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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 & 로꼬 - 우연히 봄
“수업 종 쳤어, 멍청아.”
“……야.”
“스파게티, 콜이다.”
“……변백현.”
“뭔데 불쌍한 척이야, 수업 종 쳤다니까?”
“대박…….”
“말 진짜 더럽게 안 듣…….”
“너 진짜 연애 많이 해본 애 맞구나, 난 네가 하도 처먹기만 해서 사기만 치는 애인 줄 알았는데 그게 틀린…….”
“칭찬이야, 악담이야.”
“당연히 칭찬이지, 도경수가 내 이름 물어봤다니까? 심지어 내 이름 불러주기까지 했어, 봤어? 들었어?”
“깨방정 적당히 떨어라, 도경수 불러서 다 까발리기 전에.”
“스파게티 오늘 콜이다! 맛집도 내가 찾아 놓을게! 넌 그냥 가만히 앉아서 먹을 준비나 해! 응?”
“…….”
“아, 진짜 어떡해! 아!”
벅차오르는 행복감에 못 이겨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가리기 위해 두 손을 들어 입가로 가져다 댔다. 기이하고도 섬뜩한 웃음소리가 밖으로 튀어 나왔다. 그런 나를 벌레 씹듯 내려다보는 변백현의 시선에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건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경수였다. 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눈앞에 보이는 놈의 팔뚝부분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초등학교 이후로 해본 적 없는 같은 반 남자 때리기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슴 속에서 요란하게 움직이는 파도 소리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아, 아프다고 진짜.”
“야, 어떡해 진짜? 아, 어떡해!”
“누가 보면 도경수한테 고백 받으신 줄 알겠어요.”
“아, 진짜 좋다니까…….”
“옷 갈아입어 바보야, 체육 시간이야.”
“뭐? 1교시 체육이야? 나 체육복 어디 있지? 아, 큰일 났네!”
“넌 그 깨방정만 고치면 반은 가, 반은.”
“아, 진짜 없다니까?”
“방금 전까지 기분 존나 좋지 않았냐? 컨셉이 이중인격이세요?”
“아, 그런 게 아니라……체육복 찾기만 해 봐, 진짜.”
“그 전에 나가면 되는 거 아니야?”
“야, 나가지……!”
젠장, 저 원수 새끼. 저게 도와주려는 사람의 태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놈이 말해준대로 체육복을 갈아입는 게 중요하니까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모든 여학생들이 운동장 스탠드 한 구석에 앉아 저들끼리 모여 잡다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사소하게는 화장품 이야기부터, 늘 그렇듯 남자 이야기까지. 그 한가로운 학창 시절에 한 페이지에서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오로지 나 하나인 듯 싶다. 분명 어제 챙겼던 체육복이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어디로 사라졌나 이 말이었다. 덜렁거리던 내 습관이 이번에도 일을 하나 저질렀구나 싶었다. 반사적으로 자욱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체육복을 안 입고 온 벌점자 명단에 신경질적으로 내 이름을 쓰고 스탠드로 발걸음을 옮겼다. 체육복을 안 입고 왔다는 이유로 이 추운 날에 피구를 안 하는 건 축복이었지만, 벌점이 생기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더군다나 어제 정확하게 체육복을 챙긴 기억이 뚜렷하다면. 하나둘씩 여자아이들이 스탠드로 모였다. 그런 나와는 다른 관념인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수업을 안 한다는 자체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듯했다. 큰 눈이 매력적인 서윤이가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밀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다. 사실 이런 표정은 별로 반갑지 않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 비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거니까. 솔직히 말해서 엄청 친하지 않은 이상, 남의 비밀 이야기를 듣는 건 썩 달갑지 않지 않은가. 그럼 그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생기는 거고, 혹시라도 누군가에 의해 그 비밀이 들통 나게 돼버리면 용의자중에 의심받는 건 내가 되는 거니까.
“○○아, 너 아까 변백현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
“응?”
“아니……솔직히 변백현이 우리 반 여자애들이랑 친하게 지내는 편이 아니잖아. 근데 너랑 같이 이야기 하니까 신기해서…….”
“아…….”
“이거 비밀이다! 나 사실 변백현 좋아한단 말이야.”
“뭐?”
“왜 너네끼리만 비밀 이야기 하냐? 변백현 뭐? 뭔데! 우리도 알려줘!”
“왜? 변백현이 왜? 누가 변백현 좋아해? ○○○ 네가?”
“응?”
