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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론 논쟁 연구 : Appollinarianism - Chalcedon 공의회 이후
기독론 논쟁 연구 : Appollinarianism - Chalcedon 공의회 이후
목 차
Ⅰ. 서론 / 2
Ⅱ. 칼케돈 이전의 기독론 / 2
1. 아폴리나리스 / 3
2. 네스토리우스와 시릴의 논쟁 / 4
Ⅲ. 칼케돈회의와 기독론 / 6
1. 칼케돈회의의 소집원인과 결과 / 6
2. 칼케돈회의의 배경 및 논쟁내용 / 7
3. 칼케돈신조의 영향 / 9
Ⅳ. 칼케돈 이후의 기독론 / 9
Ⅴ. 결론 / 10
참고문헌 / 10
Ⅰ. 서 론
신약교회 후 교부들 시대까지는 세계적인 기독교 회의가 없었다. 다만 한 지방에 국한된 종교회의가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3세기에는 칼타고,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등 지방대회가 열렸고, 4세기 초까지 지방대회가 더 확산되었다.
그러나 AD313년 콘스탄틴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후부터는 세계적인 교회회의가 열리게 된다. 313년부터 580년 초대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즉위할 때까지 교회 회의는 여러 차례 거듭된다.
기독교 세계 종교회의가 여러 번 개최되고 기독론에 관한 끊임없는 논쟁을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인격을 완전히 표현하지 못했다.
당시의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몇 가지 왜곡된 주장들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의 신성을 약화시킨 아리우스의 주장,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고 인성을 약화시킨 라오디게아의 감독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 기계적인 양성관계를 말한 콘스탄티노플 감독 네스토리우스의 주장, 그리스도 안에서 양성의 연합을 강조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시릴의 주장, 마지막으로 보다 깊은 사색에서 주장한 강력한 신인 양성의 연합을 말한 콘스탄티노플의 노수도원장인 유티커스의 주장들이었다. 이러한 배경아래에 451년 콘스탄티노플 인근에 있는 칼케돈에서 대종교회의가 열린다
그리스도의 성품과 의지론 즉 기독론 논쟁은 교회사적 측면에서나 조직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기독론 논쟁이란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체 안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서 쉽지 않는 논쟁적 흐름의 역사 안에서 정리되어 왔고 정립되어져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지를 가지셨는가? 아니면 인간의 의지를 가지셨는가? 하는 의지론에 대한 부분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스도의 두 성품과 의지가 역사적인 기독 논쟁 속에서 어떻게 바르게 확립되어 왔는지에 대한 기독론의 확립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칼케돈 이전의 기독론
예수 그리스도안엣 신성과 인성이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그리스도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신성을 가진 이로서 신앙과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를 하나님의 참 아들로서, 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로 믿고 예배하는 것이 신학에 선행한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재언하면, 절대적인 구원은 절대적인 신전 구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가 친히 누구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에게 대한 믿는자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를 더 자세하게 설명한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연히 다른 설명이 생기게 되어 기독론의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1. 아폴리나리스
성자의 신성교리가 공식적으로 확립되자, 자연히 그리스도 안에 병존하는 양성간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기독론의 문제를 최초로 진지하고 암시적인 방법으로 제기하여 다룬 이는 라오디게아의 감독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AD9년경)였다. 그는 탁월한 이지적 성품의 소유자였으며, 타산적인 작가요 '니케아 기독론'의 유능하고 열광적인 옹호자였으며, 한때는 정통주의의 수호자이기도 하였고, 한동안은 아다나시우스와 친구지간이었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 자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서 유지될 수 있느냐?" 하는 중요하고도 까다로운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그는 만일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과 결합되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두 개의 주체, 즉 본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인격과 양취에 의해서 아들이 된 인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일은 유지되어야 했다. 만일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다면 그의 무죄함은 보증될 수 없으며, 두 의지 사이의 조화를 이룰 길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죄를 범하기 쉽고 변하기 쉬운 존재가 될 것이며, 구속사업을 수행하는데 적합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문제는 해결 하기 위해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육체와 영혼과 그리고 인간의 이성 대신인 로고스로 이루어졌다고 가르쳤다.
클레도니우스에의 편지에 보면 아폴리나리스는 주장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을 지닌 사람을 경배할 것이 아니라, 육신을 지닌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즉 아폴리나리스의 근본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완전한 하나님을 그 직접성에서 보려는 것이요, 그리기 위하여서는 그는 완전한 인간으로 보기보다 인간에 있어서 육신만이 인성이요 영혼의 부분은 그리하여 아폴리나리우스는 그 적대자들을 비난하여 '인간 경배자'(Anthropolater)라고 불렀고, 그레고리는 아폴리나리스를 향하여 '육신 경배자'(Sarcolater)라고 불렀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성품을 최초로 진술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약화시켰고 지나치게 철학적이고 이성적 사고로 신적이성(로고스)를 주장하였다.
