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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뿌리 / 이광복
한식날이었다. 서울남부터미널을 떠난 버스는 고속도로로 들어서자마자 전용차로를 따라 휙휙 신바람나게 달려가고 있었다. 고향 부여로 성묘 가는 길이었다. 양지 바른 도로변 산기슭에는 산수유꽃이 노랗게 피어 있었다. 다른 나무들 중에서도 몇몇 부지런한 녀석들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엷은 연둣빛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고향의 아우들과는 10시 50분 부여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우리 동기간은 4남 3녀 7남매로 ‘향기 복(馥)’ 자 돌림이었다. 나는 윤복(允馥), 둘째는 차복(次馥), 셋째는 선복(善馥), 넷째 막내는 계복(季馥)인데, 전원 우리 한산이문(韓山李門) 대종회가 정해 놓은, 즉 시조로부터 28세 항렬 ‘향기 복’ 자에 준거한 작명이었다. 4형제와 달리 3자매는 큰누님 연희(蓮姬), 둘째누님 채희(彩姬), 누이동생 옥희(玉姬)로서 그 이름에는 대종회 항렬과는 관계없이 임의의 돌림자인 ‘계집 희(姬)’ 자가 들어 있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큰집 아버지, 즉 (큰)아버지로부터 한글과 한문을 배웠다. 석양국민학교(지금의 석양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너덧 살 때 한글을 깨치고 천자문을 떼었다. (큰)아버지께서는 그런 나에게 틈만 났다 하면 세보(世譜)를 꺼내 놓고 가문의 역사와 전통을 가르쳐 주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때부터 위선(爲先)과 보학(譜學)과 집안 내력에 처음으로 눈뜬 셈이었다. 어느 날인가 (큰)아버지가 내게 말했다.
“윤복아, 너는 어디를 가든 항상 한산이가라는 사실을 명심하거라. 우리는 시조 호장공(戶長公)으로부터 7세 되시는 목은(牧隱) 할아버지 자손으로 양경공파(良景公派) 후손이야. 사람이라면 반드시 제 뿌리를 알아야 하느니라. 네가 조금만 더 크면 목은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우리 선조님들이 얼마나 위대하신 어른들이신가를 저절로 알게 될 거야. 내 말 잊지 말거라.”
진실이었다. 당신은 한산이문의 후예, 목은 자손으로서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끼니를 잇기 어려울 만큼 형편이 곤궁할지라도 가문의 명예와 자존심에 흠이 될 만한 일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선조님을 흠숭하는 당신의 일편단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안방 뒷문 문설주 두어 뼘 위에는 가로로 퍼진, 뻘건 테두리에 금박 당초문을 두른 직사각형의 액자가 걸려 있었다. 어느 집에나 다 있는 싸구려 액자였다. 사진 찍기가 아주 어려웠던 그 당시 유리를 끼운 액자에는 두고두고 기념할 만한 진귀한 흑백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큰)아버지는 액자의 오른쪽 맨 위 상단에 한산 시향 참례 때 화수회에서 받아 오신, 관복 입고 관모 쓴 명함판 크기의 목은 선조님 영정 사진을 신주처럼 모셔 놓고 있었다. 보통 정성이 아니었다. 액자와 문설주 사이의 공간에는 당신의 자필 ‘安貧樂道’가 적힌 좁고 갸름한 한지가 표구되지 않은 채 벽지처럼 붙어 있었다.
앞문 문설주 위를 가로지르는 시렁에는 고리짝이 있었고, 그 큼지막한 고리짝에는 각종 목판본과 필사본 한적(漢籍)이 가득했다. (큰)아버지께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쳐 주셨다시피 목은 선조님 자손인 우리는 8세 양경공과 9세 집의공(執義公)과 15세 병사공(兵使公)의 세계(世系)를 이어받았다. 대대로 과거에 급제하여 이런저런 벼슬에 올랐다. 당달봉사가 아닌, 역사와 보학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식자층이라면 우리 한산이문이 어떤 가문인가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서 구태여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족보에 기록된 직계 선조님들의 함자와 그 어른들이 역임했던 관직명이 정확히 각인돼 있었다.
근세에 들어와 21세 선조님 동기간은 두 형제분이었다. 형님은 휘(諱) ‘낙(洛)’ 자 ‘헌(憲)’ 자, 아우님은 휘 ‘낙(洛)’ 자 ‘일(一)’ 자였는데 제씨가 큰집으로부터 분가한 이후 또 하나의 새로운 계보가 파생되었다. ‘낙’ 자 ‘일’ 자 선조님의 아드님 22세 휘 ‘세(世)’ 자 ‘직(稷)’ 자 선조님까지는 공주 탄천(灘川)에 살았고, 23세 휘 ‘엽(曄)’ 자 ‘재(在)’ 자 선조님께서 그곳으로부터 솔가하여 부여군 석성면(石城面) 증산리(甑山里) 237번지 연화(蓮花)마을에 정착했다.
그 아늑한 남향집은 결국 우리 대소가의 본적이 되었다. 그로부터 당내 후손들이 증산리 일대, 즉 연화와 시루메마을 두 동네에서 세거해 나왔다. 시루봉 아래 형성된 시루메마을의 한자 명칭은 원증산(元甑山)이었다. 증산리 중에서도 ‘원조 시루메’ 또는 ‘원래의 증산’이라는 뜻이었다.
