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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리에 이르는 길 원문보기 글쓴이: 知友
사람이 진짜 수행이 되면 마땅히 그가 변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자기가 무얼 얼마나 아느냐하며 머리로 판단하는게 아니고
옆사람들이 그에게 가슴으로 감동하며 그의 변화를 인정해주어야 그수행이 진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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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진짜로 변해야 합니다.
진짜로 변할려면 가장 좋은 수행법이
생각으로 자기자신을 <죽이고 버리는 법>입니다.
모든 문제는 내가 일으키는 것이니
내가 죽고 버려져야 합니다.
과거의 내가 펄펄 살아있으면서
자기가 거듭났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제가 아는 신도분중에 아주 착하신분인데
남과 언쟁을 할때에는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것을 모르는 분이 계십니다.
대화때는 그분의 입에서는 <내말을 먼저 들어봐!>가 반복됩니다.
자신은 자기가 옳기에 진리를 열심히 전하려고 한다고 생각하지만
상대입장에서는 자기생각과 주장에 얽매인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런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죽고 버려질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자기가 생각과 상념으로
자기를 자기생각안에서 죽이고 폭탄으로 폭파시키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도 죽이고 버리고 지우는 것을 반복합니다.
뭐 짐승들에게 자기몸이 뜯어 먹히우는것을 상상해도 좋습니다.
이수행의 핵심은
자기가 사랑하고 가장 강하게 붙들고 있는것에 대한 부정을 통해
자기의 잠재의식을 뜯어고치고 자기가 집착하고 있던것들을 버려 나가는 수행입니다.
상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효과가 있는 이유는
우리들이 가진 이나라고 하는 존재역시 생각속의 나이기 때문입니다.
즉 생각속에 있는 나이기에
생각으로 그에게 얽매인 나자신을 바꾸는 노력을 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과격하다싶은 수행이 왜 필요한가하는것은
그만큼 현대인들의 자기개체를 위한 이기심이
이사회와 대중문화속에서는 극에 달해 있기 때문입니다.
병이 극에 달한만큼 극약처방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만큼 효과는 아주 뛰어납니다.
특히 스트레스나 우울증으로 인한
심인성(心因性)질환에 걸린분들에게는
만병통치약이라 할만큼 효과가 있습니다.
지금 이수행방법을 주로 써서 효과를 보는 큰수행단체도 이미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만큼 좀 위험한 점도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그수행을 하시는 분들의 세심한 주의가 다음과 같이 필요하다 할것입니다.
첫째가 진리탐구가 과연 누굴 위한것인가하는 점입니다.
그어떤 종교나 수행법도 그목표가
수행하는 자기자신의 발전을 위한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정점과 목표엔 늘 수행뿐만이 아니라
<거듭나는 나>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죽이고 버리는 것은
나의 주장이나 인격을 무시하고 포기해서
결국 남에게 이용 당하려는것이 아니라
내가 거듭나고 변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실로 내면의 변함이 온다는 확신과
그에 대한 자각이 없이 그저 수행만 되풀이 하고있다면
이수행은 잘못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무조건 죽이고 버리다보니 옳바른 방향과 목적을 잃는수가 종종 있습니다.
예컨대 제일 사랑하는 대상(연인 가족형제등)도
상념속에서 죽이고 버리다보니
원래 이수행법의 목적은
서로 구속하거나 편중된 집착이 아닌 바른관계와 바른 사랑을 되찾자는 것인데
그게 아니라 통째로 가족과 형제관계를 무시하거나 방종스러워져서
가정이 별거아닌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적지않은 사람들이 이혼하거나
가족간에 관계가 해체가 되고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면서 도(道)지상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째로는 죽이고 버리는게 업습이 되다보면
이것이 매너리즘에 빠져서 진짜 거듭나는게 아니라 생각속에서
그것만 되풀이 하게 되는데
이리되면 잠재의식속에 죽음을 너무 각인시켜놓는 수가 있습니다.
요는 죽음을 통해 거듭나자는 것인데
거듭나진 않고 죽는것만 커피한잔처럼 즐기다보니
카페인처럼 중독될 가능성도 있단 말입니다.
이리되면 진통제와도 같이 일시적인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이 되고
잠재의식속에 후유증도 생겨나고 맙니다.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네가 죽으면 돼!"
하지만 세상엔 죽어서 되는것만 있는게 아니라
살리고 꽃피워나가야 할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방법으로 수행하는 도중에
이상과 같은 문제점을 보이는 사람들을 저는 가끔 보아왔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기애가 강해서
도(道)를 이루어야 한다는 욕심(그것은 스스로 절대 안죽인다) 하나로
자기가 지금 잘못가는줄도 모르고
마치 훗날 거액의 보험금을 한번에 타기위한것과 같은
대박의 깨달음을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될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자기자신을 직시하고 그로부터도 자유로와져야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될것입니다.
지금자기를 진정 자유롭게 해주지 못하는 수행은 먼훗날에도 참자유를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이런점들만 주의 하신다면
저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자기를 적극적으로 죽이고 버리는 수행을 하셔도
무방하며 오히려 제가 겪은 체험에 의하면 그뛰어난 효과에 대해서는
<일단 해보면 반드시 효과가 있다>라고 보증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있습니다.
또한 <죽이고 버리는 법>이
반드시 모든이들에게 다 잘맞는 법이라 할수는 없습니다.
자기내면에 죽음에 대한 너무나 부정적인 상념이 많으신분들이나
죽음에 너무나 친숙한 분들은 오히려 그효과가 없을수도 있습니다.
그럴경우에는 <죽이고 버리는 법>말고도
다음과 같은 18가지의 다양하고도 적절한 정진수행법들도 있습니다.
이방법들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을
한두가지 골라 꾸준히 명상을 하며 정진수행을 하셔도 좋습니다.
