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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풍물이란 풍물(風物)이란 쇠(꽹과리), 징, 장고, 북의 네 가지 주요 악기를 치며 그 뒤를 이어 소고 잽이들이 춤을 추는 가장행렬 기능과 극적 구성을 담당하는 잡색놀이 등을 포함하는 공동체적인 연희 형태를 말한다. 따라서 위와 같은 악기를 치면서 춤을 추고 놀이를 베풀며 의식을 행하거나 집단노동을 하는 것을 '풍물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풍물(風物)에 대한 연구는 최초로 일제 식민지 강점기 시대부터라 하겠다. 이 시기의 연구는 주로 조선총독부의 촉탁을 받은 관제 어용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이들 연구는 민중적 연대를 지니고 노동의 현장과 결속되어 있는 풍물을 사대부 취향과 감각으로 발견하고 기록하기란 어려웠다, 더구나 풍물이 자체적으로 전승되고 생명력을 갖추어 농민에 의해 보존되었음을 알지 못하고, 특정 행사에 부수되는 것으로 알았기에 그 정체는 온전히 인식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도 나름대로의 그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풍물의 존재를 인식하고 다루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당시 '풍물(風物)'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풍물이란 용어 대신에 '농악(農樂)'이란 용어가 사용되어졌었다. 이는 농악이란 용어가 이후에 기득권을 지니고 쓰이게 되어, 현장과는 한참 격리된 일상어가 된 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당시의 조사와 인식은 식민지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져 왔음을 감안한다면, 그 한계점은 저절로 자명해 진다. 이처럼 이 시대의 풍물연구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고루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풍물에 관한 명칭은 '풍물․ 풍장․ 사물․ 매구․ 굿․ 두레․ 걸궁․ 농악'란 이름으로 현장에서 쓰이고 있다. 이중에 사물은 쇠, 징, 장고, 북의 네 가지 악기를 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매구․굿은 종교 행사의 하나인 굿과 관계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풍물을 잘하는 사람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공공사업에 쓸 기금을 모으기 위해 치는 풍물을 걸립(乞粒)풍물이라 하는데 걸궁 이란 걸립 풍물에서 유래한 것이다. 농촌에서 이웃과 함께 협동 작업을 하는 것을 두레라고 하고 이런 모임을 두레패라고 하는데, 두레패는 풍물을 치면서 이동하고 작업을 하기 때문에 두레라고도 부른다. 위의 풍물에 관한 명칭 중 현재 풍물을 일컫는 용어로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용어는 '농악(農樂)'이라는 이름인데, 이 농악이란 용어는 잘못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농사꾼이 하는 음악, 즉 농사일에만 쓰이는 음악으로 인식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풍물이 농경사회에서 탄생한 것이지만, 농민들 스스로가 농악이라고 말하진 않았고, 그것은 위에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일제시대에 일제가 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자기 나라의 가면극 '능악'의 발음인 '노까구'를 붙여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둘째 , 농악은 단지 음(音)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춤, 재담, 진 풀이, 즉 놀이, 의식 등의 다양한 기능을 지닌 종합적인 표현매체의 개념이 되지 못한다. 이는 풍물이 갖고 있는 본래의 종합적이며 대동 놀이적인 성격을 나타내지 못하고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행위로만 한정하여 그 모습을 격하 시키는 일이며, 풍물의 왜곡을 부추기는 용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셋째, 도시, 즉 산업사회에서도 맞는 좀더 적극적인 용어가 필요하기 때문에 '농악'이란 용어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풍물은 본래 농경사회와 함께 하여 왔으면 농경사회의 생활과 노동의 리듬을 형성된 것이다. 오늘날 서로 다른 구조나 조건 속에 놓여 있는 여러 생활공간에서도 공동체 문화 형성에 필요한 매체로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용어 자체가 가지는 한계성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1993년 한국 국악협회에서는 풍물로 부르기로 하였다 ①,풍물의 기원과 역사 풍물의 내력은 소상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여기서 풍물의 기원과 그 변천과정을 알아보려 하는 것은 각 시대의 풍물의 변모 과정을 검토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에서부터 있어왔던 풍물은 그 시작점이 있을 것이고, 그 시작점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함으로써 왜곡되어지지 않는 풍물의 참 모습을 찾아 현실에 맞는 풍물의 모습을 만드는데 기반을 다져 보자고 하는 것이다. 풍물의 기원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역사적인 기록 문헌들을 발굴 참고하고, 그 부족한 자리에 현재의 풍물의 모습을 상기시키며 재구성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연구하는 연구자의 개인 편견이 들어갈 염려가 있다. 따라서 그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그 주장들을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몰아 붙이기에는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주장들이 많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기존의 학자들의 주장들을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는 관점을 취해서 풍물의 기원과 역사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역사적 기록에 보면 삼국시대 이전'영고'등의 축제에서 이미 북이나 쇠(꽹가리)를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풍물굿의 기원은 원시 사회의 풍년 농사와 안택을 바라는 제천의식이나 일을 할 때의 움직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에서 점점 집단생활 속에서 놀이, 축원, 연극 형태로 발전되고 사람들이 이를 즐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원시시대의 제천 의식은 집단적 신명을 통해서 신과 접촉하며 기원하는 형태였으며 풍물굿의 원시적 형태로서의 집단 춤과 쉽게 소리를 낼 수 있었던 타악기를 썼을 것이다. 