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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한국학대학원 2026-1 '궁중음악연구I'(이정희교수님) 수업에서의 발제 내용의 일부입니다.
이 글은 『대악후보』의 개괄적인 내용과 악보 체제, 그리고 주요 논점을 소개하기 위해 선행연구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제Ⅰ항 「기본 정보」에서는 『대악후보』를 서지학적으로 소개하기 위하여 국립국악원 국악사전의 「대악후보」 항목을 참고하였고, 제Ⅱ항에서는 이 문헌에 대한 음악학 연구의 토대라 할 수 있는 『韓國音樂學資料叢書』 제1집 『대악후보』의 해제를 정리하면서 그 음악학적 의의와 초기 연구에서 제기된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이어 제Ⅲ항에서는 위 두 해제의 내용을 비교·검토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분량상의 문제로 인해 해제 비교 자체는 부록으로 옮기고, 대신 검토 과정에서 발견한 몇 가지 흥미로운 논점들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또한 앞선 두 해제에서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았거나 언급되지 않은 내용은 『대악후보』와 상당 부분 내용이 중복되는 『세조실록악보』의 해제 및 관련 후속 연구를 참고하여 보완하였다.
1. 기본 정보(국립국악원 국악사전(gugak.go.kr/ency)의 ‘대악후보’, 남상숙 집필.)
1) 1759년 서명응이 세조대의 음악을 담아 편찬한 관찬 악보집.
2) 소장처: 국립국악원
3) 체재: 7권 7책 판본. 총 353장(706면).
4) 규격: 한후지(漢厚紙) 세로 44.5cm×가로 31.4cm
5) 내용: 『증보문헌비고』 「악고」에 따르면 『대악후보』가 세조대 음악을 담았다고 했지만, 실제 수록곡은 이와 다른 점이 있다. 권2의 〈유황곡〉과 〈정동방곡〉, 권3의 〈치화평〉과 〈취풍형〉, 권4의 〈봉황음〉은 조선 초기 또는 세종대의 신악이고, 권5~7에 수록된 악곡도 고려 또는 조선 초기의 악곡들이다.
6) 기보법
(1) 3·2·3·3·2·3정간의 6대강 16정간보, 오음약보.
• 권6의 〈영산회상〉만이 4·2·4·4·2·4정간의 6대강 20정간보에 기보.
• 권2의 《보태평》과 《정대업》, 〈유황곡〉과 〈정동방곡〉만이 율명 병기.
(2) 구성요소: 선율, 장구, 박, 소금(小金)/대금(大金), 가사, 노래선율 등(악곡에 따라 구성 다름).
2. 한음자총 해제 내용 정리
1) 편찬경위: “세종조의 음악은 『前譜』로 삼고, 세조조의 음악은 『後譜』로 삼아, 계속 엮어 한 질(帙)을 이루니 모두 16권이다. 영조 기묘년(1759)에 편집·정리하였다.” 『증보문헌비고』 「악고」 5.
2) 大樂前譜와 大樂後譜의 內容
(1) 大樂前譜: 雅樂樂歌 定大業 · 醉豐亨 · 致和平 · 鳳凰吟 · 與民樂慢 · 步虛子 · 洛陽春 · 前引子 · 後引子 · 與民樂絃 · 與民樂管 · 步虛子管 · 桓桓曲 · 水龍吟 · 憶吹簫 · 夏雲峯 · 小地毬樂 · 五雲開 瑞朝 · 會八仙 · 千年萬歲 · 折花 · 衆仙會
(2) 大樂後譜: 俗樂 · 園丘樂 · 創守曲 · 時用 保太平 · 時用 定大業 · 維皇曲 · 靖東方曲 · 時用 鄕樂 致和平 · 醉豐亨 · 鳳凰吟 · 賀勺 · 履霜曲 · 滿殿春 · 納氏歌 · 橫殺門 · 感君恩 · 西京別曲 · 慢大葉 · 感君恩 · 翰林別曲 · 西京別曲 · 雙花店 · 步虛子 · 靈山會相 · 北殿 · 動動 · 紫霞洞
☞ 전보는 당악, 후보는 향악 중심으로 편찬한 것 같다.