(0) 나를 죽이고 버르는 법(아사법);
(1)夢觀法(몽관법);
이방법은 모든 삼라만상을 일체 다 꿈같은 환상의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감에 감응되는 모든것 즉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고 하는 것들을 다조건과 인연속에 일시적으로 성립한 환으로 보는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순일하게 계속되어 경지가 깊어지면 낮동안에 일어나는 모든일이 다 꿈같이 여겨지는 때가 옵니다.
그러면 그것을 꿈으로 지켜보는 자가 저절로 됩니다. 그<주시자>가 되면 저절로 內光이 생겨나며 동시에 몽중일여도 실현됩니다.
이것은 자기가 몸(육체)라는 잠재의식을 자기안에서 지워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본질은 마치 전기와도 같은 것이므로 흔적도 없지만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몸이나 감각적 마음이아니라 허공성의 실체임을 실감하고 잠재의식적으로도 그리자각하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몸을 상상속에서 불태우고 짐승에게 먹이고 용광로속에서 녹여없애어 마침내 스스로도 마음속에서 막대기를 휘둘러보아 제몸에 일체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는 허공성의 무한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외가 관통되어 안팎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개체가 다없어야 비로소 전체자리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눈이 무얼 보는것이라고 여기지만 그러나 꿈속에서는 눈이 잠자고 있음에도 보는자가 따로이 있습니다.
이처럼 눈을 이용하여 보는자 즉 <주시자>는 따로 있습니다.
주시자관법은 이보는자를 다시 보는것입니다.
꿈을꾸면 가끔 그꿈속에서 헤메는 개체의 나자신 말고 그전체 꿈을 묵묵히 관조하는 그어떤 빛과도 같은 전체성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자리는 개체의 나조차 삼킨채 일체를 묵연히 바라다보고 있지요. 지금 그자리가 그대로 당신한테도 있습니다.
생시든 잠을자든 간에. 그것을 관해보십시오. 그리하여 뚜렷하게 현실(차안)을 넘어 그자리(피안)이 되어보십시오.
모든것을 그이름이나 형상너머의 본질로 보는 연습을 하십시오.
당신의 아내나 남편,혹은 자녀나 부모들을 그들로 보는것은 그대의 마음이 그렇게 보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개체마음만이 정상가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만약 그대가 전체성의 우주마음이 된다면 그들에게 그런 인격성을 부여한 것은 그대의 꿈같은 인연속 얘기일뿐
실제로는 근본 우주가 나타나신 생명현상임을 보게 될것입니다.
물건들도 그이름을 지우고 고정관념을 넘어 그것을 생소하게 바라다 보십시오. 모
든 명자(이름)과 형상(모습)을 넘어서 그본질을 보려고 노력하십시오. 나닐이 새로운것이 보일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에 대한 깨어남입니다.
그대의 오감을 가득채우고 있는 이모든 삼라만상을 다 넘어서 그존재를 초월하고 투시하여 그것을 있게하는 그존재근본의 배경을 바라다 보십시오.
당신앞의 사람이나 사물을 투시하여 그얼글과 그몸통너머에 세월이 지나도 공간이 변해도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 부동불변의 그무엇을 찾아내십시오.
눈을 감아도 컴컴한 그배경은 빛을차단해서 생긴 어두움일뿐이니 그것조차 너머선 배경에는 과연 무엇이 있습니까?
이것을 발견하면 눈을 감으나 뜨나 똑같은 것을 볼수 있게 됩니다.
세상은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의 근원적인 본질이 항상 더먼저 보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말로는 <진공묘유>를 많이 말해도 참으로 진공묘유한 자리가 어떤자리인지를 제대로 찾아내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자리는 개체의 자기가 녹아사라지면 저절로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진공>이란 마치 입맛처럼 모든것을 넘어서서 없는듯 존재하므로 만질수도 상상할수도 느낄수도 접근할수도 없는 자리이지만
아무것도없고 없다는 것조차도 없는 이자리를 찾아내어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자기가 허공화하여 그안에 들어있는 온갖삼라만상을 제몸으로 삼아 삼키게 됩니다.
그때 삼라만상을 제몸으로 삼는 의식 그것이 바로 <묘유>입니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은자는 제가 모든것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또한 동시에 모든것이 됨을 압니다. 이관법은 살아있는 초월의 자리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지금 그대의 몸을 끌고다니며 눈을 깜박이게 하고 심장을 뛰게하며 아까먹은 밥 소화를 자동으로 시켜주고 있는 그살아있는 자리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들은 그것을 <생명>이라고 관념화하여 부르고 생각의 세계속에 가두어버리고 말지만
그생명이 몸뚱이와 분리되면 바로 진리자리 그자체의 활동력이 됩니다.
그때가선 무어라 부를것입니까? 사람이 죽으면 이것이 몸에서 분리될뿐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전기가 떠나간 선풍기처럼 정지하고 맙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죽음이라고 부르며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그영원한 우주의 생명에너지(자성)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다른 사람의 얼굴을 꿰뚫어보며 그 얼굴이면에서 온갖표정을 다 만들며 울고 웃고하는 살아있는 그자리를 한번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그자리가 되어보십시오.
<이것>은 <저것>없이는 존재할수 없습니다.
어두움은 밝음없이, 큰것은 작은것 없이,
긴것은 짧은것 없이, 부처는 중생없이,
죽음은 삶이라는 현상없이는 있을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개체는 전체없이는 있을수가 없고 전체역시도 개체없이는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이런관계에 있는것을 <不異法>이라고 합니다.
동전의 앞면은 뒷면없이는 존재할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체(하나님,부처님)역시도 개체(나)없이는 존재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존재함이 바로 하나님,부처님의 존재함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예수님도 성경에서 나를 본것이 하느님을 본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대(개체)가 동전의 앞면이라면 진리(전체그대로)는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그대의 내외면에 동시에 있습니다. 그것을 한번 찾아 보십시오.