결국 가현설로 기울어질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으며 단성론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여러 종교회의(로마종교회의, AD377; 알렉산드리아 종교회의, AD378; 안디옥종교회의, AD379)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2. 네스토리우스와 시릴의 논쟁
1) 안디옥학파
안디옥학파는 형이상학적 사변과 기독교의 심오한 신비적 요소를 배격하고 성서를 문법적 역사적 해석 방법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그의 인간성을 주로 강조한다. 안디옥 학파의 기독론은 한마디로 말씀-인간-기독론이며 대표적인 사람은 네스토리우스 이다..
안디옥학파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인간 예수의 몸 안에 내주 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두 성품은 진정한 결합을 통해 인격의 통일을 이룬 것이 아니라 조화된 의지의 일치를 통해 도덕적으로 결합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마리아를 "인간의 어머니"(anthropo-tokos)라고 부른다.
결국 이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각각 강조하여 분리를 주장하는 극단으로 흐르게 되었다.
2) 알렉산드리아학파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다나시우스인데 그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주장하였고 신성과 인성의 주 성품이 항구적 결합에 의해 한 인격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θεοτοκ )라고 불렀다. 이 학파의 신학은 카파도기아 교부들에 의해 확립되었고 시릴(cyril)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 학파의 기독론은 말씀- 육신-기독론이다.
3) 네스토리우스와 시릴의 논쟁
본질적인 기독론 논쟁은 안디옥학파를 대표하는 네스토리우스와 알렉산드리아학파를 대표하는 시릴의 신학이 대립 충돌함으로 시작된다.
(1) 네스토리우스
웅변가이며 경건성과 난폭성을 동시에 소유한 네스토리우스는 428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인간인 마리아가 그리스도에게 신성을 부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성은 마리아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그를 인간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마리아에게서 나신 이가 신성과 결합되어 있음으로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으나 피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낳을 수 없으니 진정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어머니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는 말은 비유적 의미에서 쓰일 뿐이라고 한다.
네스토리우스는 제국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동정녀 마리아에게 적용되던 "테오토코스"라는 호칭 사용문제를 놓고 점차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양측으로부터 설명을 들은 그는 설교를 통해서 그 호칭은, "태에서 조성된 것은 하나님이 아닌"까닭에 부적합하다는 판결은 내렸다. 그는 덧붙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진 자(즉, 인성) 안에 계셨다"라고 하였고, "하나님을 지닌 자는 그를 지닌 분 때문에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kos)란 용어를 선호한다고 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오직 한 인격 안에 두 성품을 가진 그리스도를 가르쳤지만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있는 두 성품을 지나치게 구분(구별)함으로써 두 아들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이라 비난을 받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알레산드리아의 감독인 시릴과 기독론 논쟁을 가지게 되는데 431년에 에베소에서 열린 제 3 차 세계 종교회의에서 정죄를 당한다.
(2) 시릴
알렉산드리아 시릴은 자신에 대한 고소사건이 황제를 통해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인 네스토리우스에게 맡겨지자 시릴은 전통적인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를 반대하는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이 이단이라고 선전하며 정죄문을 만들어 황실과 교계 지도자들에게 보내어 자기의 세력을 규합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시릴이 승리한 것 같았다. 이는 그의 정치적인 수완의 노력 때문이었다.
시릴의 기독론은 역사적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인간이 되신 로고스로서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시릴은 "신-인간"(God-man)의 두 성품의 인격적 결합을 강조하였다. 두 성품은 서로 교체될 수도 없으며 서로 혼합될 수도 없다. 또 한 성품이 다른 한 성품을 병합하는 것도 아니며 신성이 인성가운데에 내주 하는 것도 아니다. 두 성품은 각각 자기의 속성을 보유하고 있다. 시릴은 양성의 결합에 있어서 로고스의 주체됨을 강조하느라 인성의 의지나 인격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Ⅲ. 칼케돈회의와 기독론
1. 칼케돈회의(AD451, Chalcedon)의 소집원인과 결과
1) 회의 소집 원인
에베소회의가 끝난 후에도 계속하여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것은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이라고 배척한 시릴당 중에서도 다른 의견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수도원 원장인 유티케스(Eutyches)가 신인양성의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양성의 구별을 어렵게 만든 것에도 원인이 있었다.
