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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
조선왕조 오백년, 그 흥망성쇠의 역사를 낱낱이 읽는다.조선의 역사는 결코 과거가 아닌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 속에이어지고 있는 현재의 역사이다.조선왕조의 흐름과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오늘과
미래를 읽을 수 있다.
지은이 소개
지은이 박영규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부산 동인고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일어와 철학을 전공했다. 도서출판 해오름 기획실장, 해동불교신문사 편집부장 등을 거쳐 현재는 창작, 집필 전문기획 '책과 사람들' 대표로 있다. 저서에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선담집인 '달마에서 경허까지'와 서양철학 이야기집 '철학이 뭐꼬'가 있다.
머리말
조선왕조실록을 한 권으로 정리하며, 어느 주간신문사에서 편집을 하던 시절에 나는 시간만 나면 백과사전들을 책상에 가득 올려놓고 역사, 철학, 문학, 생물학, 고고학, 천문학, 의학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평소에 궁금하게 여기던 내용들을 찾아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 제9대 왕 성종의
아버지 덕종(의경세자)에 대한 기록을 찾다가 내친 김에 조선의 27왕 전부에 관한 기록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나는 약 1개월에 걸쳐 조선 종묘사에 관련된 내용들을 집중적으로 찾아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점차 백과사전에 기록된 내용들이 너무 부실할 뿐만 아니라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을 한 권의 책으로 간추려 묶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내가 굳이 이것을 한 권의 책으로 묶으려고 한 것은 우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조선사와 왕들에 대한 지식이 잘못되어 있거나 편협하다는 것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해방이 된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조선왕조사 조차 제대로 책으로 묶어 놓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간추려 쓰기로 결심한 후 나는 줄곧 역사책에 매달렸다. 그리고 수집한 자료들을 서툴게나마 한 권의 책으로 묶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섰을 때 신문사에 사직서를 냈다. 직장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그 방대한 분량의 기록들을 일일이 확인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정리 작업을 진행해가면서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선 사회에 대해 매우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조선은 우리가 쉽게 단정하듯이 지극히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한 그런 사회가 아니라 대단한 정열과 무게가 내재되어 있는 깊이 있는 세계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나의 생각들을 독자들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독자들이 언젠가는 나와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자그마한 바람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조선 사회와 왕조를 극구 찬양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 세계 속에 새로운 어떤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우리는 미처 그 점을 발견하기도 전에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과 그 이후 강제된 서구 문명으로 인해 너무나 쉽게 그 세계를 놓쳐버렸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아무튼 이 책을 통해 조선 사회의 새로운 일면이 독자들에 의해 발견될 수 있기를 바란다. 병자년 벽두에 저자 박영규
제1대 태조
● 본명: 이성계(건국, 즉위 이후 이단으로 개명)
● 출생 - 사망: 1335년(충숙왕 복위 4) 10월 11일 ~ 1408년(태종 8) 5월 24일
● 재위기간: 1392년 7월~1398년 9월(6년 2개월)
● 주요 업적: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가 기틀 마련,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 경복궁 건설, 나라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으로 변경, 명나라 홍무제의 트집에 대항해 요동 정벌 추진(실패)
[제1대 태조실록]
[1. 조선 개국 이전의 이성계]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당시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지금의 간도지역)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이안사의아들 행리, 손자 춘이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으며, 춘의 아들 자춘도 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로 있었다. 그러나 이자춘은 원이 고려 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점차 원에 대해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당시 원나라는 원주민과 이주민의 대우를 달리하기 위해서 차별호적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원의 이와 같은 이주민 차별 정책은 이주민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이자춘 등의 고려인 관리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이자춘은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하게 된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한족이 주원장을 중심으로 세력을 일으켜 명나라를 세우고, 원은 명에 의해 중원에서 밀려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원의 힘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실시하여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와 긴밀한 관계에있 던 기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이를 위해서는 동북면 유민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자춘은 공민왕의 이러한 의도를 간파하고 1355년 공민왕을 만나 고려가쌍성총관부를 치면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한다. 그 이듬해에 이자춘은 아들 성계와 함께 고려가 실로 99년만에 옛 땅을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자춘은 이때의 공적으로 대중대부사복경이 되어 개경으로 오게 된다. 하지만 1년 뒤인1356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으로 되돌아간다. 이때 고려의 조신들은 그가 동북면으로 돌아가면 토착 기반을 이용하여 고려를 배반할 것이라고 했지만, 공민왕은 그가 아니면 동북면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공민왕의 판단대로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에 병사하고, 그의 차남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이성계의 형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 물려 죽고 없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태조 4년)에 이안사는 목왕에, 행리는 익왕에, 춘은 도왕에 추존되었고 이자춘은 환왕에 추존되었다. 그리고 태종 시대에 이르러 선조들이 목조, 익조, 도조에 추존 될 때 이자춘은 다시 환조로 추존되었다. 이자춘의 능은 정릉으로, 함흥 동쪽의 귀주동에 있다.
이자춘의 아들 성계는 1335년 두만강변의 화령부(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가 성년이 될 무렵인 14세기 중반의 중원은 명이 일어나 원을 위협하고 있었고, 만주 지역에서는 여진족이 원의 세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쪽에서는 왜구들의 노략질이 끊이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한반도와 중국의 양민들은 전쟁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따라서 문인보다는 무인이 대접을 받는 시기였다.
이성계는 그러한 시기에 걸맞은 인물이었다. 그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이미 동북면 지역에서 뛰어난 궁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고려의 옛 땅이자 원의 점령지인 쌍성 지역에서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가 이자춘의 도움으로 쌍성에 있던 원의 총관부를 함락시킨 후에는 고려 변방을 지키는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1360년 고려의 관리가 된 지 4년 만에 이자춘이 병으로 죽자 이성계는 사병을 육성하여 동북면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이듬해 10월에 독로강의 만호인 박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그는 사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입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1362년에 원의 나하추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오자 고려는 비로소 이성계에게 동북면병마사 벼슬을 제수하여 나하추 부대에 응전케 한다. 이로써 이성계는 27세의 나이에 문무를 겸비한 고려의 주목받는 관리로서 역사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성계의 활약상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이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그는 고려 조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성계는 쌍성총관부를 재탈환하기 위해 침입한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키면서 장수로서의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쌍성총관부를 빼앗긴 원은 여진족 장수 나하추로 하여금 고려를 칠 것을 요청했고, 나하추는 1362년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인 삼살(북청)과 홀면(홍원) 일대를 침범하였다. 이에 고려는 동북면도지휘사 정휘를 내세워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자 고려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와 대적케 했다.