자기가 전체가 된다면 과거,현재,미래세계도 다 자기안에 들어있을수 밖에 없습니다. <
전체>는 모든것이니까요.
그래서 사람이 깨달으면 그안에서는 미래조차도 과거로 만들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안에 알파와 오메가가 다 들어있으니까요.
그는 자기가 사라지고 전체이신 하느님의 영이 그안에 들어와 삽니다.
(확실 이애됨) 내가 깨달으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와서 산다 즉 나를 만든 본성 하느님 부처님이 내 안에 사는 것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은 나를 깨우치는 것인데 깨우치게 되면 저절로 구도의 길을 간다는 사실도 이와 같은 것이다.
과거는 이미 여러분도 삼켰거니와 미래조차도 삼킨다면 그자리는 과연 어떤 자리이겠습니까? 그것을 찾아보십시오.
본존불(하느님)이란 바로 이우주전체이자 그조차도 넘어선 초월그자체 입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이세상을 만들어내고 움직이는 초월적인 그근원의 자리에서 이세상은 다나와서 지금 이처럼 한판 벌어져 돌아갑니다.
그래서 일체가 다 神이 아닌게 없습니다. 일체가 다 神의 분신입니다.
세상만물을 시간속에서 빠른 비디오로 일억배속도로 돌려보십시오.
일체가 텅빈 허공성의 정신위에서 사물은 더이상 사물이 아닌체 하 얀 광선만 남기고 일체가 휙휙바뀌어 현란하게 돌아갈것 입니다.
그것이 이우주전체의 실상입니다. 대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주만물은 다 그하나(하나님자리)에서 나왔기에 서로 근원적으로 <하나>입니다. 이것을 우주의식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주의식으로 사물을 바라다보면 우리는 즉시 그것과 한임을 느낄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는 나무나 가구 혹은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그대는 그것들과 하나가 될수가 있습니다.
그대안에서 그대는 외로운 개체라는 잠재의식만 들어내어 버린다면. 눈앞에 작은 물건을 놓고 이삼십분만이라도 아무런 선입견없이 바라다 보십시오.
눈앞의 사물과 그대가 반드시 하나되는 때가 올것입니다. 그의식을 확산시켜 그의식을 가지고 전체로 거듭난후 개체의식을 그위에 펼치십시오.
거기에 참으로 기막힌 세계가 새로이 나타날것입니다. 이것이 견성이후의 자리입니다.
깨달음이라 하는것은 하늘과 땅(삼라만상), 그리고 자기라는 존재가 둘이아닌 하나로 상호융합되어버리는 현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가운데에서도 그들은 다시 또 분리해서 느끼는것이 가능합니다.
일반인들은 개체육신만을 자기라고 여기며 살아왔기에 그러한 분리상태에만 빠져있지요.
그러나 내가 내안에서 개체의 나를 쫓아내면 거기에 절로 하늘과 땅이 들어와 살게 됩니다.
개체가 전체를 삼키고 전체는 개체안에 들어와 살게 됩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개체는 전체안에 또 들어있지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묘하게도 그둘은 서로 그렇게 서로안에 들어있으며 분리 불가분으로서 상호의존적입니다.
이것이둘이 아닌것을 증득하여 자기가 전체이자 개체인 존재가 되는것이 깨달음입니다.
모든 삼라만상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져가는 그곳은 어디입니까? 모든 희로애락애오욕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져가는 그자리는 어디입니까?
그둘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것을 다내고 들이는 그자리지만 정작 마치 <입맛>처럼 그자리스스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心眼으로 한번 바라다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끊어진 자리요, 眞空의 자리>입니다. 空의 자리는 우리네 상상속에 그려지는 그런 허상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속에 우리가 지금 실재하고 있습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하나는 어디이겠습니까.
전체에는 바깥이 없습니다. 그 것이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한자요, 일체가 다 그안에 있습니다.
일체가 다 그대안에 있을때 그대는 <그어느것도 아닌것>이지만 그어떤것들도 다되는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 그것을 관해보십시오. 그대는 늘 그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일시적인 인연으로 지금의 육체와 마음을 가진 그대로 잠시 나타난것입니다. 마치 공기중의 수증기가 이슬이 되었다가 성에로 얼음이 되듯이. 눈앞에 예쁜얼음조각이 생겼다해서 너무 그것에만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언젠가는 녹아서 다 물로 수증기로 돌아갈 테니까요. 그대는 그때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대는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거짓말과 나쁜짓을 몰래 숨어서 했습니까? 그대는 얼마나 모르면서도 아는척, 아니지만 그런척, 했지만 안한척 했습니까?
그대는 자기밖에 모르는 에고행위를 얼마나 많이 저지르고도 그것을 잘 합리화 했습니까? 가만히 자기의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십시오.
지금 하느님앞에서 그삶을 전체로 낱낱이 펼쳐놓고 심판을 받는 자리로 여기고 자기를 반성하고 참회회개하십시오.
참으로 진솔하게 눈물로 회개하십시오.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아내자식에게 용서를 구하십시오.
자기를 진실로 다 밝히고 더이상 감출것이 없는자가 아니고서는 개체마음이 사라지지 않으므로 전체마음이 되질 못해 깨달음이 들어올수가 없습니다.
몇백년이 흘러 이제 당신은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당신의 시체도 다썩어 사라졌습니다.
당신을 알고 기억하고 있던 그모든 이들도 당신과 온갖 사연을 가진 모든이들도 다죽어버린지 오래입니다. 당신은 이제 인류의 생명의 흐름속에서 그존재가 잊혀지고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당신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며 더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태어나기 몇백년전과 다시 똑같아진 상황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때 과연 당신은 어디에 있으며 어떤 모습으로 있습니까? 당신은 존재하기나 합니까? 그것이 당신의 실제적인 영원한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지금 자기가 육신이나 마음등 무엇이라고 따로 여기면서 그것만을 위하여 애쓰고 있지나 않습니까? 영원속에 불변하는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관하여 보십시오. 지금의 당신은 그것과 대체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수행에는 반드시 죽이고 버리는 법만 있는것은 아닙니다. 당신에게 죽이고 버리는 법이 안맞을수도 있습니다.
