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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대한 호기심에서 체득한 아름다운 추억
-일본 유학과 방문 연구교수 시절-
都 命 基(화학과)
아침 신문을 읽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수성 못을 산책하다 보니 내 젊은 날 ‘외국’에 대한 자극을 받았던 일들이 떠 올랐다. 1951년 11월 대륜중학교 학생 시절, 함박눈 내린 어느 날, 선생님과 동기생들이 수성 들판을 함께 걸어 법이산으로 토끼를 잡으러 갔을 때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일본 사람 미즈사키 린타로(水崎林太郞墓:1868~1939)가 1915년경 개척 농민으로 대구에 와서 조선인 대지주 4명과 함께 대구 수성들 판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조선 총독부를 찾아가 저수지를 만들 것을 제안하고, 총독부 지원을 받아, 1924년 9월 27일 수성 못을 착공하여 1927년 4월 24일 완공하였다(<출처: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는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일본 유학을 다녀온 현재 상태에서 그 시대로 돌아가 당시 우리나라 국민의 과학 기술적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못가에 놓인 벤치에 앉자 박정희 대통령이 ‘실천한 꿈’이 충격처럼 다가오던 날도 기억되었다.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대륜중고등학교 새내기 교사였던 시절,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이 대구 순방 차 오셔서 법이산 중턱 수성관광호텔에 숙박하시면서 수성 들판을 내려다보시고, 참모진과 함께 경제개발 1차 5개년(1962~66)을 구상하고 실천하여 보리고개를 넘길 수 있었다는 것, 또한 경제개발 및 국제 교류 차원에서 1965년 일본과 문화교류의 구상을 함께 하셨다는 사실은 내가 대륜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을 때였는데, 크게 마음에 닿았다. ‘제비나 참새 따위가 어찌 저 높은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겠는가?(연작안지홍곡지지(燕雀安知鴻鵠之志)’란 고사를 떠 올리게 되어, 사람은 누구나 원대한 꿈을 갖고 살아가는 희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선현의 말씀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래서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유학의 꿈’이란 불씨를 지피게 되었지 싶다.
그리고 수성 못에 설치된 상화동산에 남겨둔 민족 저항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1943)는 일본 동경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1933년 교남학교(현대륜고등학교)교사로 근무하며, 일제의 억압에 저항하는 내용이 담긴 민족의 아픔과 희망을 노래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사진)를 읽어보면서, 반일 민족의식을 표현한 대표적인 저항 시에 애타는 마음이 깔려 있음을 감지하며, 일제 강점기 민족 현실을 ‘빼앗긴 들’로 비유한 지은이는 국토는 잠시 빼앗겼지만,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표현은 민족 자주독립에 대한 비장한 각오의 마음가짐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되었고, 시를 읽으면서 일본 강점기에 일어난 다양한 사회현실에 대하여 비참하였음을 가슴에 담아 떠 올려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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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돌고 돌아 수성 못 착공 사실이나, 이상화 시인의 가슴에 담아둔 일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1965년 한·일 문화교류가 열리게 되어, 일본 문화에 대한 진솔한 면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일본에 유학 갈 수 있었던 기회라 생각하고, 1차로 유학 시험에 합격하여 1972년 4월~74년 9월까지 동북대학 대학원 화학과에 유학하게 되어 이학박사를 받게 되었고, 2차로 일본 학술진흥회(JSPS) 초청으로 1979년 4월~1980년 1월까지 나고야대학 화학과 방문 연구교수로, 3차로 재차 일본 학술진흥회(JSPS) 초청으로 1988년 4월~1989년1월까지 동경공업대학 방문 초빙교수로 유학하였던 기간을 합쳐 본다면, 약 5년 동안 긴 세월을 일본 사람들과 함께 연구자로, 생활하며, 그 옛날의 일제 강점기 때 모습과 감정을 떠올리면서, 인내 속에 연구에만 몰두하며 참아온 유학 세월을 엮어 본다.