즉, 유티케스에 의하면 성육신 때 그리스도의 양성(신성, 인성)은 하나의 신인단성(Monophysitism)으로 연합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같은 단성론은 쉽게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즉, 무소부재한 것이 신의 속성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무소부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예수의 인성은 우리와 다른 신체를 가졌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유티케스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 인성과 다르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이 주장 때문에 데오도시우스 황제를 충동하여 449년에 에베소대회를 열고 심한 몸싸움을 하다가 콘스탄티노플 감독인 '플라비안'(Flavian)이 맞아 죽는다.
이같은 극렬한 싸움을 중재하려고 로마 감독으로 있던 '레오'(Leo I)의 주선으로 451년에 데오도시우스 후임인 매제 '마크리누스'(Macrinus)의 명으로 '칼케돈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칼케돈회의에는 630명의 감독이 참석했다.
2) 회의 결과
이 칼케돈회의에서는 레오가 보낸 서한(Leo of Tome)을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공히 인정한 소위 말하는 '칼케돈신조'(Chalcedon Creed)가 채택된다. 이 칼케돈신조는 삼위일체 교리의 확립을 위한 결정적 신조로 전해지고 있다.
칼케돈신조의 전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서도 완전하시고 인성에도 완정하시어 참 신이시고 참 사람이시며 이성이 있는 영혼과 육체를 구비하셨고 신성은 아버지와 동질이시고 인성은 우리와 동질이시며 죄를 제외하고는 전혀 우리와 같으시며 신성으로 말하면 만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시고 후세에 와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모 마리아에게서 인성으로 나셨다'고 했다.
여기 칼케돈회의에서 교리논쟁을 하나의 신조로 채택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은 로마교회 감독인 '레오'(Leo)의 힘이었다. 그동안 동방 교회들끼리 교리 논쟁으로 많은 정력과 시간을 소모하는 동안 서방교회인 로마교회가 조용히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칼케돈신조가 완전한 문제 해결책은 아니었으나 그러나 로마교회의 힘을 크게 드러내는 데 큰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2. 칼케돈 회의의 배경 및 논쟁 내용
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아다나시우스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임을 밝혔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문제를 가지고 신학자들 사이에 이론(異論)이 많았다. 즉 그의 한 존재 안에 신성과 인성이 어떤 모양으로 연합되어 있느냐의 어려운 문제였다. 신인양성을 믿으면서도 그의 신성을 더 우세한 것으로 강조한 사람들은 주로 알렉산드리아 학파(네스토리우스파,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에 속했었고, 그의 인성의 약화를 막으려는 막으려는 사람들은 주로 안디옥 학파(유티케스)였다. 이러한 기독론의 역사적인 논쟁들을 일괄하여 종식시키고 정통신조를 확립할 목적으로 로마의 감독 레오(Leo)가 449년 6월 13일에 플라비안(Flavian) 황제에게 보낸 편지 톰(The Tome)에서 논쟁의 해결을 위한 신학적 시론을 발표하였었다.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는 451년에 칼케돈에서 제4차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회의를 소집하였다.
1) 네스토리우스(Nestorius)와 유티케스(Eutyches)의 주장
벌코프(Louis Berkhof)는 당시 그릇된 교리를 주장하였던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몹수에스티아의 데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와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했고, 그 안의 로고스의 내재를 신자들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똑같이 누리는 단순한 도덕적 재주로만 이해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람을, 곧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동참하지만 단일한 인격적 생명의 하나 됨에서는 그와 하나가 아닌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즉, 두 인격으로 구성된 한 중보자로 보았다.
이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시릴(Cyril of Alexandria)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단일성을 강조했고, 그의 반대자들은 그가 양성을 부인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반대자들이 오해한 듯싶지만, 유티케스와 그 일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의해 흡수되었거나 양성이 융합하여 단일한 본성이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그 근거로 시릴을 인용하였다."
2) 칼케돈회의의 결정
칼케돈 신조를 발표하여 바른교리의 척도로 삼았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교부들을 따라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한 분이신 유일한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또한 사람으로서 완전하시며(teleion), 그는 실제로 하나님이시며 또 실제로 사람이시며, 합리적인 영혼(Psyches logikes)과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신성에 관한 한 그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타고 나셨고 또 그의 인성에 관한 한 그는 다만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 시간(aionon)이 시작하기 전에 그의 신성은 성부에게서 독생하였고 그리고 그의 인성은 우리의 본질을 타고 나셨다. 이처럼 다만 죄를 제외하고는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 시간이 시작하기 전에 그의 신성은 성부에게서 독생하셨고 그리고 지금 마지막 날에 와서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니, 그이 인성(anthropoteta)면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이시다.