2월에 남침을 감행한 나하추 부대가 고려 땅을 공략한 지 이미 5개월이 지나, 때는 여름의 막바지를 향해 치달리던 7월이 되었다. 나하추의 주력 부대는 홍원 달단동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동안 승전을 거듭한 결과로 군사의 수가 두 배로 불어났고 사기도 한층 고조되어 있던 터였다. 그래서인지 나하추는 휘하 지휘관에게 군사 1천을 내주면서 이성계 부대와 맞서게 하였다. 나하추는 계속되는 승전에 도취되어 이성계 부대를 얕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나하추 부대의 대패였다.
나하추의 선봉 부대는 이성계 부대에 쫓기다가 거의 섬멸되다시피 했고, 이에 격분한 나하추는 진영을 덕산동으로 전진 배치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할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먼저 야음을 틈타 나하추의 주력 부대를 기습했다. 이 기습으로 나하추는 다시 달단동으로 후퇴했지만 이성계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맹공을 가해 잔병들을 거의 섬멸해버렸다. 이 전투로 나하추는 수하 몇 명과 함께 겨우 목숨만을 건져 심양으로 되돌아갔으며, 그 이후 세력이 약화되어 명의 주원장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성계의 활약은 비단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성계는 나하추를 격퇴시킨 이후에도 약 30년 가까이 전장을 누볐으며, 그때마다 승리를 거둬 고려 최고의 장수로 맹위를 떨쳤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의 순종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새 고려왕으로 지명하여 최유, 김용 등 덕흥군 일파에게 군사 1만을 내주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공민왕은 일단 사신을 보내어 순종의 군사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기철의 누이인 기황후로 인해 실패하고, 따라서 고려 왕실과 덕흥군 부대의 무력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첫 전투는 의주에서 벌어졌다. 의주성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안우경이었는데, 그는 처음에는 최유 부대의 공략을 잘 막아냈지만 지원 부족으로 패전하고 안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주가 함락되자 고려는 최영을 급파하여 안주를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정예 군사 1천을 내주어 최영과 합동 작전을 펴게 하여 덕흥군의 선발 부대를 대파했다.
최영과 이성계는 다시 덕흥군의 주력 부대를 공략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이성계가 적장을 활로 쏴 말에서 떨어뜨림으로써 중앙 돌파에 성공한 것이 승전의 기반으로 작용했다. 이성계의 중앙 돌파는 덕흥군 부대의 전열을 뒤흔들어놓았고 최영은 좌우로 흩어진 적군을 공략했다. 고려의 이와 같은 전술에 말려든 덕흥군 부대는 거의 섬멸 당하고 덕흥군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원으로 달아났다.
1369년과 1370년에 걸쳐 이성계는 공민왕의 명을 받아 만주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동녕부를 공격하였으며, 1376년(우왕 2년)에는 왜구에 의해 충청도 공주가 함락되고 개경이 위협을 받자 군사를 남으로 몰아 왜구 토벌에 나섰다. 일본은 14세기 당시 호죠 정권이 몰락하고 사무라이 군벌이 들어서면서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내분으로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본의 영주들은 공공연히 인접 국가와 상인들에 대해 침탈을 자행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왜구라고 했다.
이성계는 1377년을 전후하여 고려에 창궐하고 있던 왜구를 경상도, 전라고 일대와 지리산에서 크게 물리쳤으며, 1380년에는 소년 장수 아기바투가 이끄는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하였다. 이 전투를 흔히 황산대첩이라고 부르는데, 최무선이 화약과 화통을 응용한 포를 등장시킨 것이 이때이다.
1382년 여진의 호바투가 동북면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자 이성계는 동북면 지휘사가 되어 다시 북으로 올라가 이들을 격퇴했으며, 1385년에는 함주로 쳐들어온 왜구를 섬멸시켰다. 이성계는 승전할 때마다 위치가 올라갔다. 1362년 동북면병마사가 된 이후 같은 해에 밀직부사에 제수되고, 1382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으며, 1388년에는 수상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2. 역성혁명을 통한 조선의 개국]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 1388년 이성계는 명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말머리를 돌려 개경을 공격했다. 개경을 함락시킨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명령한 최영을 축출하고 우왕을 폐위시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기로 한 것은 명이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는 데다 철령 이북 땅을 차지하겠다고 고려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명은 철령 이북 땅이 원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명나라 역시 원과 마찬가지로 고려를 속국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고려 정부는 크게 반발하였고, 급기야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때가 1388년 2월이었다.
우왕은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우왕은 8도에서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세자와 왕족들을 한양산성으로 보내고 우현보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게 한 뒤, 최영과 함께 서해도로 가 요동정벌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 해 4월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그리고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고는 드디어 요동 정벌을 감행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위화도에 당도한 것은 5월이었다. 그들은 위화도에서전열을 가다듬고 강을 건너 요동성을 공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고려 대군이 강을 건널 수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장마가 시작되어 압록강 물이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성계는 요동성을 공격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우왕에게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으로,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以小逆大 一不可 )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夏月發兵 二不可)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時方署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四不可)
하지만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논의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한다.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낸다. 그리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사학자들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두고 엇갈린 주장을 펴고 있다. 위화도 회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계획된 쿠데타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요동성을 공략할 수도 안 할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단행한 자구책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이성계의사불가론 중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 사대주의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사가들도 있고, 한편으로는 명나라를 달래기 위한 실리주의적 선택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보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정권 장악을 노린 쿠데타였다. 그러나경 쟁 관계에 있던 조민수와 함께 회군을 단행한 것을 볼 때 계획된 행동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고 오히려 상황 판단에 따른 실리적인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왕조의 최후
