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가장 위대한 인물은 갈릴레이다. 뉴턴은 갈릴레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 봤을 뿐이다. 뉴턴의 성과는 갈릴레이의 해석이다. 갈릴레이는 사고실험으로 물체별 낙하속도가 일정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광속은 일정하다. 마찬가지로 진화 속도는 일정해야 한다.
자연선택설을 따르면 변이의 확률이 진화 속도를 결정한다. 개체수가 많은 종은 많은 변이를 일으켜 많이 진화하고 개체수가 적은 종은 적은 변이를 일으켜 적게 진화한다. 초식동물은 숫자가 많으므로 많이 진화하고 포식자는 개체수가 적으므로 적게 진화하게 된다.
과연 그런가? 진화의 속도는 종의 개체수에 비례하는가? 그렇지 않다. 인류 중에 갈릴레이를 이해한 사람은 없다. 물체별 낙하속도의 불변은 내부의 보존원리에 따른 것이다. 보존은 보편이다. 계를 닫아걸고 내부의 자원을 전부 연결하면 뭐든 같아지는 것이 보존이다.
보존을 이해하려면 내부를 봐야 한다. 외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문을 닫아걸어야 한다. 열역학에서 닫힌계를 사용하는 이유다. 광속의 불변도, 물체의 낙하도 궁극적으로는 내부의 보존원리 때문이다. 보존이야말로 참과 거짓을 가리는 궁극의 논리가 되는 것이다.
그대는 보존을 보았는가? 그것을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으로 인류는 갈라졌다. 우리가 학교에서 여러가지 보존법칙을 배우지만 그것은 질량보존이나 각운동량보존과 같은 특수보존이고 자연계의 모든 변화가 계 내부의 자리바꿈이라는 일반보존은 배우지 않았다.
갈릴레이는 보존을 발견하고 그것을 관성으로 구체화 했다. 관성은 사건의 내부를 본다. 먼저 닫힌계를 상정해야 한다. 그것은 내부의 자원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이다. 연결되면 내부 밸런스가 작동한다. 나란함이다. 나란함은 대칭이 축을 공유한다. 보존은 공유다.
광속의 불변은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공유하면 보존되고 보존되면 일정하며 그것은 내부에서 결정되므로 외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체별 낙하속도는 일정하다. 우리가 느끼는 무게의 차이는 외부 영향이다. 그것은 인간의 개입이다.
알루미늄이 가볍고 납이 무거운 것은 인간 사정이고 지구는 그게 알루미늄인지 납인지 모른다. 물체는 지구에 속한다. 낙하는 인간이 느끼는 상대성이 아니라 지구가 붙잡는 절대성이 결정한다. 낚시꾼은 피라미든 월척이든 같은 힘으로 낚아챈다. 낚시꾼의 팔힘이 같다.
보존은 객체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결정된다. 갈릴레이는 그것을 사고실험으로 알아냈다. 그러나 사고실험은 다른 사람에게 증명하여 납득시키는 수단에 불과하고 갈릴레이는 사실 직관력으로 알아챈 것이다. 직관은 복제한다. 지식을 복제하면서 보존을 깨닫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닮는 이유는 서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공유하면 같아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느낀다. 커플이 손잡고 걸으면 걷는 속도가 같아진다. 남녀가 손을 공유한다. 우리는 위와 같아지려고 공유를 추구하면서도 아래와 같아지지 않으려고 차별한다.
사실은 갈릴레이 자신도 알지 못했다. 보존을 봤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다. 계 내부에 숨은 나란함을 봤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내부에 숨겨진 자원들이 모두 연결되면 계 내부에서 대칭된 둘이 축 하나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했다. 일반화 하지 못한 이유다.
깨달음은 쉽다. 남들이 밖을 본다는 사실을 알고 안을 보면 된다. 남이 어디를 보는지를 보고 반대로 하면 된다. 밖은 변하지만 안은 불변한다. 무엇이든 내부에 보존이 있고 보존을 아는 것이 아는 것이다. 밖으로 드러난 외모가 변해도 안에 감추어진 성격은 그대로다.
자동차의 보존은 엔진이다. 엔진이 같으면 토크와 마력은 같다. 정치판 보존은 권력이다. 유권자는 이득보다 권력을 원하므로 진보가 선거에 진다. 이득은 일회용으로 소비되지만 권력은 복제되므로 파생상품이 나온다. 가부장의 파생권력을 보지 못하면 정의당 꼴 난다.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스포츠든 모든 존재하는 것은 고유한 자체 보존이 있고 복제의 방향성이 있다. 언어의 보존은 동작이다. 동작의 복제가 어휘를 대량생산한다. 외국어 학습이 잘 안 되는 이유는 복제의 엔진을 모르기 때문에 지식이 스스로 복제되지 않아서다.