연화 입향조(入鄕祖)는 곧 우리 ‘향기 복’ 자 형제들의 현조부님이신데, 어인 판국인지 24세 휘 ‘승(承)’ 자 ‘연(秊)’ 자 고조부님과 25세 휘 ‘명(明)’ 자 ‘직(稙)’ 자 증조부님이 내리 독자였던 터라 손이 귀했다. 그러다가 다행히도 증조부님께서 아드님 형제분을 두었다. 바로 26세 ‘구슬 규(珪)’ 자 항렬의 조부님과 종조부님이었다. 조부님의 휘는 ‘철(哲)’ 자 ‘규(珪)’ 자, 종조부님의 휘는 ‘원(元)’ 자 ‘규(珪)’ 자였다.
조부님은 아들 형제분, 종조부님은 아드님 3형제분을 포함해 4남매를 두었다. 조부님의 아들 형제분은 27세이신 (큰)아버지와 아버지, 종조부님의 4남매분은 역시 27세이신 큰당숙, 둘째당숙, 막내당숙 3형제분과 당고모 한 분이었다. 천우신조라고나 할까, 아슬아슬했던 벼랑 끝 혈맥의 불씨가 27세 ‘구할 구(求)’ 자 항렬에 이르러 가까스로 되살아난 것이었다.
연화에는 조상님들의 유허가 있었다. 집터와 모정밭이었다. 선대 어른들의 집터에는 장씨네가 들어와 살았는데 무슨 까닭에선지 오래 전부터 폐가로 방치돼 있었다. 모정밭은 조상님들의 모정이 있던 곳으로, 가세의 쇠락과 함께 정자가 헐린 자리는 밭으로 변모했다.
사실 입향조 이래 증조부님 때까지 우리 조상님들은 권세와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아주 잘 살았다. 하인과 머슴이 여럿이었다. 스님이 탁발을 나오면 예외 없이 가장 먼저 고래 등 같은 우리 증조부님 댁부터 찾았다. 사랑방에 묵어가는 길손도 한둘이 아니었다. 비렁뱅이 동냥아치들 또한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광에서 인심난다고 했다. 증조부님은 물론 그 식구들까지 마음 씀씀이가 후덕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베풀었다.
그런데 웬걸 영고성쇠가 무상했다. 조부님 때 갑자기 들이닥친 괴질로 가족들이 잇따라 죽어나갔고, 그 청천 날벼락에 위풍당당했던 가세가 눈 깜짝할 사이 급전직하로 곤두박질쳤다. 조부님이 마흔넷에 급사했다. 팔월 스무이튿날이었다. 겹복을 입고 있던 상주 자신의 죽음이었다. 잇따른 줄초상으로 안방과 대청에는 궤연이 셋이나 차려졌다. 소름 끼치는 기괴한 사건이었다.
조부님 내외분은 본래 쌍둥이를 연거푸 두 번씩이나 출산하는 등 총 12남매를 두었다. 하지만 우환이 들끓어 한 해 동안 무더기로 열 명을 잃고 조모님 당신까지 타계했다. 처참하기 짝이 없는 희대의 풍비박산이었다. 최종적으로 겨우 두 사람이 살아남았다. (큰)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분이었다.
살아야 했다. 망할 대로 망한, 그리하여 알거지로 전락한 형제분은 저승사자가 똬리를 틀고 발호하는 죽음의 흉가를 빠져나와 부랴부랴 피접 길에 올랐다. 그때 (큰)아버지는 최종적으로 보첩을 비롯한 수십 권의 옛 서책만 고리짝에 챙겨 짊어졌다. 행선지는 시루메, 즉 원증산마을이었다. 사지로부터 벗어나 멸문지화를 모면하려는 필사의 탈출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큰)아버지는 병오생이었고, 아버지는 신해생으로 다섯 살 연세 차이가 있었다. 형제분에게는 집도 절도 없었다. 심신은 황폐화되었고, 가슴 한복판에는 환란의 만고풍상이 피멍으로 얼룩졌다. 앉으나 서나 연화에서 겪은 참변들이 골수에 사무쳐 혀를 빼물고 죽어도 시원찮을 판이었다.
살 길이 막막했다. (큰)아버지는 석성보통학교(지금의 석성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한 터라 식자도 아니고 농사꾼도 아닌 어정쩡한 처지에 있었다. 붓대로 살기에는 학력이 짧았고, 몸으로 때우기에는 노동과 농사일에 서툴렀다. 까막눈인 아버지는 무슨 일이나 빈틈없이 감당해 내는 일꾼 중의 생일꾼이었다.
화불단행이라 했던가, (큰)아버지 형제분의 행로에는 줄곧 말 못할 비애와 불운이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더군다나 무슨 업보인지 (큰)아버지 내외분에게는 종통을 이어가야 할 후사가 없었다. 종가가 무후할 마당이었다. 비운의 주인공인 (큰)아버지는 일천간장 녹아나는 천추의 통한을 품은 채 피맺힌 세월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 내외분께서 일생일대의 중대 결단을 내렸다. 그 어른들은 둘째딸을 큰집으로 보낸 데 이어 나까지 어머니 젖을 떼자마자 입후, 즉 양자로 바쳤다. 내 나이 세 살 때였다. 나는 그 사실을 훨씬 나중에야 알았지만, 철모르는 코흘리개 어린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 어머니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생이별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두 집이 멀리 타동네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원증산 한동네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근거리에서 내가 자라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나 또한 본가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아버지 어머니를 자주 뵐 수 있었다.
양가는 시루봉 들머리 말랭이 부근 높은 곳에 있었고, 본가는 큰집에서 빤히 바라보이는 저 아래 낮은 곳에 있었다. 나는 지대의 높낮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양가를 윗집, 본가를 아랫집이라 불렀다. 두 집의 부모님 호칭은 똑같이 아버지, 어머니였다. 부득이 두 집의 부모님을 구별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윗집 부모님은 윗집 아버지에 윗집 어머니, 아랫집 부모님은 아랫집 아버지에 아랫집 어머니라고 불렀다.
