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민중문학의 선구자
포석(抱石) 조명희(趙明熙)
치열한 작가 정신 · 탈출 의지
조 성 호 ·
납·월북 작가의 해금 조치 때에 풀린 충북 출신 작가가 많았음은 그만큼 앞서는 사상, 선각자적 기질들이 이곳에 팽만해 있었다고 보겠다. 옥천의 정지용, 진천의 포석 조명희·조벽암, 괴산의 벽초 홍명희, 영동의 권구현, 보은의 오장환 등 한국문학사에 길이 빛날 이름들이 88년 복권되어 공백으로 남아 있던 자리를 메우게 되었다.
포석 조명희는 납·월북 작가는 아니지만 사회주의 국가이던 구 소련으로 망명했기 때문에 엄불려 묶였다가 같이 풀린 것이다. 망명길에 오른 1928년으로부터 60년만의 일이다.
조명희의 생애
진천읍 벽암리 숫말에는 작가 포석 조명희와 시인 조벽암(본명은 중흡) 두 분의 문인이 태어난 생가터가 있다. 숙질간인 이들은 우리 근대문학, 현대문학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훌륭한 작가다.
김흥식 교수의 ‘조명희 연구’ 논문에서는 포석 집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실상 조명희의 집안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은 조선 후기 권문세가의 하나로, 그의 부친 조병행만 하더라도 인동 부사를 지냈다. 그는 원래 산수를 좋아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지내다가 1854년 전격 발탁되어 여러 군데 고을살이를 하면서 청백리로 상하간에 칭송이 대단했다’고 한다. 포석의 큰아버지와 셋째아버지 두 분이 이조판서, 둘째아버지는 진주 목사이고 할아버지는 청주 목사였으니 대단한 집안이었다.
그런 집안이 진천으로 이전한 데 대해 김 교수는 그의 부친이 ‘조정에서 입조를 명하나 오히려 벼슬을 내놓고 당시 한양 장흥방을 떠나 충북 진천으로 내려가서 내내 안빈낙도로 자식들을 훈도하다 종신했다. 이 진천 이주는 병인양요로 말미암은 피난 소개였다’고 한다. 당시는 내우 외환의 난세여서 영달보다는 시골에서 난을 피하고자 한 뜻으로 본다. 더구나 진천은 살기 좋다는 ‘생거 진천’이 아닌가.
포석이 태어난 1894년인 갑오년은 갑오동학혁명이 농민전쟁을 벌이며 전국을 휩쓸고, 외세의 물결이 밀려오고 혁신의 기치를 올린 갑오개혁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 조병행과 어머니 연일 정씨 사이의 네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부친이 칠순에 낳았다 하여 ‘칠석’이란 아명을 얻고 총명하여 ‘신동’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다섯 살에 부친이 별세하고, 둘째형과 함께 살면서 진천 신명학원에서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는데 작가의 회고에 한일합방이 되던 때의 분위기가 나온다. 국가를 빼앗긴 비통함을 선생님이 웅변조로 연설한 것을 집에 와서 흉내를 내어 어머니와 누나를 울렸다고 한다.
서울에서 중앙고보를 다녔는데 영웅 숭배열에 들떠, 독립의 길을 찾아 북경사관학교에 가려고 가출하였으나 평양에서 뒤쫓아온 둘째형에게 붙들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그는 탈출하려던 뜻이 꺾인 울분을 소설 읽는 것으로 달랬다. 신소설류와 삼국지, 옥루몽 등 닥치는 대로 읽었는데, ‘레미제라블’에 큰 감명을 받고 소설을 써 보기로 작정하고 습작을 하기도 했다. 일본 소설, 문예잡지를 구독하기도 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3·1운동 때는 만세운동을 하여 구속되어 몇 달 옥고를 치르고, 군내 순회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북경행 실패 후에 동경행을 결행했는데 이때는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어 남진우란 친구 덕분에 유학의 길에 오른다.