(3) 대악후보와 세조실록악보의 비교
➀ 보태평과 정대업: 용광과 정명을 합치고 중광장 첨가. 나머지 보태평과 정대업보는 서로 일치.
➁ 원구악: 세조 때 두 가지의 원구악 중 속악에 속하는 ‘희문지악·기명지악·선위지악’(협종조)는 대악후보에서 악보 없이 악장만 전하고, 아악에 속하는 “신제아악보”는 악보와 악장을 함께 전함.
➂ 그 밖의 문제점
ㄱ. 유황곡과 정동방곡은 조선 초기의 음악임.
ㄴ. 치화평, 취풍형, 봉황음은 세종 때 지은 음악임.
ㄷ. 권5 시용향악보는 ‘보허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려 또는 조선조 초기부터 전하는 곡들임.
ㄹ. 감군은과 서경별곡은 권5와 권6에 각각 따로 수록되어 있음.
ㅁ. 권5·6·7의 구분을 비교연구 해야 함.
3) 기보법
(1) 권2의 保太平·定大業·維皇曲·靖東方曲: 율명과 오음약보 병용.
(2) 아악보를 제외한 권1과 권3~7: 모두 오음약보.
(3) 영산회상만 한 행 4·2·4·4·2·4의 20정간 사용.
(4) 絃譜·管譜·鼓法·拍·歌詞 등을 한꺼번에 記譜한 總譜.
4) 맺는 말
(1) 大樂後譜는 世祖朝樂을 集大成하였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2) 大樂後譜는 비교적 古形을 간직하고 있다.
(3) 그 編纂年代가 英祖 35年(1759)으로서 現傳 國樂(正樂)의 轉換期를 劃한 正祖·純祖 이후의 음악과 肅宗 이전의 음악을 研究함에 있어서 그 中間時期에 位置하여 다리 구실을 하고 있는 점에서 더욱 所重하다.
3. 발제자의 생각
원래 이 장의 내용은 결론에서 다루는 것이 적절하겠으나, 발표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만큼 본문 해제의 비교는 부록으로 미루고, 이 자리에서는 함께 논의해 볼 만한 몇 가지 사항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각 해제를 검토한 결과, 『한음자총』의 해제는 비교적 간략하여 본문에 대해서도 가사의 유무 등 기본적인 사항을 소개하는 데 그쳤다. 반면 국악사전의 해제는 기보적 특징에 초점을 맞추어 악곡별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악보와 수록 악곡이 지닌 역사적 맥락에 대한 고찰은 상대적으로 부족하였다. 또한 발제를 준비하며 원문을 직접 검토하는 과정에서 기존 해제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들이 적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부분은 이정희의 연구를 통해 상당 부분 보완할 수 있었다.
동일한 문헌이라 하더라도 연구자의 관심과 관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소개되고 해석될 수 있다. 본 발제 역시 짧은 준비 기간 속에서 작성된 만큼 미흡한 점이 적지 않지만,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한 몇 가지 문제의식과 함께 논의해 볼 만한 주제들을 정리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대악후보』에 수록된 「世祖朝俗樂譜」의 「俗樂譜序」와 『세조실록』 「악보」의 서문 원문을 직접 대조해 본 결과이다. 대조 결과 몇몇 표현과 표기에서 차이가 확인되었는데, 비록 내용의 의미를 바꿀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으나 두 문헌이 과연 완전히 동일한 텍스트인지에 대한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세 가지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今我世祖大王,發於宸衷,創作此譜,劃(대악후보:書)爲十六井,而作六大綱,以宮上下紀聲其縵中數三體因用綱各異,而有疎數(대악후보: ×)緩急之不同。
2) 世(대악후보: 所)俗所謂林鐘尺字平調,則林鐘爲宮, …
3) 太簇를 모두 大簇로 기록. (세 군데)
둘째는 「附 新制雅樂譜」에 부기된 ‘臣謹按’으로 시작하는 글에 주목하게 된 점이다. 원문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 부분이 눈에 띄었는데, 내용이 매우 흥미로워 함께 읽어보고자 한다. 특히 원구악의 전승과 해석에 관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이정희의 해석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이정희, “영조대 서명응의 관찬악보 찬집과 그 의의” 『한국음악사학보』 75집. 351쪽.)