우왕을 폐하고 최영을 제거한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각 좌시중과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때부터 명의 연호인 홍무를 사용케 하고 의복도 원의호복을 금하고 명의 것을 입게 했다.하지만 조민수와 이성계는 차기 왕을 옹립하는 문제에서 이견을 보였다. 조민수가 우왕의아들 창을 내세우는 데 반해 이성계는 우왕과 창이 신돈의 자손이기 때문에 왕씨 일족 중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의견이 양립되자 조민수는 목은 이색에게 조언을 구해공민왕의 정비 안씨에게 국새를 맡겼고, 안씨는 우왕의 아들 창으로 하여금 왕위를 물려 받게한다. 그가 곧 창왕으로 겨우 아홉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니 이때가 1388년 6월이었다.그 러나 창왕은 이듬해 11월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당하고 만다. 표면적인 이유는 창왕이 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함께 이른바 폐가입진,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을 등극시킨다. 그가 바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다.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폐위된 우와 창을 죽인다. 또한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전리로 방출된다. 이로써 이성계 일파는 고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창왕이 폐출 되었을 때 조정 중신들 중에는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자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들의 권고를 사양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그런데 마지막 정적이던 조민수가 실각하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가속화되었고, 마침내 3년 뒤인 1392년 7월,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왕으로 등극하고 전왕을 공양군으로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이로써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원주, 간성,삼척 등을 떠돌다가 2년 후인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을 내친 후에 왕씨 일가를 모조리 멸족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전국에 방문을 붙여 왕씨들을 한 곳에 모아 수장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방문의 내용은 왕씨들에게 섬을 하나 내줄 테니 강화 해안에 모두 모이라는 것이었는데, 기왕에도 불안에 떨고 있던 왕씨들은 이러한 약속을 믿고 강화도행 배를 탔다가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이때 이성계 일파의 모략임을 간파한 일부 왕씨들은 배에 오르지 않았으며, 그들은 산 속에 숨어 살면서 대개 자신들의 성씨를 全(온전할 전)씨, 옥(玉)씨, 田(밭 전)씨, 용(用)씨 등으로 속여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태조실록'에는 왕씨의 후손들은 아버지 성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어머니 성을 따르도록 한 기록이 있어, 이성계가 정책적으로 왕씨들을 멸족하려 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3. 조선 태조로서의 이성계](1335-1408, 재위 기간 1392년 7월-1398년 9월, 6년 2개월)
1392년 4월 공양왕의 스승이자 수문하시중으로 있던 정몽주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의 사주로 살해되자, 이성계는 마침내 그 해 7월에 공양왕을 내쫓고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즉위 초에는 고려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의장과 법제도 등도 고려의 것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이성계는 국호를 개정한 후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무학과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로운 땅을 물색토록 한 뒤에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수도로 삼는다.1393년 9월에 시작된 궁궐 건립 공사는 1396년 9월까지 계속되었으며, 미처 궁궐이 완성되지 않은 1394년 10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이성계는 개국 후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억불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성계는 새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왕자들 사이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 노년에는 고통스런 날들을 보내게 된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 강씨의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 대해 첫째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다섯째 아들 방원은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일곱째 아들 방번을 함께 살해했다. 139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두고 흔히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와병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둘째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그 2년 뒤인 1400년, 방원이 동복형인 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주(함흥)에 머물렀다. 이때 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방원에 대한 태조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성계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서울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 덕안전을 새로 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로 일기를 마쳤다. 태조의 능은 건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4. 태조 이성계의 가족들]
태조 이성계는 74세를 향수하는 동안 3명의 아내에게서 13명의 자식을 얻었는데, 첫째부인신의왕후 한씨에게서 장남 방우를 비롯한 6형제와 두 딸을, 신덕왕후 강씨에게서 방번, 방석형제와 딸 하나를, 그리고 다른 후궁에게서 두 딸을 두었다.
표: 제1대 태조 가계도
조선의 제1대 왕인 태조는, 1335년에 태어나 1408년에 세상을 떴다. 재위 기간은 1392년7월부터 1398년 9월까지로 6년 2개월간이다. 아래에 태조의 가계도를 약술한다. 태조의 고조부 목조(안사)는 효공왕후 사이에서 증조부 익조(행리)를 낳았고, 증조부 익조는 정숙왕후 사이에서 조부 도조(춘)를 낳았다. 조부는 경순왕후 사이에서 아버지 환조(자춘)를낳았는데, 태조는 환조와 의혜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조선을 건국하고 제1대 왕이 되었다.태조는 부인 3명에게서 8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신의왕후 한씨에게서 진안대군(방우), 조선의 제2대 왕인 정종(영안대군, 방과),익안대군(방의), 회안대군(방간), 제3대 왕인 태종(정안대군, 방원), 덕안대군(방연), 경신공주,경선공주 등 6남 2녀를 두었으며, 신덕왕후 강씨에게서는 무안대군(방번), 의안대군(방석),경순공주 등 2남 1녀를 두었다. 그리고 다른 후궁에게서 의령옹주, 숙신옹주 등 2녀를 두었다.
신의왕후 한씨
태조의 첫째부인이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본관은 안변이며 증영문하부사 한경의 딸이다. 그녀는 이성계가 아직 벼슬을 하지 못하던 때에 영흥으로 시집와서,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에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씨 소생으로는 방우, 방과(정종),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 등의 6남과 경신, 경선 등 2녀가 있었다.조선이 개국된 다음날 한씨의 시호는 절비로, 능호는 제릉으로 추존되었고, 1398년 정종이 즉위한 후에는 신의왕후로 추존 되었다. 신의왕후의 제릉은 현재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있다. 능을 개성에 둔 것은 그녀가 조선 개국 이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신덕왕후 강씨
태조의 둘째 부인이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본관은 곡성이며 판삼사사 강윤성의 딸이다. 그녀는 신의왕후 한씨와는 달리 권문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조의 집권 거사에도 참여했을 뿐 아니라 조선 개국 이후에도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태조는 그녀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기까지 한다. 강씨 소생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에게 살해당한 방번, 방석 형제와 경순공주가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뒤에 강씨는 현비로 책봉되었으며, 1396년 사망 후에 신호는 신덕왕후,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성계가 죽은 후에 태종은 몇 차례에 걸쳐 이장을 단행했으며, 그녀에 대한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서모에게 행하는 기신제(忌晨祭)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2백년 뒤인 현종 때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강씨는 다시 종묘에 배향되고 왕비의 기신제도 복구되었다.
송시열이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 이념을 강조하면서 강씨가 이성계에 의해 정비로 책봉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릉이 왕비의 능으로 조성된 점을 일깨웠던 까닭이다. 신덕왕후 강씨가 묻혀 있는 정릉은 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묘역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릉동 자리로 정해지게 되었다. 능이 정릉으로 이장된 것은 이성계가 죽은 후 태종 9년 때의 일이다. 태종이 강씨의 무덤을 여러 차례 이장한 것은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분풀이였다. 태종은 능을 옮긴 뒤에도 정자각을 헐고, 십이지신상 같은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드는 등 강씨에 대한 노골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그 때문에 정릉은 현종 때 복구 될 때까지 2백여 년 동안 주인 없는 무덤으로 버려져 있어야 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은 모두 8명으로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이 6명,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 2명이다. 이들 8명의 형제들은 조선 개국 이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여 노년의 이성계를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한씨 소생의 형제들이 단합하여 강씨 소생의 왕자들을 참살한 '제1차 왕자의 난'은 조선 개국의 역사를 피로 얼룩지게 만든 첫 번째 사건이었다. 아래에 이들 왕자들의 삶을 약술하여 그들이 조선에 끼친 영향을 되짚어 본다(8명의 형제 중 방과와 방원은 각각 정종과 태종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리고 덕안대군 방연에 대해서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으므로 나머지 5명에 대해서만 약술한다).
