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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1대박혁거세~22대 지증왕 |
23대 법흥왕~28대 진덕여왕 |
29대 무열왕~36대 혜공왕 |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 |
삼국사기 |
상대(上代) |
중대(中代) |
하대(下代) | |
삼국유사 |
상고(上古) |
중고(中古) |
하고(下古) |
1. 통일신라 중대 전제왕권의 확립
가. 통일 이후의 신라
확대된 영토와 백성을 지배하면서 국력을 신장시킬 수 있게 되었다.
나. 무열왕계의 왕통 성립
진골 출신 김춘추가 상대등 비담(毘曇)의 반란을 진압하고 상대등 알천(閼川)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4~661년)이 왕위에 오르고 이후 그의 직계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다. 왕권의 전제화
집사부의 시중(侍中)의 권한이 강화되고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上大等) 세역을 억제되고 갈문왕(葛文王)제도가 소멸했다.
31대 신문왕(神文王, 681~692)은 681년 김흠돌(金欽突) 반란을 계기로 귀족세력을 숙청하고 개혁을 단행하였다. 신문왕 2년 682년 국학(國學. 경덕왕 6년 747년 태학감으로 개칭)을 설립하고 5년 685년 9주(州) 5소경(小京)을 정비했으며 군대제도를 7년 687년 9서당(誓幢) 10정(亭)으로 개편하고 7년 687년 관료전(官僚田)을 지급하고 9년 689년 녹읍(祿邑)을 폐지하였다. 33대 성덕왕(702~737년)때에는 신라의 전제왕권은 안정되고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상징되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진골 귀족의 세력이 일반적으로 약해진 반면 6두품은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며 신분의 권위에 집착하는 진골에 대항하여 왕권과 결합하고 국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했다, 설총(薛聰), 강수(强首), 38대 원성왕(元聖王)의 꿈 해몽을 잘해 유명한 여삼(餘三), 상대등 충공(忠恭. 39대 소성왕, 41대 헌덕왕, 42대 흥덕왕의 동생, 40대 애장왕의 숙부, 44대 민애왕의 아버지)의 인사 행정에 대한 고민을 적절한 충고로 풀어준 녹진(祿眞), 진성여왕을 비판한 왕거인(王巨人), 최치원(崔致遠)이 모두 6두품 출신이었다.
2. 통일신라 중대의 체제정비
가. 중앙제도
법흥왕 18년 531년에 설치된 화백회의 의장으로서 귀족의 대표자격인 상대등이 여전히 존재했지만 상대등보다는 진덕여왕 5년 651년에 설치된 집사부(執事部. 중시→시중)가 핵심관부로서 위화부를 비롯한 13부의 기능을 총괄하게 하고 감찰기구인 사정부를 설치했다.
나. 지방제도
주군현(州郡縣)제도로서 신문왕 5년 585년에 9주로 정비되었다. 9주(九州)는 沙伐州(사벌주, 尙州), 歃良州(삽량주, 良州), 菁州(청주, 康州), 熊川州(웅천주, 熊州), 完山州(완산주, 全州), 武珍州(무진주, 武州)/漢山州(한산주, 漢州), 首若州(수약주, 朔州), 河西州(하서주, 溟州)이며 정복한 국가의 귀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소경이라 하였고 5소경(五小京)은 中原京(충주), 北原京(원주), 金官京(김해), 西原京(청주), 南原京(남원)이었다. 주의 장관은 문무왕때 군주(軍主)에서 총관(摠管)으로 바뀌고 원성왕때 도독(都督)으로 개칭되었다. 주 밑에 郡(郡守), 현(縣令), 촌(村主)이 있고 향(鄕), 부곡(部曲)이라는 행정구역도 있었다.
다. 군사제도
통일전의 6정이 신문왕 7년 687년 9서당(九誓幢) 10정(十亭)으로 개편되었다.
9서당(九誓幢)
진평왕 5년 583년 부터 시작하여 신문왕 7년 687년에 완성된 중앙군단
녹금서당(綠衿誓幢, 583) 자금서당(紫衿) |
신라인 |
백금서당(白衿), 청금서당(靑衿, 687) |
백제인 |
황금서당(黃衿), 벽금서당(碧衿), 적금서당(赤衿) |
고구려인,보덕국성민(城民)군단2개 |
흑금서당(黑衿) |
말갈인 |
10정(十停, 삼천당(三千幢) : 통일신라의 9주(九州)에 각각 설치된 지방 군사조직으로 한주(漢州)는 다른 주에 비해 관할구역이 넓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그 중요성이 감안되어 2개(남천정(南川停)·골내근정(骨乃斤停))가 설치되었으므로 모두 10정이 되었다. 남천정(南川停, 이천), 골내근정(骨乃斤停, 여주), 음리화정(音里火停, 상주), 고량부리정(古良夫里停, 청양), 거사물정(居斯勿停, 남원), 삼량화정(參良火停, 달성), 소삼정(召參停, 함안),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 나주), 벌력천정(伐力川停, 홍천), 이화혜정(伊火兮停, 청송). 삼국사기 직관지에 의하면 544년(진흥왕 5)에 10정이 설치된 것으로 나와 있으나, 10정은 통일 이후에 설치된 것이 분명하므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10정의 군관(軍官) 조직은 대대감(隊大監) 1명, 소감(少監) 2명, 화척(火尺) 2명, 삼천당주(三千幢主) 6명, 삼천감(三千監) 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군관조직이 갖는 특징으로는 군관들이 대체로 기병 중심으로 편성되었다는 점과 삼국시대 정의 군관조직에 비하여 격이 한 단계 낮아졌다는 것 등이 지적될 수 있다.
라. 기타제도
상수리(上守吏)제도와 유학진흥을 위해 신문왕 2년 682년 국학(國學. 경덕왕 6년 747년 태학감으로 개칭)을 두었다.
Ⅱ. 통일 신라 하대의 사회 변화
1. 통일신라 중대의 붕괴
가. 진골 귀족의 내부 분열
삼국 통일후 제35대 경덕왕(742~765년)때에는 신라의 문화가 절정기에 도달했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전제주의를 타도를 위한 운동이 일어나 경덕왕은 이를 막기 위하여 한화정책을 중심으로 정치개혁을 실시하였으나 혜공왕때 대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경덕왕 이후 사회발전은 진골 세역간의 유대를 이완시켜 분열을 가져왔다.
나. 왕위 쟁탈전 전개
중앙정부의 권위 실추로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력 상실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일어났다. 왕위 계승 싸움에서 형통(신분)보다는 정치경제적 실력과 무장력이 중요시 되어 제36대 혜공왕이후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정치적 혼란은 혜공왕 4년 768년에 일어나 대공(大恭)의 난은 3년간 계속되어 전국 96각간이 서로 싸우고 혜공왕 10년 774년에 김양상(金良相)은 정권을 장악하고 실권을 쥐자 김은거(金隱居) 등이 몇 차레에 걸쳐서 왕권의 획복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그 과정에 혜공왕은 피살되고 내물왕 10대손인 김양상(金良相)이 37대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하였다. 선덕왕두에 내물왕 12대손 김경신(金敬信)이 제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했는데 이리하여 무열왕계가 끊어지고 원성왕계가 왕위를 차지하였다. 선덕왕 이후를 신라 하대라고 하고 집사부의 중시 대신에 상대등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시대적 흐름에 대한 반동이 있었다.