타골에 심취하여 동경의 동양대학 동양철학과에 입학했다. 우리 나라 최초의 학생극 서클인 동경의 ‘극예술협회’에 참여하여 연극에 관심을 기울이고, 김우진을 만나 1921년에는 포석의 첫 희곡 작품 ‘김영일의 사’가 그의 권유로 급히 씌여진다.
유학생들로 구성된 고국 순회공연단인 ‘동우회’에서 올릴 작품이 필요했던 것이다. 7월 17일부터 40일 간 전국 공연에 들어갔는데 청주에서는 7월 29일 개연되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대단한 성황이었음을 보도하고 있는데 김영일이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대목에서는 그대로 초상집을 이룬 듯하였다고 한다.
졸업을 앞두고 가난에 못 이겨 귀국했다. 조선일보에 1년 정도 기자로 근무한 적이 있을 뿐 일생을 가장으로서 생활에 큰 역할을 못한 채 작품 활동에만 전념한 전문 작가였다.
1923년에는 문학사상 최초의 희곡집이 되는 ‘김영일의 사(死)’가 출판되었고 이 해에 ‘파사’라는 희곡을 발표하여 민족극의 경지를 펼쳐 보였다.
1924년에는 ‘경이’, ‘영원의 애소’, ‘무제’, ‘고독자’ 등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의 위치를 확보했는데 이 해에 ‘봄 잔디밭 위에’란 우리 문학사상 초창기에 선구적인 창작 시집을 발간했다.
1925년 ‘카프’ 결성 때에 창립 멤버로 참가했다. 이 해에 단편소설 ‘땅 속으로’를 발표하며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민족 민중문학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인 ‘낙동강’을 1927년 발표하여 평단의 활발한 논란을 불러 일으킬 만큼 인기가 있었다. 프로문학의 새 지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한창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1928년 8월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망명작가’란 의식을 가지고 빼앗긴 조국을 떠난 최초의 망명작가였다. 당시는 ‘카프’에 대한 탄압이 점차 강화되기 시작하는 시점이고, 작가의 새로움으로 향한 탈출 시도의 실현이었다.
소련에 도착해서 발표한 첫 작품인 항일 레지스땅스 산문시 ‘짓밟힌 고려’는 국내에서는 감히 쓸 엄두를 내지 못할 훌륭한 저항작품인 것이다.
저급한 문화 수준의 한인사회에서 그의 고답한 작품 활동이 꽃 피우기에는 무리였을 것이고, 하여 문학의 기초 교육에 더 열성이었고 여러 제자를 키우는 장기적인 포석을 마련하였는데 이 예상이 적중하여 그의 제자들이 인물이 되어 문학을 하기도 하고 소련에서나 해방 조국에서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망명 10년 동안의 성과물이지만 실종된 원고인 ‘만주 빨찌산’ ‘붉은 깃발 아래서’ 두 장편소설이 아직도 발견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절실함은 이 작품이 곧 우리 저항문학의 독보적 존재일 수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망명 10년만에 스탈린이 소수 민족 말살책인 ‘37년 사건’을 조작하여 지식인들을 처형하는 과정에서 포석은 우선적으로 체포되고, 1938년 5월 11일 하바로프스크에서 일본 간첩이란 누명으로 처형되었다. 56년에 무혐의로 복권되긴 했으나.
‘소련작가연맹’ 맹원으로 ‘작가의 집’에서 유명한 작가 파제예프와 함께 살며 그의 추천을 받아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며 활발한 작가 활동을 할 44년의 생애 끝막음은 아쉬움만 안겨준다.
포석 조명희의 생애는 한마디로 파란만장이요, 그야말로 비장미 깃든 한 편의 서사시요, 드라마틱한 우리 근대사의 한 단면이었다고 보겠다.