진안대군 방우(1354-1393)
방우는 1354년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장자로 태어났으며, 찬성사 지윤의 딸과 결혼했다. 일찍이 관직에 나가 예의판서를 역임하였다. 창왕 즉위년인 1388년에는 밀직부사로 밀직사강회백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어 창왕의 친조를 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환했다. 방우는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 8월에 진안군으로 책봉되고 함경도 고원의 전답을 녹전으로 받았다. 그러나 지병으로 이듬해 4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함에 따라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조선 제2대 왕은 둘째인 방과가 이어받게 된다.
익안대군 방의(?-1404)
방의는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이 개국되자 익안군에 봉해졌으며,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가담하여 방원을 보좌한 공로로 정사공신 1등이 되었다. 정종 즉위 이후 종친과 훈신들이 군사들을 나누어 관장했을 때, 그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1400년, 아우 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이를 개탄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간접적으로 방원을 지원하였다. 그는 태종이 즉위하자 1400년에 익안대군으로진봉되었으며, 1404년 병으로 죽었다. 방의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야심이 적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싸움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 것으로 전하고 있다.
회안대군 방간(1364-1421)
방간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판서찬성사 민선의 딸과 결혼했으며, 이후 2명의 아내를 더 두었다.그 는 조선이 개국되자 회안군에 봉해졌으며,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회안공이 되었다. 또한 정종이 즉위하자 풍해도 서북면의 병사를 관장했으며, 1400년 박포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원과 대립하였다. 방원의 군대에 패배해 생포된 이후로 죽을 때까지 유배지를 전전했다('제2차 왕자의 난'은 태종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는 왕권에 대한 야심이 대단했고, 성격도 괄괄한 편이었다. 그래서 박포에게서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자 앞뒤 가리지 않고 병사를 일으켜 개경으로 진군했다. 난을 일으켰음에도 방간은 태종과 세종의 배려로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58세를 일기로 홍주(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에서 죽었다.
무안대군 방번(1381-1398)
방번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으로 태조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귀의군 왕우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의 지원에 힘입어 어린 나이에 고려왕조로부터 고공좌랑의 직위를 제수받았으며, 조선 개국 후에는 무안군에 책봉되어 희흥친군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393년에는13세의 나이로 좌군절제사로 제수되었으며, 한때 태조와 강비의 추천으로 세자로 내정되기도 했으나 조준, 정도전 등이 '성격이 광망하고 경솔하다'고 반대해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1398년 방원이 주동이 된 '제1차 왕자의 난' 때 방석과 함께 피살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훗날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이 그의 후사로 정해졌으나 광평대군이 요절함에 따라 방번의 후사는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의안대군 방석(1382-1398)
방석은 방번의 연년생 아우로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다. 현빈 유씨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폐출되자 춘추관대제학 심효생의 딸과 재혼했다. 조선 개국 원년에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났을 때 배극렴 등이 정안군 방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으나, 이때 왕비 한씨는 이미 죽고 없었기에 계비 강씨의 의향에 따라 태조는 무안군 방번을 세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 개국 공신들의 반대로 방번의 세자 책봉은 무산되었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불과 11세밖에 안 된 나이로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된 방석은 어머니 강씨의 보살핌과 정도전,남은 등 개국 공신들의 지원에 힘입어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강씨가 죽고 태조마저 병석에 눕게 되자 그의 배후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난을 일으켰고, 이 난의 성공으로 세력을 잡은 방원은 방석을 유배시키고 이어서 방번과 함께 살해했다. 이때 방석의 나이 17세였다. 후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방석의 후사를 이었으나, 금성대군이 세조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고 32세의 나이에 처형되자 후사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5.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게 된 배경]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직후 국정에 대한 강령 17개조를 발표하는 등 건국 후의 제반 조처를 강구하였는데 이 중에 가장 시급한 현안이 국호를 개정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성계는 중추원사 조림을 명에 파견하여 신정권의 수립을 알리는 한편 국호를 개정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에 명태조 주원장은 신정권의 수립을 승인하면서 국호 개정에 대해서도 신속하게 보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명으로부터 국호 개정이 승인되자 이성계는 원로들과 백관을 한자리에 모아 국호를 의논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 '조선'과 '화령'이라는 두 명칭이 정해졌다. 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등 역사적인 맥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화령은 이성계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채택된 듯하다. 이 화령이라는 지명은 원래 화주목이었는데 공민왕 시대에 화령부로 개칭되었다가,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한 1393년에는 이성계의 외조부 출생지인 영흥진의이름을 따서 '영원히 흥한다.'는 뜻인 영흥으로 다시 바뀌었다.
이처럼 '화령'과 '조선'이라는 두 이름이 결정되자 이성계는 1392년 11월 예문관학사한상질을 다시 명나라에 파견하여 조선과 화령 둘 중에서 하나를 국호로 택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 주문사로 중국에 파견된 한상질은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려 공신이 된 한명회의 조부였다. 그는 국호 개정의 논의가 있자 주문사를 자청하여 1392년 7월 명나라로 떠나 이듬해 2월에 '조선'이라는 국호를 결정받고 돌아왔다.
