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르다드의 서, 책을 보관한 자
"눈을 뜨게나, 운 좋은 낯선 손님이여. 그대는 목적지에 도착했네."
뜨거운 햇볕 아래 갈증을 느낀 나는 꿈틀거리면서 반쯤 눈을 떴다. 주위를 살펴 보니 나는 땅 위에 누워 있었고, 웬 남자의 검은 그림자가 내 위에 어른거리면서 입술을 물로 축여 숱한 상처에서 흐른 피를 부드럽게 닦아 주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몸집과 거친 풍모를 지닌 자로서 수염이 덥수룩했고 눈썹이 짙었다. 응시하는 두 눈은 깊고 예리했으며, 나이가 몇 살인지는 도대체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의 감촉은 부드러워서 나의 원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일어난 나는 내 귀에도 간신히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알타 봉 정상이네."
"동굴은?"
"그 뒤에 있네."
"검은 구덩이는?"
"그대 앞에 있네."
주변을 돌아보니 정말 내 뒤에는 동굴이 있고, 바로 앞에는 깊고도 검은 틈새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너무나 놀랐다. 나는 바로 그 틈새의 가장자리에 있었던 것이었다. 동굴 안으로 같이 들어가자고 부탁하자, 그 남자는 기꺼이 그렇게 해 주었다.
"누가 나를 '검은 구덩이'에서 구해 냈습니까?"
"그대를 산 정상까지 인도한 그가 틀림없이 그대를 '검은구덩이'에서 구출해 냈을 것이네."
"그가 누구입니까?"
"내 입을 봉한 채, 나를 이 산꼭대기에 150년간 가둔 그 사람이지."
"그렇다면 당신이 유폐된 수도원장입니까?"
"그렇네."
"하지만 당신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할 텐데요."
"그대가 봉해진 내 입을 풀어 주었지."
"유폐된 수도원장은 어떤 인간과도 교류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보아하니 당신은 전혀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은데요."
"그대말고는 모든 사람을 멀리한다네."
"당신은 한 번도 내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나 말고 모든 사람을 멀리 할 수 있나요?"
"나는 그대가 오기를 150년간이나 계속 기다려 왔네. 죄에 물든 내 눈은 하루도 어김없는 딱 150년간을 사시사철 바뀌는 계절과 기후 아래서, 혹시 한 명의 남자가 이 산을 올라와 그대처럼 지팡이도, 몸에 걸친것도, 식량도 없이 이곳에 오지나 않을까 하고 자갈로 된 비탈길을 계속 찾아 헤맸지. 많은 사람들이 비탈길을 올라오려고 시도했지만, 여지껏 단 한 사람도 산 정상에 도달한 사람은 없었지. 나는 어제 그대가 걷는 것을 쭉 지켜보았네. 어젯밤은 그대가 동굴에서 그냥 자도록 내버려 두었지. 그런데 날이 밝자마자 즉시 와서 보니, 그대는 숨을 쉬지 않고 누워 있었네. 하지만 금방 숨을 다시 쉴 거라고 나는 확신했네. 자, 보게나. 그대는 나보다도 생생하네. 그대는 살기 위해 죽었다. 나는 죽기위해 살고 있다. 오, 그의 이름에 영광 있으라, 이 모든 일이 그가 약속한 그대로다. 이 모든 일이 그렇게 되도록 예정된 것이다. 그대가 선택받은 자 라는걸 나는 추호도 의심치 않네."
"누구라고요?"
"신성한 책을 세상에 공표하기 위해, 그 손에 신성한 책을 맡길 만한 축복받은 인물이란 말일세."
"어떤 책을?"
"그의 책, '미르다드의 서'를."
"미르다드? 미르다드가 누굽니까?"
"그대가 미르다드를 모르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기묘한 일이군. 그의 명성이 이미 대지에 가득 찼으리라 생각하는데, 오늘날까지 그의 명성이 발 밑의 땅을 채우고, 주변 공기를 가득 채우고,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처럼. 오, 낯선 손님이여, 이 땅은 성스럽다. 그의 발이 이 땅을 밟았으므로, 이 공기는 성스럽다. 그의 폐가 호흡했으므로, 이 하늘은 성스럽다. 그의 눈이 바라보았으므로."
