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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맥아더 비판 (2)]
존 맥아더의 『다른 불』 비판
-존 맥아더가 통일교도라고?
맥아더의 논리 대로 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다-
-구요한 목사-
미국의 외골수 기적중지론자인 존 맥아더가 2013년 10월 개최한 “다른 불 컨퍼런스”(The Strange Conference)와 『다른 불』(The Strange Fire)이란 저서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성령운동에 대해 위기감을 느꼈는지 이전의 『무질서한 은사주의』(Charismatic Chaos) 보다 더 강도 높고 공격적인 비판의 포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포탄은 이전과 달리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맥아더가 방어하는 보수주의의 교세는 하락 일로에 있지만 맥아더파-반(反)성령운동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성령운동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교리적 윤리적으로도 성숙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맥아더파·반성령파들은 자기들이 편파적 성경해석, 건전한 체험의 결핍 및 논리적 오류로 인해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오해하고 폄하하면서 오히려 성경적으로 사역하는 성령운동파를 비난하고 있다. 이런 것을 사자성어로 적반하장, 후안무치, 허장성세, 호언장담이라고 한다.
맥아더에 대한 자세한 비판은 이미 필자가 "’존 맥아더의 '무질서한 은사주의'를 비판한다"에서 다루었고, 또한 미국의 성령운동파 두 분의 글을 통해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맥아더파-반성령운동파들이 공통적으로 저지르는 성경해석의 오류와 논리적 오류에 대해서만 다루고자 한다.
성경해석의 오류
-기적중지론, 은사중단론
맥아더는 ‘성경에 기록된 기사와 이적은 사도시대로 끝났다’고 주장하는 철저한 기적중지론자 또는 은사중단론자이다. 오늘날 성령운동파는 물론 보수적인 교회나 선교현장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기사와 이적을 존 맥아더는 모두 가짜가 아니면 마귀의 짓으로 폄하한다.
또한 혹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기사와 이적과 오늘날 성령운동파의 집회에서 일어나는 기사와 이적을 동일시하면 사도들의 은사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독특한 시대’를 살다간 ‘사도적 은사’, ‘계시적 기적’이라면서 한껏 치켜세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포함하여 신약의 신자들이 그런 은사를 구하지 않고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는 것을 정당화 한다.
이것을 한 마디로 비겁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기적을 행했다는 기록도 없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가록한 누가는 사도가 아닌 평신도이다. 그런데 사도가 아닌 평신도 누가의 기록에는 기사와 이적이 넘친다.
교회시대의 반(反)성령파들은 사도들을 한껏 치켜세워놓고 자기들이 초능력적 은사를 구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그런 것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패배주의 신학이자 궤변에 불과하다.
기사와 이적은 문명된 사회보다는 제3국에서 자주 일어난다.
단기 선교나 선겨 현장의 경험을 통해 잘못된 기적중지론에서 벗어난 목회자나 평신도들이 수도 없이 많다.
-계시종료론
공적 계시인 정경의 기록은 66권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사적 계시-음성듣기나 사적 예언-는 지금도 지속된다. 요즈음은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구하면(고전 14:1) 어린아이도 쉽게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이런 시대에 음성 한 번 듣지 못하고 환상 한 번 보지 못한 사람은 극히 드물다. 오죽 사모하는 마음이 없고 기도를 하지 않았으면 이런 시대에 음성 듣디 못하고 환상 보지 못할까?
-구속사적 해석의 결함과 모범적 해석의 보완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신약의 신자들이 반복하지 못할 길을 독특한 길을 걸어갔지만 동시에 우리 신앙과 사역의 모범이다. 이런 걸 부인하는 인간에게 고유한 모방 본능을 부인하는 자다.
-누가의 성령과 바울의 성령의 구분 미흡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 ‘사역적이고 경험적인 성령’(Ministerial and Experiential Holy Spirit)을, 바울은 ‘중생과 성화와 관련된 성령’(Regenerating and Sanctifying Holy Spirit)을 강조한다. 맥아더파-반성령파는 성령운동파가 누가의 성령만 강조한다고 비판하지만 자기들은 그들은 바울의 성령만 강조한 오류가 있다. 그 결과 성령운동파가 방방 뛰고(?) 감성적이라면 맥아더파-반성령파는 무기력하고 냉랭하다.
그 결과는?
성령운동파는 교회에서 방방 뛰고 감성적인 예배를 통해 은혜도 받고 스트레스도 해소하다 보니 전도도 잘하고 문제 해결도 더 잘 받는다. 냉랭하다 못해 제사 같은 예배를 드리는 반성령파의 교인들은 담대하지 못하여 상대적으로 전도도 잘 못하고 받은 체험도 없으니 쉽게 세속화 되거나 교회를 잘 떠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Kingdom Now vs Kingdom Later)
예수님의 초림, 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이 땅에 임했다. 그러므로 병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나고, 가난하게 자에게 복음이 임하여 구원을 현재적으로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때까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의 통치가 아직 완전하게 임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신약의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이미 already”)과 미래성(“아직 not yet)의 갈등과 긴장 가운데 살고 있다.