그럴경우에는 오히려 당신스스로를 축복하고 아름다운 영혼으로 마음안에서 되살리는 작업이 필요할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본질은 진선미(眞善美)가 다 완벽하게 갖추어진 존재들입니다. 다만 여태까지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꺼내어 쓰지못하고 활용하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이제 스스로를 축복하십시오. 우주최고의 빛나는 존재로 여기십시오. 그리고 모든 개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전지전능한 존재의 능력이 자기안에 들어있음을 관조하십시오. 당신은 의식체입니다. 당신이란 의식체는 광물의식으로부터 식물,동물단계를 거쳐 인간단계에까지 왔습니다.
이제 당신의 내면에서는 맑은 영(靈)이 꽃피어날 차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또 신(神)으로서 완전한 개화(開花)를 할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그러한 발전단계의 도중에 있습니다. 이제 당신을 하나의 식물로 관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내면에서 당신의 정신으로 너무나 투명하고도 맑고 아름다운 세상에 단하나밖에 없는 정신으로된 꽃을 피워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난 당신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을 고요히 관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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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통각(通覺) 수행
우리가 법신불을 완전하게 깨치고(하나님을 완전하게 알면)
자연스럽게 보신불 수행(하나님의 능력)을 하기 위해서
제일 마지막에 보림차원에서 한번더 자기자신을 전체입장에서 자각하는게 필요합니다.
이것은 무슨말인가 하면 자각수행을 잘한 사람은
그결과 자기가 깨치게 되면 자기는 일체 끊어진 자리에 들어가지마는
제마음을 쓸때에는 아직 제가 개체마음만 쓰던 업습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
마음을 쓰더라도 개체마음위주로 작게 밖에 못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자리에 들더라도
과거의 경향이 희미한 습성으로 남아있기에 어쩔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라고 다같은 부처가 아닌것이지요.
하지만 마음을 잘수행한 사람은
이미 자기가 개체의 자기를 넘어 전체가 되어보는 마음수행을 해봤기 때문에
마음을 쓸때에 더크게 쓸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억만장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그돈에 벌벌떠느냐
아니면 그돈을 훌륭하게 잘 쓸줄아냐의 문제라고도 비유할수가 있습니다.
자기자신을 전체적인 입장에서 자각하는 것을
바로 통각(通覺)이라고도 합니다.
전체적 입장이란 시공간적으로 일체를 초월한 입장에 선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 그리 마음을 써야 나중에 더큰 법력(法力)이 생길수 있습니다.
물론 깨달으면 일체가 다 끊어진 자리에 들게 되므로 크고작음없이 다똑같지만
그러나 그 마음자리를 활용하는 측면에서는 다르다 이말입니다.
이것은 자전거를 안타본 부처라면
아무리 부처라해도 배우지 않고는 자전거를 못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전체가 안되어본 부처는
그것을 해보아야 그마음을 굴리고 쓸줄을 압니다.
그래서 자각수행이 개체적입장만을 고려한 미분(微分)적인 수행이라면
통각수행은 자각수행이후에 추가로 보림차원에서 해보는 적분(積分)적 수행이라 할수 있습니다.
통각수행은 법신불(하나님)을 깨치고 자각한 이후에
그힘을 쓰는 법을 터득하는 수행이라
보신불(성령)공부로 들어가는 첫 단계의 공부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마음수행을 해야하는 이유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때의 공부의 특징은
더이상 죽이고 버리는게 아니라 오히려 살리고 꽃피우는 공부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여태까지는 진리의 본래자리(體)를 알려고 그저 죽이고 버리고 자각하기만 했다면
이제부터는 아름다움과 사랑, 깊고 고요하며 빛나는 행복,내면의 평화를
내안으로부터 살리고 꽃피우고 키워나가야 합니다.
사실은 죽이고 버리는 법이나 살리고 꽃피우는 법이나 같은 것입니다.
다만 보통사람들이 살리고 꽃피우는 법을 수련하기엔
자기만을 알고 이기적으로 살아온 그마음들이 너무 때가 많이 묻었기에
우선은 죽이고 버리는 법을 행한뒤 마음이 맑아졌을때가서야
비로소 살리고 꽃피우는 법을 수행하게 하는 방편을 쓰는 것일 뿐입니다.
이리하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을 버리고 떠나며 무엇을 지키고 밝혀야 하는지를 스스로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자기가 변하고 거듭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통각수행인 것입니다.
통각이란 삶이란것 전체에 대한 자각입니다.
또 나란 존재자체안에 깃든
모든 신성한 힘과 평화로울수 있고 행복할수 있는 능력에 대한 자각입니다.
그래서 통각은 눈에 보이지않는 가장 깊고 신성한 곳에 있는 본래의 나와 하나가 될뿐아니라
나아가 눈에 보이는 이세상의 모든 생명력이나
그들이 가진 모든 감정과 할력에 대해서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통각은 생명이 하나의 새로운 차원으로 한계단 더 상승하는 거듭남이며
존재의 전체적인 신비를 한번에 통찰하는 거시적인 자각입니다.
이방법은 죽이고 버린나가 다시 되살아나는 자각법이며
전체가 개체속에 들어와 사는 신비로운 현상에 대하여 스스로 깨우치는 법입니다.