| 臣謹按 世祖朝圓丘樂譜凡有二本,然以理推之,不應二承而奏二樂,此實可疑也。 |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세조조의 원구 악보에 두 종류가 있다. 그러나 이치를 따져보면, 한 제사에 두 음악을 연주함은 마땅하지 않으므로, 이는 매우 의심스러운 일이다. |
| 嘗考實錄,世宗初年 因麗代國初故事 而祀圓丘 享以圓丘之祀,匪侯邦所當行,遂削廢之,不擧。 | 이에 실록을 살펴보니, 세종 초기에 고려의 옛 제도를 본떠 원구 제사를 지냈으나, 원구 제사는 제후국에서 행할 바가 아니라고 하여, 곧 이를 폐지하고 더이상 거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조 초기에 다시 원구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
| 至世祖初年,復祀圓丘。 今此圓丘雅樂,似是世宗初年所奏者;其俗樂,似是世祖初年所奏者。 而舊譜傳寫之際,誤合爲一。 故今悉注以俾兩朝之樂不相雜焉。 | 지금 전해지는 이 원구 아악은 세종 초년에 연주된 것이고, 그 속악은 세조 초년에 연주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옛 악보를 전사하는 과정에서 잘못하여 하나로 합쳐진 듯하다. 이에 모두 바로잡아 두 시대[세종ㆍ세조]의 악이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였다. |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의문에 대한 해답도 얻을 수 있었다. 먼저 『세조실록』「악보」에 수록된 두 가지 원구악이 왜 『대악후보』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기록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세조실록악보』에는 원구악이 新制雅樂譜와 新制略定樂譜 두 章에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로 수록되어 있는데 신제아악보의 원구악은 아악이고, 신제약정악보의 원구악은 보태평과 정대업의 <기명>·<선위>·<탁정> 선율에 다른 가사를 붙여 만든 속악이다. 『대악후보』에 世祖朝俗樂譜 圓丘는 이 둘 중 신제약정악보의 원구악에 해당하기에 원사료의 아악-속악 순서를 속악-아악 순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이정희는 “서명응은 세조조를 철저하게 ‘속악’의 시대로 여겼기 때문에 『대악후보』에 ‘世祖朝俗樂譜’라고 기입한 후 제례에 쓰인 속악보를 전반부에 두는 방식으로 편집하고, 세조대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원구 아악보는 부록하는 방식으로 재편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설명을 통해 뒤에 실린 아악보의 제목 앞에 ‘附’가 붙은 이유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셋째는 장사훈과 남상숙이 공통으로 제기한 문제, 즉 ‘유황곡과 정동방곡은 조선 초기의 음악이고, 치화평, 취풍형, 봉황음은 세종 때 지은 음악이기에 세조조 음악을 실었다는 증보문헌비고의 설명과 맞지 않다’는 지적에 해답이다.
이에 대해 이정희는 서명응의 『保晩齋年譜』 권3에 근거하여 세종조의 아악은 십이율(十二律)로 악보를 기록하였고, 세조조의 속악은 일상일하(一上一下) 방식으로 악보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아악을 『전보』로, 속악을 『후보』로 구분하여 편찬하였음을 밝혔다. 또한 유황곡과 정동방곡은 세종대에 풍입송, 서경별곡 같은 향악의 선율을 차용하여 만든 속악으로 연주한 제례악이라는 성격을 갖기 때문에 권2에 수록되었을 것으로 해석하였다.