1. 학창시절
2차 세계 대전 중, 중국 난징 대 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1937년(丁丑) 11월 18일에 와룡산 자락 다랑이 농촌 서촌마을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라 먹고 살기도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부모님의 열정적인 교육열에 자식은 미래를 위에 교육시켜야 하신다고 생각하시며, 초등학교를 1945년 4월 1일 달성군(지금은 대구광역시)에 있는 성서국민학교에 입학시켜 주셨다.
중국과 전쟁 중이라 군수물자를 서울로 옮기는데, 대구에 주둔한 일본군은 말 구루마에 군 장비를 싣고, 서울로 가는 성주를 통과하기 위해 길목에 있던 성서초등학교에서 잠시 머물렀다. 여기서 군인들의 모습과 살찐 말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을 시대인데, ‘어린 몸은 저 말보다 못하나?’를 어렴풋이 생각하며, 일본 군인들을 처음 대하면서 꿈속에서라도 호기심에 미지의 나라,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관심을 가졌던 일이 있었을 것이다.
6.25 사변 중 1951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에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입학시험을 보았지만 떨어지고, 대륜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왕복 30Km를 아리랑 12 고개 산길을 넘어 다니며, 인내심을 길러왔던 체력단련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중요한 동기부여의 초석으로 작용하여, 인내심과 호기심, 창의성을 함께 자라게 한 강인한 마음 결정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갔다.
2. 중등학교 교사시절
대륜고등학교를 1957년 3월에 졸업하고, 같은 해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화학과를 입학하여1961년 3월 25일 졸업하였을 때, 그 해에 5·16군사정변을 맞아, 8월에 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양구 군사지역 DMZ에 근무도 하였으니, 국방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제대하여, 1963년 3월부터 모교인 대륜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마침 1965년부터 일본 관광이 허용되었을 때, 어느 학부형이 일본 여행을 다녀오면서, 유명한 고찰이 있는 동경에서 약간 북쪽 방향으로 가까운 닛고(日光)의 절 구경을 하였을 때, 찍은 절 사진을 선물로 받게 되어, 초등학교 1학년 때 일본 군인을 처음 본 이후, 처음으로 일본 사진을 보게 되어 꿈에라도 일본에 갈 수 없을까? 생각해 보았던 같다.
3. 일본 유학의 꿈을 이루게 된 동기
일본을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중, 연구차 유학 가는 길을 생각하게 되어, 연구자로서 중요한 초석이 되는 대구대학 대학원(영남대학전신)에 입학하였는데, 2학년 때 청구대학과 통합하여 1967년 12월 영남대학교 대학원으로 제도가 바뀌어졌을 때, 같은 재단 산하 영남대학교 이공대학에 아시아 연구재단(AID)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구입한 고온 전기로를 연구기기로 사용할 수 있는 행운의 기회를 얻어, 1300〬C 이상 고온에서 실험을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일본제 고가기기를 사용한 기회는 행운을 잡게 되었고, 산화철을 이용한 Barium Ferrite를 만들게 되어 반도체 초기재료로 사용되었으며, 훌륭한 연구 성과를 얻어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1969년 2월에 공학석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1969년 3월 영남대학교 화학과가 창설되어, 곧바로 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국내에 없던 고가기기로 일본제를 사용하였던 기억은, 또다시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라 볼 수 있었다.
4. 꿈에 그리던 일본 유학과 방문 연구교수로 갈 수 있었다
대학 교수 자리로 옮겨 왔으나, 대학 연구시설과 실험용 약품이 전무하여 연구에는 어려움이 많아, 연구자 다운 첨단 연구를 하기 위해 가졌던 큰 꿈을 갖고, 외국 유학에 관심을 얻어, 미국과 일본을 찾던 중 1965년 문화교류 차원에서 일본으로 유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려, 1970년 일본문부성 시험에 도전하였으나 1차에는 떨어지고, 남자로 태어나 목표를 설정했으면 반드시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재차 도전하게 되어 1971년에 합격하고, 과거 제3 제국대학인 일본 동북대학(Tohoku univ.)으로 1972년 4월 10일에 장도에 오르게 되었다.