제41대 헌덕왕 13년 882년 3월 웅천주도독 김헌창(金憲昌)은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무역왕계의 김주원(金周元)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웅주(熊州, 공주)에서 국호 장안(長安). 연호 경운(慶雲)으로 하고 대규모의 난을 일으켜 한때 무진주(武珍州, 광주), 완산주(完山州, 전주), 청주(菁州, 진주), 사벌주(沙伐州, 상주)등이 호응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헌덕왕 16년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이 다시 한산(한산, 서울)에 도움을 정하고 반란을 계속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전제왕권을 타도한 귀족간에도 상호항쟁과 대립이 일어났다. 경덕왕 16년 757년 녹읍(祿邑) 부활에 성공한 귀족들은 정치력의 증대를 목적으로 문객(門客)을 모으고 사병(私兵)을 모집하고 지기 소유의 노동(奴僮)이나 유민(流民)을 모집하여 무장하여 왕위계승전을 전개하였다.
처음 제42대 흥덕왕(興德王)의 4촌동생 균정(均貞)이 궁에 들어 가서 와이 되었으나 균정의 조카인 제륭(悌隆)이 실력으로 균정을 내쫓고 836년 제43대 희강왕(僖康王)이 되었다. 2년뒤 868년 희강왕도 죽음을 당하고 6촌형제인 김명(金明)이 제44대 민애왕(閔哀王)이 되었다. 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은 839년 청해진 대사 장보고(張保皐)의 군대 5000명을 빌려 민애왕을 축출하고 왕이 되니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이다. 이후 장보고는 문성왕에게 딸을 왕비로 보내려다 실패하자 문성왕 8년 846년 난을 일으켰으나 중앙귀족이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피살되고 문성왕 13년 851년 청해진도 폐쇄되었다.
사건 |
내용 |
대공(大恭)의 난. 36대 혜공왕 4년 768년) |
수도 및 5道 주군(州郡)의 전국 96명 각간(角干)이 서로 싸워 김대공이 피살되고 대란으로 확대되어 3년간 계속되었다. |
김지정반란(36대 혜공왕 16년 780년)과 37대 선덕왕 즉위 |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이찬 김경신(金敬信)이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혜공왕이 살해되어 김양상이 내물마립간 10대손으로서 37대 선덕왕(宣德王)으로 즉위하였다. |
38대 원성왕(785년) 즉위 |
내물마립간 12대손 김경신이 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 즉위하였다. |
39대 소성왕(昭聖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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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애장왕(哀莊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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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대 헌덕왕(憲德王) |
김헌창(金憲昌)의 난(헌덕왕 14년 822년)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김주원(金周元)의 아들로서 웅주(공주)를 근거로 국호 장안(長安), 연호 경운(慶雲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겼으나 실패하였다. 범문(梵文)의 난(헌덕왕 17년 825년)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한산(서울)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
42대 흥덕왕(興德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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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대 희강왕(僖康王, 836~838년) |
흥덕왕의 사후 4촌동생 균정(均貞)과 조카 제륭(悌隆)이 싸워 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 |
4대 민애왕(閔哀王, 838~839년) |
6촌 김명(金明)이 희강왕을 죽이고 민애왕으로 즉위 |
45대 신무왕(神武王, 839~839년) |
균정의 아들 김우징(金祐徵)이 민애왕을 축출하고 신무왕으로 즉위 |
46대 문성왕(文聖王) |
8년 846년 장보고난(張保皐難) |
47대 헌안왕(憲安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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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대 경문왕(景文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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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헌강왕(憲康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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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정강왕(定康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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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
나. 골품제도의 붕괴
성골은 통일전에 없어졌으며 통일 이후 1~3품이 소멸하고 4두품도 거의 평민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했다.
2. 6두품과 호족 세력의 성장
가. 6두품 세력의 대두
⑴ 학문적 식견에 의한 정계 진출
6두품(得難, 득난)은 중대에는 행정 실무를 담당하고 왕권을 뒷받침했으나 진골 중심의 골품제도와 이를 옹호하는 불교에 대항하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 6두품은 신분적 제약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학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학문적 식견에 의하여 정치적 참여의 길을 밟게 되었다. 임나출신의 6두품으로 외교문서의 작성에 공이 크고 불교를 세외교(世外敎)라고 비판하고 도덕을 사회적 출세보다 더 중요시한 강수(强首)와 원효(元曉)의 아들로서 6두품으로써 구결(口訣)로써 경서를 읽는 법을 만들고 풍왕서(諷王書, 花王戒(화왕계). 花王 : 모란, 白頭翁(할미꽃, 장부): 충신, 장미 : 간신)에서 국왕도 향락을 배격하고 도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설총(薛聰)과 같이 왕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유학자를 비롯하여 원성왕의 꿈해몽을 잘 해준 여삼(餘三), 상대등 충공(忠恭)의 인사고민을 적절한 충고로 풀어준 녹진(祿眞),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린 최치원(崔致遠), 후백제에서 벼슬을 한 최승우(崔承祐), 고려 왕건의 신하가 된 최인연(崔仁渷, 崔彦撝)이 모두 6두품 출신이었다.
⑵ 신라의 골품제도 비판
6두품은 신라의 골품제도를 비판하고 반신라적 경향도 띄었다. 도당유학생(宿衛學生)으로서 김운경(金雲卿)은 도당유학생으로서 헌덕왕 13년 821년 최초로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우감문위수부병조참군(右監門衛率府兵曹參軍)·연주도독부사마(渷州都督府司馬)를 지냈다. 최치원(崔致遠)의 10여조의 시무책에는 과거제도에 의한 인재등용을 주장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외에도 최승우(崔承祐)는 후백제에서 벼슬을 하고 최인연(崔仁渷, 崔彦撝, 최언위)는 고려의 신하가 되었다.
나. 호족의 대두
⑴ 해상무역의 발달과 해외에의 관심
골품제에 중앙정치의 참여의 길이 막히자 지방세력들은 해외로 눈을 돌려 해상무역을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조공(朝貢) 형식의 공무역외 당과 일본, 대만에 민간무역을 하게 되었다. 중국 산동반도나 대운하, 회수유역에 신란인의 거류지인 신라방(新羅坊), 거류민 관할 행정기관인 신라소(新羅所), 거류민의 안전을 기원하는 사원(寺院)이 세워졌고 사원중에는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이 가장 유명하였다.