아울러 치화평·취풍형·봉황음이 포함된 권3부터 권7의 각 권 첫머리 혹은 책 표지에 쓰인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라는 명칭의 ‘시용’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정희는 이를 단순히 서명응 당대에 연주되던 음악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조대에 실제로 향유되었던 향악이라는 의미가 반영된 표현으로 이해하였다. 그 근거로는 서명응이 『대악후보』를 편찬하던 조선 후기에는 이미 연주 정황이 확인되지 않는 악곡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러한 논의는 동일한 악곡이나 내용이라 하더라도 단순히 수록 시기만이 아니라 기보 체계와 전승 맥락을 함께 고려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다양한 문헌을 교차 검토하는 작업이 음악사의 여러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음을 확인하게 한다.
넷째는 국악사전의 「대악후보」 해제가 주로 각 악곡의 기보적 특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를 정리한 표를 작성해 보았다는 점이다. 먼저 『대악후보』에 나타나는 4~7줄의 판형을 기준으로 악곡을 분류한 뒤, 동일한 판형 안에서는 각 줄의 구성이 일치하는 악곡들을 다시 묶어 정리하였다. 또한 각 판형 내에서는 가장 높은 빈도로 나타나는 유형부터 순서대로 배열하였다.
이러한 정리는 개별 악곡의 기보적 특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향후 동일 악곡이 수록된 다른 악보들과의 비교를 통해 각 유형이 지니는 의미와 변화 양상을 검토하는 후속 연구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➀ 4줄 판형(25곡)
➁ 5줄 판형
➂ 6줄 판형
➃ 7줄 판형
그 외에 발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떠오른 개인적인 궁금증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상숙은 『대악후보』 「정대업」의 편명 해설에 대하여, 『세종실록』 「정대업」과 「발상」의 변·편을 악장 내용과의 관련성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대응시키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논증 과정은 별도의 연구 주제로서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관련 내용을 읽다 보니 「금척」, 「수보록」 등에서 보이는 서사와 겹치는 부분들이 눈에 띄었는데, 이러한 특징이 본래 종묘제례악의 악장 구성에서 나타나는 현상인지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둘째, 남상숙은 기보법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오음약보로 기록된 선율을 ‘관악 선율’, ‘현악 선율’, ‘노래 선율’ 등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동일한 기보 자료로부터 그러한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판단 근거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이에 대한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셋째, 4·2·4·4·2·4 정간의 영산회상 및 『속악원보』 수록 악곡들에 관하여 명확한 근거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남상숙만이 이에 대해 비교적 분명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읽혔다. 먼저 ‘음양조화를 중시한 우리 선조들이 陰으로만 조합된 4·2·4·4·2·4 육대강보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대악후보』의 영산회상 악보는 원래의 악보를 없애고 후대의 악보를 끼워 넣은 것’(남상숙, 「『대악후보』의 영산회상과 4·2·4·4·2·4 육대강보 고찰」, 『조선조 궁중음악의 단절과 『속악원보』』, 민속원, 2009, 76쪽. 남상숙은 이 사실을 2003년 발표한 바 있으나(남상숙, “『속악원보』의 編纂體制와 收錄曲 分析,” 국립국악원 종묘제례악전승 학술심포지움, 2003년 12월 18-19일, 국립국악원 국악연수관 207호. 유인물, 9-62쪽.이라고 기재하였다) 논문집에 싣지 못하는 등 활자화되지 못했다고 하였다.)이라고 밝혔다.(여기에 더해 그 기보된 음악에 대해서도 『대악후보』의 「영산회상」의 제1선율은 『한금신보』의 영산회상과 2음만을 제외하면 일치하며, 제2선율과 서로 관계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남상숙, 「『대악후보』와 『속악원보』의 영산회상 연구」, 『조선조 궁중음악의 단절과 『속악원보』』, 민속원, 2009, 109쪽.)누군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악보를 조작하여 삽입하였다는 결론은 다소 음모론적으로 느껴져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 근거가 타당하다면 이에 대한 검토 작업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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