국민학교 3학년 때던가 4학년 때던가 내면에서 강한 의문이 솟구쳤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각각 한 사람인데 나에게는 아버지 어머니가 두 분이어서 영 이상했다. 단초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동네 어른들 중 더러는 윗집 아버지를 ‘윤복이 큰아버지’로, 윗집 어머니를 ‘윤복이 큰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윗집 부모님을 그냥 아버지 어머니로 부르는데 그분들은 어찌하여 ‘큰’ 자를 붙이는지 무척 의아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궁금증을 달래다 못해 하루는 윗집 부모님 내외분께 어찌된 사연인지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그 어른들은 목멘 소리로 둘째누님과 나를 데려다 키운 입후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당신들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큰)아버지는 이래저래 비참했다. 그 어른이 땅 한 뼘 없이 잔혹한 가난 속에서 와신상담하는 동안 아버지는 극적으로 논 엿 마지기와 밭뙈기 두어 자리를 장만했다. 생양가 부모님 네 분은 한평생 오대삭신 육천마디가 물러나도록 뼈저린 고생을 하다가 곤고한 일기를 마치신 뒤 공동묘지나 다름없는 귀신보 국유지에 잠드셨다.
한편 (큰)아버지 형제분보다 한참 젊은 큰당숙이 연화에 살았다. 둘째당숙과 막내당숙은 몇 년 간 원증산에서 살다가 훗날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화로 복귀했다. 정작 종가의 (큰)아버지 형제분이 향리를 떠났고, 지차(之次)의 당숙 3형제분이 영욕의 옛 터전을 지킨 셈이었다. (큰)아버지가 극빈, 아버지가 빈농으로 허덕이던 그때 그 시절 연화 당숙들은 잰걸음으로 가난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있었다.
큰당숙은 매년 농토를 늘려 가며 풍작을 일궈냈다. 둘째당숙과 막내당숙도 먹고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큰당숙과 작은당숙은 돌아가신 뒤 당신들이 살던 연화에 잠드셨고, 6·25 참전용사로 국가유공자 반열에 오른 막내당숙은 국립임실호국원에 안장되었다. 현재 연화에는 막내당숙모가 살고 있었다. 생존한 친족 중 가장 높은 어른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나보다 열두 살 더 많은 큰누님은 몇 년 전 세상을 떠났고, 큰누님보다 세 살 아래 나보다 아홉 살 많은 둘째누님은 10년 전 몹쓸 병으로 쓰러진 뒤 지금은 경기도 인덕원의 한 요양병원에서 투병하고 있었다. 둘째누님과 나 사이의 나이 차이가 크게 벌어진 것은 그 어간에 어린 3남매가 젖먹이 때 사망한 탓이었다.
7남매 중 통산 셋째이자 4형제 중 장남인 나는 스무 살 때 적수공권으로 상경했다. 그 뒤 산전수전 공중전 육박전 상륙전 세균전 화생방전 핵전을 겪으며 ‘눈물 없이는 감상할 수 없는 영화’처럼 살아왔다. 피눈물로 얼룩진 형극의 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부모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잇따라 돌아가시는 그 충격과 우여곡절 속에 나는 어찌어찌 마음씨 착한 여성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일곱, 아내는 스물여섯 살이었다. 우리 부부는 3남매를 두었다. 통산 다섯째이자 3자매 중 막내에 해당하는 누이동생 옥희도 일찍 서울로 올라와 결혼한 뒤 봉천동을 거쳐 이촌동에 정착했다.
고향에는 진실로 사랑하는,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아우들 세 사람이 살고 있었다. 둘째 차복 아우와 막내 계복 아우는 원증산에 살고, 셋째 선복 아우는 부여읍 쌍북리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수시로 연락을 취하며 긴밀히 소통하고 있었다. 건강하게 장성한 조카들은 당진과 부여 일대에서 각각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선대 어른들 살아생전 원증산 두 집과 연화 세 집, 즉 (큰)아버지 형제분과 당숙 3형제분은 자타가 공인할 만큼 우애가 극진했다. 설이나 추석 때 대소 일가가 종가인 우리 집에 모여 차례를 지냈다. 기제 때에는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누구냐에 따라 집결지가 달랐다. 종가 선조님일 때는 원증산 우리 집, 종조부님 내외분일 때는 연화 큰당숙 집에서 봉사했다.
선산으로 성묘 갈 때에는 반드시 원증산 친형제와 연화 종형제 다섯 분이 동행했다. 그 어른들 뒤에는 올망졸망한 우리 당내간 형제들이 따랐다. 어린 시절 우리는 추석 성묘 길에서 곧잘 아그배나 명감을 따먹곤 했다. 일가 전원이 단체를 이루어 성묘 다니는, 우리 집안 특유의 가풍을 보면서 타성들이 부러워했다.
알다시피 우리 친형제는 원증산에서 자랐고, 재종형제들은 대부분 연화에서 성장했다. 그들은 지금 증산리 이외에도 세종 서울 인천 창원 거제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원증산의 우리 친형제보다 연화의 재종형제들이 훨씬 더 번창했다.
원증산의 ‘향기 복’ 자 항렬이 네 사람인 데 비추어 연화의 ‘향기 복’ 자 항렬은 아홉 사람이었다. 원증산 친형제들에게 사촌이 없는 반면 연화 당숙어른 자제들 사이에는 친형제 이외에도 사촌들까지 뒤섞여 있었다. 원증산과 연화의 ‘향기 복’ 자 항렬, 즉 육촌 이내의 형제간은 총 13명이었다. 우리는 선대 어른들처럼 사이좋게 지내왔고, 특히 집안 경조사에는 끈끈한 응집력으로 벌 떼처럼 뭉쳤다.
