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으로 봐선 그다지 우리의 시선을 끌만한 요소가 없어 보여 심심하게까지 느껴지는 선입견과는 달리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는 무척 재미있고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씨네서울은 딱히 장르를 규정짓기 힘들 만큼 독창성과 재치넘치는 연출이 돋보이는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영화를 만들었을까하는게 궁금해졌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단편 <지리멸렬>로 이미 일상에 대한 섬세한 고찰과 지식인 사회에 대한 냉소적 비판을 보였주었으며, 이번 영화가 첫 장편 데뷰작입니다. 앞으로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아주 '이상한' 미래계획을 가지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서면인터뷰로 진행되었습니다.
- cineseoul 영화를 보다 보면 만화적인(특히, 일본 만화) 구성을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는데, 실제로 만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나요?
- 봉준호 감독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고, 직접 그리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일상적인 듯한 분위기 사이사이에 돌발적인 만화적 표현들이 튀어나옵니다. 사실적인 표현과 만화적인 표현이 자유자재로 뒤섞이는 느낌을 애초부터 의도했습니다. 단, 특별히 '일본' 만화의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는데요...만화는 한국, 일본, 프랑스 할 것없이 가리지 않고 보는 취향입니다.
- cineseoul 단편 <지리멸렬>에도 야한 잡지를 보는 교수가 등장하고 이 영화에도 교수사회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역력한데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따로 있는지?
- 봉준호 감독 굳이 의도적으로 특정 인물군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데요...엘리트 또는 지식인 그룹에 속하지 못하는 '변두리' 인간형들에 관심과 애정이 있다보니까, 자연스럽게 그 반사작용으로 지식인들을 냉소적인 시각으로 그리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경우에는 지식인에 속한다 할 수 있는 '윤주' 캐릭터에도 일정한 애정을 가지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어찌보면 가증스런 인간이랄 수도 있으나, 뒤틀린 현실 속에서 타락의 길로 내몰리는 불쌍한 인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싶거든요.
- cineseoul <지리멸렬>과 이 영화 모두 일상생활의 단면을 날카롭게 잡아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일러 지하실이나 관리실의 풍경 등까지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정말 리얼하게 잡아냈는데, 모두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인가요?
- 봉준호 감독 주변일상이나 주위의 실제 인물들에서 디테일이나 아이디어를 많이 포착해 오는 편입니다. 보일러 김씨 이야기같은 경우도 어느 TV프로(MBC 프로 <칭찬합시다>)에서 본 실제인물-보일러를 무료로 수리해주는 아저씨-을 통해서 우연히 착안하게 되었습니다.
- cineseoul 사실, 폭발적인 시사회의 반응과는 달리 제목에서부터 캐스팅에 이르기까지 외적으로만 본다면 영화에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두 주연배우는 물론, 뚱녀(고수희)와 아파트 경비원(변희봉)의 연기는 감칠맛이 납니다. 어떠한 점을 고려하여 캐스팅을 했는지요?
- 봉준호 감독 배두나씨의 경우 첫 오디션때 보여준 남달리 자연스럽고 흐느적(?) 거리는 모습이 머릿속의 박현남 이미지와 완벽히 맞아 떨어져 신인임에도 확신을 가지고 캐스팅한 경우였고, 이성재씨의 경우는 KBS 드라마 <거짓말>에서 눈여겨 보았던 섬세하고 유약한 연기와 이미지가 윤주 캐릭터에 적격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경비원역의 변희봉씨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TV 탤런트인데요,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이미 변희봉님만이 할 수 잇는 역할로 정해놓고, 무조건적으로 캐스팅을 시도했습니다. 그분과 같이 작업했다는 것 자체가 저로서는 떨리고 영광스런(?) 일이었습니다. 뚱녀 고수희씨는 대학로연극 <청춘예찬>에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연극배우 출신인데요, 공연을 직접 보고 뛰어난 연기력에 반해 캐스팅하게 되었습니다.
- cineseoul 케익을 넣을 때 딸기가 걸리는 것이나 임신한 아내에게 호두를 까주는 윤주의 에피소드와 뽀이라(보일러) 김씨 얘기 등 굉장히 기발하고 재미난 에피소드가 많은데요, 이런 영화적 소재는 주로 어디서 어떻게 얻습니까?