이것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고려시대의 연등회, 팔관회에서의 풍물 겨루기란 행사가 있었고, 불교가 풍물굿의 악기와 연희형태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승유억불' 정책으로 인한 불교적 모습을 닮은 풍물은 기층 민중과 만나게 되었고, 농촌의 두레 공동체와 같이 행하여져 왔다. 이것을 볼 때 풍물의 오늘날의 틀을 갖춘 것은 조선시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해서 박물관에 가면 고려시대 청자기로 만든 장고 등을 볼 수 있고, 무당의 굿에 장고나 북을 사용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시대의 풍물이 지금 우리들의 풍물과는 다를 것이다 라는 것을 악기의 모양이나, 풍물을 행하는 방식 등을 살펴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오늘날과 같은 판제 형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의 풍물은 아마도 대 단위 노동력이 필요했을 시기 즉, 이양법이 들어온 조선중기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풍물의 내력을 '축원'→'노작'→'걸립'→'연예'의 측면으로 발달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축원의 형태는 하나의 종교적 의식의 성격을 띄고 있는 형태로 농기의 파종과 가을의 추수에 감사를 올릴 때 또는 '기우제' , '당산 굿'등이 여기에 속한다. 노작의 형태는 농사 계절에 두레로 일을 할 때 장단에 맞추어서 피로를 잊고 작업을 원활하게 하는 하나의 형태로 '모내기 굿' , '두레 굿'등을 이룬다. 걸립의 형태는 소위 '군악(軍樂)'이라는 군중진법(軍中陣法)을 흉내내는 진 풀이와 더불어 연기되는 형태를 일컫는 뜻으로, 조선의 탄불정책으로 인하여 사원의 재정이 피폐하여짐에 따라서 사찰에서는 전곡을 모으는 방법으로 화주승을 비롯하여 수십 명의 단원을 가지고 민가를 찾아다니면서 걸립하던 사원의 굿중 패에서 유래한 형태이다. 민가에서는 '걸궁' 또는 '마당 밟기'라고도 하는데 음력 정월이면 자기 부락의 '도청'등의 부락 공익사업자금을 염출 할 목적으로 행하기도 한다. 특이할 만한 점은 불교 식의 형태가 첨가된 점이라 하겠다. 연예의 형태는 주로 시청자를 위주로 한 공연형식의 무대 연예적 셩격을 띄고 있으며, 다양한 의상과 더불어 다양한 기교, 각종 악기들과 여러 잡색이 따른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현장에서 연주되는 풍물굿의 기능을 참작해서 이러한 모형을 설정한 것에는 흥미로운 견해라 할 수 있으나, 이러한 논리의 근거나 자료가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는 점이 그 한계점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문헌이나, 자료가 없어서 심적 추정만 가능하지 물적 물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풍물의 기원을 크게 학자들은 다음 3가지로 구분 지어 놓고 있다. 그러나 이 3가지 기원설은 풍물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현재 풍물의 모습을 재고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풍물의 모습을 추측하는 것에 불과 하다고 하겠다. 결국, 신뢰성이 떨어지는 학설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의의를 갖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 내용만 간단히 요약하는 수준으로 써 놓으려 한다. ㉮ 풍농 안택 기원 설 농경사회에서 집단적으로 바라는 것은 바로 농사가 잘되고 마을에 아무런 액이나 탈이 없기를 비는 것이다. 이것은 집단적인 신명을 추구하게 되었고, 자연히 춤과 음악이 쓰였을 것이고 여기에서의 춤과 음악이 바로 풍물굿의 원시적 모습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 불교 관계 설 풍물굿에 쓰이는 악기 등을 보면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호국불교가 번성하게 되면서 당시 민중들과 함께 했고, 조선시대부터는 승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각 사찰의 물질적 기반이 약해지기 시작하였고, 사원건립을 비롯한 중요한 불교적 행사가 있을 때 부족한 물질적 기반을 불교음악이나 춤의 형태를 가지고 당시 민중과 함께 하면서 매꾸게 되었다. 그러면서 불교 음악, 춤, 악기, 장단 등에서 당시 민중의 생각에 적합한 형태들을 풍물에 도입했을 것이다. ㉰ 군악 설 풍물굿에서 각각의 치배들의 복색 이나 체계 등을 보면 당시 군대의 복색이나 체계와 비슷하게 짜여져 있다. 이유는 농민들은 놀이에 군대의 체계를 도입했을 것이다 라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한 예로 '상모'라 일컫는 전립이란 것을 살펴보면, 당시 군대의 병사들이 쓰고 있던 군모와도 비슷하게 생겼으며, 이 군모가 발전하여 연희물인 '상모' 즉 전립이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면, 반드시 풍물굿의 형태는 아니라 할지라도 풍물인 고각을 이용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고 진격을 도모하게 하였다. 이때의 고각은 단순히 북과 뿔로 만든 나각으로 부는 나발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원초적인 군법농악 내지 군법으로 벌이는 풍물의 형태를 짐작케 한다. 또 '자명고(自鳴鼓)'설화도 군악으로 쓰인 북의 증거를 보여주는 사례로 간주된다. 이러한 군악적 기능은 삼국시대 이후에도 나타나는데, 그 중에서 '진법군고(陣法軍鼓)'라는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진법군고에는 '전(前)놀이', '군례', 진 풀이로서의 '장진 놀이'. '원진 놀이', '을자진 놀이', '태극진 놀이'등이 있고 군사의 '포부놀이', '청령', '군정놀이(전승축하놀이)', '종연 하례굿'등이 내용으로 전해진다. 위의 내용들은 모두 나름대로 논리성을 갖는 학설로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것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풍물은 아주 오래 전부터 형태는 지금과 약간은 다르다 할지라도 존재하여 있었고, 이러한 풍물은 어느 한쪽의 측면으로만 이용되었던 것이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쓰였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있을 것이다.