굳이 대소간 서열을 따지자면 21세 선조님 이래로 내가 종손이지만, 나이로는 큰당숙의 장남인 춘복(春馥) 형님이 나보다 네 살 더 많았다. 대전에서 동장을 지내고 정년퇴직한 그분은 지금 세종에 살고 있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남한테 듣기 싫은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무골호인이었다.
형님 이외의 다른 형제간은 전부 나보다 나이가 적었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이면서 국민학교 2년 후배인 육촌 근복(近馥) 아우는 둘째당숙의 장남이었다. 그는 고향을 지키며 축산과 특용작물 재배 등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2019년 3월 12일 춘복 형님이 형수를 잃었다. 형수는 형님과 같은 동네인 연화 출신이자 나하고는 석양국민학교 동기동창인데, 병명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해괴한 희귀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누워 고초를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듣고 대전의 장례식장으로 달려갔을 때 형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형님은 고인을 화장하여 고향 연화에 안장한다는 방침을 세워 놓고 있었다. 물론 자녀들과 상의를 거친 결정이었다. 연화 초입에는 형님 소유의 임야와 전답이 있었다. 임야는 증산리 47-3, 전답은 각각 증산리 211-1, 212-1이었다. 이 땅은 모두 경계를 맞대고 있어서 사실상 한 필지나 다름없었다.
형님 동기간은 오래 전 큰당숙이 돌아가시면서 물려주신 집과 논밭을 모두 처분했다. 하지만 형님은 이 세 필지를 특별한 지성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당숙들 묘소가 자리한 땅이기 때문이었다. 형님이 내게 말했다.
“동생, 연화 입구에 내 산 있잖아. 이번 계제에 거기에다 가족 묘지를 만들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형님이 말하는 산이란 증산리 47-3 임야를 의미했다. 규모는 작지만 가족 묘지를 조성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땅이었다. 연화 진입로 갓길로 용머리처럼 뻗어 나온 야트막한 야산이었다. 내가 말했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현조 할아버지부터 전부 한자리로 모시면 어떨까? 직계 조상님들과 원증산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물론 우리 육촌들까지 합쳐서 당내간 가족 묘지를 만들자는 거야.”
‘원증산 아저씨 아주머니들’이란 나의 (큰)아버지 내외분과 아버지 내외분을, ‘육촌들’이란 우리 친형제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족보 계선으로 따지자면 21세 선조님부터 27세 (큰)아버지 내외분과 아버지 내외분까지는 명색이 장손인 내가 책임져야 할 조상님들이었다.
막말로 형님이 그 어른들을 빼놓고 26세 종조부님 이후 연화 쪽 당신의 직계 가족 묘지를 따로 만든다 한들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형님은 범위를 넓혀 입향조 이래의 일가 전체를 망라하자는 것이었다. 종손인 내가 해야 할 일을 방손인 형님이 먼저 그런 제안을 하다니 참으로 놀라웠다.
지난날에는 당숙들이 종가 대신 연화를 지켜왔는데, 이번에는 재종형님이 당내간 가족 묘지를 조성하자고 나선 터라 감동의 진폭이 더욱 컸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사실인즉 나로서는 그런 위선 사업을 하고 싶어도 실천에 옮길 수가 없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소유한 땅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형님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진정한 혈족의 의미를 거듭 확인했다. 어린 시절 어느 해 봄 연화에 갔다가 형님과 함께 망태기 둘러메고 모정밭 밭두렁에서 토끼풀 뜯던 옛 생각까지 떠올라 콧날이 시큰했다. 형님은 도보로 통학하는 나를 도로에서 만나면 자전거에 태워 주기도 했다. 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내가 말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요.”
“동의할 의향이 있어?”
“동의라니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산소 문제는 내 동기간들과 사촌끼리 합의하면 되지만 그 윗대 조상님들 산소 문제는 종손인 육촌 동생한테 최종 결정권이 있잖아. 그래서 상의하는 거야.”
“아, 잘 알겠습니다. 저는 형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형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우리는 묘지 조성 계획을 의논하기 위해 부여읍의 한 음식점에 모였다. 정림사지 인근에 위치한, 주차하기 좋고 민물고기 매운탕으로 유명한 그 음식점은 내 단골집이었다.
그날 오찬 회동에는 춘복 형님을 비롯하여 우리 4형제와 근복 아우가 참석했다. 형님의 중대 결단으로 장지가 확정된 만큼 모든 수순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형수의 유해는 임시로 어느 사찰에 위탁해 놓고 있었다.
우리는 먼저 각 세대가 성의껏 공사비 분담을 약정했다. 그런 다음 포클레인을 동원한 지반 정지 작업, 신산 묘실 축조, 비석을 비롯한 석물 설치 등 공사 전반은 십자거리 석재 공장에 일괄로 용역을 주었다. 석재 공장 사장과 근복 아우는 평소 자주 어울리는 친구간이었다.
형님과 나는 묘지 조성의 기본방향을 수립했다. 묘소 자체를 호화 분묘가 아닌, 검소하지만 옹졸하지 않은 초현대식 합동 납골묘로 시공하되 묘역의 면적을 줄이는 데까지 줄여 자연 훼손을 극소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고 나서 주변에 좋은 꽃과 나무를 심어 궁극적으로는 꽃동산 묘원을 만들 구상이었다.
