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오하거나 우스꽝스럽거나, 혹은 둘 다
<부고니아(Bugonia)>(Yorgos Lanthimos, 2025):
정병기
Ⓒ CJ ENM
반전의 미학이 두드러진 영화다. ≪인디와이어(IndieWire)≫(2025.10.24)의 라탄치오(Lattanzio)의 단평처럼 ‘란티모스 감독의 전매 특허인 변태적 거리두기(perverse detachment)가 다시 한번 잘 적용된 영화’다. 한마디로 “심오하거나 아주 우스꽝스럽거나, 혹은 둘 다”이다.
테디(Teddy; Jesse Plemons)와 돈(Don; Aidan Delbis)이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해 인류를 멸종시키거나 지구를 파괴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고, 그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제약회사 CEO 미셸(Michelle Fuller; Emma Stone)을 납치하는 것으로 서사가 시작된다. 그들은 미셸을 고문해 정보를 얻은 후 외계인 황제를 만나 담판을 지어 지구 혹은 인류를 구하려 한다. 제시 플레먼스와 엠마 스톤이 주연을 맡아 두 주인공의 인물극처럼 전개된다.
지난 10년 동안 란티모스 감독은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Kinds Of Kindness)〉,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The Favourite)〉, 〈가여운 것들(Poor Things)〉뿐 아니라 16분짜리 실험 오페라 〈블리트(Bleat)〉에서까지 엠마 스톤과 함께했다. 〈부고니아〉에서 스톤은 다시 한번 주연인 미셸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부고니아>에서 스톤은 딱히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하기는 어렵다. 플레먼스가 테디 역을 맡아 스톤과 지속적인 공방전을 벌이지만, 둘의 관계는 주인공과 적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버라이어티(Variety)≫(2025.08.28)에서 글리버맨(Gleiberman)이 묘사했듯이 두 사람의 공방전은 “전술적이고 철학적인 잔혹한 결투”다. “그들은 마치 ‘누가 가장 파격적이고 황당한 반사회적 범죄자인가?를 겨루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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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켜라>와 <부고니아>
<부고니아>는 장준환 감독의 2003년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리메이크작이다. ‘지구를 지켜라’라는 직설적 제목 대신 리메이크작은 ‘부고니아’라는 제목을 달았다. ‘부고니아(bugonia)’는 ‘죽은 소의 사체에서 벌(bee)이 생겨난다고 여긴 고대의 잘못된 믿음’이나 ‘벌을 얻기 위한 의식’을 가리키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단어다. ‘부고니아’는 생명의 자연발생설을 상징하며, 생명의 재생, 정화, 풍요와도 연결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제목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하다. 그러다 대단히 암시적으로 다시 살려낸다.
<부고니아>는 <지구를 지켜라>의 흐름과 구조를 따르지만 세부 사항 중 몇 가지에서 다르다. 먼저 주요 등장인물에서 외계인 지도자급으로 의심되는 인물이 유제화학 회사의 ‘꼰대’ 남성 재벌에서 유능한 바이오기업 여성 CEO로 바뀌었다. 미셸은 젊고 유능하며 무술까지 수련한, 미국의 합리주의적 상류층이다. 독재 권력과 유착된 재벌이라는 강 사장(백윤식)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영화의 풍자 대상이 권위주의 권력 질서가 아니라 교활한 자본가의 계급 지배가 된 것이다. 20여 년 후라는 시간적 배경과 미국이라는 공간적 배경에 적응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테디가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한 사상을 접해 봤지만 모두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자본 지배에 대한 비판이나 대학 교육을 특권 세탁용 ‘자격주의 사기’라고 일갈하는 부분은 정곡을 찌른다.
<부고니아>의 테드는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신하균)와 비교해 성격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공범 혹은 동지는 바뀌었다. 병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병구를 구하는 순이(황정민)와 달리, 돈은 테디의 곁을 줄곧 지키다가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테디의 곁을 떠난다. 리메이크작에서 가장 크게 바뀐 부분이다. 윤필립 평론가는 이 부분에서 아쉬움을 표한다(《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5.10.29). <지구를 지켜라>에서는 “‘순이’가 관객들에게 병구의 상실감 어린 광기를 전달하는 동시에 순수하고 숭고한 인간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반면, <부고니아>의 ‘돈’은 에코이즘과 나르시시즘 사이에서 역동하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되지만 그렇게 의미 부여하기가 과하게 느껴질 만큼 이 영화에서 ‘돈’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순이’와 ‘돈’의 극중 역할에 대한 따끔한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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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성격에 있어서도 일정한 변화가 있다. 두 작품 모두 후반부로 가면서 스릴러의 성격이 짙어진다. 하지만 <지구를 지켜라>가 블랙 코미디의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전반적으로 강한 반면, <부고니아>는 갈수록 스릴러로 변해 간다. <지구를 지켜라>의 코미디가 때로는 ‘병맛’이기는 하지만 가볍고 홀가분한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는 반면, <부고니아>의 코미디는 줄곧 데드팬(Deadpan)이다. 드라이 유머(dry humour) 혹은 드라이-위트 유머(dry-wit humour)라고도 하는 데드팬은 감정적 중립이나 무감정을 고의적으로 표시하는 코미디인데, 한마디로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하는 격이다. “란티모스를 이해하느냐 못 하느냐”로 갈린다는 말도 있다(Zacharek, Time 2025.08.29). <부고니아>의 코미디가 <지구를 지켜라>의 코믹 맥을 일정하게 잇고 있지만, 코미디에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서사 구조에서도 <지구를 지켜라>의 중요한 서브플롯을 차지하는 형사들 서사가 사라진다. <부고니아>에서는 테디의 어릴 적 베이비시터로 성희롱을 범한 적이 있는 경찰 한 명이 등장한다. 이 점도 전체 서사에서 주변을 맴돌 뿐 섞이지 못한다. 역시 아쉬운 대목이다.