②.풍물의 기능과 구성 ㉮ 풍물의 기능 풍물의 시작은 합주이다. 쇠나 징 같은 악기는 혼자서는 음악을 이룰 수 없다. 또한 혼자서 연습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여럿이 함께 연주하게 되는데,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함께 연주하다 보면 연주하는 동안에 저절로 유대감과 일체감이 형성되고 그 마을은 저절로 화합할 수가 있다. 강렬하게 두드릴 수 있는 타악기는 치는 동안에 저절로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리게 하고 한 마당에서 함께 풍물을 치는 동안에 이웃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어 이웃간에 생긴 갈등도 해소할 수 있었다. 풍물을 치는 모습을 보면 악기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고 춤도 추고 때로는 노래도 한다. 그리고 간간히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옛날의 풍물은 마을 단위로 정월 달에는 메구 굿을 하여 잡귀를 몰아내고 그 해의 편안함과 번영을 빌었으며 마을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른바 합 굿을 하였다. 또한, 농경생활과 결부된 모내기나 기우제에서, 또는 설․ 추석과 같은 명절에, 그리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당산 굿 등에는 풍물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볼 때 풍물은 단순히 유흥 오락의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고 생산 현장에서 생산을 돕는 일 장단이기도 했고, 양보와 화해 그리고 협동정신을 기르는 교육용이기도 했으며 종교의식에서도 사용되었다. 이렇게 볼 때 생활은 풍물과 함께 하는 삶이었고, 풍물은 다목적 기능을 가진 종합 예술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의 특성 중 하나가 서로간의 대화가 없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웃집 수저의 숫자나 그릇의 색깔까지 다 구별할 수 있었다. 잔치 때 많은 그릇이 필요하기 때문에 웃집 그릇들이 총동원되는데 그릇을 보고 어느 집 그릇인지를 골라내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웃에 누가 사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고 이웃집 노인이 혼자 살다가 죽은지 한 달만에 발견되었다는 일이 있을 정도로 이웃간의 대화가 단절되었다. 이렇게 이웃간에 대화가 없다는 것은 곧 사랑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단절된 대화를 어떻게 이을 수 있을까? 그것은 함께 모일 마당을 마련하는 길이다. 그 마당을 풍물로서 만드는 것이다. 풍물의 쇠나, 장고, 등의 악기를 배우는데는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지만, 꼭 쇠나 장고가 아니어도 된다. 풍물패 뒤를 따라서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거나, 소고라도 들고 장단에 맟추어 풍물 판에 함께 어울려 풍물 판을 구성하면 된다. 그러면 풍물의 기능으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단절된 대화가 이어질 것이다. ㉯ 풍물의 구성 풍물은 기본적으로 쇠, 징, 장고, 북의 사물과 기(旗)대․ 소고․ 잡색․ 나팔․ 태평소 등으로 편성된다. 그 구성은 대체로 농기(農旗) 1인, 영기(令旗) 2인, 쇠 2~5인, 징 1~3인, 장구 2~8인, 북 2인 이상, 소고 8인 이상과 무동․ 중․각시․ 양반․ 포수(총잽이)등의 잡색으로 구성된다. 풍물 편성에 있어서 농기, 영기, 새납 그리고 사물 등도 '앞 치배'라 하고, 소고(법고)와 잡색들은 '뒷 치배'라고 부른다. 앞 치배는 주로 연주를 하고 뒤 치배는 춤이나 연극 놀이를 한다. 두레 풍물에 비하여 걸립 풍물은 그 편성이 다양하고 화려하며, 지역에 따라서 그 편성이 다양하다. 지신밟기나 두레 풍물을 할 때는 주로 사물과 소고 위주로 편성이 간소화되어 있으나, 판 굿을 할 때는 본격적인 편성을 하게 된다. 굿을 할 때 쇠가 3인에서 5인이 되는 이유는 상쇠는 별도로 풍물패의 전원을 지휘하고 또 양쪽으로 갈라져서 진 풀이를 할 때가 많으므로, 가락을 맞추기 위해서는 부 쇠와 삼 쇠 혹은 종 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장구나 북․징 등이 두 개 이상인 것은 , 한 사람이 실수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계속 이어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풍물패의 구성과 편성은 일정치가 않고 잽이의 호칭도 지역과 풍물패의 규모에 따라 다양하다. 풍물패 편성에 있어서 농기는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있으나, 영기는 경상도 지역의 풍물에는 없는 곳이 많다. 호남 지방에서는 쇠․ 장고․ 소고․ 잡색 등을 중심으로 편성되는 데 비하여 영남 지방은 징․ 북․ 소고가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무동은 경상도 지역에는 거의 없고, 경기․ 충청 그리고 영동지역에서 주요한 배역으로 되었다. 그 중 전북 남원과 전남 진도 풍물굿에서도 무동의 역할이 돋보인다. 좀더 자세한 사항은 다음의 각 지역의 풍물굿의 특징에서 다루어 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정도로 마무리 지을까 한다.