탈출 의지의 문학
희곡과 시, 소설, 수필에 걸쳐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작가의 다양성은 일종의 탈출 의지의 몸부림이 아닌가 한다. 처음에 민족주의 연극으로 ‘김영일의 사’, ‘파사’로 민중의지를 표현하다가 여기서 탈출하여 현실 비판 의식의 시로 전환한다.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번에는 소설로 탈출하여 마음 놓고 자신의 의식세계를 펼치는 일련의 과정이 끊임없는 탈출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 자체도 부단한 탈출의 시도였듯이.
시골 소학교에 다니다가 서울로 탈출하여 중앙고보라는 새로운 세계로 진출한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재학중에 북경사관학교로 가겠다고 탈출을 시도한다. 무력으로 독립 의지를 불태우겠다는 투지에서였을 터인데 보통 학생이라면 감히 엄두가 나지 않을 일이다.
패망한 나라의 몰락한 양반 후예로서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동경행으로의 탈출을 결행한다. 무력보다는 타골 같은 인도 정신이 암담한 당시의 시대를 구출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거기에서 고리끼류의 사실주의에 접근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혜안을 얻는다.
안정된 기자 생활도 팽개치는 생활의 탈출은 동료 기자의 비리를 참지 못하는 정의감에서였지만 무엇보다 구속되지 않으려는 자유분방함의 추구였을 것이다.
일생에서 가장 큰 탈출은 역시 소련 망명임은 말할 나위 없다. 새로운 희망의 나라인 사회주의 국가로 탈출하는 모험은 참담하던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낙동강’에서 박상운이 탈출했던 길, 그 길따라 로사가 탈출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나고 작가도 그 길을 따라 떠났다. 그러나 그 탈출은 돌아옴을 전제로 한 것이다. 소설 끝구절처럼.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멀지 않아서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
‘춘선이’는 간도로 탈출하려던 뜻을 접어들이는 것으로 끝난다. 떠나는 것보다 여기서 남아 삶의 투쟁을 벌이자고 설득하는 응칠이와 딸을 팔아서라도 이 가난에서 탈출하고픈 춘선이의 절실함이 어우러져 있다.
빈곤층과 부유층을 대비한 ‘김영일의 사’에서 김영일의 죽음은 영원한 탈출을 보이면서 관객에게 호소력을 이끌어낸다. 권력자와 피지배 계급과의 갈등 구조에서 민중의 탈출이 기득권측을 무너뜨리는 ‘파사’도 작가의 탈출 취향을 표출한다.
망명지에서 떠돌던 외로운 혼이 이제는 많은 이들의 기림 속에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오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4년 작가의 고향 진천에서 ‘포석 조명희 문학제’가 열리면서 해마다 연중 행사가 되었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사는 작가의 자녀들이 참석하여 하바로프스크 묘지의 흙을 뿌리며 외롭던 넋의 환향을 빛내주었다.
‘태어난 곳’ 표지비가 서고, 문학비가 들어선 ‘포석공원’이 2003년에 조성되고, ‘포석의 길’ 이름이 불려지게 되었다. 타슈켄트에서는 이미 ‘조명희 기념실’ 문학관이 1988년 설립되고, 1992년에는 고려인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의 거리도 ‘조명희 거리’ 이름이 붙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기술대학교에는 ‘조명희 문학비’가 2005년 세워지고 제막식을 올렸다. ‘잃어버린 민족문학사를 찾아가는 작가 모임’에서 앞장선 행사였다.
중국 연변 연길시에서도 2002년부터 ‘1회 연변 포석 조명희 문학제’를 연 이후 해마다 열고 있다.
많은 논문들이 그의 작품을 분석하여 재조명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남한은 물론 북한과 중국의 조선족 교과서와 옛 소련에서도 읽히고 있다. 우리 모국어를 여러 나라에서 익히면서 문학의 지평을 넓히고 통일시대를 대비한 통일문학의 디딤돌이 되고 있다.