이렇게 말하면서 그 수도승은 공손히 무릎을 꿇고 대지에 세번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는 침묵했다. 잠깐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말했다.
"당신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미르다드라 불리는 그 인물에 대해 몹시 알고 싶습니다."
"귀를 기울이게나, 그대에게 금지되어 있지 않은, 말할 수 있는 내용을 말해 주겠네. 내 이름은 샤마담. 아홉 명의 동행자 중 한사람이 죽었을때, 나는 방주의 장로였네. 그 사람의 혼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한 이방인이 문 앞에 와서 나를 만나려 한다는 얘길 들었네. 나는 곧 죽을 동행자를 대신할 사람을 신의 뜻이 보냈음을 알았지. 나는 신이 우리들의 조상 셈 시대 이래로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걸 기뻐했네."
여기서 나는 그의 말을 가로막고, 산가슭에 사는 사람들에게 들었던 얘기. 방주가 정말 노아의 장남이 건립한 것이 맞느냐고 물었다. 그는 재빨리,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맞네. 그대가 들었던 얘기 그대로네. 나는 정말 기뻤지. 그런데도 내 가슴속에선 반항심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는데, 나 자신도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네. 그 이방인을 보기도 전에 내 존재 전체가 그와 싸우고 있었지. 결국 나는 그를 거부하는 것이 불가침의 전통을 침해하고, 그를 보내 주신 신을 거부하는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거부하기로 결심했네. 문을 열고 이방인을 보았을 때 그는 고작 스물다섯 남짓 된 젊은 수도승이었는데 내 마음은 단검으로 그를 찌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
헐벗고 굶주리고 있었으며, 방어수단도 없고, 지팡이조차 갖지 않은 것이 도대체 무력하게만 보였네. 그러나 그 얼굴에 감도는 일종의 빛 때문인지, 그는 완전무장한 기사보다 더 무적처럼 보였으며, 나이보다 훨씬 더 품격을 지닌 것처럼 보였지.
나의 오장육부가 그를 거부하라고 절규했네. 내 혈관의 피 한방울 한방울이 모두 그를 쳐 부수기를 원했네. 그 이유는 어쩐지 들려주고 싶지 않군. 아마 그의 예리한 시선이 나의 혼을 벌거벗기자 나는 내 혼이 남 앞에 노출되는 걸 두려워했을 것이네.
아마 그의 순수함이 내 부정(不淨)의 베일을 벗겨 내자,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의 부정을 위해 짜 왔던 베일을 잃어버린다는 걸 슬퍼했나 보네. 내 부정은 늘 자신의 베일을 사랑하는 법이니까. 아니면 태고적부터 그의 별들과 나의 별들이 다투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누가 알겠는가? 누가 알았단 말인가? 그만이 그걸 알려줄 수 있겠지.
나는 지극히 무뚝뚝하고 냉담한 목소리로 그에게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했네. 그리고 즉시 이 땅에서 떠나라고 명했지. 그러나 이방인은 침착히 자기 입장을 고수하면서 내게 올바로 생각하라고 권고했네. 그의 권고를 모욕으로 느낀 나는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지. 그는 동요없이 자기 입장을 거듭 밝히고, 얼굴에 묻은 침을 천천히 닦아내면서 다시 한번 내게 결심을 바꾸라고 권고했네.
그가 얼굴에서 침을 닦아낼 때, 나는 그 침이 마치 내 얼굴에 묻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 나는 다시 패배감을 느꼈네. 내 안 어딘가 깊은 곳에서는 이 싸움이 대등한 싸움이 될 수 없으며, 그가 훨씬 강한 전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네. 무참히 깨진 모든 자존심이 그럴듯이, 나의 자존심 역시 산산히 부서져 가루가 될 때까지는 싸움을 단념하질 않았지. 나는 이방인의 요구를 거의 받아들일 생각이었네. 그러나 그에 앞서 그가 멸시당하는 걸 보고 싶었네. 하지만 그는 어떤 경우에도 멸시를 당하지 않았지.