선가(禪家)에도
<대사(大死)후에 다시 대활(大活)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말은 크게 뜻풀이를 하면
곧 법신불만 자각하는것으로 그치는게 아니라
나아가 보신불,화신불까지도 자각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만
이것을 바로 달리말하여
깨달으면 존재와 세상이 하나로 녹아합쳐져서 통(通)로 하나이되
그것이 살아있어서 법보화신불(法報化身佛)로 각각의 역할을 하며 사는 이치를
그각각의 관점으로 나누어 통찰하는 온전한 깨달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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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끊어진 자리
존재의 본질은 끊어진 자리에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선 <금강좌>라고도 하고 구경지(究境地)이라고도 합니다.
유식학에선 제8식 아뢰야식을 넘어선 근본자리라고도 하고
기독교에선 모든것의 터전이 되며 영원한 하나님 자리인 <만세반석>이라고도 합니다.
명상에서는 모든것을 다넘어서 있는 궁극의 자리로서 초월의 자리라고도 말합니다.
이장에서는 이자리에 대해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여러분,
이세상이 지금 무엇위에 존립하고 있습니까?
이무거운 지구가 왜 허공성의 우주위에 둥둥 떠있나요?
과학자들 말처럼 인력때문에? 아닙니다.
그럼 하늘에서 두사람이 서로 잡아당기고 있으면 안떨어지나요?
아니잖아요. 이우주는 바로 끊어진 자리속에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의 인과와 원칙을 초월해 있는 그자리위에 이처럼 떡 벌어진 것이지요.
근데 그속에 이처럼 세상만물과 우리들이 들어있지만
또한 동시에 우리들속에 그자리가 또 들어있습니다.
그것을 인식하고 찾을수 있는 의식을 가진자안에 그것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실로 그자리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런것으로도(공으로도 안된다) 묘사되거나 형용될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기에
비로소 모든것이 거기서 다 나오고 거기로 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
여기 항아리가 하나 있다 합시다.
그항아린 분명 그안에 뭘담기위해 만들어 진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늘 자기안에 공간(허공)을 가지고 있지요.
그래서 그항아리안에
물이라든지 무엇을 가득 담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여전히 그항아리의 본래성은
허공성이지요. 뭐든지 담을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데 그항아리밖에 있는 허공과 안허공이 다른것일까요?
아니지요. 이제 여기에 의식을 하나 첨가합시다.
의식은 사실 영원히 초점을 가지고 출몰하는것입니다.
그렇지만 그의식이 가진 활동능력인 마음이
그몸인 항아리안에 마치 물처럼 갇혀 그것만이 자기몸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이게 우리들의 일반 의식이요,개체마음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내용물은
언제든지 그 그릇인 항아리를 떠날수도 있고 버려지거나 완저히 교체될수도 있지요.
또 그릇인 항아리의 크기역시도 아주 작아질수도 있고 대단히 커질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몸과 마음을 스스로 벗어버린자는 마음의 자리에서 볼때
바깥허공과 안허공이 하나가 됩니다.
그허공조차 넘어선 자리가 의식에 의지하여
스스로 자각될때 이것을 <법신불>이라 합니다.
그렇지만 이게 말이 허공이지
실은 허공도 넘어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도 어렵게 생각할게 없어요.
아이디어(Idea)나 생각에 무슨 모습이나 형상이 있습니까?
그게 공(空)한 형상이 있습니까?
아무모습이나 형상이 없지만 그게 그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지지 않습니까?
그게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갑니까?
그냥 제자리에서 그렇게 일어나고 사라지지 않습니까?
또 지금 여기서 손뼉을 한번 칩시다.
자,이소리가 어디로 갔습니까?
그소리가 돌아간 자리가
바로 <끊어진 자리>요 진공(眞空)의 자리입니다.
이세상의 모든 음악은
지금 다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돌아갔습니까?
우린 눈에 속고 감각에 속아 空이라 해도
물질의 상대여백에 있는 공이나 상상하지만 진짜 공은 그런게 아닙니다.
그런공은
물질의 상대적 형상이지 참된 공(空)이 아닌것입니다.
딱 끊어진 자리,
일체상상으로의 접근을 불허하지만
그안에 아무리 어마어마한것도 다 들어가는 그배경자리가 바로 진짜 공자리입니다.
그래서 무한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모든 유형무형의 것들이
그위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며 한판 잘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이세상이 이미 그런것이죠.
그러니 끊어진 자리를 자각하라한대서 자꾸 이것저것 상상하고 찾아서 되겠습니까?
그게아니라 자기자신이 이미
이몸과 마음조차 일어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그무한의 관문임을 알아야하고
일체가 딱 끊어진 초월의 배경그자체임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참 깨달음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눈을 감으면 거기 뭐가 있어요?
세상만물의 형상에 끌려다닌 어두운 눈에나 보이는것이고 실제론 거기에 이 <끊어진 자리>가 떡벌어져 있는겁니다.
근데 이게 눈뜬자만 보이니 그게 문제지만요.
우리들이 끊어진 자리를 찾으라하니까 자꾸 생각으로나 마음으로 이리저리 궁리를 한다 이말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찾아집니까? 그건다 끊어진 자리입장에서 보면 마음이 장난치는 그림자요,망상인데요.
개체마음의 잔영이 남아 이세상만물을 실제로 있다고 착각하는 힘도 넘어서 그것들을 환상으로 보기시작하면 서서히 그자리가 열리어 초감각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우리의 형상이라면 형상입니다.
성경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었다하는 말은 겉형상이 아니라 참형상을 말하는 것이니 본질적인 것을 표현하는 말이라 바로 이자릴 말하는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세상 삼라만상이 다 무한한 자기안에 떠있고 그무한한 자리위에서 의식들이 전기불처럼 왔다갔다하며 그의식들이 여러가지 구름을 만드는데 바로 이개별구름들이 마음이라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깨친자는 이세상이 전부다 여러가지 다양한 마음이 벌이는 환상쑈임을 보게되며 일체가 다 자기품안에 한바탕 벌어져 있는 다채로운 환상의 무대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이세상이 자기가 되어버리는 자리입니다. 여기까지가 무정도(無情道)의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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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가 마자믹이 아닙니다.
