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천안제일(天眼第一) 아나율(阿那律)
영원한 비구의 표상
바람직한 수행자상의 모범을 제시한 부처님 제자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 하나를 뽑으라면 우리는 주저 없이 아나율 존자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모든 번뇌를 여읜 청정 비구의 모습으로서 걸림없는 삶을 살았다.
천안제일이라는 그의 별칭도 그의 이러한 삶과 무관하지 않다.
아나율 존자의 산스크리트 명은 아니룻다(Aniruddha)이다. 여기서 니루다(niruddha)란 '멸하다' '떠나다' '끊어지다' '없어지다'라는 동사원형 '루드(rudh)'의 과거분사형으로 거기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아(a)가 붙어 무멸(無滅), 불멸(不滅) 등으로 의역된다.
그리고 아니룻다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형용사로서 장애가 없는, 내지는 자유 의지가 있다는 뜻에서 여의(如意), 이장(離障), 선의(善意) 등으로 의역된다. 아나율(阿那律), 아니루다 등은 그 음역이다.
아나율은 석가모니불의 사촌형제다. 말하자면 그는 부처님의 작은 아버지 감로반왕(甘露飯王)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이 아나율에게는 마하남(Mahamana) 이라는 형이 있었다. 어느 날 마하남은 자기 가족 중에는 출가한 사람이 없어 걱정하던 차에 동생 아나율에게 출가를 권유해 보았다. 그러나 아나율은 형의 권유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그러자 형은 그렇다면 내가 출가를 할 터이니 너는 일가를 이끌어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복잡한 의무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자 그때서야 석연치 않은 출가를 결심했다.
형제가 아나율의 출가를 허락해 줄 것을 어머니에게 요청하자, 어머니는 출가를 막으려는 속셈으로 이미 정치적 기반을 확고하게 잡고 있던 사촌형 발제(跋提, Bhaddiya)가 출가한다면 허락하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나율은 발제뿐만 아니라 아난, 우바리 등을 동반하고 출가를 감행하였다.
석연치 않은 출가 때문인지 아나율은 출가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는 그에게 진정한 회심의 순간이 다가왔다. 어느날 부처님께서 출가 제자들은 물론이고 재가 신도들을 모아 놓고 기원정사에서 설법하고 계실 때의 일이다.
그 날 아나율은 설법하는 부처님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그것을 본 부처님께서 아나율에게 "도대체 출가한 이유가 뭐냐"고 하면서 호되게 주의를 주었다. 부처님의 이런 말 속에는 다시 한번 출가의 의미를 되새기고 가멸찬 정진을 해 보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순간 아나율은 이제부터 다시는 부처님 앞에서 졸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면서 일 주일 동안이나 자지 않는 정진에 들어갔다. 그 결과 눈으로 사물을 제대로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실명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명의(名醫) 지바카(Jivaka)에게 가서 치료받도록 명했다.
그러나 아나율은 "부처님께 맹세한 것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하고 계속 치열한 정진을 하였다. 그리고 끝내는 실명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는 육안으로 사물을 식별할 수 없었지만 직관으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꿰뚫어 보게 된 것이다. 미세한 사물까지 멀리, 그리고 널리 볼 수 있으며, 중생들의 미래에 생사하는 일도 알아내는 천안(天眼)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찰나찰나 사멸하고 마는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난 대자유의 신통스러운 능력, 그 화현이었다. 그래서 그는 육체의 눈은 잃었지만 정신의 눈, 즉 영혼의 눈만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천안제일이라 불렸던 것이다.
그의 탁월한 능력을 일컬어 『앙굴리마라경』에서는 "아나율 같은 이는 천안이 제일이어서 참으로 공중의 새 발자국을 본다"라고 했다.
수행자의 조건
자, 이제 아나율의 흔들림 없는 수행자의 표상을 보여줄 차례다.