갑자기 그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요구했네. 그러자 내 희망이 다시 되살아 났지. 추위와 굶주림이 내 편에 서서 그와 싸워준다면, 나는 내가 싸움에서 이길 거라고 믿었네. 나는 빵 한 조각도 줄 수 없다고 냉혹하게 거절했고, 수도원은 기부에 의해 생활하기 때문에 기부받은 것은 어떤 것이든 베풀 수 없다고 말했지. 그 점에 대해서 나는 극악무도한 거짓말을 한 것이네. 왜냐하면 수도원에는 남아돌아가는 식량과 옷이 있었으며, 필요한 사람에겐 충분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줄 수 있었으니까. 나는 그에게 구걸을 하라고 했지. 그러나 그는 구걸하지 않았네. 그는 당연한 권리를 요구했을 뿐이네. 그의 요구 속에는 명령이 있었지. 싸움은 오래 계속 되었지만, 상황은 결코 변하지 않았네. 처음 싸울 때부터 싸움은 그의 승리였지. 나는 자신의 패배를 숨기기 위해. 마지막으로 그에게 방주에 하인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했네. 동행자 중 한 명이 아니라 단순한 하인으로서,
나는 이 일이 그를 비하시킬 것이라고 자신을 달랬지. 그렇게 말할 때도 내 쪽이 구걸하는 것이지 그가 구걸하는 것이 아니란 걸 이해하지 못했네. 나에게 모욕을 받았다는 걸 감추기 위해 그는 말 한마디 없이 그 제안을 수용했네. 설사 하인이라고 해도 그를 가입시키면 내가 추방되리라는 것을 당시의 나로서는 미쳐 생각을 못했지. 최후의 날까지 나는, 그가 아니라 내가 방주의 주인이라는 환상에 매달려 있었네. 아아, 미르다드, 미르다드. 그대는 샤마담에게 무슨 일을 했던가! 샤마담, 너는 너 자신에게 무슨 일을 했던가!"
닭똥 같은 눈물이 수염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면서 그의 큰 몸집이 떨렸다. 나는 마음이 언짢아서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에 대한 얘기는 그만 하시지요. 생각만 해도 당신 눈에 눈물이 넘쳐나니 말입니다."
"걱정하지 말게나, 축복받은 사자여, 이 쓰디쓴 눈물을 아직까지 흘리는 것은 과거 장로였던 자의 자존심, 영(靈)의 권위에 대해 이를 가는 것은 바로 문자의 권위, 자존심은 울게 내버려 두는 것이 좋네.
우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 아아, 내 눈이, 처음 그의 천사같은 얼굴과 만났을 때처럼, 안개 같은 세속의 베일에 덮여 있지 않기를! 아아 내 귀가 그의 신성한 지혜에 정복됐을 때처럼, 세간의 지혜에 집착하지 않기를! 아아, 내 혀가,영으로 감싸인 그의 혀와 싸웠을 때처럼, 육체의 고통스런 단맛에 덮여 있지 않기를! 그러나 나는 미혹의 독버섯을 너무나 많이 수확했으며, 이제부터는 더 많이 수확할 것이네.
7년간 그는 겸허한 하인이었지. 예의바르고, 주의 깊고, 두드러지지 않고, 주제넘게 나서지 않고, 동행자들이 지시한 아무리 시시한 명령이라도 즉시 이행했네. 그는 공중에 떠다니는 것처럼 움직였지. 입술에서는 말 한마디 나온 적이 없었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진 야유를 도저히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평정으로 받아냈지.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이내 그의 침묵을 존경하게 되었네. 다른 일곱 명의 동행자는 그의 평정을 기뻐했으며, 그에게서 마음의 위로를 받았네. 그러나 나로서는 그의 평정이 무겁고도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지. 나는 여러 번 그 평정에 방해를 놓으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미르다드라고 했다네. 그 이름을 부를 때에만 대답을 했었지.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것 뿐이었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우리 모두에게 민감하게 느껴졌지. 너무나 민감하게 느낀 탓인지, 우리는 그가 자기 방에 들어 간 뒤가 아니면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네. 그 내용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도.
미르다드가 오고 나서 7년간 방주에는 큰 풍년이 들었다네. 수도원의 엄청난 재산은 일곱 배 이상으로 불어났지. 그에 대한 내 기분도 부드러워지고, 그 말고는 신의 뜻에 의해 보내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그를 동행자의 한 명으로 인정하자고 동행자들에게 진심으로 제안했네. 바로 그때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네. 그건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이 불쌍한 샤마담이 어찌 예상 할수 있었겠나.