③..풍물의 지역적 특징 풍물굿의 판도는 지역적 특성을 존중하되 현재 남아 있는 풍물굿의 분포를 살펴서 구분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풍물굿 지역권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풍물굿의 지역적 분포와 변이는 다양하고, 또 이를 일컫는 용어나 관례는 이미 굳어져 있어서 쉽사리 규정 짓기가 어렵다. 관용적으로 구분하는 방식이 퍽 유용할 것 같으나 자신의 지역을 중심으로 놓고 다른 지역을 일컫기에 그러한 용례는 재고를 요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웃다리와 아랫다리로 말하는 것은 남사당패의 구분법이나 이 용어가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 구분법은 웃다리는 경기․충청도 일대를 지칭하고 아랫다리는 영․호남을 지칭하고자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웃다리만을 강조해서 사용한 구분법이므로 아랫다리의 범위가 너무나 광범위하여 아랫다리 풍물의 특징을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많은 용어가 된 것이다. 따라서 아랫다리를 좀 더 세분화 시켜 나누어 볼 필요성이 있다. ㉮ 경기․충청도 지역의 풍물굿 가락이 경쾌하며, 쇳소리 위주로 가락이 구성되기에 쇳소리 또한 크게 발달해 있다. 투명하고 맑은 가락으로 길가락 7채, 마당 굿1채 등을 꼽을 수 있고, 이 가락들은 경기․ 충청 일대 풍물굿의 주요한 구성 요소이다. 또한 판 굿의 짜임새가 탄탄하여 갖가지 구성진 진 풀이와 놀이도 곁들여져 흥겨운 판 굿을 이룬다. 가새벌림, 당산벌림 등이 대표적인 진 풀이라 하겠고, 놀이로는 무동놀이가 특히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동리, 삼무동, 곡마당, 동고리, 던질새미 등이 대표적인 용례가 되겠다. 복색은 삼색 띠를 두르는 것이 예사이고, 청색 조끼를 입기도 한다. 안성, 평택, 이천, 용인, 화성, 부천, 김포, 서천, 공주, 논산, 부여, 홍성 등이 이에 속한다.
㉯ 호남지역의 풍물굿 가락이 단순한 가락에서 시작하여 점점 잔 가락을 넣어 복잡한 가락이 된다. 이 가락은 감정을 조였다 풀었다 하는 맺고 푸는 기법을 많이 씀으로 해서 음악의 표현력이 훨씬 강하다. 따라서 가락이 푸성지고 넌출댄다. 장고 가락을 특히 강조하고, 설 장구 놀이가 발달한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푸짐한 가락으로 풍류굿, 덩덕궁이, 오채질굿 등이 호남지역의 풍물굿이 되겠다. 판 굿의 짜임새는 굉장히 다채롭다. 특히 우도 굿과 좌도 굿이 나뉘어 있어서 지역에 따라서 판 제가 완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좌도 굿의 특징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산간 지역에서 발전되었고, 남성적인 가락으로 되어 있다. 전주, 완산, 진안, 무주, 장수, 임실, 남원, 순창, 구례, 곡성, 화순, 순천 등으로 이에 속하고, 우도 굿의 특징은 가락과 놀이형태가 다양하고 여성스러우며 부드럽고 비교적 들녘 넓은 지역으로 익산(이리), 부안, 김제, 고창, 정읍, 장성, 영광, 나주, 광주 등이 이에 속한다.
㉰ 영동지역의 풍물굿 가락이 무척 단조롭고 전투적이다. 혼합박자로 이루어진 가락은 전혀 없다시피 하고, 최근에는 창작 가락인 신식 길놀이 가락 등이 첨가되어 있다. 대부분 가락은 외 가락으로 전개되기 일쑤이다. 판 굿도 마찬가지여서 같은 가락을 거듭 반복하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대형을 이루는 것이 대부분이다. 복색은 흰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고깔을 쓴다. 강릉, 삼척, 울진, 정선, 평창, 동해 등 동해안 일대에서 전승되어지고 있다. ㉱ 영남지역의 풍물굿 가락이 씩씩하고 억세다. 힘찬 가락으로는 자브랑갱이, 영산다드래기, 덧뵈기, 길군악 등을 들 수 있겠다. 판 굿보다는 진 풀이와 갖가지 고사 의례가 발달해 있어서 매우 엄격하게 차수를 진행한다. 특히, 12차라고 하는 독특한 규범을 지니고 있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다. 보색은 흰 바지와 저고리를 입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전립을 쓰는 것이 특징적이다. 대구, 달성, 김천, 서산, 영천, 청도 등에서는 영남지역의 풍물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밀양, 삼천포, 진주, 마산, 부산지역의 놀이는 조금 다른 특성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분류한다고 해서 각 지역의 풍물이 신명을 추구하거나, 대동 적인 의미가 다른 것은 아니다. 즉, 가락의 특징들이 다르다고 해서 각 지역의 풍물굿이 추구하는 신명이나 대동 적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는 지역간의 왕래도 빈번하지 못하였고, 자연적으로 지역의 특색에 맞게 형태가 변화된 것뿐이지 근본 목적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어느 지역에서든지 풍물굿판에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가락의 느낌과 순서가 다르다 할 지라도..... 따라서 이러한 분류는 편의상의 분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풍물은 어디를 가도 풍물인 것이기 때문에... ※ 보충설명 : '채'와 '차(次)' 풍물에서 장단을 '채' 또는 '차(次)'라고 부른다. 채는 원래 무악(巫樂)에서 장단 가락을 이르는 말인데 더덕 채, 꺽을 채, 전동 채 등은 장단의 명칭이다. 이 용어를 풍물에서 완용하여 된삼 채, 오 채질굿, 칠 채 등으로 장단 이름으로 쓴다. 채라는 말은 '두드리다' 혹은 '때리다'는 뜻의 '치다' '차다'라는 말에 그 어원이 있다. 이는 북채, 징채, 궁굴 채, 말 채 등의 채와 같은 개념이라 하겠다. 