조선이라는 국호의 결정과 관련하여 조선과 명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조선 측에서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동시에 계승한다는 의도였지만, 명은 기자조선을 의식하고 조선이라는 국호에 쾌히 동의했던 것이다. 즉 '논어'에 등장하는 은나라의 현인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하여 백성을 교화시켰으며, 이에 주나라가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하였다는 '한서지리지'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명의 주원장은 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제후국임을 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이라는 국호는 민족주의적인 역사관과 사대주의적인 가치관이 혼재되어 있는 이름이었다.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하여 건국한 조선왕조는 왕도 정치의 구현과 중국과의 사대관계 유지가 이상적인 정치와 외교로 인식했다. 그러므로 기자와 같은 중국의 현인이 조선왕조와 국호가 같았던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한 일을 명예스러운 일이었다고 여겨 기자동래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흔적은 고려시대의 기록에서도 나타나는데,성리학이 도입된 이후인 고려 숙종 때 평양에 세워진 기자릉에 대한 제사가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되었던 점을 예로 들 수 있겠다.그러나 기자조선에 대한 이 같은 인식과는 달리, 근대 이후의 역사 연구에서는 기자와 기자조선을 별개의 존재로 다루고 있다. 기자가 은나라 말기의 현인으로서 실재 인물이었다 하더라도, 이 기자와 결합된 이른바 기자조선의 실체는 새롭게 규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6. 새로운 도읍지 한양]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하자 무학과 정도전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성을 옮길 계획을 세운다. 개성은 이미 땅의 기운이 다했을 뿐 아니라 조선이 새롭게 건국되었기에 민심을 일신하기 위해서는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권중화를 시켜 도읍지를 물색케 하고, 일차적으로 계룡산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여 왕성 건립을 시작했다. 그러나 계룡산은 지역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하륜의 주장에 따라 도읍지는 다시 한양으로 변경되었다.
한양은 백제 초기의 근거지로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에는 한산주로 불리었고, 이후에는 9주의 하나인 한주로 불리다가 경덕왕 14년인 755년에 한양군이 설치되면서 한양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왕이 서경인 평양과 남경인 한양에 궁궐을 짓고 돌아가면서 머무르면 국운이 크게 융성한다는 지론에 따라 숙종 5년인 1101년에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한양은 왕성지로서의 기운이 강하다는 이유 때문에 한때 고려왕조의 경계를 받기도 했다. 일찍이 도참사상의 대가로 잘 알려진 신라의 고승 도선은"한양은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두 모이는 곳이기에 반드시 왕성이 들어설 것이며, 왕성의주인은 이씨가 될 것"이라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고려왕조는 이를 염려하여 고려 중엽에 윤관으로 하여금 북악산 남쪽에 오얏나무를 심었다가 그것이 무성하게 자라자 베어버리게 했다. 이는 곧 오얏의 성한 기운을 없애 이씨가 왕조를 세우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의미였다.
조선이 도선의 이런 주장을 무시할 리는 없었다. 조선 조정은 정도전과 무학으로 하여금 한양의 형세를 살피게 했고, 마침내 새 왕도로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한양을 도읍지로 결정하긴 했지만 궁궐터는 쉽게 확정하지 못했다. 당시 최고의 풍수학자들인 무학, 정도전, 하륜 등이 각각 다른 곳을 지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룡산 천도를 반대했던 하륜은 모악산(지금의 연희동 일대) 아래에 도성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모악은 그 국면이 작고 형세가 왕궁이 들어서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일찌감치 논의에서 제외되었고,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주장이 팽팽히 대립하게 되었다.무학은 인왕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용호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만, 정도전은 대왕은 남쪽을 향하는 법이지 동향을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면서 북악산아래쪽을 극구 주장했다. 이에 무학은 화산인 관악이 정면으로 바라 보이는 곳에 궁을 앉히면 관악산의 화기가 뻗쳐 우환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관악의 화기는 가운데 있는 한강이 막아낼 수 있다며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조선 조정은 정도전의 의견을 채택하여 북악산 아래에 왕성을 짓고 궁궐을 남쪽으로 향하게 했으며,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불을 잡아먹는다는 전설의 동물 해태의 석상을 세웠다.
조선이 천도를 단행한 것은 1394년 10월이었다. 이후 조선은 한때 왕자의 난 등으로 인하여 개경으로 잠시 천도 하였던 것을 제외하고는 5백여 년 동안 한양을 왕성으로 삼고 왕조를 이어나갔다.
[7. 조선 개국을 이끈 사람들]
새 왕조를 꿈꾸는 혁명가들
조선을 개국한 사람들은 한마디로 고려 조정의 주변 세력들이었다. 역성혁명론을 개국이념으로 앞세운 이들은 이성계, 정도전, 무학대사 세 사람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이는 고려의 멸망 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 과정은 공민왕조 때 벌어진 친원파와 반원파의 대립에서 시작된다. 친원파의 대표격인 기씨 가문과 반원파의 대표격인 공민왕의 싸움은 원의 몰락으로 말미암아 공민왕의 승리로 끝난다.
이때 공민왕파에 속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이성계와 최영이었다. 하지만 이들 반원 세력은 다시 둘로 나뉘어졌다. 이성계는 근본적으로 변방 세력이었기에 언제나 전쟁터로 내몰렸으며, 최영은 중앙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 이는 곧 조정의 주변 세력과 고려왕조를 중심으로 한중앙 세력으로 구별될 수 있다. 이 주변 세력에는 이른바 성리학 이념에 바탕을 둔 개혁론자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중앙 세력에는 왕족을 비롯한 훈구 세력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양대 세력은 요동성 공략에 대한 이견으로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고, 이 때문에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중앙 세력의 수장인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한다. 하지만 이들 개혁론자들은 다시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왕조를 주창해야 한다는 역성혁명론자들과,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성리학 사상을 중심으로 고려를 개혁해야한다는 고려개혁론자들로 나뉘어진다.
역성혁명론의 대표격은 정도전이었고, 고려개혁론의 대표격은 정몽주였다. 이들은 모두 이색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대립은 결국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역성혁명론자들의 승리로 끝난다. 이렇게 해서 세운 나라가 곧 조선이었다. 조선의 태조로 등극한 이성계는 군권을 쥐고 있었지만 원래 새 왕조를 주창하겠다는 의지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품고 있었던 인물은 무학대사와 정도전이었다.이들은 출신이 미천했다. 이들은 출신 성분 탓에 능력과 상관없이 배척의 대상이 되었고,항상 주변 세력으로 머물러야 했다. 이들의 이런 상황은 변방 세력이란 이유로 끊임없이 전쟁터만을 전전해야 했던 이성계의 처지와 같았다. 그래서 이들은 힘은 있으나 주변세력으로만 머물러 있던 이성계를 찾아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것을 역설했다. 정도전은사상적인 부분에서, 무학은 이성계 개인의 인성과 천명론을 들먹이며 그를 부추겼고, 결국 이들의 설득과 논리가 이성계의 불만과 일치되면서 비로소 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역성혁명론을 실천한 풍운아 정도전
조선의 개국은 역성혁명론의 결정체였으며, 이러한 논리를 고려왕조에 대입한 사람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정도전은 이미 국운이 기울어가던 고려왕조를 폐하고 성리학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다. 정도전은 고려말에 개혁을 꿈꾸던 일군의 성리학자들이 명망있는 가문 출신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 정공미는 고을의 아전격인 호장으로 있었으며, 대대로 미미한 벼슬을 유지해오다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서 비로소 직제학이라는 중앙 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서얼 출신의 노비였다. 이런 출신배경은 정도전의 출세에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동문수학했던 벗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런 외톨박이 생활이 정도전으로 하여금역성혁명을 꿈꿀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했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보다 2년 늦은 1337년에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친구였던 덕으로 이색 문하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거기에서 정몽주, 이숭인 등과 교분을 가졌다. 24세가 되던 1360년(공민왕 9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는 진사시에 붙어 충주사록, 전교주부, 통례문지후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동갑내기인 정몽주 등과 함께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했으며, 1371년에는 태상박사에 임명되어 5년간 전선을 관장했다.