미르다드가 굳게 닫혀 있던 자기의 입술을 열어 버린 것이지. 그건 폭풍을 풀어 놓은 것과 같았네. 그는 오랫동안 침묵으로 은폐하던 것을 발산했고,그것은 저항키 어려운 급류처럼 밀려들어, 동행자들 모두 거기 쓸려가고 말았다네. 최후까지 싸운 이 불쌍한 샤마담을 제외한 모두가. 나는 장로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 물결을 역류시켜 보려 했지만, 동행자들은 미르다드의 권위 외에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지. 미르다드가 스승이었다네.
샤마담은 쫓겨난 사람에 불과했지. 나는 일시적인 수단으로 호소했다네. 나는 몇몇 동행자들에게 값비싼 금 은을 뇌물로 주었지. 다른 사람에겐 넓고 비옥한 토지를 약속했다네. 거의 성공할 무렵, 미르다드는 무언가 신비한 방식으로 내 음모를 눈치채고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그 기도를 무력화시켰다네. 단지 몇 마디 말로만.
그가 서술한 교의(敎義)는 너무나 오묘하고 너무나 복잡하다네. 그 모든 것이 이 책 속에 있지. 내용에 관해 내가 말하는 것은 허락되어 있지 않네. 하지만 그의 유창한 말들은 하얀 눈을 검은 석탄으로 보이게 하고, 검은 석탄을 하얀 눈으로 보이게 하지.
그의 말은 그만큼 예리하고 힘이 넘쳤네. 그런 무기에 대해 내가 무엇으로 대항할 수 있겠나? 내가 보관하고 있던 수도원의 인장(印章)말고는 대항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 그러나 그것조차 전혀 쓸모가 없어지고 말았지. 미르다드의 열정적인 가르침을 받은 동행자들은 자신들이 본 모든 서류에 권리를 양도하는 서명과 날인을 하라고 내게 강요했기 때문이네.
하나씩 하나씩 그들은 오랜 세월동안 신자들로부터 기증받은 토지 증서를 양도했네. 그 다음 미르다드는 동행자들에게 선물을 가득 들게 한 뒤. 수도원 근처에 있는 모든 마을로 나가, 가난한 자나 곤궁한 자들에게 그 선물을 나눠주기 시작했지. 해마다 두번 있는 방주의 축제 중 하나인 방주제. 마지막 날에---또 하나는 포도제라네---미르다드는 그 광적인 행위의 총결산으로, 수도원의 전 재산을 처분해서 축제에 모인 외부 사람들에게 분배하라고 동행자들에게 명령했네.
이 모든 일을 나는 죄많은 눈으로 목격했으며, 미르다드에 대한 증오로 터질 것 같은 내 마음 속에 그 광경을 새겨 두었지. 만약 증오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당시 내 가슴속에서 들끓고 있던 증오는 미르다드를 수천 번은 죽였을 것이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나의 증오보다 강했지.
싸움 역시 대등한 싸움이 될 수 없었네. 여기서도 내 자존심은, 그가 내 자존심을 완전히 박살내 가루로 만드는 걸 볼 때까지는 싸움을 그치려 하질 않았지. 미르다드는 싸우지 않고 나를 쳐부쉈네. 나는 그와 싸웠지만, 나 자신을 파괴했을 뿐이었지. 그는 자비롭고 관대한 마음으로 인내하면서 들러붙어 있는 더 많고 더 질긴 바늘을 찾곤 했지.
그가 나를 다정하게 대하면 대할수록 나는 더욱더 많은 증오를 그에게 돌렸네. 우리, 미르다드와 나는, 전쟁터에 나선 두명의 전사였네. 그는 자기 한 사람만으로도 하나의 군대였지. 나는 고독한 싸움을 했네. 만약 다른 동행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나는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네. 그렇게 되면 나는 그의 마음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겠지. 그러나 동행자들은 그를 따랐고, 나와 적대해서 싸웠네. 배신자들! 미르다드, 미르다드, 그대는 끝내 복수를 달성했다오."