4-1 동북대학 유학 시절
이때만 해도 국내 항공사는 없어, 일본항공기(JAL)기에 몸을 싣고 김포에서 현해탄을 건너 도쿄에 2시간 만에 네온 불이 밤하늘을 장식하는 하네다공항(나리다 공항이 되기 전)에 스스로 고생길로 들어가는 연구차 유학은, 늦은 나이(34살)에 일본 땅을 밟게 되었다.
도쿄에 도착하여 1주일간 일본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교양교육을 도쿄의 중심에 있는 시부야 근처에 있는 동경 국제교류회관에서 1주일간 교육을 받게 되었을 때, 당시에는 우리나라 지하철이 없어, 지하철 이용 방법을 몰라 길을 헤매고 있었을 때, 일본 사람이 친절하게 안내해 준 일은 잊을 수가 없기도 하네요.
1주일간의 일본 생활 교양교육을 마치고, 동경 우에노(上野)역에서 동북행 열차를 타고 4시간(그때는 고속 신간선이 없었고, 지금은 고속 신간선을 이용하면 2시간 걸림)달려 인구 80만 교육도시 센다이에 도착할 즈음 먼 산에 눈 설이 있어, 내가 좋아 유학을 선택한 일이지만, 저 추운 지방애서 어떻게 2년을 혼자 보내나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일본은 유가와 히데기 교수(1907~1981)가 1949년 노벨 물리상을 처음 받아, 그 저력의 바탕으로 지금까지 28명(분야별로는 물리학상 12명, 화학상 8명, 생리의학상 6명, 평화상 2명 내에는 단체상 포함)을 배출하였던 힘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실천으로, 한국전쟁 당시 일본은 호재를 만나 경제성장의 길로 접어들어, 1964년 올림픽을 열게 되었고, 1970년대부터 고도 경제성장 시절을 맞았으니, 대학에서도 연구 환경이 가장 좋은 시절을 맞았을 때 유학하게 되었으니, 좋은 연구시설과 약품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하였더니, 2년 6개월 만에, 일본화학회에 연속 3편을 발표하게 되어, 박사학위 논문 제출과 학력 시험을 마치고, 1974년 9월 26일에 귀국하였으며, 1975년 2월 25일 이학박사 학위를 받게 된 행운을 잡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1965년 문화교류가 시행되었지만 일본에 가기란 쉽지 않았고, 조총련(朝總聯)과 거류민단 관계도 어려움이 있었으므로 보안상 시내 거리를 다니지 못할 때이니, 학생 이외 일본 사람은 학교 이외에서는 잘 만날 수 없었다.
특히 일본에서 느낀 점은 일본 거리를 다닌다는 것이 가장 어려웠던 일은, 대학이 있는 센다이시는 니이가다를 통해 북쪽으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역이라, 조총련(朝總聯)계 사람이 많아, 당시에는 철저한 안보 차원에서 길거리를 다닐 수 없었지만, 일본 학생들과 학회 참석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활용하여, 일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행운을 가기도 하였던 것 같다.
국민성은 친절한 모습으로 인사성과 지하철에서는 책을 읽는 사람이 많았고, 음식문화도 깔끔하였던 것 같다. 일반인은 자유 여행할 수 없었던 시대라 1972년에 일본 땅에 유학할 수 있었다는 점은 행운을 얻게 되어 갔으니, 다행스럽게도 일본 전국대학에서 열리는 학회에 논문 발표 차, 전국을 여행할 수 있는 행복한 기회를 많이 가졌던 것 같다.
2025년 현재는 자유여행으로 여행할 수 있으니, 일본과는 경제적으로나, 여행 차원의 차이점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시대라, 그 옛날 상황은 꿈만 같은 일로 생각되었으며, 溫故 차원을 넘어 첨단과학기술을 습득하였으니, 창신(創新)의 사고를 더욱 알차게 갖게 된 행운을 갖게 되었다.