어느 날 아나율 존자가 사밧티에서 코살라로 가는 도중 한 마을에 이르러 여인숙을 겸한 기녀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과부의 집에서 하루를 묶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녀가 그에게 음심을 품고 격렬한 유혹의 숨길을 보내오자, 그는 단호하게 이를 물리친 데다가 교화까지 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출가 비구는 부인이 있는 집에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는 계율이 나왔다고 한다.
아나율은 8가지 수행자의 조건을 제시해서 그것을 구도자의 표상으로 삼고자 했다.
그것이 팔대인념(八大人念)이다. 팔대인각(八大人覺)이라고도 하는 이 말은 대인 또는 대인이 되기 위한 8가지 마음가짐 내지는 그러한 각오라는 뜻인데, 대인이란 보살, 아라한 등의 위대한 성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내용을 알아보자.
첫째, 지족(知足)할 줄 아는 마음가짐(知足者)
둘째, 시끄럽지 않고 적정한 곳에 머무르는 마음가짐(閑居者)
셋째, 욕심 없는 마음가짐(小欲者)
넷째, 계율을 지키는 마음가짐(持戒者)
다섯째, 생각이 고요한 마음가짐(三昧者)
여섯째, 지혜로운 마음가짐(智慧者)
일곱째, 많이 들으려는 마음가짐(多聞者)
여덟째, 정진하는 마음가짐(精進者)
아나율이 이러한 여덟 가지 위대한 인간의 조건을 제시하자 부처님께서는 그것은 고귀한 일이며 또한 가장 뛰어난 일이라고 칭찬한다.(증일아함37권『팔난품』)
아나율은 또한 깨달음으로 가는 구체적인 교리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목건련 존자는 그에게 깨달음으로 향하는 여러 덕목인 37각지(三十七覺支 ; 37菩提分法이라고도 한다.) 중에 포함되어 있는 사념처(四念處)에 대해서 물었으며, 여러 동료 비구들도 그에게 역시 37각지에 포함되어 있는 칠각지(七覺支)에 대해서 설해 줄 것을 부탁할 정도였다.
사실 이 37각지에는 사념처를 필두로 해서 팔정도(八正道), 사섭법(四攝法), 사무량심(四無量心)이 설해져 있어 부처님 생존 당시 수행체계 전체가 모두 망라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나율은 사념처에 대한 질문에 대해, 신(身; 바깥 대상), 수(受; 감각기관), 심(心; 우리들의 마음), 법(法; 바깥 대상)은 각각 부정(不淨)하고 고통스러우며, 무상할뿐더러 무아라고 설하면서,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에 머물지 말고 그 부정과 긍정의 양극단을 떠나는 것이 정지(正知)요 정념(正念)이라고 설했다.(잡아함 제19)
잡아함 제27권에서는 아나율이 칠각지에 대해서 비구들에게 설명한다. 칠각지란 우선 법의 진위(眞違)를 알아차린 다음[擇法], 그 진실한 법에 따라서 정진(精進)하여 참된 법에 대해서 기쁨을 맛보는 것[喜]이며, 마음을 가볍고 편안히 하고[輕安], 집착을 버리며[捨], 정신을 집중하고[定] 마음의 안정과 지혜의 기능을 균등하게[念] 펴 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향해서 걸어 나가야 할 모든 덕목을 빈틈없이 알고 있었을뿐더러 그것을 동료들에게 설해 줄 정도로 탁월한 지적 능력과 행동을 소유한 걸림 없는 비구의 표상이었다. 이는 천안을 가진 그 자신의 자연스러운 능력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마음 또한 침착하고 의젓하여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드시자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해 하는 제자들의 안정처가 되어 부처님의 열반을 공표하고 그 뒷 수습을 맡았다.
석굴암 십대 제자상에서 아나율은 본존불을 향하여 우측 네 번째로 등장하는데 눈에 이상이 있는 듯한 모습이다. 두 손을 가슴 쪽으로 모아 홀(笏)을 다소곳이 부여잡고 있는데, 그 홀의 윗부분이 아랫 입술에 닿아 있다.
그 조용하면서도 단아한 분위기에 아나율 존자의 침착하고 의젓한 모습이 서려 있는 듯하다.
다음을 기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