 함께 제대증까지 받았는데도 내 마음 한구석에선 언제나 나라에 미안하고 그런 내가 용서되지 않았던가 보다.
돌아오는 길 반쪽의 손을 잡으며 여보, 건강한 아들 낳아주고 이런 기쁨을 맛보게 해줘서 너무너무 고마워. 그에 따른 보답으로 퇴직하면 제주도에서 4계절을 보내게 해줄게. 하는 말에 반쪽은 이게 무슨 소리지 하는 의아한 모습으로 날 바라본다. 그리고 당신이 하는 집안일 가운데 당신이 젤 하기 싫은 일 한 가지는 내가 도와줄게 하니 설거지하는 일이 제일 싫다고 했다. 이렇게 한 약속이 퇴직과 함께 제주살이로 이어지고 새로운 만남을 통해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