눈물을 줄줄 흘리던 그는 이번에는 훌쩍거리기까지 하였다. 오랫동안 쉬고 난뒤, 수도원장은 다시 한 번 몸을 굽혀 대지에 세번 입을 맞추고 나서 말했다.
"미르다드, 나의 정복자, 나의 주(主), 나의 소망, 나의 징벌이자 보답이여. 샤마담의 무정함을 용서하소서. 뱀의 머리는 몸통에서 잘려나간 뒤라도 독을 계속 간직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물지는 못합니다. 보십시오. 샤마담은 이제 어금니도 없고 독도 없습니다. 샤마담을 당신의 사랑으로 떠받쳐 주소서. 샤마담의 입이 당신처럼 꿀을 떨어뜨리는 날이 오도록 하소서. 그 날을 위해 샤마담은 당신과의 약속을 완수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당신은 오늘 샤마담을 첫번째 감옥에서 해방했습니다. 부디 샤마담을 두번째 감옥에 오래 머물게 하지 마소서."
나는 수도원장이 말한 감옥이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마치 내 마음속에 떠오른 의문을 읽기나 한 것처럼 한숨을 내쉬면서 설명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목소리가 너무나 변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라고 맹세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날 그는 우리 모두를 이 동굴에 불러 모았네. 이곳에서 그는 늘 일곱 사람에게 가르침을 주었지. 때 마침 해가 저물고 있었네. 서풍이 짙은 안개를 헤치면서 협곡을 가득 채웠고, 안개는 바다에서부터 이곳까지 땅 전체에 마치 신비로운 하얀 수의처럼 드리워져 있었지. 안개가 산중턱 이상은 올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그 주변은 마치 해안선 같았다네. 서쪽 지평선엔 장엄한 구름이 넓게 펼쳐져서 태양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지. 스승은 감동하고 있었지만, 그 감정을 억누르면서 일곱 사람을 차례로 포옹했네. 마지막 사람을 포옹하고 나서 그가 말했네.
“그대들은 오랫동안 높은 곳에 머물렀다. 오늘 그대들은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내려감으로써 오르는 것이다. 골짜기를 산 정상과 같이 보지 않는다면, 높은 곳은 늘 그대들에게 현기증을 일으킬 것이며, 깊은 곳은 늘 그대들을 장님으로 만들 것이다.”
다음에 그는 내 쪽을 향해 잠시 동안 내 눈을 다정스럽게 바라보면서 말했지.
“샤마담, 그대에겐 아직 때가 오지 않았소. 이 산 꼭대기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오. 그 동안 내 책을 그대에게 맡겨 두겠소. 제단 밑에 있는 쇠금고에 그 책을 넣어둘 테니, 아무도 손대지 못하도록 지켜 주시오. 그대도 손대서는 안 되오. 적당한 때가 오면 내가 사자(使者)를 보내리다. 그사람은 책을 받아서 세상에 공표할 것이오. 그는 옷도 충분히 입고, 지팡이를 들고 빵을 가지고 이곳까지 도착할 것이오. 그러나 그대는 이 동굴 바로 앞에서 그가 지팡이도, 식량도, 몸에 걸친 옷도 없이, 게다가 쉬지 않는 채 누워 있는 걸 발견할 것이오. 그 사자가 찾아 올때까지 그대의 혀와 입술은 봉인되고, 어떤 사람과도 교류를 하지 못하오. 그 사람과 만났을 때에야 그대는 침묵의 감옥에서 해방되오. 그의 손에 책을 건네준 뒤, 그대는 내가 돌아갈 때까지 이 동굴 입구를 호위하는 돌로 변할 것이오. 그 감옥에서 그대를 해방시킬 수 있는 자는 나뿐이오. 만약 그대가 그 기다림을 길다고 생각하면, 기다림은 길어질 것이오. 그러나 그대가 그 기다림을 짧다고 생각하면, 기다림은 짧아질 것이오. 믿음을 갖고 굳세게 인내해야 하오.“
이렇게 말한 뒤, 그는 나도 포옹했네. 그러고 나서 그의 일곱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지.
“동행자들이여, 따라오시오.”
