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자면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있죠.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올라와요. 근원적인 자기 의심이죠. 특히 내 글에 남의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룰 때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좀 더 간절해집니다. 무척 조심스럽죠. 쓰기 전이나 쓰는 중에는 남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써도 될지, 쓴 뒤에는 잘 표현했는지 그리고 지금은 괜찮아도 혹여 나중에 문제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저도 타인이 등장하는 글을 늘 쓰기에 이런 고민의 과정을 거칩니다. 특히 가족 이야기를 선뜻 스기 어려워요. 서로 이꼴 저꼴,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속속들이 바온 사이라서겠지요. 너무 모르는 것만큼 너무 아는 것도 쓰기의 걸림돌이 됩니다.
가깝고도 먼 존재, 가족. 흔히들 집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휴식의 공간이라고 말하죠. '집이 최고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서 쉬어야지' '즐거운 나의 집'과 같이 집을 긍정하는 표현이 여럿 있는데요. 저한테는 집이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결혼 전엔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가 집에 있으면 괜히 집안 분위기가 무거워졌거든요. 밥 먹을 땐 음식이 짜네, 싱겁네, 먹을 게 있네, 없네 하며 엄마한테 반찬 타박을 하고, 술이라도 한 잔하면 거친 언어를 구사하기도 해서 마음이 조마조마했어요. 자식이던 제게 집은 부모의 감정 기류로 영향을 받는 불안한 공간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나자 집은 노동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배우자와 아이 둘, 4인 가족을 꾸리느라 숨이 가빴죠. 한숨과 눈물이 자주 삐져나왔어요. 이런 불안정한 감정 기류에 아마 제 아이들도 영향을 받았겠죠? 다행히 저는 식구들에게 불안을 조장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경각심을 갖고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글을 썼습니다. 삶의 버거움을 술로 풀지 않고 글로 풀었던 거죠.
제 산문집에 식구들 이야기가 간간이 있는데요. 몇몇 예리한 독자께서 짚어주셨어요. 제 글에 딸 이야기가 많고, 아들 이야기는 약간 있고, 배우자 이야기는 거의 없다고요. 글은 거짓말을 못 합니다. 뜨끔했어요. 이유가 있는데요. 글을 본격적으로 썼을 때 아들은 초등학교 고학년이어서 학교에서 집에 늦게 오고, 유순한 편이어서 저랑 부딪칠 일이 별로 없었어요. 글감이 되지 않았죠. 유아기이던 딸이 저랑 붙어 지내보다 보니 글에 자주 등장했고요. 아이가 어릴 땐 예쁜 말, 신통한 말, 재미난 말을 잘하니까 에피소트가 매일 생겼어요. 잘 기억했다가 놓칠세라 밤마다 글로 썼죠. 딸아이는 '꽃수레'라는 별칭으로 제 글에 등장합니다. 캐릭터 형상화에 성공한 것 같아요. 꽃수레가 인상적이라는 리뷰가 많았어요. 강연에 가면 꽃수레에게 주라며 선물을 전해주시는 독자도 많았고요.
사실 꽃수레처럼 필자와 관계가 좋은 인물을 자기 글에 쓰는 경우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습니다. 반대 경우가 조심스럽죠. 배우가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감정이 덩굴처럼 얽혀서 쓸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무작정 쓰면 별로 곱지 않은 이야기만 할 것 같고 그러면 한 사람을 활자로 심판하는 글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크고요. 나는 다 옳고 남은 다 그르고 그래서 나는 너무 억울하고 저 사람은 너 무 나쁘고, 선악 이분법에 갇힌 글을 쓸 거 같았어요.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그 인물에게 꼭 그런 면모만 있을까. 여러분이 고민하는 지점도 바로 이런 '단순화의 위험'이 아닐까 싶어요. 내 글에 등장하는 남의 이야기, 더 구체적으로 나와 갈등 관계에 있는 상대를 어떻게 쓸까 하는 고민을 저는 '재현의 윤리'로 표현합니다.