우리는 이 한 분의 유일하신 그리스도-성자, 주, 두 가지 본성(physesin)을 타고 나신 독생자를 인정하며, 이 두 가지 본성이 혼동(asunkutos)되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하거나(atrepotos), 두 다른 분리된 범주로 갈라지거나(adiaretos), 양성의 영역과 기능에 따라 각각 대립(achoristos)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 각성의 특성은 연합으로 인하여 무효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각성의 고유성(idiotetos)이 보존되고 양성이 한 품성과 한 자질(hypostasis)로 일치를 이룬다. 양성은 갈라지거나 두 품성으로 분리될 수 없고 오직 합하여 하나님의 한 분이시며 유일하게 독생하신 로고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옛 예언자들도 이렇게 증거하였고 주 예수 그리스도도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셨고, 교부들의 신조도 이렇게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단성론을 정죄하고 그리스도의 양성과 한 인격을 고백한 칼케돈 신조는 기독교의 중심된 신앙의 내용을 건전하게 발전시켜서 네스토리우스주의자인 Scylla의 이원론과 유티커스주의자인 Charybelis의 단성론을 모두 피하게 해주었다.
칼케돈 회의에서 확정된 내용중에서 중요한 것은 성의 이중성인데 정통교리는 유티케스주의와 대항하여 성육신 이후에도 성의 구분을 인정하되 양성은 변화나 여전히 신적 의지대로 남아 있고 인간적 의지는 여전히 인간적 의지 그대로 남아있지만, 이 두 성품은 계속해서 하나의 동일한 생활을 하면서 삼위의 각 위들처럼 상호 교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Louis Berkhof는 칼케돈 신조의 진술에 관한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4가지를 들고 있다.
① 양성의 특성은 일위에 속한다. 예를 들면, 전지(全知)와 제한된 지식과 같은 것이다. ② 신인의 수난은 참으로 무한한 것일 수 있으나, 그 신성은 감각할 수 없다.
③ 그리스도의 인격의 근거와 기초를 이루는 것은 인성이 아니고 신성이다.
④ 로고스는 어떤 독특한 인간 개체와 연합한 것이 아니라, 인성과 연합한 것이다. 처음부터 신격의 제2위와 연합된 개인이 있은 것이 아니라 동정녀의 복중(腹中)에서 인간의 본질과 연합한 것이다.
3. 칼케돈 신조의 영향
이러한 칼케돈 신조는 동방, 특히 발칸반도의 저속화 된 기독교를 정화하기 위하여 753년 콘스탄티노플 노회에서 결의한 '성상 반대 결의'에 기본 정신이 되었다.
Ⅳ. 칼케돈이후의 기독론
칼케돈 회의 이후 씨릴과 유티케스의 지지자들은 일성론자라고 불리어졌다. 그것은 연합후의 그리스도의 성을 혼성적인 것이었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구별된 양성을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구별된 양성은 필연적으로 논쟁들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칼케돈 이후 나온 중요한 이단이 일의설(Monothelistes)이다. 그 명칭이 보여주는 대로, 그들은 인격의 통일성을 출발점으로 하여 그리스도안에는 한 의지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교리는 두 개의 형태를 취하였는데, 그 하나는 인간의지가 신적 의지안에 연합되는 후자만이 역할을 한다고 보았고, 다른 하나는 신적의지와 인적의지가 혼합한 결과로 합성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일의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의설파(Duothelites)라고 한다. 이들은 그들의 이론의 출발점을 이중적인 성에 두고, 그리스도안에 두 의지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AD 680년에 열린 제6차 콘스탄티노플 세계교회 회의 는 로마감옥의 협력을 얻어 두 의지의 교리를 정통적 입장으로 받아들였으며, 동시에 인간의지는 신적의지에 항상 예속되는 것으로 결정했다.
Ⅴ. 결론
칼케돈 신조는 회의에서 결정된 이후로 정통견해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신조를 제시하는 목적은 이단을 추방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이것은 소극적인 내용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다 더 타당할 것이다. 칼케돈에서는 하나의 표준적인 기독론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칼케돈 신조는 한계를 설정하여 그 안에서 정통 기독론이 유지되도록 한 것이다.
Louis Berkhof는 이점에 대하여 표현하기를 칼케돈 신조는 "양극단의 견해를 전부 정죄하고, 위(인격)의 단일성(unity)과 양성을 함께 주장했다"는데 큰 의의를 두지만 아쉬운 점에 대해서는 "니케아 회의가 삼위일체 논쟁을 끝마치지 못한 것처럼 칼케돈 회의도 기독론 논쟁의 종결을 짓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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