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뻘갱이) : 빨간색 좋아히는 사람(좌파)
파랭이(푸랭이) : 파란색 좋아하는 사람(우파)
보랭이: 빨강과 파랑을 합친 보라색 좋아하는 사람(융합파)
가장 아름다운 깃발은 보라색 깃발이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더 이상 빨간색 깃발, 파란색 깃발일랑 흔들지 마라
빨간색과 파란색을 합하면 보라색(Purple) 또는 자주색(Violet)이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 섞느냐에 따라 느낌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 물감 (색료 혼합): 두 색을 섞으면 빛을 흡수하면서 점점 어두워져 깊은 보라색이 됩니다.
• 빛 (색광 혼합): 빨간색 빛과 파란색 빛을 동시에 비추면 밝은 자주색(마젠타, Magenta)이 됩니다.
💡 꿀팁: 빨간색을 더 많이 넣으면 따뜻한 느낌의 자주색이 되고, 파란색을 더 많이 넣으면 차가운 느낌의 남보라색이 됩니다.
남로당 빨갱이 박정희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과거 군 복무 시절 남조선로동당(남로당) 활동 전력으로 인해 비판적인 맥락에서 이러한 호칭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
역사적 사실과 전개 과정
• 체포와 재판: 박정희는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 이후 진행된 군내 남로당 색출 작업 과정에서 체포되었습니다. 1949년 2월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 감형과 협조: 당시 수사 당국에 협조하며 국군 내 남로당 조직원 명단과 인맥을 진술한 것으로 알려져 무기징역에서 감형되었습니다.
• 이후 행보: 이후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군에 복직하였고, 1961년 5·16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했습니다.
또한 박정희는 독립군을 때려잡은 일본 만주군의 장교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더욱 비판받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경력과 독립군 탄압 여부는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두 가지 주요 관점이 존재합니다.
1. 비판적인 관점 (독립군 탄압 가능성 및 친일 행적 강조)
• 만주군 장교 이력: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군대(만주군) 장교(중위)로 근무했습니다. 이 자체가 일제 식별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행위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등재: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로서 일제에 충성를 맹세하는 혈서를 썼다는 당시 신문 보도 등을 근거로 그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습니다.
• 상징적 책임: 당시 만주 지역은 항일 무장 투쟁이 벌어지던 곳이었으므로, 그 지역의 군 장교로 복무한 것 자체가 독립군 토벌에 간접적으로라도 기여했거나 그 목적을 가진 군대에 속해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습니다.
2. 옹호 및 반론 관점 (직접적인 독립군 토벌 증거 부재 강조)
• 직접적 토벌 증거 미비: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가 소속되었던 보병 제8단이 주로 팔로군(중국 공산당 군대)을 상대로 작전을 펼쳤으며, 그가 직접 한국인 독립군을 찾아내어 진압했다는 구체적이고 명확한 사료나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 시대적 한계와 출세 목적: 당시 식민지 조선의 청년으로서 신분 상승이나 출세를 위해 군관학교에 입학한 생계형·출세형 선택이었을 뿐, 민족을 배반하고 독립군을 잡으려는 적극적인 의도로 입대 증거를 찾기 어렵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 당시 만주 상황: 박정희가 만주군에 배치되었던 1944년 무렵에는 이미 만주 지역 내 한국인 독립군의 활동이 거의 전멸하거나 이동한 상태(러시아나 중국 내륙으로 후퇴)였기 때문에, 실제로 독립군과 맞닥뜨릴 기회가 없었다는 역사적 분석도 존재합니다.
요약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던 만주군의 장교로 복무한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직접 독립군을 '때려잡았다(토벌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와 관련 조사 기관 사이에서도 구체적인 증거 유무에 따라 의견이 팽팽히 갈리는 영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