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의 감사(욥 1:20-22)
대민성결교회 / 이석민 목사
성도 된 우리는 무엇보다도 감사에 대하여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성도의 전유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병으로 죽을 뻔했다가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소녀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딸을 살려 주셨으니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 아닙니까?”라는 소녀 어머니의 말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만, 만일 당신의 아이를 살려 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좋으시지 않다는 말씀입니까?” 이 말에 그 여인은 당황하며 망설였습니다.
자기에게 유익한 결과가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세상사람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범사에 항상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그의 인도에 의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원하는 바대로 이루어질 때 물론 감사드리며 비록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곤경에 빠졌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사랑을 믿고 감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미션디럭스 설교묵상집]
우리에게 있어서 행복이나 불행사를 포함한 모든 생활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이 주인이신 하나님께 무조건 감사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편식하는 자와 같이 자기의 비위에 맞는 것만 골라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5장17절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바울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순경이 든 역경이든 언제 어지서나 매사에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좋은 일이 있고 순경일 때 감사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일이나 역경 중에도 감사하는 것은 성도 된 자들만이 가능합니다. 성도 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감사하여야 하는데 감사를 하다보면 감사하일만 생기고 불평을 하다보면 불평할 일만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감사 제목을 찾으면 천지가 감사 할 일들 뿐 입니다.
감사는 먼저 마음으로 감사하여야 하고, 다음으로는 소리 내어 말로 감사하고 마지막으로는 행위로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촛불이라면 타오를 때에만 촛불이요, 종소리는 종이 울릴 때에만 종소리인 것처럼 행복은 감사할 때에 진정한 행복입니다.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고 감사하다는 말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와야 행복합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는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에 의해 성도로 부름 받은 사람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는 감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감사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즉, 감사를 과거적 감사와 현재적 감사, 그리고 미래적 감사로 나누었습니다.
감사는 다 좋습니다. 그런 데 그분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과거적 감사도 좋고 현재적 감사도 좋지만 미래적 감사가 가장 좋다'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미래적 감사를 표현하는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현재 나에게 처한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도 은혜를 주시고 나와 함께 하신것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감사는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좋은 것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지금 내게 아무 것이 없어도 감사하는 감사가 최고로 수준 높은 감사입니다.
본문에는 최고의 감사를 한 욥의 신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욥은 형언할 수 없는 최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원망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감사하였습니다. 찬송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욥은 칠흑같이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에서 감사하는 신앙의 빛으로 우리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욥의 감사는 모든 것을 다 잃은 후의 감사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입니다.
정말 어려운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인생의 주관자이심을 믿는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무에서 출발한 존재이므로 나에게 주어진 만큼 그것이 크든 작든, 많든 적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최소한 그만큼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의 전환이 믿음이요, 감사를 가능케 합니다. 욥처럼 최고의 감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1.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입니다.(20-21)
[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욥의 위대한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토록 수고하여 얻었던 재물들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되어버리고, 그토록 애지중지 키웠던 7남 3여나 되는 아이들이 모조리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런 현재 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현재 점에서 과거를 보는 것은 비참합니다. 행복을 잃어버린 처절한 패배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인생의 출발점인 제로 점으로 가서 인생을 바라봅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올 때 자신은 붉은 몸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걸치고 나온 것도 쥐고 나온 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이제까지 인생에서 얻어진 모든 것이 욥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아무리 정 들여 키운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아예 이 아이들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 사랑조차도 줄 곳이 없는 불쌍한 자신이었을 것을 욥은 지금 죽어버린 자식들 앞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그러할진대 나머지 재물과 재산들은 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제로 점에 서 보니 이제까지 이만큼의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해 주신 것만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지금의 이 불행한 모습으로 오늘 당장 자신의 인생이 끝마쳐진다 해도 그간 누렸던 행복만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이름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욥의 신앙입니다.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신앙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비참한 자리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있었습니다.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행하시는 선하신 뜻에 온유한 복종을 나타내며 그 하나님께 찬송을 터뜨리므로 욥의 신앙이 곤두박질하기를 바랐던 사단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찬송은 그 분의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감사의 찬송을 올려 드릴 수가 있습니다.그 분의 섭리가, 그 분의 간섭하심이 마침내는 나에게 축복을 안기어 주시며 승리케 하시리라는 이 확신에 찬 믿음의 사람만이 어려움 속에서도 찬송할 수가 있습니다.욥은 곤경 속에서 유한한 인생을 경험하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대로, 만물을 자기의 목적대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욥은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라고 하며 구체적으로 찬양하였습니다.