“그러고 보니까 ○○○ 너 아까 변백현이랑 둘이 구석에서 이야기하고, 뭐야? 둘이 썸이야?”
“아, 썸 아니야! 친구야 그냥.”
“그럼 뭔데? 이서윤 네가 좋아한다는 거야?”
“응? 아, 남자애들 듣겠다……제발 조용히.”
“이서윤 뭐야? 너 진짜 변백현 좋아해? 대박, 근데 왜 ○○이한테만 말해!”
바짝 마른 목구멍으로 건조해진 침을 간신히 넘기며 느릿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못들은 척 넘어가려고 했던 게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던 거다. 잘 익은 홍시처럼 벌게진 서윤이의 얼굴을 보자 상황이 난처해진 건 오히려 나였다. 내게만 비밀을 털어놓으려 했을 텐데 이게 무슨 낭패인가 싶었다. 멘붕의 연속이었다.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이 생기는 게 법칙이라던데. 난처해진 상황에 조바심이 났다.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리며 대처할 방법을 찾느라 고통이었다.
“야, ○○아. 변백현 여기로 오는데?”
“뭐?”
정말이었다. 한겨울에도 얼마나 격하게 축구를 했으면 와이셔츠가 흥건하게 젖은 채로 달려오는 변백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저 자식은 눈치도 없이 왜 저러는 건지 온 상황이 야단이었다. 태평하게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 상황이 더 커지면 이거 완전 나만 이상한 사람 되는 거 아니냐. 만약 서윤이가 나한테만 말하려 했던 건데 이렇게 까지 커질 줄 몰랐다며 울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라는 소름끼치는 생각이 스쳤다. 아이들은 분명 서윤이와 변백현을 장난스럽게 엮을 테고, 죄 없는 나만 타들어갈게 분명했다.
“야, ○○○, 나 봤냐? 방금 골 넣는 거?”
“응? 아, 그게 있잖아 변백…….”
“아, ○○○ 나 봤냐고. 내가 방금 골 넣었잖아”
“…….”
“아, 덥다. 땀 너무 많이 났어."
“……야.”
“이것 좀 가지고 있어, 잃어버리면 뒤진다, 진짜.”
“아…….”
그 난리 통에서 유일하게 태연했던 건 변백현 뿐이었다. 빛 하나 없는 꽉 막힌 터널 속에서 정적을 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달아오르는 얼굴을 제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파묻어버리는 서윤이부터, 입만 벌린 채 다시금 운동장으로 멀어져 가는 놈에게로 시선을 고정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 그리고 놈이 교복 치마 위에 던져놓고 간 후드 집업을 멍하니 응시하는 나도. 아무도 먼저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온몸이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놈의 후드 집업을 방패삼아서라도 제 몸을 감추고 싶었다. 이게 뭐야, 무슨 상황인데. 그런 걱정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남자 아이들의 우악스런 함성이 터졌다. 이번에도 골의 주인공은 변백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올려 놈의 번호가 새겨진 11번을 눈으로 쫓았다. 나를 이렇게 웃기게 만들어 놓고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이젠 야속하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당최 이해가 안 되는 거다. 땀을 저렇게 많이 흘려도, 겨울인데. 왜 뜬금없이 이쪽으로 와서 교복 치마 위에 후드 집업을 던져놓고 가버린 건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현실인지 아니면 지옥인지 구분도 못할 만큼 암흑 같았던 체육시간이 끝이 났다. 찌릿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내 옆에서 체육복을 갈아입는 서윤이를 보니 영 가슴 한 구석이 멍한 게 아니었다. 내가 뭘, 서윤이의 짝사랑을 방해하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솔직히 그런 건 있지 않느냐. 괜히 신경 쓰이는 거. 세상에서 제일 질퍽거리는 기분. 머쓱해진 마음에 졸졸 서윤이의 뒤만 따라 교실로 들어왔다. 끝까지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게 마음의 돌이 돼버린 채로 의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노곤해진 몸에도 자연스럽게 시선은 시간표로 향했다. 망할. 국사시간이었다. 어느 개념을 상실한 놈이 체육 시간 다음으로 국사를 배정한 건가 참으로 못 마땅했지만, 결국 뭘 어쩌겠냐. 반쯤 풀린 눈으로 노트와 색 색깔의 볼펜 세트를 꺼냈다. 이번 학기만큼은 반에서 5등 안에 들어보자던 당찬 포부에 이끌려 구매한 볼펜들이 초라하게 내 가방 안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생김새만으로도 졸음을 유발하는 한국사 선생님의 수업이었다. 오늘도 그 당찬 포부에 어긋나는 행동을 제대로 보여주는 나였다.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만 눈꺼풀이 감기는 게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수업은 물론이요, 미움까지 받겠다는 생각에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까지 잠에서 깨려 하지만, 또다시 몰려오는 졸음의 무게는 그 어떤 것도 이길 수가 없는 거였다. 이번 시간만 잘까……라는 생각으로 천천히 자세를 잡고 눈을 붙이려 하는데.