그리고 그는 동행자들의 선두에 서서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네. 그의 고귀한 얼굴은 위를 향했고, 그의 단호한 시선은 먼 곳을 찾았고, 그의 거룩한 발은 거의 땅을 딛지 않았지. 그들이 안개의 장막 끝까지 왔을 때, 바다 위에 드리워진 검은 구름 틈새로 태양이 얼굴을 내밀면서, 빛이 쏟아지는 원통형의 통로를 하늘에 만들었네. 그 빛은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형언키 어려웠고, 눈을 멀게 할 만큼 황홀했다네. 스승은 일곱 사람과 함께 산을 벗어나 안개 속으로 곧장 들어가, 그 빛의 통로를 지나 태양을 향해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네. 나는 혼자만 남겨진 것이 너무나 슬펐네. 아아, 나혼자만이.... ."
하루종일 중노동으로 지쳐 버린 사람처럼 샤마담은 갑자기 긴장을 풀면서 침묵했다.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으며, 가슴은 고동쳤다. 그는 오랫동안 그 상태로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뭔가 위로할 말을 찾고 있었는데, 그가 얼굴을 들면서 말했다.
"그대는 은총을 받은 운좋은 사람이오. 불행한 인간을 용서해 주길 바라오. 나는 많은 것을 말했소. 아마 지나치게 말이 많았나 보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소. 150년 동안 혀를 봉인당한 자가 그 봉인이 풀렸을 때 '네' 라든가 '아니오' 만으로 끝낼 수 있겠소? 샤마담이 미르다드가 될 수 있겠소?"
"질문을 하게 해주십시오. 형제 샤마담이여."
" '형제'란 호칭은 아주 멋진 것이오. 단 한 사람 있던 형이 죽고 나서 내게 '형제' 라고 불러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소. 형이 죽은 것은 이미 먼 옛날 일이오. 그래 질문할 게 무엇이오?"
"미르다드가 그토록 위대한 스승인데도 세상은 지금까지 미르다드나 일곱 명의 동행자에 대해 들은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요?"
"아마 그는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이것만은 확신하고 있소. 미르다드는 방주를 변화시켰듯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오."
"벌써 오래 전에, 틀림없이 그는 죽었을 겁니다."
"미르다드는 다르오. 미르다드는 죽음보다 강하오."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은, 미르다드가 방주를 파괴했듯이 세상을 파괴한다는 말인가요?"
"아니 절대로 아니오. 미르다드가 방주의 집을 없앴듯이 세상으로부터 짐을 없앨 것이라는 말이오. 그리하여 그는 영원히 지속하는 빛을 다시 점화할 것이오. 나 같은 인간은 그 빛을 너무나 많은 환상에 다발 아래 감추고 있었소. 그때문에 지금 자신의 어둠 속에서 비탄에 잠겨 있는 것이오. 미르다드는 인간이 자기 자신속에서 파괴한 것을 재건할 것이오. 책은 곧 그대 손에 건네질 것이오. 그 책을 읽고 그 빛을 보시오. 더이상 꾸물 거려서는 안 되겠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시오. 날 따라오지 마시오."
그는 일어서서, 몹시 놀라고 초조해하는 나를 뒤에 남겨둔 채 급히 나갔다. 나 역시 동굴 밖으로 나갔지만, 동굴 끝머리에서 더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정경의 마법같은 선과 색조가 내 혼을 압도적으로 사로잡은 탓에, 나는 잠시 동안 보이지 않는 물보라가 되어 만물을 향해 뿜어 나가며 그 속으로 녹아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롱한 안개에 쌓인 저 먼곳의 평화스런 바다로.
어떤 곳에선 볼록 솟아 있고 어떤 곳에선 움푹하지만, 해안에서부터 줄기차게 급경사로 치솟아 높은 산마루에 이를 때까지 변함없이 상승하는 능선의 언덕들을 향해. 대지의 녹음에 감싸인 언덕 위의 고요한 마을을 향해, 산에서 내려온 맑은 물이 갈증을 씻어 주고 목장의 동물들과 일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언덕 사이의 푸르른 계곡을 향해. 산들이 시간과의 싸움에서 새로운 상처를 입어 생긴 협곡이나 산골짜기 속으로. 나른한 미풍속으로. 아득한 감청색 하늘 속으로, 눈 아래 보이는 회색의 대지 속으로...... .