나는 비문을 성안했고, 석재 공장에서는 오석에 각자까지 마쳤다. 이로써 만반의 준비가 완료되었지만 문제는 묘원 예정지 현장 사정이었다. 아직은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이 녹느라 질척거려 손을 대기가 마땅치 않았다. 그리하여 4월 중순, 얼부풀고 들떴던 땅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제자리를 잡고 나서 날씨까지 푸근해졌을 때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근복 아우의 주도 아래 석재 공장에서 보낸 포클레인이 임야 47-3 산기슭을 다듬기 시작했다. 석재로 묘실을 앉히고 그 전면에 널찍한 제절을 확보하기 위해 경사면을 평면으로 깎는 기반 정지 작업이었다. 포클레인은 본격적으로 땅을 파기 전에 부릉부릉 부르릉 부르릉 힘을 쓰면서 걸리적거리는 땅거죽의 잡목들을 삽날로 찍어 넘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동네 주민 강씨 아내가 나타나 근복 아우에게 공사 철회를 요구했다. 마을 이장도 자전거를 타고 와서 가세했다. 인가 가까운 곳에 묘지를 조성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언저리에는 이미 여러 기(基)의 분묘가 있었고, 당숙들의 묘소 또한 공사 현장과 맞닿은 전답 211-1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면사무소와 군청에 민원까지 제기하면서 바득바득 묘원 조성을 가로막았다. 피차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안면을 몰수하고 나서서 제동을 거는 데는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모든 일이 순풍에 돛을 달고 술술 잘 나가나 했는데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난 셈이었다. 어떻게 보면 시골 인심이 그전 같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근복 아우는 공사를 중단했다. 부러뜨린 나무들을 한쪽 구석으로 긁어다 붙여 차곡차곡 쌓은 뒤 포클레인도 철수시켰다. 나는 원증산에 탯줄을 묻었지만 춘복 형님과 근복 아우는 본디 연화 태생이었다. 연화 출신이 연화 자기 마을에 묘지를 조성하는데 한동네 사람인 연화 주민이 막아서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4월 하순이었다. 춘복 형님은 이장을 설득하고 초장부터 시비를 걸었던 문제의 주민과 타협에 들어가 절충안을 마련했다. 임야 47-3 산기슭을 포기하는 대신 전답 211-1에 있는 기존 큰당숙 내외분의 쌍분을 헐고 그 자리를 재활용하는 방안이었다. 큰당숙 내외분의 쌍분은 마을길에서 조금 떨어진, 우리가 처음 손댔던 47-3 산기슭으로부터 몇 걸음 안쪽에 있었다.
춘복 형님은 우리 4형제와 근복 아우에게 거의 모든 업무를 일임했다. 나하고 선복은 구산 파묘를 맡았고, 차복과 계복은 화장과 신산 산역을 담당했다. 나는 이 분야에 내 나름의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성당에서 연령회 활동도 했지만, 지인들의 장례와 이장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삽과 호미 등 연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유해를 개렴할 한지까지 충분히 준비했다. 골판지 상자, 면장갑, 나일론 끈, 필기구, 생수 등 소품도 챙길 만큼 챙겼다. 나는 아우들과 머리를 맞대고 백지에 도면을 그려가면서 작업 순서를 논의했다.
현조부님 이하 선조님들의 유택은 연화 이외에도 귀신보와 원증산 등 여러 산록에 산재해 있었다. 큰당숙 내외분 산소를 제외한 다른 어른들 묘소의 현장은 어디라 할 것 없이 국유지 아니면 남의 땅이었다. 연화에는 현조부님 내외분, 고조부님 내외분 산소가 있었다. 그 묘소 일대는 본래 우리 선조님 소유였다가 집안이 몰락할 때 누군가에게 넘어간 뒤 이 사람 저 사람 여러 사람 손으로 전전했다.
그해 4월 29일이었다. 우리는 연화에서 멀리 떨어진, 귀신보에 있는 증조부님 내외분 산소부터 파묘에 들어가 차례차례 유해를 수습했다. 포클레인으로 봉분을 헐고 호미로 살살 광중을 긁어내면 유골이 나왔다. 그런가 하면 골편이 진토 되어 전혀 유골을 찾을 수 없는 곳도 있었다. 그런 묘소에서는 유해가 산화한 내광을 굴토하여 도자기 골호에 담았다.
산역은 거칠 것이 없었다. 우리 형제들의 손발이 척척 잘 맞았다. 차복 아우는 생일이라면 못하는 것이 없었고, 계복 아우는 화물차로 이것저것 실어 나르면서 신속한 기동력을 발휘했다. 석재 공장 사장은 물론 포클레인 기사와 인부들도 적극 협조해 주었다.
원증산 종조부님 내외분 산소를 파묘할 때에는 근복 아우도 합세했다. 우리 4형제는 그 어른들의 종손자이지만, 춘복 형님과 근복 아우는 그 어른 내외분의 친손자였다. 새벽녘에는 짙은 안개가 흐느적흐느적 눈앞을 가리면서 오락가락했으나 새때쯤 해서 말끔히 걷혔다.
우리는 합장묘를 포함해 총 열네 기의 산소를 파묘했고, 현조부님 내외분부터 큰당숙 내외분까지 열여덟 분의 유해를 수습했다. 선조님 중에는 부인이 전배와 후배 두 분인 경우도 있었다. 화장할 유해는 화장하고 화장하지 않아도 될 유해는 원상대로 골호에 모셨다.