해상무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사람은 청해진(靑海鎭, 완도)의 장보고(張保皐)였으며 그 외에도 강주(康州, 진주)의 왕봉규(王逢圭), 송악(松岳, 개성)의 작제건(作帝建, 왕건의 조부) 등이 있었다.
⑵ 군진세력의 대두
북진(北鎭, 삼척), 패강진(浿江鎭, 平山) 등 신라의 군진은 변경수비를 위해 육지에 설치했다. 그러나 해상에서 해적들의 활동이 심해지자 청해진(靑海鎭, 완도), 당성진(唐城鎭, 남양), 혈구진(穴口鎭, 강화) 등과 같이 해안요지에도 차례로 군진을 설치하게 되었고 가장 유명한 것이 패강진(浿江鎭)과 청해진(靑海鎭)이다.
북진(北鎭, 삼척)은 태종무열왕 5년 658년, 패강진(浿江鎭, 平山)은 선덕왕 3년 782년, 패강진(浿江鎭)은 선덕왕 3년 782년에 세워진 것으로 예성강(禮成江) 이북과 대동강(大同江) 이남을 광범한 지역을 담당하는 군진이었다. 청해진(靑海鎭)은 흥덕왕 3년 828년에 장보고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당성진(唐城鎭, 남양)은 흥덕왕 4년 829년, 혈구진(穴口鎭, 강화)은 문성왕 6년 844년에 설치되었다.
장보고(張保皐, 弓福, 弓巴)
제42대 흥덕왕 3년 828년 장보고의 청에 따라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淸海鎭, 莞島, 828~851)을 설치하였다. 당에 가서 군인으로 출세하여 해적이 성행하여 신라인을 잡아다가 노비를 매매하는 일에 분개한 그는 본국에 돌아와서 흥덕왕에게 청하여 남해의 요해지인 완도에 청해진을 두고 청해진 대사에 임명되어 사병적 성격의 1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해안지대를 경비하여 해적을 제압하고 당 및 일본과도 활발히 무역을 하여 황해의 해상왕이 되었다.
해상왕 외에도 중앙정치에도 간여하여 김우징(金祐徵)을 도와 44대 민애왕(閔哀王)을 축출하고 45대 신무왕(神武王)에 오르게 하였다. 46대 문성왕(文聖王) 5년 846년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는 문제를 계기로 하여 중앙귀족이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게 암살되고 문성왕 13년 851년 청해진은 폐지되고 그 군대 1만명은 벽골군으로 옮겨 재생이 억제되었다.
⑶ 성주의 자립
지방의 호족이나 진골, 성골, 6두품 출신의 몰락한 중앙귀족, 촌주들은 일정한 지역에 성을 쌓고 성주 또는 장군으로서 칭하면서 실질적으로는 군현의 장관을 대신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지방민에게 조세(租稅)와 역역(力役)을 부과하고 농법도 전하면서 촌락민들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게 되어 신라의 중앙정부의 경제력을 잠식하고 있었다.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 약화를 틈탄 지방 호족들이 독자적 세력 형성하고 중앙 정부에 항거하기에 이르렀다.
3. 농민 봉기와 후삼국의 성립
가. 농민의 봉기
지방 성주들의 지방민에게 조세(租稅)와 역역(力役) 부과로 중앙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중앙정부는 주・군에 대하여 조세를 독촉항기에 이르렀고 중앙정부와 지방성주들로부터 이중으로 부담을 지게되어 농민들은 반란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농민반란은 정치의 부패, 지배층의 불법적인 농토 확대, 가혹한 수탈, 부패․무능한 신라 왕실에 대한 불만 고조의 결과로서 반란의 첫 봉화는 진성여왕 3년 889년 사벌주(沙伐州, 상주)의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였고 이어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사벌주(沙伐州, 상주)의 원종(元宗)・애노(哀奴)의 난 진성여왕 3년 889년
북원(北原, 원주)의 양길(梁吉)
죽주(竹州, 안성 죽산)의 기훤(箕萱)
완산주(完山主, 전주)의 견훤(甄萱)
철원의 양길의 부하 궁예(弓裔)
891년 죽주(竹州, 죽산)에 웅거한 기훤(箕萱) 밑으로 들어가 892년 양길에게 의탁하여 899년(효공왕 3년) 국원(國原, 충주)을 비롯한 30여 성(城)의 강병(强兵)을 이끈 양길과 회전에서 선제공격으로 양길을 제압하여 이후 충청도 지역은 대부분 궁예의 세력권이 되었고 901년 창업.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궁예의 아버지가 신라 제47대 왕 헌안왕(재위 857~860년) 또는 제48대 왕 경문왕(861~875년)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나. 후삼국의 성립
⑴ 후백제(後百濟)의 건국(900)
견훤(甄萱, 867~936)은 진성여왕 3년 889년 무진주 점령하고 진성여왕 6년 892년 왕을 자칭했으며 효공왕 4년 900년 완산주(전주) 점령하고 자신이 거느린 군사와 전라도 지역의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全州)에서 후백제를 세웠다. 견훤은 군인세력을 배경으로 호족세력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워서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부분 지역 차지하고 있었다. 견훤은 미륵신앙에 근거한 전제군로서 행세하였다.
⑵ 후고구려(後高句麗)의 건국(901)
일찍이 기훤(箕萱)에 투신한 궁예(弓裔)는 뒤에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고 다시 양길을 타도하고 고구려 부흥을 기치로 효공왕 5년 901년 송악에서 후고구려국을 건설하였다. 이후 국호를 904년 마진(摩震)으로 연호를 무태(武泰), 성책(聖冊)으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겼고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 정개(政開)라고 하면서 반신라 정책 강화와 통일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평성, 대룡부, 수춘부 등 관부를 두고 정광을 비롯한 9관등을 설정하여 국가면모를 갖추었다.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彌勒佛)이라 하고 아들은 보살(菩薩)이라 하면서 폭군행세를 하다가 신하들에게서 내쫒겨났다.
⑶ 신라의 위축
신라는 후3국의 정립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Ⅲ. 발해의 건국과 발전
1. 발해의 건국
가. 당나라의 이민족 분열정책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요동지방을 안동도호부 관할에 놓고 고구려 유민을 무마하기 위하여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임명하였으나 반란을 꾀하여 소환하고 연이어 손자 보원, 이들 보덕과 덕무를 파견했으나 점차 독립적인 지위를 확립하여 소고구려국으로 부르게 되었다. 당은 고구려 유민, 거란인, 말갈인을 영주(榮州, 朝陽)으로 강제로 이주시킨뒤 감시하였다. 영주에서 거란족 이진충(李盡忠)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나. 건국 과정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은 거란인의 반란을 계기로 영주를 탈출하여 천문령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동모산(東牟山, 돈화)을 근거로 자립하여 698년 진국왕(震國王),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고 후에 발해(渤海)로 고쳤다. 이로서 남부국시대가 되었다. 발해는 2원적 민족구성으로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었다.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 차원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국호 “고구려국” 사용하였다.
