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개항장이었던 인천은 많은 근현대사의 유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역사속의 인천 이야기는 의외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 미처 알지 못했던,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통해 인천의 숨은 매력과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한다.
화수동-만석동 사택촌, 감시와 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화수동 만석동 일대에는 아직도 일제 강점기 세워진 조선차량주식회사, 도코 지포전기, 조선기계제작소의 사택마을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대단위 공장이 세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사택이 들어선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고만 단순하게 생각했다. 수년 간 이곳을 다니면서 이 집들은 누가 살던 집이었을까? 무척 궁금하였지만 알 수가 없었다. 굿모닝 인천 유동현 편집 장이 집필한 ‘골목, 살아지다’(2013. 인천광역시)를 읽으면 그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끈질긴 삶터 달동네’를 집필한 한겨레신문 김은형 팀장을 만나 답사를 다니다가 우연히 이 간부사택을 사는 주민을 만나면서 집안을 들어다 보는 기회를 가졌고, 지난 5월 인문학 골목투어를 다니면서 집안 내부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리고 화수동 안으로 더 걸어 들어가면 미륭아파트 건너편 골목에는 조선철도 공작창 사택 4채가 나온다. 다음 골목으로 들어가면 東京芝浦電氣 인천공장 사택이 나온다. 그리고 더 안쪽우로 들어가면 東京芝浦電氣 사택이 나온다. 이 일대가 사택마을이었음을 보여준다. 길을 건너가면 화수2동 마을공원이 나오는데 공원 일대가 조선기계제작소 숙련사원 사택이다. 22~3평 되는 연립형 주택으로 아직도 3동 15채만이 남아 있다. 예전에는 이 일대가 사택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뒤쪽 건너에도 조선기계제작소 노동자 사택이 있다. 좌우로 5채씩 있으면 그 사이로 통로가 있으며, 통로 위를 지붕으로 덮어 마치 실내 같았다. 집안에는 2층 계단이 있고 2층은 테라스형 쪽방이 있다. 그리고 통로 끝에는 공동화장실이 있다. 앞쪽 집에는 도로 쪽으로 창문이 있었는데 소방도로를 내면 이마저도 시멘트 블럭으로 막아버렸다고 한다. 돔형 노동자사택이다.
만석동으로 가다보면 만석부두 입구 만석다방 안쪽으로 골목이 나타난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꼬방들이 나온다. 현재는 빈집들로 2층 구조이다. 안으로 살펴보면 들어서자 약간 들어간 부엌이 나오고 그리고 방이 나온다. 방 우측으로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온다. 이곳이 조선기계제작소 노동자숙소였다고 한다. 일제 말기 군수공장 체제로 전환하기 전까지는 이곳이 노동자면서 5천명의 노동자들이 일을 하면서 만석동 언덕(괭이부리마을)에도 쪽방을 지어 강제 동원된 노동자들을 수용했다고 한다. 판자 2층 하꼬방을 짓고 노동한 집에 6~7명씩 수용하여 생활을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왜 이렇게 조선기계제작소 등 대규모 공장들은 사택마을을 이렇게 짓고 조선인노동자들을 집단수용하고자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인 노동자 복지혜택을 부여하기 위해서 일까? 그렇다면 그들의 임금을 현실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조선인노동자는 1/2에 불과한 차별적 임금을 받았다.
인천 만석동-화수동 일대 대규모 공장을 설립한 일본기업은 왜 사택마을을 조성했을까? 일제 강점기 노무관리를 한 바 있는 전직 직원으로부터 그 실마리를 들은 적 있다. 그는 가정형편으로 다니던 경성공업학교를 중퇴할 수 없었지만 일본인교사의 소개로 조선기계제작소 공원으로 취업하였다가 노무관리직원으로 전환되어 근무하다가 1950년대 중반 그만두었다고 한다. 의 증언을 보면 사택마을 조성을 통해서 노동자를 통제하거나 관리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여자들이 특히 나이 어린 여자들이 많이 다녔던 동양방적은 지방에서 올라온 애들이 많아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남자들만 다니는 조선기계작소는 공장 안에 기숙사 같은 것은 없었지. 다 공장 밖에 사택을 지어줬어. 맨 처음에는 화수동에다가 일본인 간부사택을 지었는데 미국하고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며 발전기 만드는 회사가 무기를 만드는 회사로 바뀌더라고 그리고 공장도 커지고 직공들도 많이 들어왔어. 조선기계제작소만 그랬나, 동경 지포전기도, 철도공작창도 다 공장 근처에 그렇게 사택을 많이 지었어. 나중에는 송림동 언덕빼기에도 하꼬방을 지었지. 그 때는 조선인 기술자는 경성공업 출신들이 많이 있었어. 일본놈들보다 실력이 훨씬 좋았지. 그런데도 차별을 했어. 