어떤 인물에 대해 쓸 때 최대한 여러 측면을 다각도에서 보려고 노력해요. 감정이 아니라 행위 중심으로 쓰자는 이야기를 앞서 드렸죠. 글쓰기는 무언가를 구체화하는 작업이니까요. 가령 '애인은 늘 나를 통제하려고 했다'라는 판단을 내재한 문장보단 관련 사례를 한 장면처럼 보여주는 사실 위주의 문장을 쓰는 거죠. '친구랑 나눈 문자까지 일일이 보려고 했다'라는 식으로요. 이렇게 써놓고 '꼭 그렇기만 할까?' '그는 왜 그랬을까?'하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는 거죠. 행위를 낳은 구조를 보고, '그가 자상하고 친절한 측면도 있으니까 만났지' 싶은 생각이 들면 그의 자상하고 친절한 모습도 떠올려보고요. 글 쓰는 과정에서 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의무적으로 해야지, 내 글 속 인물이 납작해지지 않고 말과 행동의 맥락을 살려낼 수 있어요. 그러다보면 그 사람과 연루된 나의 행위나 말, 감정이나 생각도 객관적으로 보게 되죠. 글쓰기로 특정 인물을 형상화하는 작업은 기존의 내 감정이나 판단을 내려놓고 그 사람을 최대한 공정하게 보려고 노력하는 일 같아요. 이스라엘 소설가 아모스 오즈는 이렇게 말했어요. "다른 사람의 처지와 입장이 되어보는 것, 그것이 작가의 일이다.
이렇게까지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글쓰기가 '서사의 편집권'을 갖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쪽 면만 도드라지게 편집 헤서 한 인물을 성자로도 악마로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최대한 공정하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인물과 상황을 인식하고 표현하려는 노력과 정성이 필요합니다.
'재현의 윤리'에 대한 좋은 사례로 참조할 만한 책이 있습니다. 조기현 작가의 <<아빠의 아빠가 됐다>>인데요. 조기현 작가는 뭐라도 해보려던 스무 살에, 갑자기 쓰러진 아빠의 보호자가 된 청년이에요. 8년간의 돌봄 과정을 기록해 책으로 냈고요. 조기현 작가가 영화를 찍기도 하는데요. 남다른 영상 감각 때문인지 글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고 장면이 빠르게 전화돼서 잘 읽힙니다. 본문에 작가의 내적 갈등을 다룬 이런 대목이 있어요.
--돌봄이라는 형벌을 받는 듯했다. 개인 시간이 없어지고, 금전 부담이 커지고, 무엇보다 아빠의 돌발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 아빠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 선택이 내 유일한 출구다.
그런데 아빠를 끝까지 책임집니다. 자칫하면 아빠를 무능하고 자식한테 폐만 끼치는 인물로 재현하기 쉬운데, 작가는 아빠의 다른 모습도 발견하고 글로 표현합니다.
--엄마가 집을 나가자 나한테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혼자 꿋꿋이 가사노동을 하던 모습, 언제가 내 뺨을 후려치고 미안한 마음에 동네 사람들한테 자기가 아들을 때렸다고 소문내고 다니던 모습이 나를 붙잡았다.
--아빠를 보호하는 일은 버거운 과제였지만, 아빠를 보호할 때만 나는 인간의 지위를 얻었다.
--아버지는 자주 짐이 됐지만, 나한테 새로운 생각들도 불어넣었다.
--내가 아버지를 돌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가 사회적이고 신체적인 약자이기 때문이다.
분명 아빠가 원망스럽고 아빠를 돌봐야 하는 현실이 싫었지만 원망과 억울에 그친 글을 쓰면 아빠가 사회적으로 쓸모없고 짐짝 같은 존재로 사물화되잖아요. 이런 우려를 조기현 작가는 이렇게 정리해요. "이 글을 통해 나만 통통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이 책을 보면서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인물에 관한 글쓰기가 한 사람을 크게 성장하게 하고 그 과정에서 글쓰기도 성숙한다고 믿게 됐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좋은 힌트가 되면 좋겠어요.
타인의 이야기를 '함주로 쓰면 안 되니까 안 쓴다'가 아니라 '함부로 쓰면 안 되니까 조심스럽게 쓴다'로 방향을 잡으시고요. 심판자가 아닌 관찰자가 되어 인간 이해에 도움이 되는 인물을 그려내시길 바랍니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3. 섬세하게 쓰고 싶다면에서 첫 글입니다. 수업 중에 읽으며 공감했던 이야기. 가족이야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쓰다 보면 너무 감정적으로 치닫기도 하고 쓰고 나서도 걱정이 될 때가 있어 결국 꼭꼭 잠가둔 폴더 속으로 숨겨버릴 때가 많습니다. 조심스럽게 쓴다면, 관찰자가 되어 쓴다면 폴더 속에서 꺼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