연도 |
인물 |
내용 |
677 |
보장왕 |
조선군왕 임명. 부흥운동. 소환~682년 사망 |
685 |
보원(寶元) |
보장왕 손자. 태자 복남의 아들. 조선군왕. 부흥운동 |
686 |
보원(寶元) |
충성군왕. 부흥운동 |
698 |
보덕(報德) |
조선군왕. 부흥운동 |
699 |
덕무(德武) |
보장왕의 아들. 안동도독.부흥운동 |
698 |
大祚榮 |
대진(大震). 발해(渤海)~926 |
류득공의 발해고(渤海考)ᆞ이종휘의 동사(東史)ᆞ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ᆞ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ᆞ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ᆞ서상우의 발해강역고(渤海疆域考)ᆞ홍석주의 발해세가(渤海世家) 등 조선 후기의 역사서들은 발해를 우리 역사로 적극 인식했다. 특히 발해고와 대동지지는 남북국 용어를 사용하였다.
2. 발해의 발전
왕 |
연호 |
내용 |
2대 무왕(大武藝. 719~737) |
인안(仁安) |
만주와 대부분의 연해주를 차지했다. 당과 신라의 협공을 막기 위해 일본과 돌궐과 통교했다. 아우 대문예(大門藝), 사촌동생 대일하(大壹夏), 외숙 임아상(任雅相)을 시켜 흑수말갈(黑水靺鞨. 흑수라고 불렀던 헤이룽 강(黑龍江)이 동류하여 쑹화 강(松花江)과 만나는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을 치는 한편 14년 732년 장문휴(張文休)를 시켜 산등을 공격하여 등주자사 위준(韋俊)를 죽였다. 당은 33대 신라 성덕왕때 733년 발해의 반역자 대문예(大門藝, 대조영의 차남)과 김사란(金思蘭)을 시켜 발해 남부를 공격했다.일본에 사신으로 영원장군 낭장 고인의(高仁義)외 24명을 외교문서와 함께 보냈다. |
3대 문왕(大欽茂. 737~793) |
대흥(大興.737), 보력(寶력.744) |
통치체제 3성 6부를 정비했다. 당과 화친을 맺었다. 국립대학격인 주자감(冑子監)을 설치했다. 수도를 동모산에서 중경, 상경, 동경으로 옮겼다. 신라와 상설교툥로(신라도)를 개통했다. 많은 유학생을 당에 보내 빈공과에 합격했다. 758년 보덕장군 양승경(陽承慶)과 귀덕장군 양태사(陽太師)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안록산난(安祿山亂756~757. 연국. 연호 성무)을 계기로 소고구려국에도 힘을 뻗어 요동까지 지배하였다. |
6대 성왕(成宗, 大華興 , 793~794) |
중흥(中興) |
수도를 동경에서 상경으로 옮겼다. |
10대 선왕(宣王, 大仁秀. 818~830) |
건흥(建興) |
말갈을 복속시켜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했다. 최대의 판도(동 沿海州, 서 遼河, 남 咸南, 북 黑龍江)를 이룩하여 5경, 15부, 62주 등 지방제도를 정비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게 된 시기이다. |
15대 대인선(大諲譔, 907~926) |
926년 거란에 멸망함 |
3. 발해의 제도
발해는 중앙에 선조성(宣詔省, 門下省), 중대성(中臺省, 中書省), 정당성(政堂省, 尙書省) 3성과 충부(忠部. 吏部), 인부(仁部. 戶部), 의부(義部. 禮部), 지부(智部. 兵部), 예부(禮部. 刑部), 신부(信部. 工部) 6부제로 하여 정당성의 장관 대내상(대내상)이 선조성 장관 좌상과 중대성 장관 우상으로 하는 제도였다.
정당성(政堂省, 尙書省) 대내상 |
충부(忠部. 吏部) |
인부(仁部. 戶部) | |
의부(義部. 禮部) | |
지부(智部. 兵部) | |
예부(禮部. 刑部) | |
신부(信部. 工部) | |
선조성(宣詔省, 門下省) 좌상 |
|
중대성(中臺省, 中書省) 우상 |
지방은 국도인 상경(東京城, 용천부)을 중심으로 중경(中京), 동경(東京), 서경(西京), 남경(南京)의 5경이 있었으며 전국을 15부(府), 62주(州). 현(縣)으로 정비하였다.
15府(都督) 62州(刺史) 縣(縣丞) 刺使史
5京
5경 |
|
상경용천부(東京城) |
黑龍江城 永安縣 牧丹江 渤海鎭 : 당 장안성 영향 |
동경용원부(琿春) |
|
중경현덕부(敦化, 東牟山) |
|
서경압록부(臨江) |
|
남경남해부(北靑) |
군사제도는 중앙군으로 10위가 있었으며 각 지방에 지방군이 편성되어 있었다.
4. 발해의 멸망
가. 발해 이질적인 백성 구성
발해인은 소수의 고구려인과 다수의 말갈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유력 귀족 가운데 고구려 유민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말갈인들의 거란의 침입으로 발해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발해에서 자주 이탈했고 거란의 침입에 전 백성을 동원하여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나. 내분 격화
900년 무렵부터 귀족들의 권력다툼이 심화되었다.
다. 거란의 침입
926년 거란의 야율아보기의 침입으로 보름만에 망했다. 고구려계 지배층은 고려에 귀화하였다. 왕자 대광현(大光顯)은 고려에서 왕계(王繼)라는 성을 주어 동족의식을 심어주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고 유민은
라. 부흥운동
발해 유민들은 약 200년간 부흥운동을 전개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났다. 처음에는 대씨(大氏)가 압록부(鴨綠府, 臨江) 일대를 중심으로 후발해(後渤海, 926년? ~ 938년?)를 나중에는 열씨(烈氏)가 정안국(定安國, 938~938)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열만화(烈萬華, ?~976년?, 재위: 935년 또는 938년?~976년?)는 발해의 왕족이자 정안국의 첫 번째 왕으로서 935년을 전후로 해서 정변을 일으켜, 대씨 정권이었던 후발해를 무너뜨리고 오씨 정권을 세운 뒤 국호를 정안국으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970년에 정안국 국왕 열만화라는 이름으로 송에 서한과 공물을 전했다. 그 뒤는 불명확하며 그 전에 죽었거나 내분으로 자신이 암살을 당해 열씨 정권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976년을 전후해서 자신의 찬탈을 도와준 오제현(烏齊顯)의 후손인 오현명(烏玄明, ? ~ 986년 재위: 976년 ~986년)이 정안국에서 정변을 일으켜 두 번째 왕으로 등극했다.