특히 연구 환경이 좋은 센다이에 있는 동북대학에 먼저 온 유학 선배들의 따뜻한 배려는 그때만 해도 정다움이 많아, 향수병을 달래 주는 기회를 가져, 일본 제3 관광지라는 마쯔시마(松島)에 가끔 안내해 준 일은 유학 생활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었고, 연구생활에 많은 도움을 받게 되었던 추억은 귀국해서도 자주 만나 추억담을 나누면서 담소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있다.
특히 일본 국내 여행 기회는 1차로 도쿄에서 센다이 도착 후 6개월 만에, 1972년 10월 가을 도쿄학회에 발표차 참석하였을 때, 당시만 해도 도쿄에서 신간선이 다니지 않아 센다이에서 도쿄까지는 4시간 걸려 여행하면서, 그 옛날 사진으로 본 닛꼬까지 여행 할 수 있었고, 황궁에 들어갈 수 있는 ‘이중다리(二重橋 니즈바시)’에서 사진을 남겨둔 일과 61층 동경 탑에 올라간 일은 추억에 한 장면이었고, 이때 마침 대구에서 여행 오신 분을 외국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2차로 1973년 봄 4월 학회는 오사카대학에서 학회가 열려, 마침 경북대학교에[서 먼저 온 Y. 교수를 만나, 1년 후면 귀국한다기에 가슴 속까지 이상한 외로움도 느낄 수 있었다. 오사카는 일본에서 상업도시로 알려져 있었고, 한국 거류민단이 가장 많이 살던 곳이기도 하였다.
3차로 또다시 6개월 만에 구슈대학에서 열리는 1974년 10월 가을학회에 참가하는 행운을 얻어, 일본 대륙을 넘나들며 눈으로 열차 주변을 눈요기하였던 일로, 눈 덮힌 후지산(富士山)을 볼 수 있었고, 연구에 흥미를 느껴 초지일관으로 호기심을 살려 연구에 충실하였던 결과, 일본 여행은 학회를 통해, 다른 학생들보다는 많이 일본 전국을 여행할 수 있어, 일반사람들을 접하면서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고, 열차 여행 중애서 많은 사람들이 차중에서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은 그때 그 시절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여행 중에 길 안내도 친절하게 안내하였고, ‘아리가도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 ‘이다다기마스(잘 먹겠습니다)’, 열차 내에서는 말을 조용 조용하기도 하였고, 서로 간에 어렵거나, 무거운 짐을 옮기는 경우에는 남보다 자기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많이 경험하게 되었다.
특히 학교 내에서 연구 생활 중 친절하게 서로 토론하며,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풀어나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러한 이유는 아마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경제적 면이나, 나름대로 도덕성 면에 우위였다고 생각할 수 있었고, 대학 안에서도 수준차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일본 사람은 당시만 하더라고 강대국(미국)에는 스스로 몸을 낮추었지만, 우리나라나 대만 등에서는 우월감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여기서 생각되는 경험은 학문 연구에서 대학 내에서 인정을 받으면, 공손하게 서로 간에 존경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이외에도 향수병에 걸리는 시간에, 일본 도착 2개월 만에 대학 내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북해도 여행은, 정말 아름다운 시간으로 남아 연구에 충실할 수 있는 보람을 느끼기도 하였다.
4-2. 나고야(名古屋)대학 초빙 연구교수 생활
1975년 2월에 동북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연구력에 인정을 받아 일본학술진흥회(JSPS)의 초청을 받아, 초빙 연구교수 자격으로, 2차로 1979년 4월 1일~1980년 1월까지 10개월 동안 나고야대학에서 대학원 학생을 지도하는 영광의 기회를 얻었을 때, 학생들의 연구 태도는 끝까지 집착력을 갖고, 문제를 해결해 내는 습관은 과학자의 기본태도로 실천하였던 연구자의 태도로, 우리나라 학생보다 우수한 점을 알게 되었고, 첨단연구과제에 연구 성과를 올려 일본 화학회지에 발표하고 귀국하였다.
