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느티나무와 어린이끼의 그늘
마을 어귀를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커다란 느티나무는 여름이 오면 푸르고 무성한 잎사귀를 넓게 펼쳐 올렸습니다. 뜨거운 볕을 가려주는 느티나무의 무성한 그늘 아래로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어 땀을 식히고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사람들은 느티나무의 우람한 품을 칭송했지만, 정작 느티나무는 늘 마음 한구석이 미안하고 서글펬습니다. 자신의 빽빽한 잎사귀가 하늘을 온통 가려버린 탓에, 밑동 바위 틈새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는 작은 초록색 이끼에게는 단 한 조각의 따스한 햇살도 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작은 이끼야, 참으로 미안하구나. 내가 잎을 너무 무성하게 피워 올려 네가 받아야 할 태양의 빛을 온통 빼앗아 버렸어. 내 그늘 밑에서 빛도 보지 못하고 사니 얼마나 어둡고 슬프겠니."
바람이 불 때마다 느티나무가 나뭇잎을 살랑이며 진심 어린 사과를 건븠지만, 밑동의 이끼는 수줍게 미소 지으며 차분하게 답했습니다.
"느티나무님, 저는 햇빛의 뜨거움보다 당신이 만들어준 이 어둡고 습한 그늘의 포근함을 더 사랑한답니다. 당신의 그늘은 나를 말라죽지 않게 지켜주는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예요."
느티나무는 이끼의 말이 그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마음이라 생각하며 여전히 안타까운 시선으로 밑동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하늘이 뚫린 듯 억수같은 장대비가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몇 날 며칠 동안 그치지 않는 폭우에 산사태가 일어나고, 마을 언덕의 흙더미가 거세게 쓸려 내려갔습니다. 무섭게 불어난 빗물은 느티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던 마을 어귀의 흙마저 가파르게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아, 거센 빗물에 흙이 모두 쓸려나가는구나! 이러다 내 뿌리가 겉으로 드러나 기울어지고 말겠어!"
느티나무는 굵은 가지를 떨며 거친 장대비 속에서 절망했습니다. 아무리 단단하고 굵은 뿌리를 가졌을지라도, 발밑의 흙이 사정없이 씻겨 내려가자 수백 년 된 거목조차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느티나무 밑동을 빽빽하고 촘촘하게 감싸고 있던 작은 이끼들이 온 힘을 다해 서로의 손을 꼭 쥐어잡았습니다.
이끼들은 스펀지처럼 거센 빗물을 머금고, 자신들의 미세한 뿌리 실로 밑동 주변의 작은 흙알갱이 하나하나를 꼭 움켜쥐었습니다. 사나운 빗물이 느티나무의 발밑을 때려도, 이끼 장막이 굳건하게 흙을 잡고 받쳐준 덕분에 빗물은 흙을 쓸어가지 못하고 그저 부드럽게 돌아 나갈 뿐이었습니다.
긴 밤이 지나고 비가 그친 뒤, 거센 폭우 속에서도 단단하게 자리를 지켜낸 느티나무는 놀란 눈으로 자신의 밑동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자신이 햇빛을 가려 미안해했던 그 작고 보잘것없는 이끼가, 억수같은 장대비 속에서 자신의 흙을 지켜주고 뿌리를 가려주어 거목의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느티나무는 비로소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내가 베푸는 따스한 그늘과 돌봄은 결코 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베풂이 아니었음을, 내가 그늘로 다정하게 감싸 안았던 작고 약한 존재가 결국 세상 가장 강한 시련의 순간에 나를 가장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위대한 힘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요.
그날 이후 느티나무와 이끼는 서로의 그늘과 온기를 더욱 깊이 품어 안으며, 어떠한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친구로 마을 어귀를 지켜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