1375년(우왕 1년) 권신, 이인임, 경복흥 등의 친원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에 유배되었으며, 2년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로는 낙향하여 4년간 칩거하다가 한양으로 가서 삼각산 밑에 초가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주변 유학도들의 방해로 서재를 철거당하고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이렇게 유랑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1383년 이성계를 찾아간다. 이때 이성계는 나하추부대를 격퇴시킨 후 각종 전쟁에서 승전을 거듭하여 고려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고려 변방 동북면의 도지휘사를 맡고 있었다.
이성계와 인연을 맺은 정도전은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다. 이후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건의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하여 이성계가 조정을 장악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듬해정몽주 등과 함께 우왕의 아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좌명공신에 봉해지고,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다음해 봄 이성계가 사냥 중에 낙마하여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정몽주, 김진양 등의 탄핵을 받아 또 다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정몽주 등이 그를 탄핵한 주된 이유는 '가풍이 부정하고 가계가 불명확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몽주 일파의 정치적 공략에 위기감을 느낀 이방원은 급기야 정몽주를 살해하는 등의 극단적인 조치를 단행한다.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격살 당하자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풀려 나와 그해 7월에 조준, 남은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의 개국은 정도전의 역성혁명론의 실천임과 동시에 그가 염원하던 유교적 왕도 정치의실습장이었다. 정도전은 꿈에도 그리던 새 왕조 주창에 성공하자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해 매진했다. 우선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였고, '경제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추진해 병권 집중 운동을 펼쳐나간다. 이러한 하부 조직에 대한 개혁 작업뿐 아니라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해 왕이 나아갈 길을 밝혔으며,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숭유억불 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 같은 노력은 사병 혁파에 위기를 느낀 이방원의 무력 동원으로중도에서 좌절되고 만다. 정도전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자 이방원은 자신의 형제들과 힘을 합쳐 그를 제거해버렸던 것이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은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그를 살해하고 더불어 세자 방석도 죽여 버렸다. 이때가 1398년으로 정도전의 나이 62세였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조선의 개국에 자신의 공이 가장 컸음을 공공연하게 자랑하곤 했다. 그리고 한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한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나친 자부심이 결국 그의 죽음을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조선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역성혁명이론에 입각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을 개국하게 했고, 한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제를 확립하고, 민심을 수습키 위해 천도를 단행했다. 그뿐 아니라 조선의 개국 이념인 유교사상을 사회 속에 확립시켰고,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를 내세워 왕의 바른 길을 가르쳤다.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지나치자 요동 정벌론으로 맞서며 정치적 독립을 실행했고, 병권 집중화 운동으로 군권을 안정시켰다. 이렇듯 정치, 경제, 사상, 병법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조선 개국을 이끌었던 그가 후대에 이르러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된 것은태종의 권력 집착에서 비롯된 정권 찬탈을 미화시키려는 조선왕조의 의도적인 매도 때문일 것이다.
장수를 군왕으로 이끈 무학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새로운 왕국 건설의 당위성을 가르쳤다면, 무학은 이성계를 일개장수에서 군왕으로 이끈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정도전이 이성계를 통해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면, 무학은 이성계에게 군왕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처럼 조선을 개국하는 데에 정도전의 역할 못지않게 무학의 공헌도 지대했다. 무학은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박씨로 대몽항쟁의 명장 박서의5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법명은 자초이며 18세에 수선사(송광사)로 출가하였고 용문산의 혜명스님에게서 불법을 전수 받았다.
무학의 부모는 고려말 당시 해안 지방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에게 끌려가다 간신히 탈출하여 안면도에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던 하층민이었다. 때문에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전무해서 그의 행적은 출가 이후 일부만이 겨우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무학은 출가한 지 몇 년 후에 원으로 유학하였다. 그는 거기에서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스님을 만나 선불교를 배웠고, 또한 원에 유학 중이던 나옹 혜근스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무학은 원에서 돌아온 뒤 나옹스님을 찾았다. 그때 나옹은 공민왕의 왕사로 봉직하고 있었다. 나옹은 무학을 전법제자로 삼았지만 나옹의 제자들은 이를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옹은 문도들의 반대로 그에게 의발을 전수하지도 못하고 전법제자임을 알리는 시를 한 수 지어준다.
나옹의 제자들이 무학을 배척했던 것은 우선 무학이 천민 출신이라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보수적인 자신들의 성향 때문에 무학의 선진적인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학은 공양왕의 왕사 책봉도 받아들이지 않고 나옹의 곁을 떠나 오랫동안 토굴에서 수도생활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이성계를 만난 뒤부터 그의 삶은 달라진다. 무학은 새로운 왕국의 건설을 꿈꾸는혁 명가임과 동시에 새 왕조의 군왕이 될 이성계의 충실한 인도자가 된다. 사실 그가 이성계를 만난 경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 중기 휴정이 지은 '석왕사기'에 따르면 이성계가 그를 찾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무학은 천문지리와 음양도참설에 밝았고, 파자점과 해몽술에 능했던 모양이다. 그를 찾아온이성계가 문(문 문)자를 짚어 보이자 어느 쪽으로 보나 군(임금 군)이라고 하며 그가 장차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가 하면, 꿈에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다는 이성계의 말을 듣고 그것은 임금 왕자라고 하여 후에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이 기록의 사실 여부를 떠나 무학이 이성계에게 왕의 기상이 깃들어 있음을 각인시킨 것만은 분명했던 것 같다. 이후 이성계는 그를 스승으로 대했고, 조선 개국 이후에도 왕사로 받들었다.