풍물의 장단에는 또 '차(次)'라는 것이 있는데, 채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여러 풍물 가락 가운데 하나이지만 차는 판 굿에서만 쓴다. 따라서 채 가락은 마을 풍물 꾼 들도 연주할 수 있으나, 차는 판 굿도 할 수 있는 세련된 풍물패에서만 연주한다. 12 차는 십이 채 또는 열두 마치라고 부르는데, 채와 12 차는 아무 관계가 없다. 판 굿을 할 때 열두 가지의 가락을 모으면 십 이채가 편성되고, 십 이채에 열 두 가지의 군법(軍法)이 편성되면서 과장 개념(科場槪念)이 생겨 12차 혹은 풍물 12마당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 2.사물놀이 사물놀이란 용어는 원래 1978년 공간사랑 소극장에서 놀이패(사물놀이패)가 만들어지면서 갑자기 많이 쓰이게 된 용어이다. 퓽뮬울 가르킨다기 보다는 고도로 무대화된 4개의 타악기 연주라고 할 수 있고. 쇠, 장구, 북, 징의 네 가지 악기를 기본으로 해서 연주를 하는 하나의 예술장르를 지칭하는 용어로 변화된 것이다. 1978년 이전까지는 사물(四物)이란 용어는 불교에서 쓰는 법고, 운판, 목어, 대종 등의 4가지 악기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불교에서 쓰이는 사물이 지금의 사물이란 말이 된 것은 1978년의 공연에서부터 이다. 1978년 김용배,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이렇게 4명의 남사당패의 후예들이 공간사랑에서 전통적인 풍물굿을 현대의 무대형식과 접목을 시도하게 되었고, 바로 이것이 사물놀이의 출발이 된다. 70년대에 대학가에 탈춤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어 우리민족문화 전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은 풍물굿에 대한 부흥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때 남사당의 후예인 김용배와 김덕수가 풍물굿을 현대에 맞게 발전시켜야한다는 생각으로 공간사랑이라는 소극장을 중심으로 만나게 된다. 김용배와 김덕수는 마당에서의 풍물굿을 극장의 무대위로 끌어올려 정제된 음악의 형태로 다듬고 변형시킨 것이다게 된다. 78년 2월 김용배, 김덕수, 최태현, 이종대가 웃다리풍물을 '제1회 공간 전통 음악의밤'이라는 행사에서 발표하게 된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고, 4월에는 이종대 대신 최종실이 들어온뒤 영남 삼천포 12차 농악을 발표한다. 5월 최태현 대신에 이광수가 들어와서 본격적인 사물놀이패의 구성이 된고, 종합적인 공연을 올리게 된다. 사물놀이를 시작할 때 풍물에 대한 연구에 대한 방향성에서 세가지 연구 방향을 세우게 되고 이것은 결국 지금의 사물놀이의 모습을 만들게 되었다. 첫째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경기․충청지방의 웃다리풍물과 호남 우도굿, 그리고 영남 삼천포 12차농악을 연구하여, 사물놀이로서 발표하게 된다. 둘째는 무악이다. 그 중 경기도 도당굿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게 되고 비나리를 통해서 무대위에서 발표하게 된다. 마지막 셋째로 웃다리, 영남, 우도 등에서 나름 대로의 형성 발전․계승되어 오고 있는 설장고 가락에 대한 연구이다. 원래 풍물굿판의 선반으로 행하여 지던 설장구가락을 정교하게 접목시켜서 무대위에서 앉음반의 모습으로 공연하게 된 것이다. 이런 연구에 대한 성과로 국립국악원을 비롯하여, 전국적인 사물놀이의 융성을 초래하게 된다. ①.사물놀이와 풍물굿의 비교 사물놀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놀이의 모태인 풍물굿과의 비교 방법이 가장 많이 사용되어진다. 사물놀이가 과거의 풍물굿의 현재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본다면, 두 가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풍물굿에서의 사물놀이에로의 이행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이 사물놀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풍물굿은 여러 사람이 춤사위와 발림을 하며 악기를 연주하는 형태이다. 그러므로 규모도 크고 볼품도 있어서 사뭇 흥겨움과 신명을 안겨준다. 갖가지 진풀이와 다채로운 가락을 연주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물놀이는 네 사람이 앉아서 일정하게 짜여진 틀에다 가락을 얹어 연주하는 형태이다. 규모도 작을 뿐만 아니라, 춤사위와 발림이 없어서 정교하게 짜여진 가락에 의존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는 셈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물놀이는 풍물굿과는 사뭇 다른 호응과 폭발적 감흥을 준다. ㉮ 연주형태 사물놀이와 풍물굿에 있어서 가장 눈으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차이점은 그 공연이 이루어지는 장소에서 기인되는 연주형태이다. 풍물굿은 주로 마당에서 행하여지고 자연적으로 마당에서의 대동놀이를 동반하는 선반의 형식을 취하고, 사물놀이는 무대에서 행하여지는 관계로 무대의 특성상 대동놀이의 성격을 수반하지 못하므로 앉은반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물론 무대에서도 풍물굿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무대라는 공간이 대동적인 놀이를 수용하기에는 부족한 공간이므로 대동적인 놀이가 이루어 질 수 없다. 대동적인 놀이가 없는 풍물굿은 이미 풍물굿이 아니게 된다. 즉, 대동적인 놀이요소가 없는 풍물굿은 비록 선반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풍물굿이 아닌 사물놀이화되어 버린 풍물굿이 된 것이다. 