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열전-신동문 4작성자페드라|작성시간09.06.03|조회수224목록댓글 1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문학이라는 총대를 멘 이들이건 그 대열에 서려고 준비 중인 이들이건 혹은 양쪽 모두에서 비껴난 이들이건 간에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며 혁명이 무엇이며 인간이 얽혀 산다는 게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져주었다. 이병주는 그렇게 한국문학사를 먼데서 가까운 데로, 가까운데서 지근으로 자리하게 했다.
논객으로서의 자리를 비워낸 이병주에게 신동문은 은근히 추파를 던졌다. 이형, 이젠 생각을 고쳐먹어요. 그간 잡지에 논설 쓴 탓으로 고생을 했으니 다 털어버리고 소설이나 한편 써 봐요. 신동문의 회유는 끈덕졌다. 하지만 이병주는 소설을 쓴다고 언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신동문은 이병주에게 끈질기도록 최면을 걸었다. 두 사람은 무교동과 명동이 제집인양 활보하며 문우들과 술을 마셔댔다. 1964년은 이렇게 흘러갔다. 신동문도 이병주가 소설을 쓰는지 안 쓰는지 잊고 지낼 정도의 시간이었다. 겨울의 포신을 걷어낸 1965년의 봄은 눈부셨다.
이 시기 신동문은 종합지 세대지의 상임편집위원으로 있었다. 그는 신구문화사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월간지 세대의 편집위원도 겸했다. 그만큼 신동문의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이다. 사실 주간이나 편집장은 한 잡지를 꾸려가기도 벅찬 직책이다. 그런데 신동문은 경향신문에 근무할 때도 월간지 새벽의 주간으로 일했고 최인훈의 ‘광장’을 끝으로 새벽이 문을 닫자 이젠 세대지의 편집위원으로 있으면서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하는 데 힘을 쏟았다.
세대지는 사상계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교양지로서의 명성을 유지했으며 특히 새로운 작가를 발굴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소설가라고 부르기 어려운 평론가 이어령도 세대지에 소설을 발표하면서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그가 1966년 3월호에 ‘장군의 수염’을 게재해 세대지는 여타 문학지와는 다른 선상에 있다는 걸 증명했다. 그해 시 란에는 정진규, 김소영, 허소라 시인의 시에 그림이 곁들여져 이색적이었다. 이때의 편집장은 이광훈이었다.
1965년 이른 봄, 이병주는 신동문에게 한 뭉치의 원고를 건네주었다. 그가 2년 동안이나 옥고를 겪었기에 무언가 나오리라 여겼지만 막상 원고를 받아든 신동문은 놀랐다. 부피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신형, 감옥에 있는 동안의 경험을 적은 것이오. 한번 읽어보구려.’ 그날 밤 신동문은 이병주의 원고 500여 매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난 후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소설의 상식을 깨트린, 소설이 주는 메시지가 너무 강한 이 소설에 신동문은 들떴고 하루 빨리 잡지에 게재하자고 했다. 그러자 이병주는 글을 좀 손질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신동문은 손사래를 치며 손 댈 곳이 없다고 거절하곤 곧바로 이광훈에게 원고를 건넸다.
65년도는 시기적으로 독재치하에서 옥고를 치른 정치인이며 언론인과 문인들이 많아 때 아닌 옥중기가 범람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선지 이광훈은 이병주의 옥중기를 받아들자 제목을 보고선 별것도 아닌 원고를 가지고 흥분한다고 오히려 어이없어 했다. 그것도 500여 매나 되는 원고를 6월호에 전재하라고 하니 시큰둥할 수밖에. 그날 이광훈은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이병주와 신동문의 사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진지한 마음으로 원고를 읽어나갔다. 이광훈은 원고를 읽으면서 아연 긴장했다. 업무가 끝났지만 그는 읽다만 원고의 전율이 남아 있어 집으로 원고를 가져가선 단숨에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정신이 혼미함을 느꼈다. 참으로 이상한 소설이었다. 마치 마술에 빠져든 그래서 헤어나기 힘든 구름에 떠다니는 부운의 상태였다. 그가 대했던 많은 소설들과는 차원이 다른 소설이라서 만이 아니었다.
무대도 생소했다. 기원전 4백 년 전부터 동서양의 무역교류지점이었던 헬레니즘의 항구도시인 알렉산드리아라는 지명이 낯설면서도 친근감 있게 다가왔다. 왠지 이광훈 자신이 매력덩어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이병주가 이 도시를 가봤을 리는 만무하다. 소설이 전제된 후 이병주는 부산항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마치 자신이 그곳에 살기라도 한양 세세하게 묘사했다고 얘기했다.
유대인소녀가 술집을 경영하면서 돈을 벌어 비행기를 구입해 나치에게 복수를 한다는 얘기는 마치 황당무계한 미래소설을 읽는 기분이었지만 소설은 분명 상상을 초월하게 했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당무계함이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그러다보니 소설을 읽게 되면 그 황당함으로 해서 도저히 글에서 눈을 뗄 수가 없게 했다.