무학의 혁명에 대한 염원은 부패 상황이 극에 달한 고려말의 불교계에 대한 비판에서출발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분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성계와 함께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세력들이 불교를 극구 배척하던 성리학자들이었음에도 무학이 정도전을 비롯한 성리학자들과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불교적인 입장보다는 개혁에 대한 염원이 더욱 간절하였기 때문이었다.무 학은 태조의 왕사로 있으면서, 조선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왕도를 정하는 일과 왕궁을 건축하는 일에 가담하는 등 노년의 거의 전부를 조선의 건설에 쏟았다. 하지만 조선의 중심 세력은 성리학자였고, 그것은 곧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치로 이어졌다. 무학은 이런 현실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소임이 끝났음을 알고 조용히 왕사직을 물러나 수행에만 전념하다가 1405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것이조선 개국의 주체이면서도 전혀 그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 무학의 선택이었다.
[8. '태조실록' 편찬 경위]
'태조실록'은 총 15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392년 7월부터 1398년 12월까지 6년 5개월12일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원명은 '태조강헌대왕실록'이며, 지금 남아 있는 강화도 정족산본은 필사본이고 태백산본은 인쇄본이다. 현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태조가 1398년 9월에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정종시대)과 태상왕(태종시대)을 지내다가1408년에 74세로 일기를 마치자, 태종은 이듬해 8월에 태조실록 편찬 작업을 시작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춘추관 기사관 송포 등은 조선왕조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이 처음인데다가 시대가 멀지않고 그 당시 활동하던 인물들이 대부분 살아 있다는 이유로 실록 편찬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태종은 찬수의 뜻을 굽히지 않고 사관들에게 태조 원년부터 정종 2년까지의 사초를 제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초 제출 기한은 서울 거주자 10월 15일, 지방 거주자 11월 1일까지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사초가 잘 들어오지 않자 태종은 사초를 제출하지 않은 자에 대해 자손을 금고하고 벌금 20냥을 징수하도록 하는 처벌 규정을 마련해 사초 제출을 독려했다. 그래서1410년 정월부터 하륜, 유관, 정이오, 변계량 등을 중심으로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1413년3월에 완성되었다.
하지만 '태조실록'은 완성된 후에도 곧바로 출판되지 못했다. 실록을 살펴본 조정 대신들이중복된 기사가 많다면서 수정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때 중신들이 지적한것은 제1차, 2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편찬 책임을 맡았던 춘추관 관료들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아 태조실록은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출판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1438년(세종 20년)에 변계량이 지은 헌릉(태종의 능)의 비문 가운데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에 대한 내용이 잘못 기술되었다는 주장이 대두하자, 세종은 이를 고치도록 명하였고, 아울러 '태조실록'과 '공정왕실록(정종실록)'을 함께 고치게 되었다. 그러나 실록 개수 작업이 이루어진 것은 4년 뒤인 1442년이었다. 이 작업이 완료되자 '태조실록'은 '공정왕실록', '태종실록'과 함께 고려시대의 실록을 보관해둔 충주사고에 봉안되었다. 하지만 충주사고 하나만으로 영구 보존이 어렵다는 지적이 있자 1445년까지 삼조실록 3부를 더 필사하여 전주사고와 성주사고에 각각 1부씩 봉안했다. 현재 서울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정족산본의 삼조 실록은 전주사고에 봉안한 것이다.
'태조실록'은 태조가 즉위한 1392년 7월 17일부터 1398년 12월말까지 약 6년 6개월간에 있었던 정치, 외교, 국방,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이 연월일순에 따라 편년체로 기술되어 있다. 태조는 '제1차 왕자의 난' 직후인 1398년 9월 5일에 정종에게 양위하였기에 그의 재위 기간은 실제로 이때까지지만 '태조실록'에는 그 해 말까지를 수록범위로 잡고 있다.
태조 시대의 세계 약사
태조 시대의 세계 정세를 살펴보면 우선 동아시아의 중국에서는 원이 밀려나고 명이 일어나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일본에서는 남북이 황통을 합일하고 황위는 북조 계통으로만 세습토록 했다.한편 유럽은 프랑스에서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파의 싸움이 벌어졌고, 독일에서는 한자동맹이 체결되었으며, 영국의 리차드 2세와 프랑스의 왕녀 이사벨라가 결혼함으로써 두나라는 화해 국면을 맞이했다.
조선왕조 제1대 태조
이성계의 등장과 그의 활약상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당시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지금의 간도지역)에 들어가 원의 지 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증손자 춘은 원이 고려 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점차 원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고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하게 된다.
해서 이자춘은 아들 성계와 함께 고려가 실로 99년 만에 옛 땅을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훗날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에 병사하고 그의 차남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이자춘의 아들 성계는 1335년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가 성년이 될 무렵인 14세기 중반의 한반도는 문인보다는 무인이 대접을 받는 시기였으며 1360년 고려의 관리가 된 지 4년 만에 이자춘이 병으로 죽자 이성계는 사병을 육성하여 동북면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듬해 10월에 독로강의 만호인 박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그는 사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수 도 탈환 작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입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1362년에 원의 나하추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 오자 고려는 비로소 이성계에게 동북면병마 사 벼슬을 제수하여 나하추 부대에 응전케 한다. 이로써 이성계는 27세의 나이에 문부를 겸비한 고려의 주목받는 관 리로서 역사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 시피 했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이성계는 승전할 때마다 위치가 올라갔으며 1362년 동북면병마사가 된 이후 같은 해에 밀직부사에 제수되고 1382년 에는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으며 1388년에는 수상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
1388년 2월,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리고 이 해 4월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그리고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고는 드디어 요동 정벌을 감행했다. 그러나 5월, 장마로 인해 물이 급격히 불어난 상황이 발생하자 이성계는 요동성을 공격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우왕에게 요동 정벌의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불가론'으로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 와 논의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한다.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낸다. 그리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고려의 몰락
우왕을 폐하고 최영을 제거한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 각 좌시중과 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때부터 명의 연호인 홍무를 사용케 하고 의복도 원의 호복을 금하고 명의 것을 입게 했다.
이후 이성계일파는 조민수가 세운 아홉살의 창을 폐하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세웠으며 또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폐위된 우와 창을 죽인다.
또한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전라로 방출되었으며 이로써 고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이성계는 3년 뒤인 1392년 7월,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왕으 로 등극하고 전왕을 공양군으로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실로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원주, 간성, 삼척 등을 떠돌다가 2년 후인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성계의 조선개국, 그 시작과 끝
처음 고려의 왕으로 등극한 이성계는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3월 명 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 그는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억불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 강씨의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물론 이 러한 결정에 대해 첫째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다섯 째아들 방원은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일곱째아들 방번을 함께 살해했다.