“야, ○○아. 이거 변백현이 너 주래.”
“응?”
젠장, 개새끼. 놈은 전생에 나랑 원수가 분명했다. 그 전에는 아무런 기미도 안 보이더니 마음잡고 잠을 청해보려 하니까 쪽지를 보내는 저 못돼 처먹은 심보는 뭘까 싶었다. 다소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폈다. 딱 울퉁불퉁하고 삐죽삐죽한 게 누가 봐도 딱 변백현스러운 글자였다.
‘나 스파게티 말고 피자 사줘’
변백현 뒤통수 갈길 수 있는 방법 아시는 분. 이게 말이야 방구야. 스파게티랑 피자랑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피자는 적어도 삼 만원이 거뜬하게 넘는데? 미쳤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말이 나오지 않지. 몸을 홱 돌려 맨 끝자리에서 샤프를 돌리며 태평한 표정을 짓는 놈을 보고 있자니 힘 빠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고민하다 놈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없이 속삭이는 나였다.
“싫어.”
“싫어?”
“진짜 싫어.”
“경수 번호가 뭐였더라?”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있었다. 변백현은 그 누구보다 내 약점을 잘 알고 있다는 것. 뼈 속 깊이 슬금슬금 올라오는 분노감에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변백현에게 성질을 내봤자 좋을 건 없었다. 그냥 한 번에 깔끔하게 끝내는 법이 나을지도 모른다. 조용히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는 뜻이었다. 더는 내 순수한 약점 가지고 치사하게 굴지 말라는 말이다. 누구보다 만족스러운 엿을 날리기 위해 더 깊숙하게 고개를 숙여 빠르게 손가락을 올리고 여유롭게 고개를 돌리면…….
“○○○, 변백현 나가.”
“…….”
“…….”
“○○○ 넌 남자애한테 가운데 손가락이나 날리고 잘하는 짓이다.”
“…….”
“안 나가? 나가서 손들고 서 있어!”
어깨 부근이 저릿하게 저려왔다. 혹시라도 누군가 건드리기라도 한다면 매가리 없이 팔이 빠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이를 바득 바득 갈며 험한 욕을 반복해서 토해냈다. 물론 속으로. 훅하고 올라오는 절망감과 비례하는 고통에 애달픈 신음이 나오는 건 나뿐이었다. 아주 여유롭게 한 손만 올리곤 다른 한 손으로는 카카오톡 메신저를 구경하고 있는 놈이 그렇게나 거지같을 수 없었다. 이건 내 잘못도 있지만 엄연히 네 잘못도 있는데, 왜 나만 이렇게 열심이야? 그런 내 고생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다시는 도전 안 하기로 했던 발 연기를 다시 시전하려 두어 번 헛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최대한 더 고통스럽게, 고달프게. 그럼 양심에라도 찔려서 들기라도 하겠지…….
“아아……팔 아파.”
“…….”
“아파서 죽겠다…….”
“아파?”
“넌 안 아파? 두 손 다 들고 있어 봐, 아프다니까.”
“두 손 다 내려, 뭐 하러 병신같이 들고 있냐?”
“…….”
“진짜 계속 그렇게 병신같이 행동하세요.”
“야!”
“아, 진짜 웃기네. 이래서 여자 애들 놀리는 건가.”
“이게 웃겨?”
“삐졌냐?”
“그럼 너 같으면…….”
“어떻게 하면 풀 건데, 멍청아.”
“…….”
“뭐, 할 말 있잖아.”
“……도경수한테 다음은 뭐 해야 해?”
“아, 오로지 도경수 생각이구만.”
“뭐, 알려줘야지. 설마 이름 알려주고 끝은 아니잖아.”
“뭐 해야 할 거 같아. 이름 알려줬으니까.”
“이름 알려줬으니까……말 해보기?”
“네가 어떤 애인 줄 알고 말을 해.”