④ 왕권의 전제화
독자적 연호 사용 : 인안, 대흥, 건흥 -중국과 대등함, 왕권의 강대함 표현
관료 조직 정비 : 당의 3성 6부제 도입 독자적 운영, 중정대
왕위 계승의 장자 상속제 확립
제2절 남북국 시대의 경제
Ⅰ. 통일신라의 경제정책
1. 수취제도
가. 조세
1/10세를 수취하여 농민의 부담을 줄였다.
나. 공물
특산물(삼베, 명주실, 과실류 등)
다. 역
16~60세까지 군역(軍役)과 요역(徭役, 繇役, 賦役)을 담당하였다.
2. 토지제도
가. 녹읍(祿邑), 식읍(食邑)
귀족은 자신의 녹읍에 가신을 보내 수취했으며 지방관이 이를 감독했다.
나. 녹읍(祿邑)의 혁파와 부활
관료전 지급(신문왕 7년 687년) |
신문왕 7년 687년 5월 고나료전을 지급하되 차등을 두었다. |
녹읍 폐지(신문왕 9년 689년) |
신문왕 9년 689년 1월 내외관의 녹읍을 폐지하고 매년 세조(歲租)로서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
정전 지급(성덕왕 21년 722년) |
성덕왕 21년 722년 8월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였다. |
녹읍 부활(경덕왕 16년 757년) |
경덕왕 16년 757년 3워 내외 월봉(관료전과 세조)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지급하였다. |
국학생 녹읍 지급(소성왕 원년 799년) |
소성왕 원년 799년년 3월 청주 거노현을 학생들의 녹읍으로 삼았다. |
다. 정전의 지급
왕토사상에 따라 성덕왕 21년 722년 8월 처음으로 백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하고 조를 바치게 하였다. 신라 민정문서에 등장하는 연수유답(烟受有畓)은 정전으로 보인다.
3. 민정문서
가. 발견
1933년 일본 도다이사(東大寺) 쇼소인(正倉院0에서 유물 정리 도중에 제35대 경덕왕 14년 755년 또는 제41대 헌덕왕 4년 815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서원경(西原京, 청주) 및 그 부근 4개 촌의 장적이 발견되었다.
나. 내용
⑴ 작성
3년마다 작성한 것으로 보이며 변동사항을 기록하였다.
⑶ 내용
촌의 호수, 인구수, 우마수, 토지면적, 뽕나무(桑)・잣나무(柏)・호두나무(楸)의 수, 호구, 우마의 감소 등이 기입되어 있다.
인구는 연령에 의하여 정(丁, 丁女), 조자(助자, 助女子), 추자(追子, 追女子), 소자(小子, 小女子), 제공(除公, 除母), 노공(老公, 老母)의 6등급으로 나뉘어 있었고 공연(孔烟, 戶)은 상상호(上上戶)에서 하하호(下下戶)까지 9등급으로 나누었다. 공연의 정(丁)의 수를 합계하여 일년마다 1계연(一計烟)으로 계산하여 촌에서 역역을 징수할 정수를 파악하였다(최근에는 공연의 9등급은 종아 수가 아니라 재산의 정도에 있었다는 새로운 설이 제기되었다). 촌에는 관모답・전, 내시령답, 마전 등이 할당되어서 촌민이 경작하였다.
토지 |
내용 |
관모답・전(官謨畓・田) |
국가의 수입 |
내시령답(內視令畓) |
내시령(內視令)의 수입 |
마전(麻田) |
국가의 수입 |
촌주위답(村主位畓) |
촌주의 수입 |
연수유답(烟受有畓) |
농민의 수입 |
신라에는 촌만이 아니라 향, 부곡도 존재했다. 군・현・촌이 양민 거주지역이고 향・부곡은 천민 거주지로 생각했으나 향・부곡도 군・현・촌주민과 같이 인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Ⅱ. 통일신라의 경제활동
1. 통일이후의 경제성장
가. 서시(西市)와 남시(男市) 설치
농업생산력의 증가와 경주의 인구 증가로 기존의 시사(市肆, 소지마립간 12년 490년)과 동시전(東市廛. 지증왕 10년 509년)만으로는 상품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32대 4년 695년 서시(西市)와 남시(男市)를 설치했다.
나. 수공업
각 물품마다 생산을 관리하는 행정부서거 있었고 왕궁내에 설치한 공장에서 장인과 노비를 통해 공급했다.
2. 대외통상
가. 당
조공형태의 공무역과 사절단이나 사신들에 의한 사무역이 있었다. 통일 이후 문물교류의 확대와 더불어 점차 활발해졌다. 당이 혼란기에 접어 들면서 사무역이 공무역을 압도했고 산동반도, 강소성 등지에 신라방(新羅坊. 신라촌(新羅村, 신라인 거주지), 신라소(新羅所, 관청), 신라관(新羅館, 여관), 신라원(新羅院, 절) 등이 설치되었다. 장보고가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이 유명했다,
나. 일본
처음에는 적대관계에서 무역이 성행하지 못했으나 8세기 이후 교류가 활발해졌다.
다. 아라비아(大食國)
울산에 까지 와서 무역을 하였다. 주로 양탄자, 유리그릇, 향신료 등 귀족의 사치품이 애용되었다.
라. 장보고의 활동
장보고(張保皐, 張弓福, 張弓巴)는 42대 흥덕왕 3년 828년 완도에 해군기지 및 무역기지로서 청해진(靑海鎭)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고 일본과 당과 국제통상을 전개하였다. 장보고는 청해진대사, 감의군사, 진해장군으로서 김우징(金祐徵)을 도와 중앙정계에 개입하고 딸을 문성왕비로 보내려다 귀족의 반대에 직면하여 문성왕 8년 846년 난을 일으켰으나 염장(閻長)에게 암살되어 청해진은 문성왕 1년 861년 폐지되고 1만 군대는 벽골군(碧骨郡)으로 이주되어 재생이 억제되었다.
3. 생활 모습
가. 귀족
귀족은 녹읍(祿邑), 식읍(食邑), 사전(賜田), 마거(馬阹, 목마장), 조(租, 곡물)를 통해 농민을 지배했다. 귀족은 서민을 상대로 한 고리대금업도 수입원이었고 금입택(金入宅)이라고 하는 호화주택에서 살았다. 당시 주경(主京) 금성(金城, 경주)에는 178,936호(戶), 1,360방(坊), 55리(里), 35 금입택(金入宅), 4 절유택(節遊宅)이 있었다.
나. 평민
시비술이 발달하지 못해 농업생산력에 한계가 있었다.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빌려 농사를 지을 경우 생산물의 절반을 지주에게 주어야 했다. 전세는 생산량의 1/10 정도였으며 공물(삼베, 명주실, 괴일류 등 특산물)과 요역(부역)을 부담해야 했다.
Ⅲ. 발해의 경제
1. 수취제도
조세 |
조, 콩, 보리 등 곡물을 거둠 |
공물 |
베, 명주, 가죽 등의 특산물을 거둠 |
부역 |
궁권, 관청 등의 건축에 노동력 징발하고 전쟁시 나가서 싸움 |
2. 산업
가. 농업
밭농사 위주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이 유적을 통해 확인되었다.