그다음은 보신불공부
즉 유정도(有情道) 공부의 시작이 가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끊어진 자리를 자각한다함은
곧 자기가 일체를 다쉬고 이세상에 태어나오기 이전자리,
그근본의식자리로 돌아가 그근원자리에서 고요히 관하는 의식그자체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공부는 그자리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개체마음도
쓰기 따라서는 하나의 진리이니(여기서 번뇌무명이 곧 진리란 말이 성립된다)
그것은 전체자릴 항상 잃지않으면서도 필요에 따라
그위에서 개체마음을 능력에 맞게 쓰는것이 곧 보신불자리임을 아는것이고
또 그작용을 스스로 체험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정도(有情道)의 시작이요,
사후세계에 영생속에서 보살활동을 하기위한 연습의 장이기도 한것입니다.
이끊어진 자리가 이세상에 이미 환하게 드러나 있음에도
삼라만상의 형상에 속아 눈이 착각속에 빠져 닫힌 사람들만이
이몸만이 전부인줄알고 여러가지 망상을 갖는 것입니다.
그자리가 나타난것이
바로 <지금여기>의 느낌입니다.
<지금여기>를 고요히 한번 관해보세요.
그이면에 바로 끊어진자리가 떡 벌어지며
그안에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가 한권의 책처럼 들어있으며
다양한 의식계와 물질계가 온통 어우러져 지금처럼 다채롭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모든것이 다 누구안에 들어있습니까?
이것이 있어야 저것도 인식되고 의미지어질수 있습니다.
개체가 없으면 전체도 없습니다.
물론 전체가 있어야 개체도 있을수 있지만요.
그래서 개체인 우리가 전체인 이근본우주자리위에 출현한 것입니다.
끊어진자리는 하나님의 능력인 창조의 자리라
모든것을 다만들어낼수 있습니다(이것을 불교용어로는 <아마륵果>라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자리가 나타나는 관문(關門)이
바로 다름아닌 그대인것입니다.
그래서 그대가 곧 궁극의 창조주
(이것이 정히 부담스러우면 자녀라해도 괜찮다)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역사에 늘 동참시키신다는 말은
이처럼 해석해야 합니다.
즉 그분과 우리는 이미 하나로서
서로 분리하거나 뗄레야 뗄수가 없는 불리불가분의 관계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말을 이미 예수는
"하나님안에 내가 거하고 있고 내안에 또한 하나님이 거하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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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거듭나기 수행요지
이제 여태까지 설명해온 명상의 공부방법을 재정리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거듭나기(Born Again)>명상법이라고
우선 이름지어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죽을수밖에 없고 잊혀질수 밖에 없는 개체의 내가
전체성의 영원한 생명을 가진 무한한 능력의 <나>로 거듭 태어난다는 말뜻입니다.
어디에서 어떻게요?
바로 이우주를 다삼킨 나의 내면세계속에서
진리와 하나된 내가 있는 그대로의 진리상태에 있는 또다른 나를 되살림으로서.
(1) 제일단계가 법신불 자각입니다.
이것은 <색즉시공>을 깨닫는 단계인데 다시 여기에는 두단계가 있습니다.
첫단계는 초점의식(순수개체)으로서의 자신의 인신(人神)자리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맡는 이살아있는 자리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것을 자각하고 탐구해 들어가 이몸뚱이를 넘어서 이몸을 이끌고 다니는 그 초월적인 빛없는 빛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자리를 쉽게 자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꾸 그것을 대상화하거나 객체화하여 그것을 자기 바깥에서 인식하려들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찾고 생각하는 놈,지금 이글을 읽고,보고,듣고,느끼고,상상하는 이자리의 존재가 바로 자신이자 진리인 법신자리입니다.
두번째단계는 전체바탕(근본의 전체자리)으로서의 자신의 본래 원신(原神)자리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조차도 나오는 자리로서 의식계의 근본바탕자리이며 동시에 일체의 물질우주의 바탕도 되는 자리입니다. 이원신의 자리에서 수많은 초점의식(자각하는 개체의식)이 나왔는데 그것은 마치 한촛불에서 수많은 촛불이 불을 당겨받아 이어 나올수 있는 원리와도 같고 또 계곡을 흐르는 물이 수많은 갈래로 나뉘어 흐르지만 그본질이 다같은 하나의 물인 사실과도 같습니다.
이두자리는 본래 하나지만 우리에게 깨달은후에도 마음이 크고 작게 작용하고 있어서 이렇게 필요상 법신불을 둘로 나누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본래자리(體)에 돌아가 있으면 끊어진 자리로서 부여 잡을수가 없으되 용(用)을 써서 일어나면 작으면 개체마음이요,크면 전체마음이라 하는것으로서 크기도 없고 냄새도없고 형상도 없고 빛깔도 없지만 보통은 이육신안에 갇혀있고 수행을 해서 그마음이 자기 본래자리에 깨어나면 육신의 형상을 벗어나 온우주가 다되거나(이것을 범아일여라고 합니다) 혹은 그마져도 넘어서서 우주를 그대로 다 담을수도 있는 신묘한 것입니다.
기존의 불교수행(참선)에서는 여기까지가 깨달음의 끝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마음자리의 체와 용을 깨달으면 공부가 다 끝났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사실은 아직 중간과정에 불과한것이며 그이상의 과정이 더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다음에 소개하는 보신불,화신불 수련과정인 것입니다.
(2)제이단계는 보신불 자각입니다.