고통스럽던 팔의 감각이 점차 무뎌지기 시작했다. 도경수라는 이름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중요한 정보를 놓치기라도 할까 놈의 속삭임에 볼을 조금씩 밀착시킨다. 조용하던 복도는 놈의 귓속말과 함께 윙윙 울려댔다.
“무작정 말을 해보기 전에, 네가 어떤 애인지 인식을 심어줘야 할 거 아니야.”
“…….”
“네가 먼저 말을 걸기 전에 도경수가 먼저 너랑 말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하면 되는 거야. 그 주변을 공략해. 예를 들면 도경수한테 네 얘기를 말해줄 수 있는 친구들.”
“근데 나 도경수 친구들 중에 아는 애 없는데.”
“…….”
“아, 혹시 그때 도경수 친구라……!”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손을 감싸는 변백현이었다. 순간적으로 모든 시간이 일시정지 돼버렸다. 반사적으로 놈의 시선이 멈춘 곳으로 고개를 틀었다. 미친, 하고 작은 욕이 튀어 나왔다. 그 주인공이 도경수임을 확신한 순간, 고개가 원상복귀 되는 건 당연한 지사였다. 한창인 수업시간에 대체 무슨 일로 나온 건가 이 말이었다. 하필이면 지금 이 시간에. 이완했던 긴장감이 다시금 서늘하게 내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눈치라도 빠른 변백현은 내가 무턱대고 소리라도 지를까 봐 손부터 잡았던 거였다. 그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운 좋게 피해갔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알 수 없는 이 분위기는 어떻게 하느냐. 분명 그냥 지나가면 끝나는 상황인데 경수는 도무지 발을 뗄 생각조차 없는 듯 보였다. 계속해서 가빠지는 숨소리에 입술이 메말라갔다. 그 아득한 감정을 눈치 채기라도 한 건지, 잡고 있던 손을 더 꽉 잡아주는 변백현이 있었다. 등 뒤로 땀방울이 하나둘씩 맺히는 것 같았다. 두 눈을 꼭 감았다. 죽어라 기도했다. 제발 경수가 아무 말 없이 지나가게 해주세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그런 내 기도를 들어주기라도 한 건지 조금씩 발걸음을 움직이는 도경수가 보였다. 그 작은 발걸음이 내게는 그렇게나 웅장한 떨림으로 들려올 수가 없었다.
“미친…….”
저만 들리게 욕을 토해내는 변백현에 나도 따라 자욱한 한숨을 내뱉었다. 온통 속이 까만 무언가로 물들여지는 것 같았다. 가빠지는 호흡에 어지러움까지 더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넘기기 힘든 마른 침을 간신히 삼켜버렸다. 점차 나를 지나치는 경수를 보지 못 하고 고개부터 숙이고 마는 안타까운 상황이 일어났다. 놈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렇다간 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으니까. 내 손을 잡고 있던 변백현의 힘이 풀리는 것으로 보아 경수가 완전히 내 곁을 지나갔음에 확신했다. 그제야 멀쩡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멍하니 멀어지는 경수를 기다리며 어떠한 행동 하나 못 한 바보 같은 내가 그렇게나 싫었다. 이렇게 피하기만 할 거면 뭐 하러 마지막 자존심까지 굽히고 연애코치를 부탁했던 거고, 처음의 그 패기는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으니까.
“○○○.”
“…….”
“너 아까 아침에 준 그거…….”
세상이 멈췄다. 고로 경수와 내 사이의 공간도 멈춘 게 분명했다. 내 옆에서 들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담백하고 깨끗한 음성이었다. 멍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당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장난스럽던 그 상황을 나만 기억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애틋해진 가슴이 응어리졌다. 저도 모르게 눈동자가 요동쳤고, 내 심장 안에 파도도 그랬다.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물고 경수의 말을 기다렸다. 이건 좀 생각보다 빠른 전개였다. 경수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준다는 것.
“……아, 아니다.”
“…….”
“그나저나 변백현 넌,”
“…….”
“계속 그딴 식으로 사네.”
도망치듯이 우리 곁을 떠나버리는 그늘진 뒷모습에 그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흔한 인사조차도. 흐린 안개가 다시금 경수와 내 거리 사이를 휘감았다. 그럴수록 더 희미해지는 건 내 짝사랑이었다. 옆에서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던 변백현 또한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사실 여기서 중요한 건 경수가 변백현에게 한 이유모를 말이지만, 지금 그게 머릿속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모든 건 탁했다. 내 시야도, 경수도, 날씨도. 내 가망 없는 짝사랑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