반드시 엔진이 있다. 고유한 엔진을 모르면서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엔진은 내부에서 무언가를 공유하는 나란함이다. 선과 악은 사회성을 공유하고, 진보와 보수는 문명성을 공유하고, 밝음과 어둠은 광자를 공유한다. 반드시 그것이 있어서 변화를 결정한다.
변화는 하나의 밸런스에서 또다른 밸런스로 복제된다. 밸런스의 해체로 변화를 격발하고 또다른 밸런스에서 변화가 멈추므로 구조가 복제된다. 우리는 밸런스를 교착시켜 변화를 통제한다. 변화를 멈추고 때로 변화를 격발한다. 공유에는 효율이 따르므로 지속가능하다.
인류는 공유를 보지 못했다. 복제의 엔진을 보지 못했다. 밖을 보기 때문이다. 밖을 보면 원자가 있다. 사물이 아니면 사건이다. 사물은 원자가 쪼개지지 않으므로 내부가 없고, 사건은 입구와 출구, 곧 원인과 결과를 보지만 역시 계 내부 의사결정 구조는 보지 못한다.
근대과학의 두 기둥인 원자론과 인과율은 밖을 보는 논리다. 갈릴레이가 처음 관성을 보았지만 인류는 관성을 보지 못했다. 계 내부의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보지 못하고 내부에서의 자리바꿈을 보지 못했다. 갈릴레이가 보고한 결과물을 봤지만 보는 방법을 보지 않았다.
지구가 1초에 400미터를 돌면 우리는 원심력에 의해 우주 밖으로 튕겨나갈 것이다. 이는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원심력에 의해 지구 밖으로 튕겨져 나가지 않고 제 자리에 멈추어 있지? 그들은 사실 중력을 발견한 것이다.
관점의 차이다. 관성도, 중력도 반대파가 먼저 단서를 찾았다. 그들은 갈릴레이에게 업적을 양보했다. 왜 무거운 물체가 더 빨리 떨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나? 피사의 사탑에 올라 물체별 낙하속도의 차이를 분석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려고 해야 맞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 문제다. 진보의 공격적 자세로 설 것인가 보수의 방어적 자세로 설 것인가? 갈릴레이는 공격적이고 그들은 방어적이다. 갈릴레이보다는 그들이 먼저 피사의 사탑에 올라 깃털과 쇠공의 낙하를 실험했어야 했다. 납과 돌 중에 어느게 빨리 떨어지지?
깨달음은 간단하다. 어색함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물체별 낙하속도가 같으면 광속도 같고 진화 속도도 같다. 다 같이 간다. 시를 지어도 라임을 맞추는 법이다. 뭔가 가지런하면 보기가 좋잖아. 이것은 본능적인 것이다. 그러나 지구에는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시피 하다.
갈릴레이도 사실은 반대파의 추궁에 쫓겨서 생각당한 것이다. 왜 어색함을 느끼지 않나? 가지런하지 않잖아. 비뚤어져서 들쭉날쭉하잖아. 광속이 일정하므로 진화 속도는 일정해야 한다. 시계 태엽은 일정한 속도로 풀린다. DNA라는 시계 태엽이 감겨 있다가 풀린다.
광속은 빛 내부 자기장과 전기장의 밸런스다. 일정할 수 밖에 없다. 뭐든 내부에서 결정되는 것은 일정하다. 그리고 자원을 모두 연결하면 반드시 계 내부에 도달한다. 열역학이 대표적이지만 열역학이 아니라도 뭐든 내부에서 압력이 높아지면 열역학으로 흘러간다.
정치는 투표율이 높아지면 열역학으로 바뀐다. 인도에서 유권자가 전부 투표하면 카스트별로 득표한다. 모두 투표한다고 가정하면 피부색만 보고 누가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될지 알 수 있다. 여성들이 모두 투표하고 흑인들이 모두 투표하면 당연히 해리스가 당선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할 것없이 모두 참여하면 일정해지는 보존법칙이 작용한다. 다르다면 간격이 떼어지고 차단된 것이다. 트럼프를 화나게 하면 법칙대로 행동한다. 모두 연결하면 인구가 전쟁을 결정한다. 미국까지 연결되자 연합국이 쪽수로 양차대전에 이겼다.