두 영화에서 모두 외계인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성별이 바뀐 만큼 그들의 신분도 바뀔 수밖에 없다. 두 영화 모두 황당한 반전 결말로 마무리된다. <지구를 지켜라>의 결말은 지구 멸망인 반면, <부고니아>의 결말은 인류 멸종이다. <지구를 지켜라>에서는 병구도 실험 대상이었는데, 지구 멸망에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 실험이었음이 마지막에 화면으로 제시된다. <부고니아>에서도 명시적으로 보여주지 않지만 서사의 흐름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인 언어가 아프리카어 같다면, <부고니아>에서의 외계인 언어는 슬라브어 느낌을 준다.
감정 이입 혼란을 통한 극단주의 비판
‘가짜 뉴스가 횡행하고 음모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대한 우화’라는 비유적 평가도 일리가 있다. 테디가 음모론에 빠져 확증 편향(자신의 신념이나 가설을 지지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반대 증거는 무시 혹은 과소평가하는 인지적 편향)이나 반향실 효과(같은 입장을 지닌 정보만 반복 수용해 신념이 증폭·강화되는 현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적어도 초반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는 영화를 끝까지 보고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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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은 감정 이입 대상과 관련된다. <지구를 지켜라>에서는 많은 사람이 병구에게 감정 이입할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부고니아>에서는 후반부로 갈수록 미셸에게 감정 이입할 가능성이 높다. 서사 전개와 등장인물 변화, 장르 성격 등 지금까지 언급한, 두 영화의 차이점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하지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쯤이면 온전히 감정 이입할 캐릭터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Jeppesen, Sight and Sound 2025.10.28). <부고니아>는 현실의 모두를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한 가지 입장을 전한다. 스크린에는 극단주의만을 담았는데, 이 극단주의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 길항인 온건주의(moderatism)를 역설적 혹은 반어적으로 설파하는 것이다. 미셸의 행위도 비판의 날을 피해 가지 않는다. 그가 파멸을 초래한 인간을 단죄하는 신과 같은 존재일지라도 자본가로서 해 온 비인간적인 극단적 행동들은 영화에서도 긍정적으로 묘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류 멸종도 극단적인 방법의 하나다. 인류가 극단적이니 기후 변화도 극단적이고, 그에 대한 해법도 극단적인 것일까.
<부고니아>는 스스로 자멸의 길을 초래한 인간을 비판하는 생태주의만으로 해석될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온건주의는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질서 안에서 목표를 추구하는 신념이나 태도를 말한다. 이를 우주적으로 확대하면 생명 질서 안에서 목표를 추구하는 신념이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극단주의가 횡행하는 요즘 시대에 적절하고 의미 심장한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다. 이렇게 볼 때 ‘저주받은 명작’으로 알려진 <지구를 지켜라>가 란티모스의 손을 통해 이 시대의 새로운 사건으로 재탄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디펜던트(Independent)≫(2025.10.30)에서 로리(Loughrey)가 평가했듯이 <부고니아>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어둡고도 시의적절한 영화”다. ‘심오하거나 우스꽝스럽거나’에서 고른다면 분명 ‘둘 다’이다.
제목 ‘부고니아’가 생명의 재생, 정화, 풍요와도 연결되듯이 스크린은 인류의 멸종으로 치달으면서 죽음을 통한 재생을 담았다. 미셸이 인류 역사를 설명한 내용과 연결하면 현생 인류가 멸종하지만 새로운 인류가 태어나는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멸망의 핵심 원인을 제거해야 살길이 열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흐르는 노래를 생각해 보면 또 그렇지만은 않다. 독일 가수 마를레네 디트리히(Marlene Dietrich)가 피트 시거(Pete Seeger)의 반전 평화 포크송 〈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를 부른다. 전쟁, 고문, 테러 그리고 죽음은 극단주의적 방법이다. 평화와 생명은 온건주의가 추구하는 가치다. 생명은 극단적으로 치달을 때 지속될 수 없다. 생명도 물처럼 순리대로 흘러야 스스로 정화하며 끊기지 않고 지속할 수 있다. 테드의 극단주의는 결국 그가 막고자 했던 인류 멸망의 핵심 원인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고, 생명을 담보로 한 미셸 회사의 실험도 그것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 미셸의 최종 선택도 극단적이다. <부고니아>는 그것이 지구 멸망이든 인류 멸종이든 끔찍한 종말을 초래한 극단주의에 대해 배경 음악 〈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를 통해 우회적으로 비판한 영화다. ♣
정병기 교수
정병기 교수 시인 영화평론가
시인, 영화평론가, 정치학자.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2016년 《나래시조》 시조 신인상. 2018년 《시와 표현》 시 신인상. 시조집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시간 환상통』, 『산은 이미 거기 없다』. 시집 : 『오독으로 되는 시』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 『엔딩 크레디트』 영화평론 · 분석 : 『사랑과 예술, 아모르파티: 시가 있는 영화 평론』 『천만 관객의 영화 천만 표의 정치』외 다수. byungkeej@naver.com
[출처] [연재] 심오하거나 우스꽝스럽거나, 혹은 둘 다: <부고니아(Bugonia)>(Yorgos Lanthimos,2025 ) - 정병기 ♣ 웹진 《문예마루》제2호(2025. 12)|작성자 문예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