나고야대학에 유할 때, 나고야는 공업지대라, 대구에서 온 섬유업자들의 도요타 섬유공장 방문 시에 통역을 하였던 일은 유학기간 동안 보람된 일로 기억되었다.
중공에서 자유 진영 유학 제도가 처음 실시된 1차 연도가 1978년부터 시작되어, 미국 선호도가 많았으나, 다음으로 일본이었고, 2차 연도인 1979년에도 미국 다음으로 일본 유학 시험을 치루고 온, 중공 학생들이 많이 유학 왔을 때라, 나는 방문 연구교수 자리에 있었으니, 연구실이나 대학 내 외부 유학생들과 함께 관광을 다녔을 때, 즐거운 대화를 많이 가지기도 하였던 일로, 당시에는 중공과는 교류가 없을 때이지만, 학생 중에는 유럽 공산국에 유학 다녀온 친구들에게 한국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들었다면서 한국에 유학 갈 수 없느냐고 묻기도 하였다.
당시에 한국에서는 중공 사정을 알 수 없던 시대라, 대화 속에서 중공 대학의 연구 상태의 수준을 알게 된 점은, 정보 차원에서 선각자의 알찬 경험으로 작용하였던 일로 기억된다.
4-3 동경공업대학 초빙 연구교수 생활
3차로 또 다시 1988년4월~1989년 1월까지 일본학술진흥회(JSPS)의 초청을 받아, 동경공업대학 자원화학연구소에서 초빙 연구교수로 초청을 받아, 특히 영남대학교에서는 꿈도 갖지 못할 시절 우수한 분석기기를 사용하여, 학생 지도와 공동 연구한 결과를 미국 화학회지에 발표하였던 행운의 기회는 과학자로 연구한 최대한의 보람이었다고 생각되었다.
여기에 힘을 받아 귀국하여 영남대학교 공동기기센터 소장(1991년)을 할 때, 분석기기로 고가(당시에 3억 원)의 독일제 300 MHZ NMR을 구입하게 된 행운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전국 대학에서 3번째로 갖게 되어 영남대학교 위상을 높이게 되었으며, 학교평가에서도 우수한 상태로 교수들의 연구 활동에 크게 도움을 주기도 하였던 일은, 만일 유학 생활을 가지 않았더라면 꿈도 갖지 못할 일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에도 연구실 안에서는 여러 나라 중, 중공 학생들이 많이 유학 왔을 때라 즐거운 대화를 많이 가졌던 일은 지구촌 사람들과 많이 교류하였던 성과라 생각되었다.
마지막으로 유학 생활의 성과는 직접적인 경제성보다도 다양한 간접방법으로, 산업사회의 첨단기술을 전수 하게 된 점을 자부하기도 하고, 동시에 부모님에게 받은 유전자로, 열정과 호기심을 살려 창조성 사고를 충실히 살려왔던 점은 학문적 연구 성과로 이어져, 행복한 삶의 바탕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재직 시에서 얻은 과학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퇴직 후에는 자연과학의 진리를 유학에 접목시켜, 사람다운 삶의 중요한 교훈과 자산으로 작용하는 고사성어(故事成語)로 첫째, 중국 청나라 때 판교정섭(板橋鄭燮)이 남긴 난득호도難得糊塗): 즉 ‘총명한 사람은 겸손하며, 조금 손해 보며 살아가는 모습’이나, 둘째로 중용(中庸)에 나오는 은악양선(隱惡揚善): 즉 ‘남의 허물은 덮어주고, 좋은 점은 본받아 살아가는 모습’을 실천하며, 동시에 유학 세계에서 동양의 성리학자로 널리 알려지신 퇴계의 ‘경철학(敬哲學, 主一無適)’을 가슴에 담아 좌우명(座右銘)으로 삼고, 온고창신(溫故創新)의 새로운 사회혁신을 활성화하는데, 동참할 수 있기를 바라며 살아가려 한다.(2025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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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고맙습니다! 체계적으로 세밀히 구성하신 글에서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을 함께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