큰당숙 내외분 합장묘 위치에 새로 축조한 신산의 석곽 묘실은 모두 열두 칸이었다. 장방형의 석곽을 세로로 이등분하고 가로로 육등분하였다. 저 위 사성 쪽을 시작으로 균등하게 칸칸이 가른 광중에 현조부님부터 큰당숙까지 내외분끼리 나란히 앉혀 열여덟 분의 골호를 차례차례 하관하고 횡대를 얹었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골호와 횡대에는 잠드신 분의 휘와 배위(配位)의 성씨 명문을 넣었다.
묘실 두 칸은 당장 천묘하기가 어려운 둘째당숙 내외분과 막내당숙, 현재 생존해 계시는 막내당숙모의 훗날을 위해 공실로 남겨 두었다. 그러고는 이 아래 제절 쪽 두 묘실에는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춘복 형님 내외분과 우리 부부가 들어갈 자리를 설정해 놓았다. 형님 내외분과 우리 부부는 죽은 뒤에도 가장 가까이 묻히게 될 것이었다.
이제 형수의 유해는 언제든지 이곳 유택으로 모실 수 있었다. 향후 형님이 세상을 뜨면 그 곁으로 입실하게 될 것이었다. 장차 우리 부부가 맨 아래 가장 낮은 귀퉁이 칸에 들어가 두고두고 역대 선조님들을 잘 모시리라는 다짐과 함께 자식들에게 묘지 걱정을 덜어주게 되었다는 생각이 맞물려 매우 흡족했다. 형님 연세는 일흔 셋이었고, 내 나이는 예순아홉으로 일흔에 턱걸이하고 있었다.
산역 작업자들은 교대로 십자거리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돌아와 막판 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석곽 위에 흙을 올린 다음 떼를 입혀 봉분을 만들었고, 그 주변에 몽돌을 깐 뒤 석재로 테를 둘러 마감했다. 상석 앞에는 잘 다듬어진 화강석을 널찍하고 미끈하게 깔아 전천후 제절을 만들었다.
아담한 묘비도 세웠다. 앞면에는 ‘한산이씨집의공파묘원조성기(韓山李氏執義公派墓園造成記)’를, 뒷면에는 ‘한산이씨집의공파세계일람(韓山李氏執義公派世系一覽)’을 새겼다. 묘원조성기에는 가문의 내력과 묘원 조성 경위를 간략히 썼고, 세계일람에는 시조로부터 출가외인을 제외한 28세까지의 직계존속을 명시하는 한편 28세가 낳은 29세 ‘멀 원(遠)’ 자 항렬 16남 12녀 28남매의 이름을 적었다. 여기에 새긴 지친은 총 73인이었다. 그 맞은편 한쪽에는 ‘묘실안치도(墓室安置圖)’를 세워 조상님들께서 잠드신 현실(玄室)의 위치를 도면으로 적시했다.
해가 서너 발쯤 남아 있을 무렵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당초 예정보다 일찍 끝난 셈이었다. 우리는 곧 상석 위에 간소한 제물을 차려놓고 성분제를 지냈다. 화강석이 깔린, 그러나 아직은 흙부스러기가 남아 있는 제절에 우리 형제들이 넙죽 엎드려 절을 올릴 때 내 가슴속에서는 실로 만감이 교차했다.
현조부님부터 조부님까지는 뵙지 못했지만, 살아생전 나를 끔찍이도 아껴 주셨던 종조모님과 (큰)아버지 (큰)어머니 아버지 어머니와 큰당숙 내외분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라 심장이 멎는 듯 거의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선대 조상님들을 이처럼 번듯한 한자리 유택에 모심으로써 감개가 무량했다. 형수가 작고한 지 딱 49일째 되는 날이었다.
저 안쪽 옛 집터가 호적의 본적이라면 여기는 육친의 본적이었다. 지난번 공사를 중단한 언덕받이에는 드문드문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어 있었다. 며칠 후 형님 가족들이 형수의 골호를 이 묘소에 봉안했고, 형님과 재당질들이 수시로 들러 고인을 추모하며 슬픔을 달랬다.
역시 선대 어른들의 묘소를 한곳으로 이장 통합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남의 땅이 아닌, 우리 친족인 형님 땅이어서 그동안의 불안과 걱정을 말끔하게 씻어낼 수 있었다. 최소한 누군가 타의에 의해 분묘 개장을 강요받을 일은 없었다.
우리 후손들이 찾아오기도 용이했다. 종래에는 묘소가 여기저기 띄엄띄엄 여러 산록에 산재해 있어 실전의 위험이 컸다. 우리 세대가 죽고 나면 객지로 나간 차세대의 경우 십중팔구 묘소를 찾기 어려울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묘원은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로움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성묘도 단 한 번 행보로 일원화되었다. 과거에는 원증산에서 출발하여 귀신보로, 연화로 한 바퀴 돌아야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더군다나 이 근래에는 산이 숲으로 우거져서 산길을 찾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 묘원은 산이 아닌 잔디밭에 조성되어 숲을 헤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었다.
마을 어귀인지라 교통까지 편리했다. 승용차든 화물차든 마음만 먹으면 제절 앞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당초 공사를 시작했던 47-3 산기슭이 아닌 까닭에 다소 미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이 자리가 그 자리만 못한 것도 아니었다.
벌초도 쉬워졌다. 그전에는 벌초 때마다 아우들이 예초기를 짊어지고 근동의 여러 산소를 찾아다니며 중노동을 했다. 고역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두 시간이면 일거에 모든 작업이 끝났다. 여러 군데 구산 파묘한 자리가 본래의 형상으로 복원되었으니 자연 보호에도 일조한 셈이 되었다.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여러 차례 묘소를 참배했다. 선친 기일인 음력 5월 열아흐렛날, 선비 기일인 7월 초닷새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른 일로 부여에 갈 때마다 반드시 아우들과 동행하여 먼저 가신 어른들의 영원한 안식을 빌었다. 여름에는 봉분 잔디까지 파랗게 살아나 여간 보기 좋은 것이 아니었다.