성령은 내세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성령 체험을 자주하는 성령운동파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신자는 모두 부자가 되어야 하고 병든 자는 모두 치유 받아서 건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령 체험이 없거나 희박한 사람들은 내세의 능력을 현세에서 잘 체험하지 못하니까 고난이나 가난을 강조한다.
이것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니까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는 것이다.
성령운동파가 보기에 가난과 질병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반/비성령운동파는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고, 맥아더파-비·반성령운동파가 보기에 부와 건강을 추구하는 성령운동파가 탐욕스럽고 경건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물론 양극단은 지양되어야 하며, 성령운동파는 물론 비·반성령운동파도 서로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는 겸허한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갈등과 긴장 가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 오류
-유유상종 회합 죄의 오류(guilt by association)
본인의 직접 체험이 없으면 '내용'를 모르니까 '외양'이 비슷하면 한 통속으로 간주한다. ‘유유상종 회합 죄의 (논리적) 오류’이다.
하나님의 특별 은혜는 신자나 불신자에게 고루 베푸시는 일반은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맥아더파-반성령파는 성령운동파의 집회에서 나타나는 익숙하지 않은 ‘신체적인 현상(들)’이 사교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성령운동파를 사교집단으로 매도한다. 그들은 존 칼빈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신자에게 ‘조용하고 은밀하게’ 적용하시는 성령에만 익숙하여, ‘요란하고 가시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요란하고 가시적으로’ 역사하신 기록이 많다.
(구약)
-하나님은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신을 충만하게 주어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성전 기물을 만드는 여러 가지 재주를 주셨다(출 31:3).
-사사들에게 임하여 육체적인 완력(physical strength)을 주셨다(특히 삼손)(삿 3:10; 6:34; 11:29; 13:25; 14:6, 19 등).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하여 사울 왕이 예언을 하고 벌거벗은 채 하루 종일 드러누워 있었다 (삼상 19:23-24).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을 만난 다니엘의 온 몸에 힘이 빠졌다(단 10:9-10).
-여호와의 신으로 인해 다윗이 시를 짓고 노래했다(삼하 23:2).
-하나님의 신이 에스겔을 일으키시고 다른 장소로 이동시키셨다(겔 2:2; 3:12, 14, 24; 8:3; 11:1; 행 8:39 참조―빌립을 이끌어 다른 장소로 옮김).
-꿈을 해석했다 (창 41:38; 단 4:18).
-성가대가 일제히 찬양할 때 여호와의 영광―성령―이 구름으로 임하여 모든 사람이 서서 섬기지 못하고 쓰러졌다(대하 5:13-14).
(신약)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기사와 이적들.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으셨다(마 12:28).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다(눅 10:21).
-하나님의 영광, 예수님의 말씀, 천사를 본 사람들의 몸이 뻣뻣해지고 쓰러졌다(마 28:4; 계 1:17).
-예수님에게 사역을 위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했다(눅 4:18; 행 10:38)
-오순절에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으로 임하셨다(행 2:1-3)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모인 사람들이 성령충만하여 방언하고 집단적인 방언통변이 이루어졌다(행 2:4-8).
-성령이 강하게 임하자 모인 장소가 흔들렸다(행 4:31).
-성령이 임하여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다(행 2:17이하; 4:31).
-성령이 임하자 성령 충만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행 2:4; 8:17; 10:44-46; 19:6).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하셨지만 사람이 보기에는 ‘이상하고 희한한 일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고 오늘날 성령운동파의 집회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사례가 전부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행적을 모두 기록하려면 이 세상이라도 모자랄 것이니까(요 21:25).
그런데도 맥아더파-반성령운동파는 성경의 이런 기록들은 신약의 신자들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자기들에게 체험이 없으니 체험 있는 자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이고, 외형이 비슷한 사교 집단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맥아더파-반성령운동파의 논리대로 라면 그들은 통일교도나 모르몬교도들이다.
예를 들어보자.
-불교, 통일교, 모르몬교는 물론 기타 사교집단도 자기들의 경전이 있고, 찬양이 있고, 강해(설법)이 있고, 기도가 있고, 헌금(공양)이 있다.
-기독교도 그렇게 한다.
-그들도 문서, 라디오, TV 인터넷을 통해 전도하고 양육한다.
-기독교도 그렇게 하고 맥아더파-반성령파도 그렇게 한다.
그렇다고 맥아더파-반성령파가 불교도? 통일교도? 모르몬 교도인가?
아니다.
‘외양’은 비슷하지만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성령운동파의 집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의 외형이 사교의 그것과 비슷하다 해서 사교 집단으로 매도하는가? ‘내용’은 맛도 보지 못하고 체험도 하지 못해서 모르니까 ‘외형’의 유사성만으로 평가하는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유유상종 회합 죄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이다.