나. 수공업
제철, 방직, 목재, 피혁가공업, 금속가공업, 삼베・비단・명주등 직물업, 도자기업이 발달하였다,
다. 어업, 목축업
고래, 명마, 모피, 녹용등이 풍부했고 돼지, 말, 소, 양등을 길렀으며 말(솔빈부의 말 유명)은 주요한 수출품이었다.
라. 상업
상경용천부 등 도시와 교통요지에 상업이 발달하였다.
3. 대외관계와 통상의 발달
발해의 주요 교통로에는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일본도, 신라도가 있었다.
가. 당
처음에는 당이 흑수말갈을 이용해 발해를 견제했으나 장문휴가 산동지방을 공격하였고 문와이후 우호관계를 맺었다.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통상을 하였으며 산동반도의 덩조우(登州)에 발해관을 설치했다.
나. 일본
당과 신라의 협공에 대비하고 외교 고립을 타개하기 위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 했다.
다. 신라
남북국시대 두 나라간에는 친선과 대립이 교차하였으며 당의 빈공자 합격을 위한 문화적 우월 경쟁도하였다. 국경근처에 상설적인 교류가 이우어졌다.
라. 돌궐
당을 견제하기 위해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제3절 남북국 시대의 사회
Ⅰ. 통일 이후 의 신라 사회
1. 민족통합정책
가. 피정복국의 지배층 포섭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금관가야의 후손인 김유신(金庾信)과 고구려의 안승(安勝, 보장왕의 서자, 고구려왕→보덕국왕)을 진골에 편입하고 안승에게는 김씨 성을 주었다. 피정복국 백성으로서 경주에 온 고구려인은 6두품, 백제인은 5두품으로 대우했다.
나. 9주 5소경 9서당 10정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옛땅에 3주씩 9주를 설치하고 5소경을 두었으며 9서당에 백제인, 고구려인, 말갈인, 보덕국인으로 편성된 부대가 있었다.
2. 골품제의 변화
진골귀족은 모든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향유하고 진골간의 내부 경쟁이 심화되어 경쟁에서 패배한 진골귀족은 6두춤으로 추락하가도 하였으며 학문적 식견과 실무능력을 갖춘 6두품은 중대에는 전제 왕권을 뒷밭침했으나 득난(得難)아란 신분적 한계로 출세의 벽이 존재했다. 신라 말기에는 반신라적 경향을 띄었다. 1~3품은 통일후 평민으로 되었다.
Ⅱ. 통일신라 말의 사회 모순
1. 정치적 혼란
가. 왕위 계승 다툼 심화
나. 지방 세력의 성장
2. 농민의 몰락
가. 신라 하대 농민들의 처지
나. 농민의 부담 증가
3. 농민항쟁
가. 무장 조직의 등장과 봉기
나. 정권의 수립
Ⅲ. 발해의 사회
1. 이질적인 주민 구성
가. 지배층
대씨(大氏), 고씨(高氏), 양씨(楊氏) 등 고구려 유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 피지배층
대다수는 말갈족으로 부락을 단위로 자치적인 생활을 하였다..
2. 사회 모습
가. 발해의 지식인
당의 문화를 수용하고 당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빈공과(賓貢科)에서 신라인과 수석을 경쟁하였다.
나. 사회 분위기
고구려와 말갈사회의 전통을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제4절 남북국 시대의 문화
Ⅰ. 남북국 시대의 문화의 성격
1. 남북국시대 문화적 성격
통일신라(남국) |
사회적 기반과 경제생활이 안정되면서 고구려와 백제문화를 융합하여 민족문화를 확립할 수 있었다. 당나라 문화를 중심으로 외래문화를 흡수 가미함으로서 보다 다양하고 세련된 문화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
발해(북국) |
고구려적 요소 위에 당나라의 문화가 재구성되었다. |
2. 남북국시대 문화의 특징
통일신라(남국) |
골품제의 특권을 살린 우아하고 풍요로운 귀족문화와 질박한 민간의 문화가 공존했다. |
발해(북국) |
국제적이고 융합적인 성격을 보인다. |
Ⅱ. 통일신라의 사상
1. 유학의 보급
가. 유학기관의 설치
⑴ 국학(國學)
제31대 신문왕 2년 682년 국학(國學)을 설립했다.
⑵ 공자・10철・72 제자의 화상 국학 안치
제33대 성덕왕 16년 717년 당으로부터 공자(孔子)・10철(哲)・72 제자(弟子)의 화상(畵像)을 가져다가 국학에 안치하였다.
⑶ 태학감(太學監)
제35대 경덕왕 6년 747년 국학을 태학감(太學監)으로 개칭하고 박사와 조교를 두어 교수를 담당케 하고 3과를 두었다. 9년이 되도록 학업이 진척이 없는 자는 퇴학시켰다.
3과의 과목
공통과목 |
건택과목 |
논어(論語), 효경(孝經) |
예기(禮記), 주역(周易) |
논어(論語), 효경(孝經) |
좌전(左傳), 모시(毛詩) |
논어(論語), 효경(孝經) |
상서(尙書), 문선(文選) |
⑷ 국학(國學)
36대 혜공왕 12년 776년 다시 국학으로 환원되었다
⑸ 독서3품과(讀書三品科)
38대 원성왕 4년 788년 관리채용을 위한 국가시험제도 설정 신라 때 관리 채용을 위한 일종의 국가시험 제도로서 종래의 골품제를 기초로 한 벌족(閥族) 본위의 인재 등용을 지양하여 학벌 본위의 관리 채용을 지향하기 위해 독서삼품과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제도에 따르면, 응시자는 그 독서의 성적에 따라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어 채용하였다. 5경(五經), 3사(三史),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통한 자가 있으면 우선적으로 기용하였다.