사무엘상17장45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히브리서 기자는 다윗의 이 같은 행동을 곧 믿음이라고 보았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 11:32).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신앙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 이름으로 빼신바 된 이스라엘이 할례 받지도 못한 이방인들의 입에서 모욕을 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불명예였고, 모욕이었습니다.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은 곧 보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열심으로 나타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자신으로 간주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에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의존적입니다. 다른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 없이 홀로 살아갈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스스로 존재하는 분일뿐만 아니라, 다른 것을 존재하게 만든 분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즉 “여호와”는 ‘있게 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 만물을 있게 만드신 분’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인간도, 자연도, 우주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비롯하여,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하늘에 있거나 땅에 있거나 바다에 있거나, 그 어떤 것들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은 원래 없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있게 했기에 비로소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자신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창조된 자요,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았으면 자신은 없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는데서 그 이름을 부르고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그리고 온 땅에서 경배 받아야 할 거룩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그의 위대하심과 통치하심을 세상과 사람들에게 드러낼 때 그 이름을 부르거나 사용해야 합니다.
이사야12장4-5절에 “[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하나님께 구원 받은 자의 마땅한 의무는 구원자 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만민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해서 알리는 것이 구원받은 자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고 찬송하며 기뻐하는 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우리는 동시에 아직 이 구원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온 땅에 알게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욥처럼 열악한 환경에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 드리는 최고의 감사가 있기를 바라며 구원받은 자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범죄 하지 않는 것입니다.(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이유 없이 한꺼번에 큰 시련을 만났지만 오히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실지니이다 라고 감사하였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말과 행동입니다. 아니 웬만한 기독성도라 하더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결코 생각할 수도, 고백할 수도 없는 말입니다. 오늘날 만일 어떤 교인이 자기의 전 재산과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들까지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리는 재난을 당한다면, 그 교인이 그 다음 주일에도 교회에 나와서 이전과 똑같이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올바르게 찬송을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욥은 자기에게 있던 모든 물질뿐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까지 다 취하여 가신 하나님앞에 범죄 하기 쉬운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욥이 바른 성도라면 꼭 가져야 할 신앙의 최고 정수, 곧 '하나님 절대주권의 신앙'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는 고백은 바로 그 신앙 때문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소유권자가 오직 하나님이시며, 그 '모든 것'에는 자기 재물은 물론이요 자기 생명과 자기 자식들의 생명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평소에도 늘 잊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믿고 살던 진짜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본문은 욥의 그 엄청난 고난을 받으면서도 범죄하지 않았다고 가르쳐줍니다. 이는 휼룡 하다는 것이요 상 받을 만한 신앙임을 보여 주십니다
욥기서2장10절에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사실 엄청난 실패나, 처절한 아픔이나, 혹은 병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분노’라고 합니다. 그런 입장이 되면 누구나 그 누군가를 향하여 저주하면서 울분을 터뜨립니다. 욥기서에서 살펴 본 대로 사단이 볼 때 욥이 드디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그의 신앙을 버릴 때가 되었다고 할 바로 그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이 전부를 잃은 그 순간, 사탄의 기대를 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말이나 행동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욥은 신앙을 포기하기보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하였습니다.
욥은 고난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고난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사는데 왜 우리 가정에만 이런 고난이 오는가? 납득하지 못합니다. 욥의 아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여보, 우리가 신앙생활을 안했습니까? 십일조를 안했습니까? 정직과 순결을 지키고 주일성수도 잘 했는데 왜 이 꼴이 되었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습니다(욥 2:9,10). 그러나 욥은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욥은 자기의 순전한 믿음을 지켰다고 말하였습니다(2:3).