이것은 <공즉시색>을 깨닫는 과정인데 달리말하자면 법신불과정이 <모든것이 공함>을 보는것이라면 보신불과정은 거꾸로 그자리에서 현실처럼 나타난 모든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임을 보는 과정입니다. 여기에도 다시 두단계가 있는데 첫단계는 <나자신이 바로 전체(하나님,부처님)가 만든 살아있는 진리의 개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내가 잘났거나 못났거나 있는 그대로 하나님(부처님)의 온전한 창조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개체가 다시 전체인 본래자리안에서 진리로 영원히 부활하는 것입니다.이차원에서는 내개체가 더이상 유한한 개체가 아니며 영원성을 가진 존재가 임의로 자기의 형상을 취하여 가지는 의미에서 영생한다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그런 개체로서의 내마음이 더이상 이육신으로서만 그형상에 매여있지 아니하고 자유의지로 마음차원(의식계)에서는 돌멩이나 새나 꽃이나 구름이나 산이나 바다나 (산신령이나 용왕은 그런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더나아가서는 지구나 별이나 우주은하계에 이르기가지 다 되어보는 광자체(光子體)로의 변신체가 되는 단계입니다.이차원에서부터는 실로 우주의 대자유 주인공으로서의 삶을 누리는 단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3)제삼단계는 화신불 자각입니다.
이것은 <色空不異(색공불이)>의 통합원리를 깨닫고 응용하는 단계로서 다시 여기에도 두단계가 있습니다.
그첫단계는 내가 있는 그대로 전체가 온통 이미 진리인 이세상전체와 더불어 한덩어리로 그것이 된 내전체마음자리속에서 부활하여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전체가 들어있는 내마음이 기존전체세상(기존의 전체우주)으로부터 횡으로 번식하여(복사되어) 또하나의 살아있는 영원한 우주가 되는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몸으로 살때에는 이물질세상과 겹쳐져있어 둘이아니지만 의식으로 존재할때에는 내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다는 점에서 둘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식스 센스>란 영화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영화의 원리와 비슷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여러분이 고향마을이나 정든곳이 눈에 삼삼할때가 있지요. 그것이 바로 의식계안에서 그존재들이 내가 창조함으로서 영생할수 있다는 증거입니다.개체마음이 전체마음이 되면 그마음이 바로 근본의식계와 싸이클이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이것을 부처님의 가피에 의해 일체중생이 극락왕생한다고 말할수도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전체우주가 된 내가 그전체의 일부나 혹은 전부를 내뜻에의해 재창조하거나 바꿀수도 있고 혹은 일체를 쉴수도 있고 무한성의 법신불 자리안에 일체를 가지고 창조와 체험을 할수있는 것이니 그야말로 대자유의 대각자(창조주,아미타불)가 되는 차원이 열린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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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거듭나기 수행의 8단계
성경에서도 우리가 <거듭나면> 천국에 갈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왜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으면서도
스스로 자기가 천국에 갔는지 못갔는지
혹은 갈것인지 못갈것인지를 걱정하며 잘모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진실로 거듭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진정 자기안에서 자기가 <거듭난다>면
스스로 자기가 찬국에 이미 났음을 스스로 압니다.
자기가 모른다면 아직 내적으로 하느님의 부름을 못받은 것입니다.
자기안에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앞장에서 요지를 설명한 거듭나기 수행은 그런면에서
오늘날 종교나 타수행법과 아무 상관없이
누구나 병행하여 수행하면 다 되는 그런 수행법입니다.
거듭나기 수행법의 핵심적인 요지를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이
제 1단계부터 제6단계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1) 제1단계에서는
우선 자신이 기억과 생각속의 환상적 존재임을 자각하고 확신하는것이 제일 목표이고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하는 이생각뭉치는 사실은 우리가 가진 환상적인 헛된 생각이고 마음일뿐
우리의 본질은 그냥 우주의 영원한 생명현상일 뿐입니다.
그생명현상이 가진 일시적 구름같은 이몸을 움직이기위한 소프트웨어가 바로 우리의 개체마음입니다. 우린 그런 우주의 생명현상이었을 뿐입니다.
우린 이렇게 <생명현상>에서 와서 다양한 창조와 체험을 한후 다시 그것으로 돌아가는 과정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중간에 일시적으로 살면서 생긴 기억과 경험의 마음들이 우리의 <나>란 개념을 만들어
우리속에서 군림하고 때로는 삶을 걱정하고 겁내고 스트레스를 받고 그렇게 우리를 일생동안 지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의 위대한 생명이 개체안에 들어와 소 인배 졸장부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본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본래가 아닌 이헛된 허상의 존재인 가짜 나를 바로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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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2단계에서는
외공(外功)공부와 내공(內功)공부로 나누어지는데 우리는 이두가지 공부를 조화있게 병행하여야 합니다.
깨달음도 생각속 개념입니다.
이세상에 우리가 만든 모든 것은 다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그생각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바로 우리가 만든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만든 생각에 우리가 지배당하지 말자는것입니다.
여기에 지배당하면 평생을 헛고생하며 끌려다닙니다.
그리고 자기생각속에서 그생각이 만든 개념들을 그게 보람있고 의미있는거라고 스스로 혼자 정의하고 웃고 울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나서 <모든것을 만드는 자는 바로 나다!> 이진리를 늘 잊지말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나>란게 대체뭔가, 바로 이것을 실제로 알아가자는 공부입니다.
달리말하면 외공공부는 생각을 넘어서서 자기 생각에 걸려 넘어지지 말자는 것에 그치지만
내공공부는 대체 그생각을 만드는 자는 누구인가를 실제로 발견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신(神)이 나타나신 현상입니다.
실제로 그의 임재(臨在)현상인 나자신을 실제로 증득하고 체험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신을 진정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외공적인 생각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생각은 그것이 제아무리 진리를 가르키는 정확성이 높은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은 화살표에 불과하지 진리그자체는 아니란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매순간하는 자각의 시작과 끝이 사라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하나의 밝은 존재로서의 내면이 밀밀히 이어지며 자각하는 상태로 들어가면
거기엔 아주 큰 <앎(Knowing)>만이 뚜렷하게 현전합니다.