그건 일본간부들도 인정했어. 차별한 거지. 조선인이라고. 공장은 둘로 나뉘어서 작업을 했는데 1공장은 일본인들만 들어갈 수 있었지, 조선인은 경성공업출신 중 확실한 사람만 출입할 수 있었어. 아주 통제가 철저했어. 2공장은 그냥 나눠져서 부품만 만들었어. 맡겨진 부품만 만졌지. 뭐를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게 했어. 그래서 사택도 구분했어. 일본놈들은 간부사택, 기술자 사택에서 살았지. 서양식 2층에 마당도 있고, 안에 들어가면 복도가 있고 넓은 다다미방 2개, 작은 다다미방 1개가 있고, 계단으로 올라가면 큰 다다미방 1개, 작은 다다미방 1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 수문통 따라 있었어. 얼마 전 가보니까 아직도 그 집들이 있더라고. 그런데 많이 없어졌더라고. 무슨 학교야, 보통학교 옆으로 쫙 일본인 간부사택이었어. 그리고 화수동 공장 바로 옆에는 일본인 기술자 사택이 있었어. 튼튼하게 잘 지은 집이었어. 나가야 라고 하는데 안으로 긴 집이었어. 들어가면 창문이 그리고 현관이 있고 집안에 화장실이 있었어. 마루 사이로 방이 2개가 나누어져 있었고, 작은방 1개가 있었어. 20평이 넘는 집이었지. 뒤편에는 정원도 아담하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 거기 자주 놀러 다녔지. 조선인 근로자들은 하꼬방에 살았어. 대부분 혼자니까 목조로 대충 2층집을 짓고 7~8명씩 살도록 했어. 새벽부터 일 나가면 밤늦도록 돌아오니 그냥 잠만 자는 숙소에 불과했어. 사람 사는 곳이 아니지. 다닥다닥 붙어 있고 나무판자나 대고 지은 집이라 나는 그곳에 자주 가지 않았어. 나름대로 경성공업 다녔다는 자부심이라고 할까. 그게 작용했지. 차별이라고 하나. 부질없는 것인데 일본놈들이 그렇게 차별했으니까 나도 그렇게 물든 거지.공장 일을 하다가 똑똑하고 업무처리를 잘한다고 노무관리를 하는 부서로 갔어. 그때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5천명이었어. 일제가 전쟁을 한참 할 때이니까. 학교 다니는 학생들도 강제동원 시켜서 많이들 왔어. 1공장은 2천명, 2공장은 3천명 정도가 일을 했어. 1공장 2천명도 부품을 조립하는데 완성조립이 아니지. 1천 5백명은 부분조립하고, 일본인 핵심기술자, 일부 조선인기술자 500명이 안 공장에서 잠수함을 조립한거야. 그러다보니 감시 감독체계가 엄격하고 매우 치밀했어. 공장은 물론이고 공장 밖에서도 감시 통제를 했어. 빨갱이들이 공장에 침투해서 아무도 모르게 공장 직공들을 빨갱이 교육을 하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있어. 들어올 때도 신원조사도 하지만 막을 순 없지. 그래서 공장에서 부품 만드는 조선인들이 사는 사택에는 철저하게 교육시킨 밀고자를 두고 관리를 했지. 수상한 조짐이 있으면 바로 공장 노무관리과로 보고가 되고 그 다음날 공장을 그만 두게 하고 일본 고등계 경찰에게 신고해서 체포 조사하도록 했어. 그리고 집들을 수색해서 이상한 물건이 있는지도 완벽하게 확인했지. 이건 조선기계제작소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다 그렇게 했어. 출근할 때도 함께 하고 퇴근도 함께 하고 잠도 함께 자도록 했고. 그러니까 통제 관리를 쉽게 할 수 있었지. 빨갱이들이 침투해서 점조직을 만들어 골치 아픈 일이 생길까 무척 노심초사했지. 해방되고 보니 이미 빨갱이들이 손을 다 뻗고 있었고, 열에 아홉이 빨갱이가 주도하는 전평에 들어갔어. 참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어. 어떻게 들키지도 않고 사람들을 빨갱이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내색도 전혀 없이 살았는지. 참 사람이 무섭다는 것을 그때 처음 맛보았어. 그때 얼마나 힘들게 일을 했는지 몰라. 그 사람들 나중에 주먹대장 김두한 있지. 그 사람 패거리들 족청이라고 했는데 서울에서 트럭타고 내려와 모두 쓸고 갔어. 그리고 이북사람들이 들어왔지. 빨갱이들은 다 쫓아냈어. 한마디로 물갈이를 한거지.“ “(노**. 2007년 10월 6일 인터뷰, 당시 82세.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귀룡골 거주. 조실부모하고 큰아버지가 키워주었다고 한다. 불은보통학교를 다녔는데 큰아버지는 보통학교만 다니라고 했지만 담임교사가 너무 똑똑한 아이라고 서울 경성공업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3학년 다니는데 갑자기 큰아버지가 학비 및 기숙사 일체를 지원하는 것을 중단해 중퇴를 하였다고 한다. 안타깝게 생각한 와타나베 교사가 조선기계제작소 취업을 주선해 일을 하였다고 한다. 이때가 18세였다고 한다. 처음 기술직으로 시작했으나 작업처리 능력이나 대인관계가 좋다는 평가를 받아 노무관리 일을 했다고 함. 그리고 해방 후에도 일을 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요구함. 일제강점기 조선기계제작소 노무관리 직원으로 근무한 까닭에 자신의 발언을 최대한 자제를 하고, 조심스럽고 자신에게 불리할 수 있는 말은 절대 자세하게 말을 하지 않았다. 당시 조사 목적은 강화 민간인 학살 실태조사인 까닭에 더 이상 묻지는 못했다. 2013년 불은면을 지나가도 방문했을 때 이미 고인이 되었다.)
출처 : 인천시 인터넷신문(발행 재1035호 2015.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