상품(上品)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예기(禮記), 문선(文選)을 읽어서 능히 그 뜻에 능통하며 논어(論語), 효경(孝經)에 밝은 자
중품(中品) : 곡례(曲禮), 논어(論語), 효경(孝經)을 읽은 자
하품(下品) : 곡례(曲禮), 효경(孝經)을 읽은 자
나. 대표적인 유학자
6두품 출신이 많았고 유학은 골품제를 비판하고 사회모순을 개혁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김대문(金大問) |
계림잡전(鷄林雜傳),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紀),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 등 역사와 지리에 관한 저술을 하였다. |
김장청(金長淸) |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 |
강수(强首) |
임나출신의 6두품으로 외교문서의 작성에 공이 크고 불교를 세외교(世外敎)라고 비판하고 도덕을 사회적 출세보다 더 중요시하고 “김인문을 놓아주기를 청하는 글(請放仁問書)”을 당고종에게 바쳤다. |
설총(薛聰) |
원효(元曉)의 아들로서 6두품으로써 유교경전에 밝았으며 구결(口訣)로써 경서를 읽는 법을 만들고 신문왕에게 풍왕서(諷王書, 花王戒(화왕계)를 올리고 감산산조상기(甘山寺造像記)를 씀. 홍유후(弘儒侯) 칭호 |
최치원(崔致遠, 857~) |
도당유학생으로 당의 빈공과에 합격하였으며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짓기도 했다. 귀국하여 제51대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조를 건의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계원필경(桂苑筆耕), 사륙집(四六集), 제왕연대록(帝王年代曆), 향약잡영(鄕樂雜詠), 사산비명(四山碑銘). 문창후(文昌侯) 칭호 |
김필오(金弼奧) |
성덕대왕신종명(聖德大王神鐘銘) : 무게 있는 탁월한 문장력 |
기타 |
제문(帝文), 수진(守眞), 양도(良圖), 풍훈(風訓) 등 유학자와 김운경(金雲卿, 최초 빈공과 합격자), 김가기(金可紀) 등 숙위학생 |
2. 불교사상의 발달
가. 불교의 사상적 체계화
원측(圓測) |
당의 현장(玄奬)에게서 불법을 배워 역경(譯經)과 저술에 종사하였으며 Tibet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원효(元曉, 617~686) |
각 종파의 사상적 대립을 일심사상(一心思想)을 통해 해결하였다. 화쟁국사(和諍國師). 유심안락도(游心安樂道, 淨土信仰) :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으로 南無阿彌陀佛만 염불하면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중국의 화엄종 성립에 큰 영향을 미침),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산스크리트어(梵語)로 번역되어 인도의 불교계에 영향), 열반종요(涅槃宗要),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 |
의상(義湘. 625~702) |
지엄(智儼)의 제자로 중국 화엄종을 들여와 신라 화엄종을 창시했다. 부석사를 건립했으며 원융사상(圓融思想, 一卽多 多卽一. 一心에 의하여 만물을 통섭하는 것. 一體不離).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관음신앙 |
혜초(慧超, 704~) |
성덕왕 18년 719년 당에 가서 다시 인도와 페르시아, 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성덕왕 26년 727년 당에 돌아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3권을 남겼다. |
진표(眞表) |
백제 유민으로서 경덕왕때 김제 금산사(金山寺)를 중심으로 미륵신앙을 통하여 백제유민과 고구려유민 사이에 크게 환영받았다. |
김교각(金喬覺, 696~794) |
신라 왕손 출신 승려로 성덕왕 18년 719년 당에 가서 중국 안휘성 구화산(九華山)에서 75년간 고행과 포교활동을 전개하다가 지장보살의 화신이 되었다. |
나. 불교의 대중화
원효는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으로 南無阿彌陀佛만 염불하면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고 하여 불교의 대중화의 길을 열었고 의상은 아미타신앙과 더불어 관음신앙을 이끌었다.
다. 선종(禪宗)의 등장
가 교종(敎宗)
교종은 경전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했고 5교로 성립되었다.
나. 선종(禪宗)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표방하며 개인의 실존과 자각을 강조하는 실천수행을 통한 개달음을 추구하며 중국의 달마(達磨)대사가 개창하여 3국 통일 이전에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신라 말기에 지방호족, 6두품의 호응으로 크게 유행했고 9산문(山門)이 성립되었다.
5교 9산
宗派名 |
開創者 |
根本道場 | |
교종(5교) |
열반종(涅槃宗) |
무열왕 때 普德 |
전주 景福寺 |
계율종(戒律宗) |
선덕왕 때 慈裝律師 |
양산 通度寺 | |
법성종(法性宗 |
문무왕 때 元曉 |
경주 芬皇寺 | |
화엄종(華嚴宗) |
신문왕 때 義湘 |
영주 浮石寺 | |
법상종(法相宗) |
경덕왕 때 眞表律師 |
김제 金山寺 | |
선종(9산) |
가지산(伽智山) |
도의(道義) |
장흥 보림사(寶林寺) |
실상산(實相山) |
홍척(洪陟, 洪直) |
남원 실상사(實相寺) | |
동리산(桐裡山) |
혜철(慧哲) |
곡성 대안사(大安寺) | |
사굴산(闍崛山 |
범일(梵日) |
강릉 굴산사(굴山寺) | |
성주산(聖住山) |
무염(無染 |
보령 성주사(聖住寺) | |
봉림산(鳳林山 |
현욱(玄昱) |
창원 봉림사(鳳林寺) | |
사자산(獅子山) |
도윤(道允) |
영월 흥녕사(興寧寺, 현재 法興寺) | |
희양산(曦陽山) |
도헌(道憲) |
문경 봉암사(鳳岩寺) | |
수미산(須彌山) |
이엄(利嚴) |
해주 광조사(廣照寺) |
3.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선종 승려인 도선(道詵)은 불교의 선근공덕사상(善根功德思想)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등을 결합하여 풍수지리설을 전개했다. 지리에는 땅 기운이 순조로운 곳(明堂. 명당)과 땅 기운이 쇠약하고 거슬린 곳(凶地, 흉지)이 있는데 명당(明堂)에 양택(陽宅, 주택)이나 음택(陰宅, 무덤)을 짓거나 도읍(都邑)을 정하면 국가나 개인이 행복을 누릴 수 있고 흉지(凶地)에 양택(陽宅, 주택)이나 음택(陰宅, 무덤)을 짓거나 도읍(都邑)을 정하면 국가나 개인에게 불행을 가져다 주므로 비보사찰(裨補寺刹)을 지어 재앙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풀수지리설은 경주 중심의 국토관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고려시대(왕건의 훈요십조 등)와 조선시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Ⅲ. 통일신라의 과학기술
1. 천문관측
삼국사기의 일식, 월식, 지진, 헤성 출현에 대한 기록이 매우 많고 정확했다. 천문은 농업에 관련되며 천재지변은 민심을 반영하다는 믿음으로 인해 중요시했다.
2. 수학
석굴암, 석가탑, 다보탑 등의 균형 잡힌 비례구성에서 수학지식을 엿볼 수 있다.
3. 목판인쇄 및 제제술
석가탑에서 발견된 35대 경덕왕 10년 751년 이전에 만든 무구정광다라니경(無垢淨光陀羅尼經)은 세계최고의 목판인쇄술이다. 종이는 목판과 마찬가지로 닥나무를 이용했다.
4. 범종(梵鐘)
범종에는 성덕왕 24년 725년에 제작되어 가장 오래된 상원사종(上院寺鐘)과 혜공왕 7년 771년에 제작되어 가장 유명한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 봉덕사종, 에밀레종, 구경 7척 5촌 높이 11척)이 현존하는 최대의 종이다. 황룡사종은 50만근의 거대한 종이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Ⅳ. 통일신라의 예술활동
1. 고분양식의 변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火葬, 茶毘)이 유행했다. 고분양식은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竪穴式赤石冢)에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바뀌었다. 봉토 주위에 둘레돌을 쌓고 12지신상을 조각하는 독특한 양식이 등장했다.