사물놀이와 풍물굿의 차이점은 바로 이 연주형태에서의 차이점들이 파생되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풍물굿은 선반으로 이루어 지므로 치배들의 발림, 춤사위가 음악적인 요소, 진풀이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종합예술의 형태이지만, 사물놀이는 앉음반 형태이므로 이러한 발림이나 춤사위, 진풀이등이 불가능하게 된다. ㉯ 가락의 짜임새 풍물굿은 맺는 가락과 푸는 가락이 주기적으로 반복․ 교체의 짜임새를 갖고 있지만, 사물놀이도 부분적으로는 긴장과 이완의 원리( "4>사물놀이의 원리" 부분 참조)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인 면으로 본다면 느린가락에서 빠른가락으로 이행되는 점층적 가속의 틀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가락의 끊김이 없이 계속해서 감정을 고조시켜 가는 짜임새를 갖는다. ㉰ 연주시간 풍물굿의 연주시간은 한정이 없이 길다. 무한정은 아니지만 1-2시간정도에서 하루종일 걸리는 경우까지 있다. 하지만 사물놀이는 대략 한곡당 10분에서 15분정도이다. 지금까지는 사물놀이와 풍물굿의 차이점을 위주로 설명하였다. 이제 사물놀이와 풍물굿의 공통점으로 어떤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하겠다. ㉮ 가락에 있어서 동일한 가락을 사용한다. 풍물굿에서 쓰이는 가락이나 사물놀이에서 쓰이는 가락은 동일하다. ㉯ 신명추구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풍물굿과 사물놀이는 신명을 추구하는 면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풍물굿에서는 마당에서 이루어져 대동놀이를 이루면서 공동체적인 신명을 추구하고 있다. 사물놀이는 연주자와 관객들 사이에 교감을 형성하고 그 와중에 신명을 추구하고 있다. 물론, 둘의 신명의 차이는 있다. 풍물굿에서의 신명은 확산의 개념을 갖는 신명이고, 사물놀이에서의 신명은 절제의 개념으로서의 신명이지만, 둘사이는 신명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위의 사실들을 보면, 사물놀이는 풍물굿의 실내음악의 형태로 변화시켜 전통을 계승한 한 갈레임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단순히 풍물굿을 실내음악의 형태로 변화 시켰다고 해서 사물놀이가 폭발적 감흥을 일으키는 데에 적절한 설명일 수 없다. 오히려 여기에 깊이 개입한 창조의 원리("4>사물놀이의 원리"부분을 참조)를 알아야만 사물놀이의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3.비나리 '비나리'는 고사라고도 한다. 비나리의 어의가 분명하지 않고 또 그것을 밝혀 줄 만한 문헌도 기록도 없이 실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비나리는 존재하고 있으며 지금도 김덕수네 사물놀이패나 여타의 패거리들이 연행하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희미하게나마 비나리의 존재 양상ㅇ과 연행 형식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비나리패라는 유량연예집단이 있덨다는 기록을 보면 비나리는 단순한 고사소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 비나리의 어의 비나리의 말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빌다 (告,乞)" 라는 뜻에서 왔을 법하나 그 유레를 밝힐 수 없어서 아쉬울 따름이다. 비나리의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비나리의 용레와 이와 유사한 계열의 용어를 들어보자 ㉮ 갯비나리 ㉯ 멧비나리 ㉰ 비나나다. 비나이다. ㉱ 비난수 ㉲ 비념 ㉮는 포구나 바닷가에서 비나리를 할 때에 부르는 용어이다. ㉯는 들이나 산에서 비나리를 할 때에 사용하는 용어이다. ㉰는 우리가 관용적으로 신에게 축원을 올리거나 기원을 할 때에 사용하는 말이다. ㉱는 평북 정주 방언으로 굿을 할 때에 귀신에게 비는 말이라 한다. ㉲는 제주도굿에서 신에게 기원한다는 뜻으로 소규모의 재차를 의미한다. 이때에는 작은 요령만 사용한다. 이 모든 것을 검토하여 보면 모두 비나(bina)의 음소를 갖고 있다. 또 모두 일정한 대상을 향햐여 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위의 모든 말들은 귀신이나 신에게 재를 올리며 비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비나리를 본다면 비나리 역시 무엇엔가 빌고 재를 올리는 형식의 기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비나리의 어원은 '빌다'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비나리의 내용분석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②비나리의 내용 분석 비나리를 먼저 들어보면 징의 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징의 쓰임이 사물놀이나. 풍물굿의 그것과는 상당히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풍물굿이나 사물놀이놀이에서의 징은 여러개의 소리를 하나로 감싸 안아주는 역할을 하지만 비나리에서의 징은 감싸 안는 것 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개별 악기로 다른 악기의 소리와 섞여 난다는 느낌이 있다. 즉, 풍물굿이나 사물놀이에서처럼 리듬의 함축과, 종속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닌 리듬의 분활과, 리듬의 주도의 역할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치 그 소리가 전자음악을 듣는 듯한 착각까지도 일으킨다. 마치, 무악에서 쓰이는 형식의 징의 모습을 흡사하게 닮고 있다. 초반부에서 이런 징의 쓰임으로 보아 초반부는 무악의 영향을 받은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고, 후반부에 가면 불교적 색체가 짙다. 