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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 01장. The Mustard Seed/겨자씨 하나 (3/4)
믿음은 사라져버렸다, 이것을 기억하라, 예수는 깊은 믿음의 시대에 살았다, 그의 모든 영광, 그의 모든 의미는 그런 믿음의 차원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예수가 말한 이 작은 이야기로 들어가자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들은 질문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호기심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논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질문은 순수했다, 질문이 순수했을 때만 예수는 그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다, 질문이 순수한 경우를 그대는 아는가?
만일 그대가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면 그 질문은 순수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묻는다, "하느님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대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 그대는 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는 단지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 나에게 오는 것이다.
또는, 그대는 거기에 신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대는 단지 내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나에게 오는 것이다, 만일 이미 대답이 있다면 그 질문은 속임수이며 순수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질문은 예수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없다, 예수는 오직 순수한 질문에만 대답하기 때문이다.
제자가 질문할 때 그 제자의 마음속에 대답은 없다, 그는 모른다, 그는 단순히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대가 무언가를 질문할 때, 잘 기억해 두라, 그대가 이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묻는 것인가? 또는 그대의 지식을 통해서 묻는 것인가?
그렇다면 거기에 더 이상의 만남은 없다,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한다 해도 그 답은 그대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 답을 받아들이기에 그대는 충분히 비어 있지 않다, 그 답이 이미 그대에게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미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두 가지 타입의 질문이 있다, 하나는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그것은 논쟁만이 가능한 것으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무지로부터 묻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을 잘 안다, 그대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물을 때 그대는 제자가 된다.
이제 그것은 논쟁이 되지 않는다, 그대는 단지 목이 말랐고 물을 청하는 것이다, 그대는 배가 고팠고 음식을 청하는 것이다, 그대는 모른다, 그래서 질문한다, 그대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제자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질문한다, 그대가 모를 때 그대는 겸손하다, 그대가 알고 있을 때 그대는 이기주의적이 되며 예수는 이기주의자들에게 말할 수가 없다.
제자들이 물었다.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는 끊임없이 하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그것은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 용어가 문제였는데 나라, 왕국이란 단어는 정치적인 용어로서 정치가들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가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정치가들이 "이 사람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왕국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또 자기가 그 왕국의 왕이라고 말한다, 이 사람은 정부를 몰아낼 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이 사람은 자기 왕국을 세우려 하고 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 총독, 관리, 그리고 제사장들은 모두 예수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기 때문에 예수는 영향력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변형되었으며 불꽃이 되었고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내면에 무언가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래서 사제들과 총독 본디오 빌라도, 헤롯 왕, 그리고 모든 지배자들--정치가와 성직자 들--은 이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는 위험스런 인물로 보였다, 그는 이렇게 오해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항상 오해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문제는 그가 세상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다른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말해야만 한다, 거기에 다른 용어란 없으며 사람들은 이미 그 용어들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그 의미들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하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n)와 하느님 나라(the kingdom of God), 그러나 '나라' 그 단어가 위험한 것이다, '나라'라는 용어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인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 세상의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혁명가였다, 혁명의 대가, 그러나 그것은 내면의 세계를 말함이었다, 그는 내면의 왕국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나 제자들조차도 그가 이야기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대가 어느 스승에게로 갈 때 거기에는 두 가지 다른 차원의 만남이 존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과 땅의 끝이 만나는 것이다, 만일 그대에게 신뢰가 있다면 그대는 하늘 속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신뢰가 없다면 그대는 땅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에게 신뢰가 있다면 그대는 날개를 펴서 날 수 있다, 그러나 신뢰가 없다면 그대는 땅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 사람은 그대에게 위험을 가져온다, 하늘 나라란 무엇인가? 어떤 형태의 나라를 말하는 것인가? 그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예수는 거듭 설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을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부자가 될 것이요,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 그는 마치 노자처럼 말했으며 그는 노자와 같은 사람이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 그는 가장 겸손한 자가 가장 중요한 자가 될 것이며,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부유하게 될 것이며, 소외받은 자가 그 나라에서는 인정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대가 소리 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가까이에 서 있을 때 강물에 비친 그대의 모습을 보라, 그것은 반대로 되어 있다, 반사된 모습은 언제나 거꾸로 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실제로 우리는 거꾸로 되어 있으며 만일 우리가 똑바로 되려고 한다면 모든 것을 바르게 놓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이 거꾸로 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어떤 혼돈의 상태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붓다는 거지가 되었다, 거지, 이 세상의 꼴찌, 그는 왕이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꼴찌에 속하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의 왕국을 떠났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나라는 단지 쓸모 없고 의미가 없는 짐이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짐을 나르고 있으나 그것은 자양분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를 파괴시킨다, 그것은 하나의 독이며 아주 천천히 스며드는 독이어서 그대는 그것을 느낄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한 친구가 그의 곁을 지나다가 말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것은 아주 천천히 퍼지는 독이야."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괜찮아, 나는 바쁘지 않으니까."
그대가 삶을 무어라 부르든지 간에 그것은 천천히 퍼지는 하나의 독이다, 왜냐하면 삶이란 결국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를 죽인다, 그 외에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그대는 바쁘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독의 질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그대가 바쁘지 않다면 그것은 아주 천천히 퍼질런지도,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그대를 죽일 것이다, 이 세상 나라는 죽음에 속해 있다, 그러나 하늘 나라는 영원한 생명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준비가 된 자들은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에게 넘치는 생명을 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장님이 빛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다
예수가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는 목이 말랐고 그래서 그는 우물가로 왔다, 거기에는 한 여인이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었는데 예수가 그 여인에게 말했다. "나는 목이 마르다, 나에게 마실 물을 조금만 달라."