139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두고 흔히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와병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둘째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그 2년 뒤인 1400년, 방원이 동복형인 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 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주(함흥)에 머물렀다. 이 때 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 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방원에 대한 태조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성계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한양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 덕안전 을 새로 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로 일기를마쳤다. 태조의 능은 건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신의왕후 한씨
태조의 첫째 부인이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본관은 안변이며 증영문하부사 한경의 딸이다. 그녀는 이성계가 아 직 벼슬을 하지 못하던 때에 영흥으로 시집와서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에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씨 소생으로는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 등의 6남과 경신, 경선 등 2녀가 있었다 조선이 개국된 다음날 한씨의 시호는 절비로, 능호는 제릉으로 추존되었고 1398년 정종이 즉위한 후에는 신의왕후로 추존되었다. 신의왕후의 제릉은 현재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있다. 능을 개성에 둔 것은 그녀가 조선 개국 이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신덕왕후 강씨
태조의 둘째 부인이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본관은 곡산이며 판삼사사 강윤성의 딸이다. 그녀는 신의왕후 한씨 와는 달리 권문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조의 집권 거사에도 참여했을 뿐 아니라 조선 개국 이후에도 배후에서 막강 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태조는 그녀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기까지 한다. 강씨 소생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때 방원에게 살해당한 방번, 방석 형제와 경순공주가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뒤에는 강씨는 현비로 책봉되었으며 1396년 사망 후에 시호는 신덕왕후,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성계가 죽은 후에 태종은 몇 차례에 걸쳐 이장을 단행했으며 그녀에 대한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서모에게 행하는 기신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2백년 뒤인 현종 때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강씨는 다시 종묘에 배향되고 왕비의 기신제도 복구되었다. 송시 열이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 이념을 강조하면서 강씨가 이성계에 의해 정비로 책봉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릉이 왕비 의 능으로 조성된 점을 일깨웠던 까닭이다.
신덕왕후 강씨가 묻혀 있는 정릉은 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묘역 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릉동 자리로 정해지게 되었다. 능이 정릉으로 이장된 것은 이성계가 죽은 후 태종9년 때의 일이다. 태종이 강씨의 무덤을 여러 차례 이장한 것은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분풀이 였다.태종은 능을 옮긴 뒤에도 정자각을 헐고 십이지신상 같은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드는 등 강씨에 대한 노골 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그때문에 정릉은 현종때 복구될 때까지 2백여 년 동안 주인 없는 무덤으로 버려져 있어야 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은 모두 8명으로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이 6명,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 2명이다. 이들 8명의 형 제들은 조선 개국 이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여 노년의 이성계를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한씨 소생의 형제들이 단합하여 강씨 소생의 왕자들을 참살한 '제1차 왕자의 난'은 조선 개국의 역 사를 피로 얼룩지게 만든 첫번째 사건이었다.
진안대군 방우
방우는 1354년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장자로 태어났으며, 찬성사 지윤의 딸과 결혼했다. 일찍이 관직에 나가 예 의판서를 역임하였다. 창왕 즉위년인 1388년에는 밀직부사로 밀직사 강회백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어 창왕의 친조 를 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환했다. 방우는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 8월에 진안군으로 책봉되고 함경도 고원의 전답을 녹전으로 받았다. 그러나 지병으 로 이듬해 4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망함에 따라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조선 제2대 왕은 둘째인 방과가 이어받게 된다.
익안대군 방의
방의는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이 개국되자 익안군에 봉해졌으며, 1398년 '제1차 왕자 의 난'에 가담하여 방원을 보좌한 공로로 정사공신 1등이 되었다. 정종 즉위 이후 종친과 훈신들이 군사들을 나누어 관장했을 때 그는 경기도와 총청도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1400 년 아우 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이를 개탄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간접적으로 방원을 지원하였다. 그는 태종이 즉위하자 1400년에 익안대군으로 진봉되었으며 1404년 병으로 죽었다. 방의는 형제들 가운데 가장 야심이 적고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싸움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킨 것으로 전하고 있다.
회안대군 방간
방간은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판서찬성사 민선의 딸과 결혼했으며 이후 2명의 아내를 더 두었다. 그는 조선이 개국되자 회안군에 봉해졌으며 '제1차 왕자의 난'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회안공이 되었다. 또한 정종이 즉위하자 풍해도 서북면의 병사를 관장했으며 1400년 박포와 함께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원과 대립하였다. 방원의 군대에 패배해 생포된 이후로 죽을 때까지 유배지를 전전했다. 그는 왕권에 대한 야심이 대단했고 성격도 괄괄한 편이었다. 그래서 박포에게서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자 앞뒤 가리지 않고 병사를 일으켜 개경으로 진군했다. 난을 일으켰음에도 방간은 태종과 세종의 배려로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58세를 일기로 홍주(지금의 충청남도 홍성)에서 죽었다.
무안대군 방번
방번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으로 태조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귀의군 왕우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의 지원에 힘입어 어린 나이에 고려왕조로부터 고공좌랑의 직위를 제수받았으며 조선 개국 후에 는 무안군에 책봉되어 희흥친군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393년에는 13세의 나이로 좌군절제사로 제수되었으며 한때 태조와 강비의 추천으로 세자로 내정되기도 했으나 조준, 정도전 등이 '성격이 광망하고 경솔하다'고 반대해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1398년 방원이 주동이 된 '제1차 왕자의 난'때 방석과 함께 피살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훗날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이 그의 후사로 정해졌으나 광평대군이 요절함에 따라 방번의 후사는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의안대군 방석
방석은 방번의 연년생 아우로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다. 현빈 유씨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폐출되자 춘추관대제학 심효생의 딸과 재혼했다. 조선 개국 원년에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났을 때 배극렴 등이 정안군 방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으나 이 때 왕비 한씨는 이미 죽고 없었기에 계비 강씨의 의향에 따라 태조는 무안군 방번을 세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배극렴 조준, 정도전, 남은 등 개국 공신들의 반대로 세자 책봉은 무산되었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불과 11세밖에 안 된 나이로 조선의 왕세자로 책봉된 방석은 어머니 강씨의 보살핌과 정도전, 남은 등 개국 공신들 의 지원에 힘입어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강씨가 죽고 태조마저 병석에 눕게 되자 그의 배후 세 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난을 일으켰고 이 난의 성공으로 세력을 잡은 방원은 방 석을 유배시키고 이어서 방번과 함께 살해했다. 이 때 방석의 나이 17세였다. 후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이 방석의 후사를 이었으나 금성대군이 세조에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하고 32세의 나이에 처형되자 후사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