- 봉준호 감독 주변일상에서 디테일들을 많이 포착하는 편인데요, 호두 에피소드 같은 경우, 제 대학동기 친구의 실제 부부생활에서 따온 경우이고, 경비원이 빗자루로 골프스윙하는 장면도 제가 아파트 단지에서 실제로 목격했던 모습입니다. 케익상자에 걸리는 딸기나 앵벌이 아줌마 에피소드 같은 경우는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것이구요.
- cineseoul 문방구, 관리사무소라는 공간은 상당히 나른하면서도 '지리멸렬'한 공간입니다. 어떻게 그런 공간을 설정하게 되었는지요?
- 봉준호 감독 공간 그 자체의 분위기도 있겠지만, '인물'들을 묘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남이나 뚱녀 모두 나른하고 권태로운 일상에서 (강아지 소동이라는) 엉뚱한 모험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되는 인물이므로...인물들의 출발 자체는 되도록 무기력하고 나른할 필요가 있었지요. 개인적으로도 맹숭맹숭하고 따분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 cineseoul 일상의 단면이라는 측면에서 홍상수 감독과도 비슷한 소재인데 접근과 표현방식은 서로 무척 다른 것 같다. 그가 다루는 일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봉준호 감독 홍상수 감독님의 영화는 한마디로 놀라울 뿐입니다. 일상과 인물 그 자체를 집요하고 잔혹하게(?) 파헤치는 경이로운 관찰력과 묘사력을 보여주는 감독님이죠.
- cineseoul 교수사회, 상고졸업생, 직장 속의 여성 등 사회문제에 대한 고민의 흔적도 보인다. 자신의 전공인 사회학과도 연관이 있나?
- 봉준호 감독 사회학은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대한 관심은 많습니다.
- cineseoul 새로운 코미디 장르라고 평가들을 하는데 어떤 코미디(혹은 어떤 장르)로 불리고 싶나?
- 봉준호 감독 '블랙 코미디' 정도? 사실 기존의 어떤 장르의 틀 속에 집어 넣기가 힘든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 cineseoul 왜 하필 개인가? 개를 좋아하나? (음식으로서 혹은 애완동물로서)
- 봉준호 감독 애완견을 좋아하고 아파트에 살기 전에는 몇 마리 키우기도 했습니다.
- cineseoul 영화를 보다보면 동물보호협회에서 들고 일어날 소지가 있는 부분들(개들의 수난장면)이 리얼하게 담겨 있는데요, 촬영과정에서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특히, 아파트 옥상에서 강아지를 던지는 장면)
- 봉준호 감독 촬영과정에서 동물학대가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모들 출연 강아지들은 애완견 전문가의 보살핌을 받았구요, 마취장면등 위험한 촬영시에는 동물의사의 참여하에 진행되었습니다. 옥상에서 강아지를 던지는 장면은 물론 CG로 합성된 것이죠. 이성재씨가 양수리세트장에서 블루매트 앞에서 강아지를 던지고, 조감독들이 안전그물로 바로 옆에서 강아지를 받았죠. 그 화면에 아파트 옥상과 뒷배경인 산과 하늘을 합성했습니다.
- cineseoul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을 느껴주길 바라는가?
- 봉준호 감독 일단 표면상의 스토리인 '강아지 소동'을 낄낄낄 웃으며 재미있게 봐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다가 간혹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면, 윤주와 현남이란 인물들을 통해 살짝 내비쳐지는 타락과 순수의 이야기를 뒤집어 보신다면 저로선 더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 cineseoul 영화속 배경음악으로 재즈를 선택한 것이 인상적이던데 개인적인 취향인지?
- 봉준호 감독 개인 취향까지는 아니구요...독특하고 '무표정한' 분위기의 음악을 찾다보니 재즈특유의 심드렁하고 무표정한 느낌들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 cineseoul 자신이 좋아하는 감독이나 배우가 있다면?
- 봉준호 감독 작고하신 김기영 감독님...그리고 마틴 스콜세지와 제인 캠피온 감독...모두 독특한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감독들이라 좋아합니다.
- cineseoul 올해 가장 기대하고 있는 영화가 있는지?(외국/한국)
- 봉준호 감독 홍상수 감독님의 <오! 수정>. 그리고 이명세 감독님의 신작. 외국은....?
- cineseoul 앞으로의 계획은?
- 봉준호 감독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