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와 강빈 그리고 선교사 예수회 소속 독일인 아담 샬 의 만남
분명 조선에도 기회가 있었다. 병자호란으로 청에 굴복한 인조는 자식과 며느리와 관료와 백성들을 청국으로 보내야 하였다. 장장 8년의 세월 동안 소현 세자와 강 빈은 청나라 수도 신양과 명나라 멸망 후 북경 심양 관에서
머물며 나날이 새롭게 발전하는 청나라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 이면에는 중국에 들어와 있던 많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특히 소현 세자와 친교를 나누던 독일태생이며 예수회 소속 선교사였던 아담 샬은 소현 세자와 각별한 관계였다.
소현 세자는 1612년 인조의 장남으로 사가에서 태어났으나 인조반정으로 서인들과 함께 왕권과 정권을 잡았다. 인조반정이 그를 세자로 책봉시킨 것이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세자는 전주로 내려가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병자호란을 겪은 후 인조와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삼전 도에 내려가 굴욕적인 항복 후 불모가 되어 강 빈과 함께 청의 수도 신양으로 끌려가 살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북경으로 옮겨 심양 관에서 살았다. 함께 불모가 된 봉림 대군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청나라에 대하여 복수의 칼을 갈면서 세월을 보낸 봉림 대군 과는 다르게 청나라의 정세를 면밀히 살피고 선교사들과 교류를 맺으며 서양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청나라가 조선과 전쟁을 끝내고 회군할 때 청나라 왕을 배웅하기 위하여 벽제 부근까지 나갔다. 그리고 불모로 잡혀가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 절개를 지켜야 한다. 한나라 무제 때 흉노에게 포로가 된 소무를 닮아야 한다. 소무는 19년 동안 흉노족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복하지 않은 절개의 표본적인 인물이다.
소현 세자는 중국으로 끌려간 후 신양을 거쳐 북경에 심양 관을 짓고 수행원들과 함께 기거를 한다. 청은 소현 세자를 통해 조선국과 관계의 업무를 처리하였다. 조선의 외교관 역할을 한 것이다.
소현 세자가 끌려가 북경에 들어간 시기는 1644년 9월이었다. 이 때 서양 선교사들이 주관하던 천문대를 방문할 기회를 갖은 후 역법을 알게 되었고 이후 청나라 이전 국가였던 명나라 황제의 각별한 은총을 입어 북경에 천주당을 짓고 동안 문에 살던 독일출신 아담샬(Schal J.A) 선교사가 있었는데 소현 세자 거처와 지척에 있어 사귀게 된 것이다. 아담 샬 입장에서는 조선국의 차기 왕이란 이야기는 선교의 가치로 소현 세자의 입장에선 국가에 새로운 문명도입으로 약소국의 설음을 벗어나려는 의도에서의 만남이었다. 당시 천주교의 대학자였으며 북경의 남당 신부 황비묵은 정교봉포((正敎奉褒)에 이렇게 적고 있다. – 순치원년 1644년 조선 왕의 세자 소현은 북경에 불모로 잡혀와 있으면서 남당에 찾아와 아담샬을 만나 천문학, 수학, 의학 등에 대하여 묻고 배워갔다. 이에 아담샬도 소현 세자가 거처하는 곳을 자주 찾아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두 사람은 깊은 공감대가 점점 깊어졌다. 아담샬은 천주교가 바른 길러 나가는 길이라 강조하고 소현 세자도 아담샬의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고 진지하게 묻기도 하였다. 소현 세자가 환국할 때 아담샬은 자신이 지은 천문, 신학, 성교정도, 마데오 릿지의 천주실의 등등과 여지구, 한벌과 천주상을 보냈다. 소현 세자는 이것을 받은 후 친히 글을 써서 고마움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담샬이란 인물은 명대 말 승정역서 편찬한 사람이고 서양역법으로 추산한 신력 편수에 종사하고 있었다. 당시 두 사람의 만남은 조선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조선인으로서 최초 서양의 역법과 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천주교리를 접하게 된 것이다. 일본인 야마구치 마사유키가 쓴 조선선교사에서 소현 세자는 아담샬이 보내준 선물에 대한 심정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어제 당신이 보내 준 천주상, 천구의, 양학서, 천문서 등등을 반갑게 받았으며 감사 드립니다.
나는 우선 두 세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정신을 수양하고 인격을 세우는데 관한 유익하고 높고 먼 교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로지 어둡고 깨지 못하여 이런 것을 모르고 있었으나 이 교리들은 우리들에게 지식의 빛이 될 것입니다. 천주상을 벽에 걸어 놓고 보니 보는 사람의 마음에 평화를 주고 이 세상의 더러운 티끌들을 씻어 내리는 것 같아 여러 가지 느낌이 크게 다가옵니다. 주신 책들이 이제까지 이 세상에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이런 것을 받으니 꿈만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수백 년 동안 하늘의 움직임과 맞지 않아 헛된 것이라 느낍니다. 이제 참으로 보기 힘든 물건을 얻었으니 이 보다 무엇이 반갑겠습니까. 내가 우리나라에 들어 가면 궁중에서 사용토록 하고 책을 많이 박아 글을 보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겠습니다. 그러하면 사막과 같이 메마른 우리나라가 학문의 전당으로 바뀔 것입니다. 사랑과 은총을 받은 우리 백성은 서양 사람을 통하여 배운 모든 것들을 감사할 것입니다. 당신과 나는 다 같이 외국인으로서 큰 바다를 건너 낯선 땅에 와서 서로 만나 즐겁게 사귐이 피를 나눈 한 가족 같으니 천리의 깊고 깊음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마음이란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서로 알고 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서양서적과 천주상을 우리나라로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지만 우리나라에는 아직 천주교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릇된 나쁜 종교라는 천주의 높고 귀중함을 더럽힐까 두렵습니다. 그리하여 천주상을 당신께 돌려 드리고 실수함이 없도록 하려고 합니다. 나도 당신에게 대한 감사의 뜻으로 우리나라의 귀중한 물건을 보냅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 준 은혜에 비하면은 만분의 일도 되지 않음을 말씀 드립니다.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국제적 감각과 영특한 면모가 있었던 소현 세자가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조의 대를 이어 왕에 올랐다면 일본보다 개화가 앞섰을 것이고 천주교 또한 순탄하게 조선과 접목되어 갔을 것이다. 이재(利財)에 남달리 밝았고 활달한 성품을 지닌 강 빈은 남편 소현 세자를 따라 불모의 몸이었지만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척하여 포로와 노예신분으로 전락한 백성들을 구해 내고 땅을 개간하여 공동체를 구성한다. 또한 청나라 각료들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도록 소현 세자를 돕는다. 그러나 소현 세자와 강 빈은 귀국하면서 환대커녕 경계대상 끝에 둘 다 죽음을 맞이한다. 남편을 잃은 강 빈은 끝내 인조를 독살하려 하였다는 모함으로 시아버지가 내린 사약을 마시고 죽고 세 자녀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지만 그들 역시 막내만 남기고 제주도에서 죽는다. 막내 역시 효종 때 역모란 이유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결국 소현 세자와 강 빈의 한 가정의 비극은 역사의 비극이 된 것이다. 부왕의 올바른 처신으로 부자지간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 개화경쟁에서 지지 않아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슬픈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천주교인으로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하늘이 주시려 하였던 그 기회를 저버린 인조에 대한 징벌이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통과 슬픔의 식민의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 아닐까? 믿는 자로서 그런 생각을 해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