치열한 작가 정신을 발휘했던 포석 조명희의 문학은 이제 우리 문학사의 중요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인간 조명희
포석 조명희는 작가로서의 열정이 대단했다. 대표작인 ‘낙동강’을 쓰기 위하여 낙동강 구포벌에서 3개월 동안이나 작품의 현장에 머물었음은 리얼리즘 작가로서 얼마나 리얼리티에 충실했는가를 보여준 일화라고 보겠다. 경상도 사투리를 적절히 쓰고, 지방 민요 가락을 잘 살려 자칫 저항과 투쟁만을 부각하여 딱딱하기 쉬운 분위기를 문학적 향기로 감싸 훌륭한 작품을 이루고 있다. 러시아에 망명해서도 원동의 육성촌 시골 농민의 현장에서 그들의 삶을 체험하기 위해 얼마 동안 머물기도 했다.
수필가 김소운의 수필에 나오는 회고담에서 ‘포석을 처음 만난 그 날부터 그의 인간적인 매력은 나를 압도했다.’ ‘털끝만큼도 타협을 모르는 꼿꼿한 성품이었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준엄한 시인’이었음을 간조하고, 겪었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김소운이 선배 시인인 포석의 집을 방문하여 하룻밤 묵었는데 자신을 대접하기 위해 5원을 빌렸고, 모레 갚는다는 날 어김없이 그의 집에 찾아가 전달하였다는 이야기는 당연한 일이지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어 신선한 느낌을 준다. 눈이 무릎까지 쌓인 10리 길을 걸어서 약속한 날을 넘기지 않으려고 밤 10시나 되어서야 어찌 집을 알아내어 용케 찾아온 포석, 극심한 가난에서 그 돈은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지만 꼭 약속을 지키고 떠나가던 선배 시인의 ‘뒷모습을 눈물겨운 감동으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여러 편의 포석 회고담을 쓴 민촌 이기영은 수산 김우진과 함께 가장 친했던 친구로서 애정어린 글을 남기고 있다. 포석이 망명하기 두 달 전에는 포석의 소설집 ‘낙동강’과 민촌의 소설집 ‘민촌’의 합동 출판기념회를 30여 문우들과 함께 열었음이 당시의 동아일보에 사진과 같이 나와 있다.
막상 망명하던 전날도 내일이면 떠난다는 귀띔을 주고 떠날 만큼 믿는 친구였고 같은 집에도 2, 3년을 함께 세 들었을 정도였다. 포석이 자기를 ‘조선지광’사에 취직시켜 주었는데 포석 자신은 일 년 정도 신문사에 근무하며 일생에서 가장 풍족한 생활을 누리다가 사표를 냈다면서 그 이유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월급과 뚜르게네프의 장편 ‘그 전날 밤’을 번역한 번역료를 합치면 한 달에 100원의 거금 수입이 되는 괜찮은 직장인데 ‘웬만한 사람 같으면 그런 취직자리는 떼울까봐 겁이 나서 어떤 수모를 받든지 참고 월급에 매달려 살았겠는데 포석은 차라리 굶어 죽으면 죽었지 양심의 가책을 받아가며 비열하게 살 수는 없었다’고 한다. 일제에 아첨하고 동료간에는 교만하게 굴며 중상과 이간을 일삼는 그 자의 비행을 폭로 규탄하고 당장 신문사를 그만 두었다니 ‘정의감이 강했다’는 표현이 알맞겠다.