또한 그 음악 형식에서 보면 불교음악의 회심곡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결국, 비나리는 무악과 불교음악이 함께 공존해 있고, 그 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창세 내력과 현세의 근원 첫부분은 천지개벽 이후의 현세가 이루어진 근원을 밝히고 있다. 이 부분은 함경도나 제주도 등의 창세무가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치국잡기'무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공간이 상당히 내력이 있고 명당이라는 의식이 강력하게 반영되어 있다. 특히 한양의 묘사에서 풍수지리 사상을 도입 한국인의 공간 사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살풀이 둘째부분은 살풀이이다. 살 이라고 하는 마치 세균과도 같은 존재로 인간에게 달라 붙는다. 따라서 끼이거나 붙은 살을 풀어버려야 한다. 그래서 살풀이를 한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살들을 열거하고 풀어 내는 것이다. ㉰ 액풀이 이 분분은 앞의 비나리 내용(사설)부분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러나 비나리를 잘 살펴 보면 액풀이도 들어가 있게 된다. 액은 마치 불행한 운수와 같은 것으로 인간에게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운한 질서이다. 이러한 액을 풀어내는 것이 액풀이다. 액풀이는 흔히 달거리로 진행된다. 일년 열 두 달의 겹치는 날로 전달의 액을 풀어 버린다. 예컨대, 정월에 드는 액은 이월 이자로 막는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사고의 표현이며 액풀이는 이러한 순서로 열 두 달의 액을 막는다. ㉱ 덕담 축원 뒷풀이 마지막으로 액과 살을 물린 뒤의 뒷풀이이다. 특히, 두드러지는 사설 내용은 재물, 장수, 물로 정화된 생명을 강조하고 있다. 때에 따라서 축원, 덕담을 하지 않고 성조풀이나 삼재풀이를 같은 장단에 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 부분은 불교음악과 깊은 관련성을 보인다. 4. 악기와 타법
①) 쇠(꽹과리) 쇠는 사물(四物)에서 리더 구실을 하는 악기로 중요하게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금속악기가 가죽 악기를 이끄는 사례는 세계적 견지에서 볼 때에 드문 경우에 해당된다. 쇠는 달리 메구라고 부른다. 지름이 20Cm 정도의 얇고 둥근 놋쇠판의 둘레에 한편으로 '둘레'를 달고 둘레의 위쪽 구멍을 2개 뚫어서 굵은 노끈으로 자루(끈)를 단다. 쇠채는 길이 20Cm 정도의 가는 대나무 뿌리의 한쪽 끝에 엽전 4개 정도를 한데 모아 그 주위를 가는 실로 떠서 만든 '방맹이'를 단다. 요즘은 나무 혹은 고무 방맹이를 만들기도 한다. 방맹이 끝에는 색실로 꽃술을 단다. 다른 한 쪽에는 가죽을 감아서 손잡이를 달고 손잡이 끝에는 붉은색(또는 五色)천을 길게 맨 '너설'을 단다. 너설은 돋보이기 위하여 달지만 상쇠가 상쇠놀이에서 쇠채를 휘저으며 쇠발림을 할 적에 쓰인다. 음색에 따라서 숫쇠와 암쇠로 나뉘는데, 숫쇠는 소리가 야물고 높고, 약간은 투박한 느낌의 음색이 나고, 암쇠는 소리가 유하고 얕아서 자근자근 밟아주는 듯한 음색을 띤다. 숫쇠와 암쇠가 서로의 음색을 받아치며 하는 놀이는 마치 새 한쌍이 서로 어울리어 노래하듯 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꽹과리 타법 당 먼저 막음쇠를 한 직후에 치거나 . 막음쇠를 다 열고 한번 친다.. 다 당 을 약하게 친다. 그 막음쇠를 연 상태로 약하게 친다 다당 다 와 당 을 연속적으로 두 번 치며. 막음쇠가 두 번 그당 그 와 당 을 연속적으로 치되 막음쇠는 당 에 한번 답 당 을 친후 바로 막는다. 다압 답 보다 약간 늦게 막는다. 닷 완전히 막는 동시에 친다. 닥,딱 완전히 막은 상태에서 친다. 엇당 엇 에 막은후 당을 치되 막음쇠 없이 친다 엇다다 엇 에 막은후 다다를 치되 막음쇠는 한번 한다 그닥 완전히 막고 그당 을 친다. 그닷 그당 을 치되 '당'에서 완전히 막는다. 그랑 당 을 치되 쇠를 튀겨서 나는 소리이다. 그랏 그랑 을 치되 완전히 막는 동시에 친다. 그라당 그랑 과 당 을 연속적으로 이어 친다. 그라닷 그랑 과 닷 을 연속적으로 이어 친다. 그랏당 그랏 과 당 을 연속적으로 이어 친다. ② 장고(구) 장고는 사물악기 중에서 유일하게 음양성을 낼 수 있는 악기이다. 양편 머리가 크고 그 허리가 가늘다 하여 '세요고'라고도 한다. 궁편(좌편)은 흰 말 가죽이나 소가죽을 대어 가죽이 좀 두껍고 소리가 낮으며, 채편(우편)은 보통 말 가죽을 대어 가죽이 얇고 높은 소리를 내게 된다. 사물놀이에서 쓰는 장고는 개가죽으로 만들며, 특히 암캐가죽과 수캐가죽이 더불어서 만나야 훌륭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장고 통은 보통 미루나무 와 오동나무를 쓰고, 그 중 오동나무로 된 통이 소리가 좋은 편이다. 소리가 가장 좋기로는 소나무 통이 가장 좋으나 무거운게 단점이다. 지름이 30Cm 정도, 길이 70Cm 정도의 매우 굵고 긴 오동나무 혹은 미루나무의 가운데를 오목하게 깎아내어 '졸목(조롱목)'을 만들고 내부를 파서 통을 만든다. 가는 쇠로 지름 60Cm 정도의 둥근 '테'를 2개 만들고, 한편에는 개가죽을, 한편에는 소가죽을 맨다. 개가죽을 통의 오른편에, 소가죽을 통의 왼편에 대고 붉은 무명실로 된 긴 '줄'에 놋쇠로 갈구리 처럼 된 '깍쇠'를 꿰어 가죽을 맨 테에 걸고 줄을 졸라 맨다. 줄사이에 가죽으로 된 '부전'을 달고 이것을 오른편으로 당겨서 줄을 조이면 가죽이 팽팽해진다. 오른편 가죽은 '채편'이라하며 높은 소리가 나고, 왼편 가죽은 '궁편'이라하며 낮은 소리가 난다. 열채는 길이 30Cm 정도의 대나무를 가늘게 깎아 만들고, 궁굴채는 길이 30Cm 정도의 가는 대나무뿌리에 박달나무나 탱자나무를 둥글게 하여 방맹이를 달아서 쓴다 . 장구 타법
○ 궁채(왼손)로 북편(궁편, 왼쪽 가죽)을 친다.