내 눈이 이곳 저곳을 방황하다가 비탈길로 들어왔을 때, 비로소 나는 그 수도원장과 그가 말했던 그자신, 미르다드, 그리고 그 책에 얽힌 기묘한 얘기로 돌아왔다. 나는 단지 또다른 일을 하도록 인도하기 위해 나를 여기까지 오게한 보이지 않는 손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손을 마음속으로 축복했다.
이윽고 수도원장이 돌아와 내게 조그만 꾸러미를 건네주었다.
그 꾸러미는 오랜 세월로 인해 누렇게 변한 광목에 싸여 있었다.
그가 말했다. "이제부터 나의 신뢰는 그대의 신뢰요. 그대의 신뢰에 충실하기를... 이제 나의 두번째 시간이 다가왔소. 감옥의 문은 나를 맞기 위해 열려 있소. 머지 않아 그문은 나를 유폐하기 위해 닫힐 것이오. 그 문이 얼마 동안 닫혀 있을지, 그것은 미르다드만이 알고 있소. 이제 곧 샤마담은 모든 기억속에서도 사라질 것이오.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아아. 기억으로부터 사라지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왜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미르다드의 기억에서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데, 미르다드의 기억속에서 살아 있는 자는 아무 것도 사라지지 않는데, 미르다드의 기억속에서 살아 있는 자는 그 누구든 영원히 사는데."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잠시 휴식한 뒤, 수도원장은 눈물로 흐려진 눈으로 나를 보면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머지 않아 그대는 세상으로 내려가오. 그러나 그대는 벌거벗고 있고, 세상은 벌거벗은 것을 싫어하오. 세상은 혼 자체를 누더기로 덮고 있소. 옷은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쓸모가 없소. 나는 동굴로 들어가 옷을 벗어 놓을 테니, 그 옷으로 벌거벗은 몸을 가리시오. 하지만 샤마담의 옷은 샤마담 외엔 누구에게도 어울리지 않을 것이오. 내 옷이 그대에게 거치적거리지 않았으면 좋겠소."
나는 그 제안에 대해 아무 말도 못했지만, 무언의 감사로써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수도원장이 옷을 벗기 위해 동굴로 들어갔을때, 나는 책 꾸러미를 풀고는 누런 양피지로 된 책장을 만지작만지작 넘기기 시작했다. 그 책을 읽기 시작하지 첫페이지부터 나는 매료되고 말았다. 나는 쭉쭉 읽어 나가면서 더욱더 빠져 들었다. 나는 수도원장이 옷을 다 벗었으니 옷을 입으라고 하는 소리를 반 무의식 상태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몇분이 지나도 부르는 소리는 없었다.
책에서 눈을 들어 동굴 안을 보니, 동굴 중앙에 수도원장의 옷이 포개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러 번 수도원장을 불러보았다. 한번 부를 때마다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그러나 응답은 없었다. 나는 몹시 놀라고 당황하였다. 동굴에는 내가 앉아 있던 좁은 입구 외에는 출구가 없었다. 수도원장은 그 입구로 나가지는 않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한점의 의혹도 없었다.
그는 유령이었던가?
그러나 나는 내 뼈와 살로 그이 뼈와 살을 느꼈다.
게다가 손에는 책이 있고, 동굴 안에는 옷이 있었다.
혹시 그는 옷 밑에 있는 것인가? 나는 옷이 있는 곳에 가서 옷가지를 하나하나 들춰 보았다. 그러다가 나는 나 자신을 비웃었다. 옷이 아무리 많기로소니 수도원장의 큰 몸집을 가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뭔가 신비한 방법으로 동굴에서 떨어져 '검은구덩이'로 삼켜지고 말았던 것인가?
이 마지막 생각이 머리에서 떠오르자마자 나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의 동시에 나는 입구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못박힌 듯 서고 말았다. '검은 구덩이'의 맨 끝 가장자리에서 나는 거대한 둥근 돌과 마주쳤다.
그 둥근 돌은 조금 전까지는 없었다. 그돌은 웅크린 동물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얼굴만은 인간을 지극히 닮아 있었다. 그돌은 거칠고 장중한 자세였으면 넓은 아래턱은 위를 향하고,위턱은 굳게 닫혔으며, 입술은 일자로 다물었고, 눈은 멀리 북쪽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