막상 망명하던 전날도 내일이면 떠난다는 귀띔을 주고 떠날 만큼 믿는 친구였고 같은 집에도 2, 3년을 함께 세 들었을 정도였다. 포석이 자기를 ‘조선지광’사에 취직시켜 주었는데 포석 자신은 일 년 정도 신문사에 근무하며 일생에서 가장 풍족한 생활을 누리다가 사표를 냈다면서 그 이유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월급과 뚜르게네프의 장편 ‘그 전날 밤’을 번역한 번역료를 합치면 한 달에 100원의 거금 수입이 되는 괜찮은 직장인데 ‘웬만한 사람 같으면 그런 취직자리는 떼울까봐 겁이 나서 어떤 수모를 받든지 참고 월급에 매달려 살았겠는데 포석은 차라리 굶어 죽으면 죽었지 양심의 가책을 받아가며 비열하게 살 수는 없었다’고 한다. 일제에 아첨하고 동료간에는 교만하게 굴며 중상과 이간을 일삼는 그 자의 비행을 폭로 규탄하고 당장 신문사를 그만 두었다니 ‘정의감이 강했다’는 표현이 알맞겠다.
모처럼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김우진에게 빌린 200원으로 팥죽장사를 시작했는데 거덜나는데는 두세 달도 버티지 못했다고 한다. 장사가 팔고 이문을 남겨야 하는데, 사먹는 사람 입장에서 배고픈 이에게는 덤으로 더 퍼주고, 돈이 없는 이에게는 외상을 주니 장사가 잘 될 턱이 없을 것이다.
한번은 포석, 송영, 한설야, 이기영이 윷놀이로 내기를 하였는데 아무도 술값 낼 능력이 없으니까 포석이 자기 두루마기를 전당포에 잡히고 일금 30전을 빚내 한 잔에 5전짜리 막걸리를 나눈 적이 있었다고 한설야는 회고하기도 한다.
어쩌다 원고료를 타서 가져오는 날 거지에게 잔돈이 없어 1원이란 거금을 선뜻 내어주니 집에서는 굶기가 십상이고 책을 판 돈도 다리 밑 거지에게 나누어 주기를 즐겼으니 경제력이 있을 리 없겠다.
러시아의 최금순이 쓴 황동민 모스크바대학 교수의 회고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우쑤리스크에서 포석은 길가의 신문팔이에게서 날마다 고려신문 ‘선봉’, 러시아신문, 중국신문들을 사서 보곤 했는데 하루는 늦어서 다 팔려 살 수가 없었다. 마침 중국신문에 연재하던 루신(노신)의 소설을 보던 중이라 여간 애석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문팔이가 이를 보고 어렵사리 사흘 후에 그 신문을 구해 주니 포석은 기뻐하며 고마움의 표시로 배급 식량인 흘레브(빵)를 그에게 덥석 주고 갔다고 한다. 물론 집에서는 가족들이 그것을 고대하고 있던 중이었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열차간에서 아이를 데리고 탄 부인을 만났는데 남편이 독립운동으로 고국의 감옥에서 신음한다는 말을 듣고는 자세히 소식을 물어보았다. 무엇으로 위로할까 하다가 자신의 팔목시계를 끌러 부인에게 주었다. 그 후로 포석은 시계 없이 일하러 다녔다. 그때는 시계가 귀하고 시장에서는 값이 세어서 구하기 어려웠다. 그는 마지막 생명이 다할 때까지 시계 없이 살았다.
황동민이 1937년에 계몽 강연을 마치고 우쑤리스크 역에서 모스크바로 떠날 때에 포석이 배웅하면서 “나도 머지 않아 모스크바로 가겠소. 여기 하바로프스크에서 나의 선집이 이 가을에 출판되면 로어로 번역하겠소. 그러니 모스크바에서 만날 때까지 … “ 하면서 기차에서 내렸고 ‘이것이 나의 마지막 이별이었다.’고 황동민이 회상하였다고 최금순은 전한다. 그때 곧바로 모스크바로 갔더라면 그 악명 높은 ‘37년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 남아 높은 수준의 문학과 만나는 행운을 얻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험악한 시대에 태어나 탄압을 받으며 살다가 억울한 죽음을 맞았으나 한평생을 뜨거운 인간애로 모범적인 삶을 살았으니 작가 이전에 인간으로서도 우리의 본보기가 아니었던가 한다.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