● 궁채로 채편(열편, 오른쪽 가죽)을 친다 ○ 궁을 살짝 치거나 손가락으로 울음을 살짝 잡는다. ○ ○ 궁을 연달아 두번 감아 친다.
| 열채로 치는 동시에 열채를 변죽에 붙인다 ․ 열채 끝으로 살짝댄후 땐다 더러러러 열채로 연속적으로 굴려 친다. ¡ 열채로 기와 닥을 치되 연달아 감아 친다
기닥 . 다기닥 먼저 열채 끝으로 두번(다기)튀기고 연달아 감아서 닥(딱)을 친다. 덕,떠 열채로 변죽을 친다. 덩 궁과 딱을 동시에 친다 딱은 변죽에 칠 수도 있다. 텅 덩을 치되 모두 채편을 친다. 더르르르 구르르르와 다르르르를 동시에 친다. 탁 궁채와 열채를 부딪혀 소리를 낸다.
③ 징 징은 그리 중요한 악기가 아닌 것처럼 간주되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물악기에서 가작의 기둥을 세우고, 장단을 감싸안는 구실을 하니 징이 없으면 사물의 신명이 형성되지 않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더욱이 무악에서 징의 쓰임새는 유별난다. 원음은 "정"이나 징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징은 옛군악인 고취악에 사용된 연유로 해서 고취징 이라는 호칭도 있고, 그밖에 나, 금라, 금등의 호칭도 있다. 또, 제주도에서는 특이하게 징과 쇠의 중간형태의 크기로 "무구"가 있는데, 이 무구는 징처럼 쓰이기도 하고, 쇠처럼 쓰이기도 한다. 지름이 60Cm 정도의 둥근 놋쇠판에 10Cm 정도의 둘레를 달았다. 둘레의 위쪽 가운데에 2개의 구멍을 뚫어 굵은 끈으로 자루를 달았다. 징채는 길이 20Cm, 굵기 1.5Cm 정도의 가늘고 긴 막대기의 한쪽 끝에 찬을 칭칭감고 그 위에 두꺼운 헝겁으로 싸서 방맹이를 만든다. 방맹이 끝에는 색실로 꽃 수술을 단다. 막대기의 다른 한쪽인 손잡이 부분에는 긴 붉은 천으로 '너설'을 단다. 징은 그 명칭은 간단하지만, 제작 과정에서 복잡하고 다양하다. 따라서 징은 지역에 따라서 소리가 다르다. ④ 북 북은 어찌보면 가장 원초적인 형태를 지닌 악기라 할 수 있다. 북이 단순한 쓰임새에 머무르지 않고, 사물의 악기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무로 지름 60Cm. 길이 30Cm 정도의 통을 짠다. 가늘고 긴 쇠를 휘어서 30Cm 보다 조금 크게 갓테를 2개 만들과 쇠가죽을 각각 맨다. 길고 가는 쇠가죽으로 된 줄로 통의 양편에 댄 가죽을 맨 '갓테'를 교대로 얽어매고 당겨 조인다. 가죽과 통사이에 나무토막으로 만든 쐐기를 박아서 줄을 조인다. 북채는 길이 30cm, 굵기 1.5Cm 정도의 막대기로 만든다. 북 타법 쿵 위에서 아래로 가죽의 중앙을 힘껏 내려친다. 궁 쿵을 약하게 친되 팔 굽을 들며 친다 쿠궁 궁와 쿵을 연속적으로 이어 한 번에 친다. 딱 북의 테두리를 북채로 친다. 5. 호흡(呼吸) ⑴ 호흡이란? 인간이 살기 위한 본능적이고 필수적인 작용. - 폐로 공기를 흡입하는 숨쉬기 남과 같이 살아나가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동질감과 유대감을 갖기 위한 필수 조건. ⑵ 풍물과 호흡의 상관관계 호흡의 중요성은 풍물이나 춤에 국한되지 않고 동양사상 - 단전호흡, 기(氣), 선(仙), 동양무술 등 기저에 깔려있는 한 기본 체계이다. 풍물 호흡은 숨을 들이킬 때(들숨) 가슴이 펴지면서 몸이 약간 올라가고 숨을 내쉴 때 (날숨)의 몸이 좁아들면서 몸이 내려가는 ‘폐’ 호흡을 ‘몸’ 호흡으로 바꾼 것으로 몸 호 흡의 모습은 ‘오금돋움’으로 시작되고 다양한 형태로 파생된다.
⑶ 호흡의 다양성 숨을 들이켜야 내쉴 수 있듯이 장단의 시작도 오금이 내려가는 시점이 아니라 장단이 시작되기전 ‘얼쑤!’ 하면서 오금을 올리는 시점, 일명 ‘준비동작’부터이다. 호흡은 악기에 따라 그리고 발 디딤새에 따라 다양하고, 모든 음악 및 춤․탈놀이 등 다양하게 존재한다. 즉, 음악을 들을 때 박수를 치거나 발장단을 맞추는 몸짓, 유치원 생이 동요에 맞춰서 오금질 하듯이, 표현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⑷ 호흡의 중요성 인간의 호흡이 멈추면 죽게 되듯이 풍물․춤에 호흡이 끊긴다면 죽은 풍물이 되는 것 이다. 인간은 항상 호흡속에 살고 있다. 비단 폐의 호흡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 람과 조직, 조직과 사회, 사회와 문화 관계 등 모든 삶 속에 들어 있기에 호흡이 맞질 않는다면 문화는 형성되지 않으며 사회는 유지 불가능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또한 광대와 악기의 호흡뿐만 아니라 광대와 광대, 그리고 더 나아가 관객과 광대사이 의 호흡도 인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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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보았습니다