그 여인이 말했다. "저는 아주 천한 계급에 속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물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나에게 물을 달라, 그러면 나도 너에게 나의 우물에서 나오는 물을 주겠다, 네가 그 물을 한 번 마시면 너는 다시는 목 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묻고 있다, "하늘 나라는 무엇과 같은 것입니까?"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것은 '무엇과 같은'이라는 용어로서만 설명이 될 수 있다, 신화란 이러한 것이다, 신화학은 그대가 모르는 것, 그대의 정신 상태로는 알 수 없는 것을 그대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을 통해서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신화란 그대가 아는 용어들을 통해 미지의 것을 표현하여 그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하늘 나라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대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것을 설명할 어떤 방법도 없다, 무엇을 말하더라도 틀릴 것이다, 진리는 말로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나 노자, 그리고 붓다가 그들의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만일 진리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라면 그들이 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그대들이 아는 어떤 상징들을 통하여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대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 그 미지의 것을 설명하려 노력했다.
비유들, 신화들, 이야기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들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신화를 분석, 해부하려고 시도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말한다, "이것은 신화이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분석하고 해부하며 신화에 수술을 가한다, 그리고 말한다, "이것은 신화이지 역사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도 신화가 역사라고 말한 사람은 없다, 그리고 신화는 해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떤 이정표에 화살표가 있고 그 화살표 곁에 '델리'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데, 그대가 그 이정표를 분해하고 화살표와 글자에서 화학적으로 잉크를 분석하여 모든 것을 해체하고는, "어떤 바보가 만든 것인지...... 여기에는 '델리'가 없어!"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신화는 이정표이며 화살표는 미지의 것을 향해 있다, 그것은 목적지가 아니며 단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묻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는 하늘 나라가 무엇인가 하고 물을 수는 없다, 그 질문의 성격을 잘 보라, 우리가 하늘 나라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면 너무 무리한 질문이 된다, 우리는 어느 쪽의 답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무엇과 같은지... 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그 의미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을 통해 어떤 표지판을 만들어주시면 우리는 잠깐이나마 그 실체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장님이 빛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다, 그대가 눈먼 장님일 때, 어떻게 빛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묻는 것은 답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것은 대답할 수 없다, 눈이 있을 때만 빛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빛은 무엇과 같은지요?"라고 물어야 한다, 그 의미는 "장님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것을 설명해 주십시오"라는 것이다.
모든 우화들은 장님의 언어로 표현된 진리이다, 모든 신화들은 장님의 언어로 치장된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해부하지 말라, 거기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그저 표지판일 뿐이다.
그리고 그대가 그것을 신뢰한다면 그 표지판들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 된다, 일본의 어느 절에는 불상이 없다, 사람들은 절 안에 들어가서 묻는다, "불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거기에 불상은 없다, 그러나 대좌 위에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 하나가 있다.
그것이 바로 부처이다, 그 절의 중은 말할 것이다, "이것이 부처입니다," 사실 그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고 있다, 그 중이 그것을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나는 모른다, 붓다란 무엇인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제자들은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를 묻고 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우화로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같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말해 주십시오, 우리는 경험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잠깐이나마 그 실체를 엿볼 수 있도록 무엇인가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마치 모든 씨앗들 중에서 가장 작은
한 알의 겨자씨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름진 땅에 떨어지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온갖 새들의 보금자리가 된다.
예수는 이 겨자씨의 비유를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이다, 하느님은 눈으로 볼 수가 없고 가장 작은 것보다도 더욱 작다, 그러니 어떻게 그를 가리킬 수가 있겠는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경계선상에 있는 것이 겨자씨이다, 가장 작은 것...... 그 경계를 넘어서 있는 것을 그대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계를 넘어서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겨자씨는 바로 그 경계선상에 있는 씨앗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있으나 그것은 너무도 작다, 그대가 그 경계를 넘어선다면 그대는 극미한 세계로 들어간다, 그 세계는 가장 작은 세계보다 더 작다, 이 겨자씨는 그 경계선상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 겨자씨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매우 신비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일단 그것이 자라나면 가장 큰 식물이 된다, 그것은 역설적이다, 씨앗은 가장 작지만 그 식물은 가장 크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지만 우주는 잘 보인다, 우주는 식물이며 나무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씨앗이다, 하느님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우주는 분명히 나타나 있다.
만일 그대가 한 알의 씨앗을 쪼개어본다 해도 거기에서 나무를 발견할 수는 없다, 그대는 그것을 분해할 수 있지만 거기에 숨어 있는 어떤 나무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대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나무는 없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데 이 씨앗 안에 커다란 나무가 숨겨져 있다고 말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가들이 항상 하는 일들이다.
그대는 이 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그것을 실험실로 가져가 그것을 분해해서 어디에 그 아름다움이 있는지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들은 꽃의 화학적 성분이나 다른 성분들을 가려낼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분해하고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병 속에 그 꽃의 다른 조각들을 분리해 넣고 표시를 해둘 것이다, 그러나 어떤 병에서도 꽃의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다, 절대로, 그러면 그들은 실험실에서 나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 환상을 본 것임에 틀림없다, 당신이 꿈을 꾸었거나...... 거기에 아름다움은 없다, 우리가 그 꽃 전부를 완전히 해부했는데도 아름다움은 없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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