진화의 속도는 DNA 내부에서 결정되므로 일정하다. 자연선택은 외부 영향이므로 무시한다. 자동차 속도는 도로가 아니라 엔진이 결정한다. 개미가 진화를 멈춘 이유는 태엽이 풀렸기 때문이다. 진화는 무한하지 않다. 소행성이 충돌하여 태엽을 새로 감아준다면 몰라도.
깨달음은 반대편을 보는 것이다. 쉽다. 갓난아이도 일초에 한다. 왜 반대을 보지 않지? 왼쪽 반대는 오른쪽일까? 천만에. 그것은 시간의 반대다. 내일은 어제의 반대인가? 아니다. 내일이 조금 있으면 오늘 되고 더 있으면 어제 된다. 진보가 나이가 들면 보수로 변한다.
인간이 움직이므로 시간의 흐름에 의해 반대가 되는 상대성은 가짜다. 절대성은 공간이다. 공간대칭은 겉과 속, 안과 밖이다. 인류는 밖을 볼 뿐 안을 보지 않는다. 갈릴레이가 처음 안을 본 것이다. 밖을 보면 다르고 안을 보면 일정하다. 모든 상대성은 밖을 본 오류다.
인과율과 원자론은 밖이다. 왜 안을 보지 않나? 인과율과 원자론이 틀린 것은 아니고 절반의 진실이다. 왜? 밖만 보니까. 안을 보면 관측되는 정보가 늘어난다. 자동차 밖을 보면 트럭이냐 승용차냐를 구분할 뿐이지만 안을 보면 엔진에 따라 백 가지 자동차가 존재한다.
모두가 밖을 본다는 사실을 나는 봤다. 고개를 돌려 안을 보면 깨달음이다. 내부의 구조를 보고, 질서를 보고, 보존을 보고, 나란함을 보고, 축의 공유를 보고, 엔진을 보고, 방향을 보고, 효율을 보고, 동력을 보고, 지속가능성을 보고, 복제를 보고 다음 단계를 내다본다.
밖을 보면 입구와 출구가 있지만 그게 전부다. 대칭을 보라고 하면 시간을 본다. 대칭적이고, 상대적이고, 이원론적인 것은 대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본 착오다. 앞에 가는 것은 머리요 뒤에 가는 것은 꼬리다. 그것은 그냥 시간차다. 내부의 엔진을 알아보지 못한다.
전자는 양성자 주변을 돌지 않는다. 회전한다는 생각은 밖을 보는 관점이다. 사실은 내부의 밸런스를 맞춘다. 전자는 양성자 주변에서 자기장의 극을 바꾼다. 밖을 보면 주술을 걸고, 기도를 하고, 푸닥거리를 한다. 안을 보면 의사가 수술을 한다. 메스로 암을 잘라낸다.
우주가 보존이고, 보존이 불변이고 모든 존재에 고유한 보존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능동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자발성이 있다. 정치에, 경제에, 문화에, 도덕에, 예술에 고유한 보존이 있고, 자체의 관성과 논리가 있고, 권력이 있다. 그것을 알면 엔진을 찾은 것이다.
뽕짝은 보존이 아니므로 예술이 아니다. 관객 비위를 맞춘다. 권력은 작가에게 있다. 관객이 권력을 가지면 닫힌계 밖으로 나간 것이며 예술이 가출한 것이다. 권력이 내부 엔진이다. 예술 내부에 권력이 있어야 한다. 무지개를 보되 프리즘을 보지 못했다면 본게 아니다.
세상에 진리가 여러 개 있지 않다. 진리는 하나이며 그것은 보존이다. 인간은 직관력으로 보존을 보고 거기에 진리라는 이름을 붙인다. 진리는 복제의 엔진이다. 그것을 복제할 수 있을 때 안다고 할 수 있다. 엔진은 대칭이 축을 공유하므로 우리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남자 노벨상 수상자가 여자 수상자보다 많지만 아이큐 평균은 같다. 뭐든 모두 연결하면 같다. 남북한이 아이큐는 같은데 왜 북한은 가난한가? 미국시장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 연결하면 열역학이 작동한다. 열이 대류와 복사와 전도로 연결하기 때문이다.
모두 연결하면 어떻게 될까? 이 생각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모두 연결하면 객체 자체의 논리가 드러난다. 모두 투표하면 진보가 이긴다. 모두 투표하게 하는 전략은 뭐지? 정답이 나온다. 선진국이 되려면 차별금지로 모두 연결해야 한다. 우리가 가는 방향이 명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