그러면 그것에 점점더 강하고 커지게 몰입하세요.
그러면 일체의 생각과 행동,일이나 자기몸의 이동까지도 다 그안에 들어있게 되고 나아가 점점 더깊어지면 마침내 이세상도 그환한 빛안에 들어있게 됩니다.
그것을 막는 장애물인 스모그(Smog)같은 자기란 상념체(개체마음이 만든 허상의 존재)를 죽이고 버리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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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제 제3단계로 올라갑니다.
이세상 삼라만상이 자기의 내면의 빛덩어리인 <앎>안에 쑥 들어오게 되면
거기서 더욱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버리고 죽이고 딲아서 순수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란 잠재의식이 약해져서 마침내 사라지면서 근본마음자리가 드러나고 그에 딸린 마음에는 범아일여 (凡我一如; 이세상 만물이 곧 자기라고 여겨지는 동일시 현상) 가 체험 됩니다.
세상살이를 하면서 자꾸 다시 개체마음을 쓰거든요.
그것을 자꾸 쓰게하고 요구하니까. 그렇게 되면 개체마음의 기운이 다시 되살아납니다.
<앎>그자체의 순수한 의식덩어리를 더크게 더맑고 깊게 키워나가야 해요.
그속에서 일하고 그속에서 잠자고 그속에서 일시적으로 생겨난 이몸과 마음을 쓴다고 여겨보세요.
그럼 바로 곧 익숙해 집니다. 모든 생명과 비생명현상전체, 물질과 비물질전체, 이 우주전체가 통째로 둥둥 떠있는 그바탕이 되는 근본우주의 이자리가 바로 참된 <나>자신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에너지 기운의 자리이며 동시에 빛조차 넘어선 빛의 자리이며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이 통째로 하나인 자리입니다. 그리되면 우리는 범아일여의 체험조차도 넘어서게 됩니다.
제대로 깨치면 누구나 다 우아일여가 됩니다. 물론 이때의 우주란 물질우주를 말하는게 아니고 근본자리우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완전히 딱끊어지고 무한의 존재의본질적 생명요소(존재의 근본성품) 그자체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어야 비로소 3단계 법신불 자각(하나님을 친견함)이 제대로 완성되고
법신불을 제대로 보았다 하여 일반불교에서는 견성(見性)이라 하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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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4단계는
보신불수행 (성령공부:하느님,부처님의 힘으로 나타난 일체현상에 대한 공부) 으로 갑니다.
개체인 자기가 법신불을 바라다보고 붙잡는게 아니라
자기가 이제 무한한 원래 그법신불자리 그것임을 뚜렷하게 자각함과 동시에
그자리에서 반대로 개체의 이몸과 마음을 바라다보고 관조하는 상태로 존재의 중심(中心)이 이동되는것입니다.
즉 여태까지는 개체성이 전체성을 바라다보는 방향의 공부였다면
이제는 그반대로 전체성에 존재의 중심이 옮겨지고 그자리에서 전체성이 개체성을 응시하는 차원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것의 근본원인이 되는 창조적 힘의 자리, 바로 그것으로 중심이 바뀌어 이동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자리에서 그자리(하나님부처님자리)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세상 삼라만상이 이렇게 다양하게 쏟아져 나옴을 보고
그중의 하나로서 개체의 제몸과 마음도 그섭리에의해 나왔음을 자각하는 공부입니다.
즉 더이상 색즉시공 (돌아가는 자리)에만 매달리는게 아니라 이젠 공즉시색(나오는 자리)을 깨닫고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귾어진 자리에만 매달리는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자리, 즉 <있는 그대로>가 그대로 완전한 진리의 자리임을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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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제 5단계로 나아갑니다.
(성자공부: 하나님의 분신으로 나타나신 존재를 알고 체험하는 공부) 입니다.
그래서 일체의 삼라만상을 전부다 자기 진리의 법신불과 보신불(몸과 마음)으로 보는 <살아있는 우주>그자체가 되는 공부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그마져도 넘어서 있습니다. 바로 여기 이자리가 神界요, 실상세계요, 천국입니다.
삼라만상 일체가 여여하게 원래 그자리와 하나된 제안에서 다되어있음을 자각하는 공부입니다.
이게 이환상세계의 실상(實相)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다시는 지워지지도 변하지도 않는 영생천국의 나라에 드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 떡벌어져 있는게 바로 이세상인데
그근본우주마음자리에 제마음이 합일하니 그실상의 나라에 제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
여기가 참된 천극극락이고 나머지는 다 상념체들이 만든 영계수준의 천당들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영원히 존재할수가 없습니다.
그는 살아있는 우주가 화현된 개체현상인것이며 다른 말로는 바로 물질로 나타나 살아있는 전체신(하나님,부처님)입니다. 공부방법이 자각만으로 하는게 아니라
거기에 살아있는 우주전체의 생명력인 사랑과 대자대비의 힘이 생하여
그에의하여 일체를 내몸과 같이 사랑하고 하나로 여기고 그럼으로서 개체의 잠재업습을 녹이고 없애며 전체가 한생명으로서 온전히 거듭나게 하는 거듭나는 통찰의 수행이 필요합니다.
즉 마지막공부의 방편은 바로 자각수행에 사랑과 대자대비가 자각에 추가되는 수행이고 그럼으로서 전체가 한몸으로서 거듭나 살아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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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6단계에서는 보림단계이자 천국극락(신계)창조와 체험의 경지입니다.
아미타불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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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간단히 거듭나기 수행의 각단계설명과 구체적인 공부방법을 일러드렸으니
여러분은 더욱더 정진하셔서 중도퇴전없이 빠른 시일내에 좋은 결실을 이루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