사실 욥처럼 법죄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욥처럼 범죄하지 않을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시편119편11절에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는 사람은 범죄하지 않습니다. 범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모든 삶의 표준을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하나님 말씀을 좇아서 가나안을 향해 나고, 요셉은 극심한 유혹을 받으면서도 말씀으로 그 인격을 온전케 하였으며, 다니엘은 말씀을 의지하였기에 불의와 타협치 않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강력한 힘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단이 시험할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느니라" 하시면서,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을 양식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능력이 있어서, 말씀을 의지하면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환난이나 곤고나 역경 속에서도, 온전케 되는 은혜를 받게 합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우리를 온전케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하였으니, 우리가 하나님 음성을 들으려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둘 때 범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욥은 그 극심한 고통 중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가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단순히 우리의 창고가 가득 찼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의 빈 창고를 채워 주실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찬송하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우리의 삶을 친히 다스리실 것을 믿기 때문에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옛날 욥이 그랬던 것처럼,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어떤 고난이 닥칠지라도 입술로도 범죄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찬송하는 최고의 감사가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원망은 사람 편에서 욕구가 채워지지 못할 때 나오는 개인적 태도입니다. 일을 마땅찮게 여기거나 책임을 전가하며 불평을 휘두르는 것이 원망인데, 원망은 죄 아래 있는 사람의 쓴 뿌리입니다.
원망은 본인도 괴롭고 타인도 괴롭힙니다. 원망은 쇠 힘줄처럼 질겨서 좀처럼 사람의 삶 속에서 끊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양이 있고 도덕 훈련을 받았다 하더라도 원망은 사람의 내면에 숨겨져 순간순간 나도 모르게 숨처럼 토하여 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 참담한 슬픔의 와중에서도 그릇된 일을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어려움을 당하면 원망부터 하게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욥도 재산과 종들을 죽인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고 원한 서린 말과 보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식들을 죽인 것이 자연이라 할지라도 태풍을 원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어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닥친 어려움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 왔었는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탓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망’은 나에게 불행이나 좋지 않은 일이 닥쳐왔을 때 남을 탓하는 것, 불평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욥은 자기가 잘못이 아닌 사단 마귀의 시기와 질투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어렵게 하실 분이 아님을 믿었고 설령 그렇다 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며 사랑한다면, 어떤 경우와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원망에 대하여 성도들이 이 땅에 살면서 빈번하게 범하는 죄악 중 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40년 동안의 광야의 여정에서 제일 많이 지은 죄도 원망의 죄입니다.
민수기11장1절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가는 동안 조금만 어려운 일에 직면하여도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10징10절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원망하였던 역사적인 사례를 들어서 사도바울은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특별히 기억하여야 할 사실은 '감사는 축복의 통로이며 원망은 멸망의 통로'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인생을 실패하고 좌절한 사람들과 단 5분만 대화를 하여도 그의 입에서는 모든 탓을 남에게 돌리면서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모세에게 전가하였습니다.
왜 당신은 우리를 광야로 이끌어 내서 이 고생을 하게 만드는가? 모든 것이 남의 탓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탓합니다. 남편 탓, 자식 탓, 부모 탓. 나라 안에 무슨 일만 생기면 다 정부 탓, 대통령 탓입니다. 밤낮 정치인들 욕하지만 그런 정치인을 뽑아 놓은 사람은 누굽니까? 내가 못사는 것도 남의 탓이요, 천재지변도 남의 탓입니다. 심지어는 살인 강도짓을 한 후에도 남의 탓을 합니다. 모든 원망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을 철저하게 간섭하고 섭리하고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 가운데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으시는 일도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관여하심을 알면서 원망한다면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내게 힘든 일이 생겼다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메세지가 있습니다.
원망하는 죄는 신앙인들이 범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쩌면 가장 무서운 죄가 원망하는 죄일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웃을 원망하고 형제를 원망합니다. 원망은 감사를 빼앗아 가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마음을 앗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시는데 원망은 이 모든 것을 빼앗아가 버립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장 비 신앙적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 중심적으로 믿어야 원망하지 않습니다. 나 중심적인 믿음은 늘 우리의 삶을 조급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내 삶이 나의 판단대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내 판단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빌립보서2장14절에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여기서 바울이 지금 강조하는 말은 “모든 일”입니다. 어떤 일, 어떤 경우든 간에 원망과 시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능력을 주시는데 그 능력은 반드시 기쁨과 감사입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욥은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조그마한 일에도 원망을 하며 불평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욥을 볼 수 있습니다. 원망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감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