발치 아래에는 또 하나의 밭이 있었다.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무화과나무와 매실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그 땅은 아우들과 손아래 후손들의 몫이었다. 평장하기 딱 좋은 지형이었다. 부여의 아우들이야 수시로 만나지만, 전국 각지에 거주하는 재종아우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몹시 궁금했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그들을 그리워하는 동안 버스가 속력을 낮추면서 느린 동작으로 우회전하고 있었다. 부여시외버스터미널 입구였다. 아니나 다를까, 세 아우가 하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그들과 악수를 나누는 순간 얼마나 반가운지 눈시울이 화끈했다.
우리는 곧 각자 승용차에 분승하여 단골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차복 아우의 승용차에 계복아우가 동승하고, 나는 선복 아우의 승용차에 편승했다. 길가에는 벚꽃이 활짝 만개해 눈이 부셨고, 주차장 언덕 위에는 하얀 목련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다. 아직 시간이 좀 일러 할랑한 음식점에는 춘복 형님과 근복 아우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서로 안부를 물으면서 메기 매운탕을 끓여 놓고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그 집 음식은 언제 먹어도 맛이 있었지만, 어중간한 연세에 홀로 되신 형님을 바라볼라치면 안쓰러운 마음에다 단명했던 형수가 떠올라 목울대가 뻣뻣해지면서 음식이 찌룩찌룩 목구멍에 걸렸다.
식사를 마친 뒤 선발대는 연화로 떠났고, 나는 선복 아우와 함께 금동대향로 조각상이 백제의 역사를 알려주는 로터리 부근 농협 하나로마트에 가서 조상님께 올릴 주과포혜(酒果脯醯) 등 기본적인 제수를 구매했다. 조율이시(棗栗梨枾)는 진열대에 올라와 있는 여러 품목 중에서 가장 싱싱하고 실팍한 최상품으로 선택했다. 차복 아우가 좋아하는 믹스커피 한 상자와 형님께 드릴 담배도 두어 갑 샀다.
선복 아우가 각종 물품을 골판지 상자에 다문다문 담아 승용차 트렁크에 실었고, 우리는 서둘러 로터리를 벗어난 뒤 수년 전에 새로 개통한 제4호 국도로 들어섰다. 왕년의 제4호 국도는 이제 제10호 군도로 하향 조정돼 있었다. 승용차가 십자거리를 지나 사비문 방향으로 치달을 때에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원증산을 눈알이 빠지도록 쳐다보았다. 예전에는 없었던, 새로 지은 빨갛고 파란 건물들이 알록달록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는 새다리를 지나 묘원에 다다랐고, 먼저 도착해 있던 선발대와 합류했다. 묘소 앞 좌우 화병에는 아직 생생한 조화가 꽂혀 있었다. 형님네 자녀들, 즉 재당질들이 최근 며칠 사이에 다녀갔다는 증표였다. 그 아이들은 아직도 모친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우리는 곧 상석에 제물을 진설하였고, 여섯 사람이 일렬횡대로 도열했다. 내가 초헌, 형님이 아헌, 근복 아우가 종헌을 맡았다. 우리는 헌작과 동시에 일제히 절을 올렸다. 독축은 생략했다. 나는 바닥을 짚고 엎드릴 때마다 조상님들의 명복을 빌면서 자손만대의 창대한 번영을 발원했다.
우리는 그 오른쪽의 둘째당숙 내외분, 당고모부 내외분 산소에도 잔과 절을 올렸다. 누런 잔디 사이로 예쁜 제비꽃이 피어 있었고, 쑥과 냉이를 비롯해 자잘한 잡풀들이 파릇파릇 어린 싹을 내밀고 있었다. 모든 성묘 절차를 마친 뒤 우리는 반질반질한 화강석 제절에 둘러앉아 음복에 들어갔다. 과도로 저민 사과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면서 형님이 내게 말했다.
“이 자리 참 좋지?”
“좋고 말구요. 천하명당입니다.”
“옛날 연화가 번창할 때 여기 이 자리에 안동권씨네 기와집이 있었대. 지금도 밭을 갈다 보면 기와 조각이 나와. 초가집 일색이던 시절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면 형편이 괜찮았다고 봐야지. 그 사람들이 주저앉은 다음에는 우리 선조님들이 그 뒤를 이어 떵떵거리며 가장 잘 살았다고 하는데…”
형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이 마당에서 유쾌하지 못한 과거사를 소환해 봤자 별로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한때 저 밑바닥까지 거꾸러졌던 우리 가문은 조상님들의 망극한 은덕으로 마침내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더욱이 꺼져가는 촛불처럼 간당간당했던, 백척간두의 절손 위기에 처했던 우리 일가가 이만큼이라도 번창한 것은 미상불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형님에게 말했다.
“형님 고맙습니다.”
“뭐가?”
“형님 결단으로 이런 묘원을 조성한 겁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형님께서 실행하셨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날씨는 화창했고, 광활하게 탁 트인 전망이 참 좋았다. 해마다 벼가 누렇게 익어 황금물결을 이루는 곡창 저 건너편으로 논산 광석면 슴말이 보였다. 슴말은 섬말, 즉 섬마을을 일컫는 우리 고향 사람들의 독특한 발음이었다. 그 오른쪽으로는 성동면의 일각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광석면과 성동면의 경계를 이루는 종래의 국도 제4호, 즉 현재의 군도 제10호는 지난 시절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원증산에서 논산까지 도보로 통학하던 길이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절이었다. 형님이 내게 물었다.