이상한 매력을 발산하는 소설은 이광훈을 어질어질하게 했고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그런 느낌을 주었다. 당시 이광훈은 갓 등단한 신예 평론가이자 편집장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 소설은 새로운 세상에 발을 담그고 있는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소설이 퍼즐처럼 다가오는 건 에코의 영향 탓이 클 것이다. 그러나 1965년이야 에코의 글을 접하지 못했으니 실로 대단하다고 할 밖에 없다. 에코의 글이 사유의 변조라면 이병주의 소설은 사유의 재미 바로 그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이며 낯선 이름 탓이라곤 해도 너무나 읽기 쉽고 재미가 있어 낯섦이 낯설지가 않고 오히려 친근감으로 전해왔다.
이광훈은 용단을 내렸다. 특집으로 게재하려고 했던 문학관계 글을 다음호로 미루고 이병주의 소설을 전재하기로. 그날 이후 이광훈은 교정과 편집을 혼자 도맡아 해내며 기존의 글씨보다 좀 더 큰 활자로 조판했으며 목차엔 이병주의 사진을 앉혔는데 이 또한 그때 잡지의 상황으로선 파격 그 자체였다. 지금이야 목차나 표지에 저자의 사진이 자리하는 건 흔한 일이 됐지만 예전의 잡지에선 금기사항이었다.
어쨌거나 이병주의 소설은 한국문단에 새로운 서광을 드리웠다. 세대 1965년 6월호가 두 번째 시발점이다. 표지엔 선명하게도 ‘소설 알렉산드리아’ 이병주란 이름이 뚜렷이 새겨졌다. 전국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어떤 소설이 이 열광에 견줄 수가 있을까? 최인훈의 ‘광장’ 이후 한국문단은 뚜렷한 족적이나 그림자를 남기지 못했다. 그런데 신예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이병주에 의해 소설사가 새롭게 쓰여 짐과 동시에 언어의 마술사란 이름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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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 중엔 소설이나 시만을 쓰는 분들이 더러 있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황순원은 평생 소설과 시 외에는 어느 곳에도 한눈을 팔지 않은 외골수다. 그는 생전에 시집이나 소설에 붙는 자서나 후기를 쓰지 않기로 정평이 나있다. 하긴 소설가는 소설로 말하고 시인은 시로 말하면 되는 데 굳이 사족을 다는 건 소설이나 시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힘겹게 출간한 시집이나 소설집에 발문하나 게재하지 않는 것도 좀은 어색스럽다. 시인의 시집에 지인의 발문이 자리하는 건 어찌 보면 인지상정이다.
시인들은 자신의 시집이 세상에 나올 때쯤 되면 어느 분에게 발문을 부탁할까 하는 마음이 먼저 이는 건 세상사 이치이자 순리일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시인들이 발문이나 자서를 고집하진 않을 터이다. 그래도 시집에 발문이 있게 되면 왠지 더 정이 간다. 그만큼 시인의 세계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얘기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다.
문인들이 시나 수필 혹은 소설을 써서 생활을 영위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어떤 경우건 시인이 시로서 삶을 영위할 수 없듯 소설가도 매한가지다. 이젠 문인들이 대학의 숫자가 많아진 탓에 여러 대학에 둥지를 틀고 있지만 예전엔 아주 소수의 문인들만이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황순원, 김동리, 조병화, 김용호, 박두진, 서정주, 김구용, 김현승, 조지훈, 박목월, 정한모, 김달진, 정한숙, 김광식, 김정한, 이주홍, 전광용 등 셀 수 있는 시인과 소설가들이다. 그렇다 보니 여타의 문인들은 호구지책으로 잡지사나 신문사에 근무를 했다. 신문사엔 여러 부서가 많지만 문인이란 특수성 때문에 시인이나 소설가는 문화부에 둥지를 틀기 마련이었다.
신동문도 그랬다.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기에는 생활의 신산함을 견뎌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기에 강단이 됐건 편집부가 됐건 발 디딜 공간을 찾아내야 했다. 그 공간이 잡지였다. 그는 1960년 33세 때 이녕의 주선으로 종합지 ‘새벽’의 편집장이 되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진출했다. 그 시절 잡지로는 ‘사상계’가 유일했고 문학지로는 ‘현대문학’과 ‘자유문학’이 있었지만 김광섭이 운영하는 ‘자유문학’은 돈 때문에 항상 쩔쩔매며 잡지사를 운영해갔다.
신동문은 잡지에 새바람을 넣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1960년대는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신구파가 매일 싸움만 해대서 어수선한 시기였다. 이 시기를 둘로 나눈다면 하나는 학생들의 시기고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두 번째는 ‘광장’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해 10월 신동문은 25세의 최인훈을 찾아내 600매에 달하는 중편 ‘광장’을 새벽에 전재했다. 전쟁의 잔흔이 그득한 서울바닥에서 광장은 대단한 호평을 얻었고 최인훈은 문단의 기린아가 되었다.
신동문, 그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남다른 승부사적 기질이 있다. 그는 잡지 새벽에 글 쓸 문인들 중 논설 진은 참신한 신진들로 구성하려고 애를 썼다. 이 시기 신동문은 청주에서 논설위원으로 있는 민병산에게 사회의 이슈를 만들 만한 글을 쓰게 했다. 또 한사람 이병주가 있다. 이병주와는 일면식도 없으면서 단지 국제신보에 실린 논설을 보고 주위의 요청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이 쓴 글이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그 덕에 이병주는 영어의 몸이 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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