그런데 반성령운동파의 대부분이 이런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사교 집단에서 ‘이렇게’ 하고, 성령운동파도 ‘이렇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교 집단이다?
이런 식으로 주장하면 모든 정통교회가 사교집단이 될 수 있다.
과대 일반화
맥아더파-반성령운동파는 성령운동을 폄하하기 위해 일부 성령운동파의 비윤리성과 비도덕성을 파헤친다.
-성령운동파의 비리가 이렇다.
-그러므로 성령운동은 잘못된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성령운동파에게만 그런 비리가 있는가?
칼뱅은 종교개혁 당시 ‘종교 경찰’을 동원하여 자기가 가르친 교리나 행동 준칙을 따르지 않은 사람을 가혹하게 다스리거나 처형했으며-그래서 비장로교인들은 장로교는 사람 많이 죽인 교단이라 생각한다-한국 장로교가 따르는 미국의 청교도들은 수없이 많은 원주민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재산을 강탈했다.
오늘날 미국이나 한국 교회의 비리가 성령운동파에게만 국한된 사실인가?
맥아더 못지 않게 반성령운동의 기수라고 자부하는 CRI의 행크 해네그라프는 불법으로 대표 자리를 강탈하고 자기가 비판하는 ‘번영 복음’ 전파자들 못지 않게 신도들의 헌금으로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한국의 대형 교단의 대표나 목회자의 비리는 어떠한가?
-성 추행 목사
-논문 표절 목사
-수십 억 공금 횡령으로 실형을 살고 나온 목사
-교회를 강탈하는 노회 임원들
-노래방 총회장
-10억 짜리 총회장 등.
입에 담기도 거북한 대·소형 비리가 줄 서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반성령운동파들은 이런 것에 대해서는 애써 침묵하고 있다. 외부의 모기 같은 잘못에는 대포를 쏘면서 내부의 낙타 같은 잘못에는 파리채도 들지 못한다. 자기들의 밥줄, 자기들의 회원권을 틀어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가?
맥아더파-반성령운동파는 더 이상 성령을 소멸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지 말고 자기들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성령의 역동성, 누가의 성령 회복-인가를 깨닫고 회개해야 할 것이다.
현실적 이유
-교인 이탈 현상
신자라면 일반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안다. 어느 운동이나 어느 지역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비상하게 나타나면 기존 신자들이 그쪽으로 몰리면서 교인 이탈 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면 교인을 빼앗긴 교회나 교단은 일단 이런 운동에 제동을 건다. 이단이나 사이비로 규정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손 쉬운 방법이다.
예수님이나 사도들 당시에도 사람들이 그쪽으로 몰리니까 기득권을 가진 종교지도자들은 교리적인 핑계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본디오 빌라도는 그들이 시기로 그렇게 한 것이란 사실을 알았지만 면피성 결정을 내린다.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마 27:18).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행 5:12-18).
-강의식 예배와 축제식 예배
개신교회는 중세시대부터 강의식 예배에 익숙해져 왔다. 앉아서 조용하고 점잖게 예배 드리는 것이 유일한 성경적 방법이라 세뇌되어 왔다. 그러나 사람은 흥이 나고 신이 나면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축제 현장에서 조용히 앉아있는 사람은 구경꾼들이다. 참여자는 흥겹고 신이 나서 온 몸으로 흥을 즐긴다.
성령운동파의 예배도 마찬가지다. 성령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는 예배이기 때문에 조용히, 가만히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은혜에 겨워 울거나 웃기도 하고, 죄의 책망으로 인해 통회자복하며 소리를 지르거나 딩굴기도 한다.
이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교인들이 이런 전인적인 체험을 하지 못하니까 예배 때는 점잖은 것 같지만 예배 후 교회에서나 바깥에서 스트레스나 아픔을 쏟아놓으면서 패가 갈라져서 시끄러운 교회가 한두 군데인가?
-영적 체험 유무
소명이 있고 신학을 전공한 목회자라도 하나님의 깊은 것들-예언, 방언 등-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런 경험을 한 신자들이 부담스럽다. 더군다나 자기가 신학적 오류가 있고 삶의 규모가 없으면 그런 체험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
그렇다면 그렇게 좋은 신학과 바른 전통을 가진 한국 정통 교단 내에 왜 그처럼 부도덕적인 비리-논문 표절, 성추행, 공금 수십억 횡령, 같은 노회 교회 강탈, 성직 매매, 노래방 총회장 등-가 근절되지 않고 있는가?
맥아더파-반성령운동파의 논리대로 하면 그들의 신학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
신학에 문제가 있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강조하는 구속사적 성경해석을 강조하고 예수님이 우리 삶의 도덕적 모범이라는 모범적 성경해석을 간과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 8:29).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필자는 맥아더파-반성령운동파가 하루 빨리 바른 신학과 바른 성령 체험을 통해 눈의 비늘이 벗겨져서 하나님이 하시는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