“동생, 오늘 서울로 올라가야지?”
“그렇습니다.”
“건강하게 잘 지내.”
“제가 형님께 드릴 말씀입니다. 혼자 사시는 형님이야말로 식사 잘 챙겨 드시고 건강에 각별히 신경 쓰셔야 합니다. 가까이 살면 자주 찾아뵐 수 있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정말 송구합니다.”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우리는 음복하고 남은 제물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해는 아직도 하늘 한복판에 동동 떠 있었다. 그전 같으면 여러 군데 흩어진 묘소를 찾아 산판 능선을 더듬고 다닐 시간이었다. 우리는 진입로 갓길 느티나무 쪽으로 내려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차복 아우에게는 믹스커피를 선물로 건넸다.
우리 형제들은 각자 자기 승용차에 올랐다. 먼저 춘복 형님이 떠나자 그 뒤를 따라 근복 아우도 자기 집으로 출발했다. 아까 부여읍에서 그랬던 것처럼 차복 아우의 승용차에 계복 아우가 탔고, 나는 선복 아우의 승용차에 올라 동네 안쪽으로 들어가 막내당숙모를 찾아뵈었다.
인기척을 하며 댓돌 쪽으로 다가가자 당숙모가 뒤뚱뒤뚱 맨발로 달려 나와 반겨 주었다. 벌겋게 충혈된 당신의 눈에는 그렁그렁 이슬이 고이고 있었다. 허리는 굽을 만큼 굽었고, 치아가 다 빠져 합죽해진 두 볼에는 주름살과 검버섯만 자글자글했다. 병아리 눈물만큼 약소한 용돈을 드렸다. 당숙모는 팔순을 훌쩍 지나 구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른이 부엌에서 떠다 준, 시원하면서도 꿀맛 같은 냉수 한 대접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삽짝을 나섰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가랑잎과 지푸라기들이 풀풀 휩쓸려 날아다니고 있었다. 당숙모는 우리가 앞집 담장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댓돌 위에 서서 눈물을 훔치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곧 연화를 떠나 부여시외버스터미널로 직행했다. 며칠 전부터 한식 성묘에 무척 신경을 써왔는데 비로소 큰 숙제 하나를 간동하게 해결한 셈이었다. 홀가분하면서도 뿌듯했다. 나는 선복 아우가 사준 차표를 들고 버스에 올랐다. 내 좌석은 9번이었다.
버스가 승강장을 밀어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자 아우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창밖의 아우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머니 병환으로 유아기에 유난히 젖배를 많이 곯았던 아우도 어느새 환갑을 넘기고 노년으로 접어들었다 생각하니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이 야속하고 서러웠다.
그렇다. 나는 이다음에 죽어서라도 우리 집안의 뿌리가 박힌 부여군 석성면 증산리 육친의 본적으로 돌아와 조상님들 발아래 뼈를 묻으리라. 터미널 출구 골목을 벗어난 버스가 성왕상(聖王像) 로터리 방향으로 좌회전하면서 조금씩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
이광복(소설가·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약력
충남 부여 출생
1973년 문화공보부 문예창작 현상모집 장막희곡 입선
1974년 『신동아』 논픽션 현상모집 당선
1976년 『현대문학』 소설 추천
1979년 『월간독서』 장편소설 현상모집 당선
[주요경력]
(사)한국문인협회 『월간문학』 기자, 편집국장, 이사(제19대~제23대), 소설분과회장(제24대), 부이사장(제25대~제26대, 상임이사 겸임), 이사장(제27대), 평생교육원 원장, 『월간문학』『한국문학인』 발행인 겸 편집인 역임.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처장, 문화정책위원장, 이사(제28대~제34대)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제6대~제9대, 제11대~제12대) 부이사장(제10대, 제13~14대) 역임. 한국문학진흥 및 국립한국문학관건립공동준비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 문학진흥정책위원회 위원, 국립국어원 말다듬기위원회 위원,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제27대~제28대),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이사, 국립한국문학관 이사,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대표회장, 제6회 세계한글작가대회 조직위원장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한국소설가협회 최고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대한민국 명예해군
[주요작품]
ㆍ소설집 화려한 밀실 사육제 겨울여행 먼 길『동행『만물박사(전3권)
ㆍ장편소설 풍랑의 도시 목신의 마을 폭설 열망 술래잡기 겨울무지개 바람잡기 송주임 이혼시대(전3권)『삼국지(전8권) 한 권으로 읽는 삼국지 사랑과 운명 불멸의 혼-계백 구름잡기 안개의 계절 황금의 후예
ㆍ콩트집 풍선 속의 여자 슈퍼맨
ㆍ산문집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ㆍ전래동화 에밀레종
ㆍ교양서적 태평양을 마당처럼 세계는 없다 끝나지 않은 항일투쟁 금강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 천수경에서 배우는 성공비결 108가지 문학과 행복
ㆍ시나리오 시련과 영광 아, 대한민국 외 다수
[수상]
대통령표창(1987, 1995). 제7회 동포문학상. 제2회 시와시론문학상. 제20회 한국소설문학상. 제14회 조연현문학상. 제1회 문학저널창작문학상. 제19회 한국예총예술문화상 공로상(문인부문). 노동부장관 표창. 제28회 국제PEN문학상. 제14회 들소리문학상 대상. 부여 100년을 빛낸 인물(문화예술부문). 제30회 한국예총예술문화상대상. 제3회 익재문학상. 제9회 정과정문학상. 제3회 한국지역방송연합(KBNS) 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제35회 대한민국예술문화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