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
김홍섭
1987년, 이천에 내려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천은 도자기로 유명했다. 어느 날 매형의 친구 한 분이 말했다.
"이천에 갔으면 해강 도자기 한 점만 살수 있으면 사봐"
어떤 도자기 인지 나도 궁금했다. 그래서 이천에서 잘 아는 형님께 부탁했다.
"형님, 해강 도자기 하나 살수 있을까요?"
형님은 웃으며 말했다.
"야, 너 월급을 몇 년 동안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못 사"
"구경이라도 하면 안 될까요?"
"네가 보자고 한다고 내놓을 물건이 아니야."
그 말에 나는 해강 도자기를 보지도 못한 채 마음속에만 품고 살아야 했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신신당부했다.
"꼭 해강 도자기로 사 와, 돈이 얼마가 들어도 괜찮아. 다른 건 사면 안 돼"
그 도자기는 우리 아들의 생명을 살려주신 의사 선생님께 꼭 드리고 싶은 감사의 선물이었다.
다음 날 아내는 보자기에 싼 나무 상자를 들고 왔다.
기쁜 마음으로 상자를 열어 본 순간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해강이 아니라 해림이었다.
아!, 그렇게 꼭 해강걸 사오라고 했는데 해림걸 사왔네...
"왜 이걸 사 왔어? 이건 해강이 아니잖아."
아내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도 좋은거라고 했어 해강 전시관에서 산거야! "
하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이키를 사 오랬는데 나이코를 사 온 거랑 뭐가 달라."
"이건 짝퉁 이잔아 이걸 어떻게 줘! "
그리곤 아들이 있는 병실로 들어 갔다.
그래도 어쩔수 없이 다음날 나는 회진 도시는 의사 선생님에게 선물이라고 드렸다
"선생님께 너무 감사해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이 도자기로 유명해서 한 점 마련했습니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대신 받아 들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편하지 않았다.
병실을 나와 아내가 말했다.
"차라리 좋은 양주를 사드릴걸 그랬어. 의사들은 술을 좋아한다던데…."
나는 어이 없는 표정으로 그저 집사람을 쳐다 보았다.
" 할수 없지머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이틀 뒤 회진 시간.
간호사의 손에는 그 보자기가 그대로 들려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저는 도자기를 잘 모르기도 하고 둘 곳도 없습니다. 괜히 깨지기라도 하면 안 되니 그냥 돌려드리겠습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죄송합니다. 다른 선물을 준비해 드릴까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혼자 살아서 딱히 필요한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선물은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다.
세월은 흘렀다.
아들을 살려주신 그 의사 선생님은 군산으로 가셨다고 들었다.
지금도 문득문득 안부가 궁금하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실까.
15년이 지나 정년퇴직을 앞두고 여주의 농가주택으로 이사하면서 짐을 정리하다가 그때 돌려받았던 해림 도자기를 다시 발견했다.
예전에는 해강의 '짝퉁'이라고만 생각해 창고 한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도자기 였다.
그런데 천천히 꺼내 바라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뜨거운 불 속에서 유약이 흘러내리며 만들어 낸 자연스러운 빛깔, 단정하면서도 힘 있는 곡선, 절제된 아름다움….
결코 평범한 도자기가 아니었다.
나는 꽃을 꽂아 거실 한가운데에 올려놓았다.
볼수록 정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 중고장터에서 해강 도자기를 판매한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40년 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도자기였다.
판매자를 만나 여러 가지를 물었다.
"이 도자기는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그는 해강 선생은 이미 돌아가셨고, 아드님도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손자가 전주 한옥마을에 전시한 작품 이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도자기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진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한 번 바라보고, 지나가다가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는지 신비롭기만 하다.
해강의 작품을 공부하면서 또 하나 알게 되었다.
예전에 짝퉁이라고만 생각했던 해림 이임준 역시 우리나라 1세대 도예가로 손꼽히는 훌륭한 작가였다는 사실이었다.
그제야 아내가 사 왔던 그 화병이 왜 그렇게 달라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이제 우리 집 거실에는 해강도 있고 해림도 있다.
40년 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꿈도 이루었고, 한때는 창고 구석에 두었던 도자기도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끔 그 도자기를 바라보면 아들을 살려주셨던 의사 선생님이 떠오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아내를 타박했던 내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세월은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물건의 가치도 다시 보게 만든다.
젊은 날의 나는 이름만 보았고, 지금의 나는 작품을 본다.
그래서 오늘도 거실의 도자기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참 행복한 하루다."
https://youtu.be/aFzrcj4Uifg?si=LvTZZ3ovVc2sQdA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