신라 |
3세기 이후 |
경주식덧널무덤 |
|
4세기 이후 |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
경주평야의 98호고분(皇南大塚) : 南墳과 北墳의 쌍무덤(瓢形墳), 鳳凰大古墳, 金冠塚, 金鈴塚, 天馬塚, 瑞鳳塚 도굴이 어려움 | |
지방 |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陵) |
경산, 대구, 창령, 안양, 부산, 의성, 안동 | |
통일신라 |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 |
경덕왕릉, 흥덕왕릉, 掛陵(괘릉), 金庾信墓 호석(護石, 둘레돌)에 12지신상 조각 | |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 |
2. 건축과 탑
가. 건축
⑴ 불국사와 석굴암(石窟庵, 석불사)
경덕왕 10년 751년 김대성(金大城, 中侍)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불국사의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석가탑・청운교(靑雲橋)・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
석굴암은 중국의 석불사원을 양식을 받아들여 만든 것이나 중국의 석불사원이 자연적 바위벽에 이루어 진 것인데 대하여 신라의 석불은 인공의 석굴을 만들어서 불상을 모신데 차이가 있다. 석굴암은 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후실(後室)로 되어 있고 후실 천장은 돔(dome, 穹窿, 궁륭)으로 돌을 쌓아 올린 것이다.
기술적으로 교묘할뿐만 아니라 역학적으로도 기하학적으로도 치밀하게 설계되어 조각된 38구의 불상(원래 40구)이 체계적으로 배열하여 세계에서 가장 숭고한 종교적 세계를 이룩해 놓은 신라인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부처의 세계나 다름 없다.
석굴암이 석불사인 점은 그 조각에 있다. 후실 중앙의 석가상(釋迦像)을 비롯하여 둘레의 벽에 부조(浮彫)된 11면 관음과 여러 보살(菩薩) 및 나한(羅漢), 전실의 8부신장(八部神將)과 인왕(仁王), 연도(羨道)의 사천왕(四天王) 등 모두가 각기 특색을 지니고 조화된 미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둥근 얼굴과 풍만한 몸은 당의 영향을 받은 바 있다.
⑵ 안압지(雁鴨池)
삼국사기 문무왕 14년 2월조에 의하면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하여 삼국통일을 전후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문무왕 14년 674년에 완성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난 조경술을 보여준다.
⑶ 기타 : 679년 사천왕사, 684년 망덕사
나. 불탑
구분 |
탑 |
특징 |
초기 |
의성탑리5층석탑(義城塔里五層石塔) |
백제식 목탑을 본뜬 석탑과 신라식 모전석탑의 혼합양식 |
감은사지동서3층석탑(感恩寺址東西三層石塔) |
국보 제112호.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 55-9 | |
불국사3층석탑(佛國寺三層石塔,釋迦塔,석가탑) |
경덕왕 10년 751년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창건. 국보 21호. 경북 경주시 불국로 15-1 | |
불국사다보탑(佛國寺多寶塔) |
높은 예술성과 빼어난 건축술 국보 제20호. 경북 경주시 불국로 15-1 | |
말기 |
양양 진전사지3층석탑(陳田寺址三層石塔) |
기단과 탑신에 부조로 불상을 새긴 것으로 유명. 국보 제122호. 강원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100-2 |
구례화엄사4사자3층석탑(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
국보 35호.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황전리) | |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和順 雙峯寺 澈鑒禪師塔) |
국보 제57호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195-1번지 | |
경주 창림사3층석탑(昌林寺三層石塔) |
제46대 문성왕 | |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3층석탑(桐華寺毘盧庵三層石塔) |
제40대 애장왕 | |
전남 장흥 보림사3층석탑(寶林寺三層石塔) |
제47대 헌안왕을 위한 석탑 | |
전북 남원실상사3층석탑(實相寺三層石塔) | ||
충남 보령 성주사3층석탑(聖住寺三層石塔) |
다. 불탑과 공예
⑴ 불상
초기 |
균형미가 뒤어난 불상들이 만드어 졌다. 석굴암은 완숙미가 뒤어나고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삼존불과 안압지에서 나온 그 삼존불은 초기 형태이고 경주 감산터에서 옮겨온 2구의 석불은 성숙된 모습이다. |
말기 |
개성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장흥 보림사와 철원 도피안사의 비로자나불, 함안 방어산 약사여래입상, 논산 관촉사 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 |
⑵ 석조물
팔각기둥형(일반형석등) |
부석사석등(통일신라 후기), 합천 청량사석등, 구례 화엄사각황전앞 석등, 남원 실상사석등(통일신라), 장흥보림사석등, 남원실상사의 백암장석등(장식적) |
쌍자자석등 |
법주사 쌍사자석등, 광양 중흥산성쌍사자석등, 합천 영암사지쌍사자석등 |
⑶ 범종 : 상원사종과 성덕대왕신종
3. 향가와 구전문학
가. 향가
4구체에서 10구체로 바뀌었으며 대부분 승려와 화랑들이 저슬했다. 향가집으로 제51대 진성여왕 2년 888년에 각간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삼대목(三代目)을 지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에 14수와 균여전에 11수가 전해진다.
나. 구전문학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에밀레종, 설씨녀, 효녀 지은(孝女 知恩, 효자 손순(孝子 孫順) 등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Ⅴ. 발해의 문화
1. 발해의 유학
귀족 자제의 유학 교육의 목적으로 주자감을 설치했고 6부를 유교식으로 지었으며 당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빈공과 합격자를 배출했다.
2. 발해의 불교
발해의 절터는 5경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지배층 중심으로 불교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발해의 예술활동
가. 고분
흙무덤, 굴식돌방무덤, 벽돌무덤(塼築墳)이 있다.
주인공 |
무덤양식 |
천정방식 |
위치 |
벽화 |
정혜공주지묘(貞惠公主誌墓) |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 |
고임천정(모줄임방식) |
육정산 고분군 |
없음 |
정효공주지묘(貞孝公主誌墓) |
벽돌무덤(塼築墳) |
용두산 고분군 |
있음 |
나. 불상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 등에서 고구려 양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다. 조각
석등, 와당 등의 문양에서 웅건함과 소박하면서도 직선적인 고구려적 색채가 보인다.
라. 자기공예
가병고 광택이 있으며 종류, 모양, 크기, 색깔 등이 매우 다양했다.
마. 고구려의 계승
⑴ 지배층 : 대씨, 고씨, 양씨 등 고구려계
⑵ 제도 : 5경제는 고구려 5부제
⑶ 문서 :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왕
⑷ 문화 : 온돌장치, 정혜공주묘의 굴식돌방무덤, 이불병좌상, 와당연화문, 발해음악, 다듬잇돌(砧石, 침석), 모줄임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